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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성숙과 내적 성장을 위한 여행,
2007년 밀라노 한인성당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그 첫째 날(2007년 11월 2일),
먼 순례 여행을 떠나기 위해 이미 어두워진 밀라노 시내의 피아자 티토(Piazza Tito
L. Caro 7 Milano) 소재 한인성당 앞으로 여행에 참가하는 신자분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이 여행을 위해 많은 분들이 오래전 부터 계획하고 준비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들었기에 그분들께 우선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집니다.
먼 곳으로 떠나기 전 순례여행을 준비하는 의미로 많은분들이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았고 또 신부님 집전으로 무사한 여행을 기원하는 의미의 간단한 미사와 기도를 마친 우리는 두대의 버스가 대기 하고 있는 곳으로 이동해 준비한 음료및 간식등을 싣고 미리 배정된 2층형 장거리 관광버스인1호차 2호차에 설레는 마음과 상기 된 표정으로 각 30여명씩 나누어 탑승 했습니다.
순례여행에 참여한 일행은 다양한 성원이었습니다.
젊으신 신부님을 위시해 주로 가족 단위성원이 많았고 그 다음으로 젊은 남녀 유학생, 또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 신자분 등이 함께 했으며 나이별로도 아이들, 젊은 세대, 중장년 세대 등 다양 했습니다.
허나 함께 여행에 참여한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 될것 없이 실로 가족 같은 공동체로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밤 9시 반경 출발해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어두워진 밀라노 시내를 지나 먼 노정을 위해 이태리 반도 동남부로 향해 뻗어 있는 A1 고속도로를 따라 간간이 빠르게 지나치는 낯 선 불빛과 마주치는 자동차의 전조등 빛을 맞고 보내며 길을 달려 나갔습니다.
차가 달리는 동안 밤 하늘에 뜬 초승달과 별빛이 줄곧 우리를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1호차의 앞자리 부분 오른쪽 창가에 앉은 난 스쳐 지나가는 어둔 밤의 차창 밖 불빛들을 바라보며 많은 상념들을 떠 올릴 수 있었습니다.
도중에 두어군데 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또 볼로냐(Bolona)에서 A14 고속 도로를 바꿔탔고 또 리미니(Rimini)라는 곳 에서는 교대 운전을 위한 이태리인 운전기사를 각 버스에 한명씩 더 태우기도 하면서 우리가 탄 버스는 밤새 달렸습니다.
달리던 도중 붉으스레 밝아 오는 여명을 맞은 후 묵주기도와 아침기도를 마친 우리는 고속 도로를 벗어나 산간 마을을 약 1시간 정도 달려 출발 한지 약 10시간 만에 순례 여행의 1차 목적지인 작은 타운인 산 조반니 로톤도(San Giovanni Rotondo)에 아침 7시 반 무렵에 도착 할 수 있었습니다.
산 조반니 로톤도(San Giovanni Rotondo) 성지는 밀라노에서 약 9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주 척박한 땅으로서 성당과 병원이 자리한 곳은 흰 빛의 석회암으로 된 메마른 가르가노 산 기슭에 자리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체크 포인트의 버스 주차장에서 바라다 보니 어느새 밝아있는 맑고 푸른 아침 하늘 아래 석회암으로 된 산 기슭에 옛 성당과 새 성당 그리고 흰빛의 병원이 바라다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둘째 날(2007년 11월 3일),
산 조반니 로톤도(SanGiovanni Rotondo)는 파드레 비오 성인께서 수사신부로 지내시면서 너무나 영성이 신실해 기적의 오상의 특은을 받은 성지 입니다.
*오상(stigmata : 다섯 상처)의 파드레 비오(Padre Pio)성인*
1887년 6월 25일 이태리 남부 베네베토 지역의 피에트 렐치나(Pietrlcina, 작은 돌)라는 작은 산간 마을에서 아버지 그라찌오 포르조네와 어머니 주세피나 사이에서 50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똑 같은 오상(양 손, 양 발, 옆구리 다섯 곳의 상처)을 몸에 지니고 고해성사를 통해 인간들을 완전한 회개로 이끄셨던 20세기의 위대한 성인 비오가 태어 났습니다.
그리고는 1910년 8월 10일 베네벤토의 주교좌 성당에서 비오신부로 사제 서품을 받으셨습니다. 이 후 자신의 고향인 피에트 렐치나 본당에서 생활 했습니다. 1910년 8월 마지막 날 부터 그의 두 손과 발에 흔적 없는 성흔의 현상이 일어남으로 인해 허약한 육체적 고통이 더욱 가중 되었습니다. 그후 병약하지만 점점 훌륭한 영적 신부가 된 그는 가르가노 산 위에 위치한 무명의 외딴 곳인 풀리아 지방의 산 조반니 로톤도의 작고 낡은 수도원과 버려진 작은 성당으로 옮겨 왔습니다. 심혈을 기울인 미사에의 몰입, 끊임없이 바치는 묵주기도의 생활 중 1918년 9월 20일 예수 그리스도와 똑 같은 오상, 즉 그의 영적 아버지이자 수도원 창립자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받았던 오상의 특은을 받습니다.
