지난 한해 많은 사람들은 박주영이 K-리그를 휩쓴 한해였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박주영의 만들어낸 골의 대부분은 김승용(21)의 어시스트에서 나왔고,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박주영의 기록 역시 없었을 것이다.
구리챔피언스파크에서 만난 우리의 리마리용 김승용은, 그의 골세레모니만큼 유쾌하고 밝았다. 마치 동화 속 피터팬이 현실 밖으로 뛰어나온 느낌이랄까.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의 꿈을 잊지 않은 그는, 앞으로도 그라운드에서 팬들에게 꿈을 주는 선수로 남고 싶다고 했다.
피터팬, 김승용. 그가 꿈꾸는 원더랜드는 과연 어떤 곳일까?
-2005년 시즌이 끝나고 어떻게 지냈나요?
2005년 시즌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다른 팀들보다 휴가를 일찍 받았어요. 11월 초에 일주일가량 쉰 다음, 힘을 기르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 위주로 훈련을 하며 11월을 보냈습니다. 12월부터 동계훈련이 시작된 터라 계속 훈련만 하며 보냈죠.
-이곳에 와서 보니 FC서울 팀 분위기가 참 가족 같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린 선수들은 나이 많으신 선수들에게 ‘삼촌’ 이라는 호칭을 붙여 불러요. 이민성 선수 같은 경우 저랑 띠동갑인데, 편하게 “민성 삼촌” 이라고 부릅니다. 또 저희 숙소가 아파트잖아요. 저녁이면 거실에 모여 이야기하고 많이 하고, 그 때문에 정말 가족처럼 따뜻한 분위기이에요. 아까 보셨죠? (인터뷰 도중 이장수 감독님이 들어오셔서 “승용아, 너 지금 뭐하냐?” 며 농담하셨던 것을 언급하며) 감독님도 먼저 저희에게 편하게 다가와서 잘해주세요.
-서포터즈와는 어때요? 얼마 전 FC서울 선수들과 FC서울 서포터즈 수호신과의 송년의 밤 행사가 있었는데.
네. 송년의 밤 행사가 있었어요. 처음 참가한 행사였는데, 서포터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무척 재밌고 즐거웠습니다. 서포터가 없으면 저희 선수들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뜻 깊은 행사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팬들에 대한 마음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미니홈피에서도 팬들에게 참 다정하시더라구요.
미니홈피요? 예전에는 운동시간 외에 자주 했는데, 요즘은 운동을 많이 하다보니 피곤해 자주 못하고 있어요. 미니홈피에 자주 오는 팬들 이름은 기억하고 있어요. 선물도 자주 보내주고 늘 응원해주셔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팬이 없으면 지금의 축구선수 김승용도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항상 조금이라도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 뿐이죠.
-이제 어느덧 데뷔 3년 차 입니다. 선수 층이 두꺼운 FC서울에서 데뷔 첫 해부터 출장기회를 잡은 선수였는데요.
제가 2004년 7월 11일에 프로에 데뷔했어요. 마침 저희 팀에서 아테네 올림픽 때문에 차출된 선수들이 많았는데, 그 선수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제게도 기회가 주어진 거죠. 경기에 나가서 정말 열심히 뛰었어요. 기회를 주셨으니 그것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처음에 팀에서 사이드 어태커로 뛸 때 ‘어떻게 하면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 자리에 적응 못하면 팀에 도움이 안 되니까요. 다행히 팀에 대한 적응력도 늘어갔고, 그 때문에 기회가 더 많이 왔어요. 저 또한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또 제가 열심히 뛰는 것이 우리 팀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했구요. 그 덕분에 조금씩 교체 빈도가 늘어났습니다.
-2005 시즌 전남과의 마지막 경기 때 데뷔골을 넣었죠? 그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팀에서 사이드 어태커로 뛰다보니 포지션의 특성 상 어시스트를 많이 했습니다. 그날은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나섰는데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어요. 컨디션도 좋았고, 부담감이 없으니까 제가 할 수 있는 플레이도 다 나왔고. 한태유의 패스도 좋았고, 골을 넣던 순간 제 움직임도 좋았죠. 골이 들어가던 순간, 기분이 굉장히 좋았어요. 또 ‘데뷔골이라는게 굉장히 힘들구나!’ 라는 사실도 깨달았구요. 일찍 넣었으면 탄력이 붙어서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조금 있지만, 데뷔골도 넣었으니 올 시즌은 편안히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5 카타르8개국청소년대회 한일전 이후로 골 소식이 없었잖아요. 그게 더 부담이 된 것은 아닌가요?
청소년대표팀에서는 스트라이커로 뛰지만 FC서울에서는 사이드 어태커로 있습니다. 사이드 어태커일 때는 수비 가담도가 약 60~70% 정도로, 수비 위주의 플레이를 해요. 그러다보니 저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는 선수들에게 크로스 해주는 것이 훨씬 팀을 위해서 도움이 되다보니 제가 슛을 시도할 기회가 잘 없어요. 그렇지만 청소년대표팀에서의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왜 아직도 골을 못 넣어?‘ 라는 생각을 많이 하시더라구요. 그런 시선을 모르는 것은 아니니까 전혀 의식 안할 수가 없었어요. 어서 빨리 골을 넣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전남과의 경기가 올해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꼭 그 기회를 잡고 싶었어요. 그 때문에 그날 경기서 공격 가담을 많이 했는데, 노력 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서 기뻤죠.
-그렇다며 측면 미드필더로 뛸 때와 최전방 공격수로 뛸 때, 어떤 포지션이 본인에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나요?
아무래도 측면에서 뛸 때는 수비 위주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보다는 공격수로 뛸 때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기량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거든요. 공격적으로 하는 플레이가 저에게는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용 선수가 뛰는 모습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와요. 드리블할 때도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요?
돌파력이 좋다, 저돌적이다, 많이 뛴다, 이런 말들을 많이 들어요. 공간 활용도가 높아서 그런 말을 듣는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프로에는 저보다 힘이 센 선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욱 힘을 길러 저돌적인 모습이 배가 될 수 있게 만들어야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저돌적인데요? 카타르 청소년 대회 때 머리를 다쳤는데, 나중에 붕대를 감은 채로 경기를 뛰었죠? 붕대 감은 머리로 헤딩을 할 때마다 더 다치는 것은 아닌지 무척 걱정됐습니다.
하고 나서 아파 죽는 줄 알았어요! 그렇지만 그 순간에는 경기 이기는 게 중요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까 굉장히 아프더라구요.
-몸을 사리지 않는 그런 모습이 김승용 선수가 가진 장점 아닐까요?
선생님들도 많이 그러세요. 그런 성실함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 술도 잘 못해서 맥주 몇 잔 마시면 바로 잠드는데, 그것도 참 다행인 것 같아요. (웃음)
-김승용 선수가 부평고에 있었을 때 경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어시스트를 참 많이 하는 선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부평고는 전국 최강이었습니다. 처음 축구를 시작하던 초등학교 시절, 전국초등선수권대회가 있었어요. 총 16시도에서 48개 팀이 나왔는데, 인천이 1,2,3위를 휩쓸었죠, 그 뒤 그때의 주역들이 모두 부평고로 모였고, 최고의 멤버들이 임종헌 선생님이라는 최고의 지도자 아래에서 뛰었습니다. 그때 빈 공간을 침투하려고 사이드로 많이 빠졌고, 최전방에 있는 선수들에게 어시스트를 많이 할 수 있었어요. 덕분에 도움상도 몇 번 받았구요.
-당시 전담 프리키커이기도 했죠?
제 허벅지를 보시면 아시겠죠? 하체 힘이 좋거든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랬어요. 그래서 코너킥, 프리킥 등은 도맡아서 했고, 중?고교 때까지 쭉 이어졌습니다.
-그 시절 고교무대에서 날리던 선수 한명이 더 있었잖아요. (웃음) 여기서 박주영 선수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겠죠? 박주영 선수가 대학을 선택할 때, ‘나도 대학을 가고 싶다’ 는 생각은 전혀 없었나요?
대학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다만 학교생활과 관련해 재밌는 경험이 없는데, 대학 생활을 했다면 캠퍼스의 낭만이나 추억을 느낄 수 있었겠죠? 그게 조금 아쉽지도 하지만, 대학에 갔다면 지금의 김승용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프로 선택은 상당히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FC서울에서는 어린 선수들을 위한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많이 마련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희 팀에는 중? 고교 졸업 후 오는 선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축구를 뛰어나게 잘할지는 몰라도 지식적으로는 많이 부족하죠. 그런 부분을 팀에서 관리해주고 있다는 게 좋아요. 솔직히 학창시절에도 공부를 안 하는데 프로에서는 더 안하게 되잖아요. 그렇지만 은퇴 후 지식이 없으면 사회생활을 해나가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지금 팀에서 받는 교육들이 은퇴 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재미교포 선생님께 영어를 배우고 있는데, 처음에는 저희 수준을 유아수준으로 봐서 조금 억울했어요. 그렇지만 저희가 지루하지 않도록 참 재미있게 잘 가르쳐주세요.
-일본어 공부는 안하나요? J리그 진출을 위해 일본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어 공부는 안합니다. J리그 보다는 더 큰 유럽무대를 생각하려구요. 욕심과 포부는 크게 가질수록 좋잖아요. 일단 저희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로 열심히 뛰면서, 유럽 무대로 나가겠다는 꿈을 꾸고 싶습니다.
-지금 소속팀인 FC서울, 그리고 청소년대표팀에서 박주영 선수와 함께 뛰다보니 자주 비교 되는데,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은 없나요?
솔직히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주영이한테는 배울 점이 정말 많아요. 일단 경쟁의식 투철해 지기 싫어하고 집중력도 상당히 높거든요.
-그렇지만 김승용의 패스가 없었다면 박주영의 골도 없지 않았을까요? 박주영 선수의 골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게 섭섭하지는 않았나요?
언론에서는 골 넣은 것만 주목하지 어시스트는 잘 신경 쓰지 않잖아요. 물론 처음엔 많이 섭섭했죠. 그렇지만 제가 패스하거나 크로스를 올릴 때 다른 공격수는 위치를 잘 못 잡지만 주영이는 방향, 거리, 움직임을 잘 알고 그걸 바로 골로 연결해요. 주영이가 골을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제 어시스트가 빛나는 게 아닐까요? (웃음)
-2005년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의 성인식이라고 한다면, 어떤 성인식을 치룬 것 같습니까?
올 초에는 정말 빛났죠. (웃음) 청소년대표팀 경기에서 리마리오 세레모니를 보인 이후로 사람들이 저를 보는 시선이 바꿨는데 무척 기분 좋았어요. 김승용이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알린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또 신문에도 제 기사가 나와서 기뻤구요. 세계청소년대회 때 주목할 선수로 선정돼 좋았지만, 그 기대에 못 미친 것에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팀 성적이 노력에 비해 좋지 않았고, 데뷔골도 늦게 기록했고, 아직 팀에서 주전자리를 꿰차지 못해 무척 아쉽네요.
-‘제2의 고정운’ 이라는 말을 종종 듣잖아요. 또 마침 소속팀의 수석코치로 계시는데.
‘제2의 고정운’ 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기분 좋죠. 선생님이 굉장히 힘이 좋았고 또 저돌적인 선수였잖아요. 또 현역 때 어시스트도 많이 하셨고. 능력이 워낙 뛰어나 제가 따라가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요. 그렇지만 본보기 삼아 꼭 그렇게 성장하고 싶습니다.
-본받고 싶은 선수가 더 있다면요?
어렸을 때부터 김현석 선수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공격력 뿐 아니라 어시스트 능력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팀에 보탬이 많이 되는 선수였죠. 제가 되고 싶은 선수로서의 능력을 모두 갖추신 분이십니다.
-김승용 선수가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잘 알려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거 아세요? 사실 제가 골키퍼로 축구를 시작했어요. (백지훈 선수도 초등학교 시절 골키퍼로 뛰지 않았냐고 묻자) 저도 몰랐는데 지훈 형도 저처럼 어렸을 때 골키퍼였다고 하더라구요. (웃음) 반별 시합에서 골키퍼로 뛰었는데 선생님이 잘한다고 저를 축구부원으로 뽑으셨어요. 그때부터 경기를 따라다니며 골키퍼로 있었는데, 선수가 부족해서 유니폼을 입고 필드 선수로 뛰었어요. 잘 뛰다보니 자연스럽게 골키퍼에서 스트라이커로 바꿨죠. (웃음)
-미니홈피 자기소개에 인상 깊은 문구가 있었습니다. ‘공을 차다 잠이 오면, 두 사람을 생각하라, 너의 아버지와 너의 라이벌을, 그라운드를 뛰다 잡념이 생각나면, 두 사람을 생각하라, 너의 어머니와 너를 비웃는 자를(생략)’ 좌우명인가요?
우연히 다른 축구선수의 홈피에 들어갔는데 발견한 문구입니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절실히 공감했고, 굉장히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제가 놀고 있을 때 경쟁자는 운동을 열심히 해서 한 단계 성장할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래서 자주 기억하려고 미니홈피에다 써놓았던 것입니다. 좌우명은 ‘하면 된다’ 에요. 저희 집의 가훈이기도 하구요. 도전해서 손해 보는 것은 없잖아요. 뭐든지 부딪혀 보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문구를 보면서 ‘아들을 축구선수로 키우기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하라’ 는 뜻으로 해석했어요. 김승용 선수 부모님도 고생 많이 하셨죠?
어머니는 공장 다니시느라 아버지가 저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많이 하셨어요. 어머니는 제가 프로에 가게 되면서 여유가 생겨 요즘 제가 뛰는 경기를 보러 많이 오세요. 예전에는 부모님께 오면 부담되니까 오지 말라고 했는데, 요즘은 부모님이 오시면 더 열심히 하게 되고 힘도 많이 나요. 물론 요즘도 어머니는 공장에 나가세요. 자기 일을 갖고 사시는 게 좋다고 하시네요.
-부모님 속 썩힌 적은 없었나요?
만수중학교 시절 때 축구하는 게 참 힘들었어요. 집에 가면 가정 형편 어려운 거 알면서 축구화 사달라고 떼쓰고 철없이 굴었었죠.
-프로에 입단했을 때 부모님이 뭐라도 하시던가요?
프로에 입단해서 받은 돈을 드렸을 때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셨어요. 이만큼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하시면서요. 사실 그동안 저희 집이 없었거든요. 제가 번 돈으로 집을 마려했는데 참 뿌듯하고 좋았어요.
-형이 있다고 들었어요.
제가 축구선수로 있다보니 부모님이 저에게 관심을 많이 쏟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형한테 항상 미안해요. 그렇지만 형은 저를 보며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말해요. 아시아청소년대회 때 형이 군대에 있었는데, 제가 경기에 뛰는 모습을 보고 높으신 분들이 편하게 해줬다고 하더라구요. (웃음) 저 역시 기쁘게 생각하죠. 이번에 형은 군대에 제대했고, 복학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김승용 선수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니, 2005년은 축구선수로서의 보람을 느낀 한 해였던 것 같군요.
요즘 항상 축구선수로서의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FC서울에 입단이 결정됐을 때, 편하게 운동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최고의 구단에 가게 된다는 사실만으로 좋았고 그 때문에 잠까지 설친 정도였으니까요. 팬들에게 사랑받고, 팀이 이기는데 도움이 되고, 그런 저의 모습을 보며 가족들이 기뻐할 때마다 행복과 보람을 느꼈죠. FC서울은 지금의 저를 잊게 해준 소중한 곳이에요.
-긴 인터뷰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작년 한해 저희 FC 서울이 최다관중 동원기록까지 세울 정도로 많은 팬들이 경기장에 찾아와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쉽게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해 팬들에게 무척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골도 많이 넣고, 수비를 보강해 실점을 줄여 이기는 경기를 보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제가 주전자리를 꿰차야하겠죠. 이번 동계훈련 때 대표팀 선수들이 빠지게 되므로, 제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좋은 모습 보이고 싶습니다. 아울러 많이 뛰어다니고 재밌는 세레모니 보여주며 여러분께 기쁨을 주는 선수이고 싶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 항상 찾아와주는 팬들 여러분들을 항상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보답하는 선수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그랬듯. 제가 뛰는 모습을 보며 꿈을 꿀 수 있게 만드는 그라운드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다. 지켜봐주세요.
첫댓글 자세히 보니 참 친근하게생겻네요. ㅎ 카타르대회 떄 정말 맹활약했던걸루 기억하는데. 곧 대표팀에 승선하기를.. 화이팅
솔직해보이는 모습을 보니깐 참 친근감느껴지네요 ㅋㅋ
언제부터.. 김병철의별명을 하사받았더냐.!!!
음 멋있다^^ 김승용선수 진짜 좋은선수죠...앞날이 기대됨! 근데 K리그에서 박주영선수의 골은 김승용이 아니라 대부분 히칼도선수의 어시였는데 (카타르대회가 김승용의 어시)
청소년선수권대회때 브라질전때 프리킥 및 코너킥 찬스가 20번정도 왔던걸로 기억하는데.. 다 날려버린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