이러한 오상의 기적이 소문이 나자 풀리아 지방은 물론이거니와 이탈리아 전역,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순례객들과 소문을 확인 하려는 호기심 있는 이들의 발길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습니다. 이때 부터 비오 신부의 고해소에는 밤낮으로 고해성사를 드리기 위한 순례자들과 불치의 병의 환자들이 치유의 기적을 얻기 위해 찿아 왔습니다. 한편 의사에게 사형 선고를 받고 찿아 온 불치병 환자들이 비오 신부의 전구로 완치 되는 기적 또한 적지 않은 바 이 모든 기적들은 항상 전제조건으로 오로지 영혼의 구원을 받은 기적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자들과 영적 지도자들의 안내에 따라 기도하기 위해, 그리고 형제적 사랑을 나누기 위해 모일 때 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현존하시는 믿음과 사랑의 난로들이 되십시오.”
“모든 환자 안에는 고통 받으시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모든 가난한 사람 안에는 초췌하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니 모든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은 이중으로 현존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가난한 환자 안에서 주 그리스도님을 맞아 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통을 더는 집’ 시공식(1947년)을 갖었습니다.
비오 성인의 주요 기일을 살펴 보면,
1887년 5월 25일 피에트 렐치나에서 탄생
1887년 5월 26일 프란체스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
1899년 9월 27일 견진성사
1903년 1월 22일 비오형제의 이름으로 프란체스코 수도회 입회
1910년 8월 10일 사제서품
1918년 8월 31일 흔적 없는 성흔의 현상이 시작
1918년 9월 20일 오상의 은사를 받음
1940년 기도단체 모임 탄생
1956년 5월 5일 9년에 걸친 공사 끝에 고통 받는 환자 치료와 영적 구원목적의 병원인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 축성
1968년 9월 22일 마지막 미사 봉헌
1968년 9월 23일 새벽 2시 30분 81세의 일기로 자매인 죽음을 맞이 함
1997년 12월 18일 가경자 선포
1999년 5월 2일 복자 선포
2002년 6월 16일 성인 선포
옛 성당안 지하에 안치 된 비오 성인의 무덤 옆 제대 앞에서 신부님 집전으로 미사를 마친 우리는 무덤앞에서 묵상과 기도를 한 후 전시 된 유품을 돌아 보며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성당 안 성물 판매점에서 각자가 필요한 성물들을 구입 하였고 성당 밖으로 나와 모여서서 건축을 전공하신 양박사님에게서 성지에 대한 해박한 설명을 듣고는 기념 사진을 찍으며 성당 앞을 거닐거나 산 자락에 조성 해 놓은 십사처 십자가의 길과 예수님상을 부조해 놓은 곳으로 오르는 계단길을 따라 오르 내리며 거닐어 보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곳에는 이태리 전역을 위시한 세계 도처에서 순례객들이 모여들어 미사에 참례하거나 묵상과 기도를 하기에 여념들이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휠체어를 탄 노인환자 분들이 휠체어를 미는 봉사자들과 함께 와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는데 참으로 인상 깊게 느껴졌습니다.
미리 예약 해 둔 이태리 식당(La Buona Forchetta)에 가 식사를 한 우리 일행은 타운 전 지역이 비오 성인의 활동 지역이었기에 성지라 할 수 있는 타운 일대와 새로이 신축해 준공 단계에 다달아 축성을 준비 중인 현대적인 디자인의 조형미와 웅장한 모습을 지닌 새 성당의 안 밖과 거대한 기념 십자가 상 주위를 둘러 보기도 했습니다.
성지를 거닐거나 기도와 묵상을 하는 동안 내 자신의 너무나 부족한 영성에 마냥 부끄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대도 하늘은 차갑게 느껴지며 상큼하게 부는 바람과 더불어 왜 그리 맑고 푸르기만 하던지.
오후 세시 좀 넘을 무렵 우리 일행은 식사를 했던 이태리 식당 앞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해 다음 목적지인 란치아노(Lanchiano) 성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 했습니다.
란치아노(Lanchiano) 성지는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 A14고속도로를 따라 밀라노에서 오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약 20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란치아노 방향으로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는 오후 무렵의 풍광 좋은 남부 이태리의 전형적인 경치가 펼쳐지고 있어 그 경치를 한껏 감상 할 수 있었습니다.
차창 밖 경치는 얕으막한 구릉에 조성해 놓은 올리브 밭과 포도 밭 일색이었으며 그 사이로 아름다운 모습의 주택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있는 가운데 멀리로 바라다 보이는 서쪽의 높다란 산들은 어느새 눈이 내려 하얗게 빛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동쪽으로는 아드리아 해의 푸른 바다가 오후의 햇 살에 반짝이고 있어 차안에서 달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는 우리 일행의 눈을 마냥 즐겁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새 차창 밖으로는 짧은 석양과 함께 어둠이 내려 안기 시작했고 산 조반니 로톤도를 떠난 지 두시간 여 무렵에 차 내에서 저녁기도를 마친 우리 일행은 우리를 쉬게 할 숙소인 란치아노 근교의 아드리아 해 바닷가에 면한 작은 해안 도시 몬테 실바노 마리나(Montesilvano Marina)의 그랜드 호텔 몬테 실바노에 여장을 풀 수 있었습니다.
난 동료 신자 한분과 함께 호텔 4층의 어느 방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여장을 푼 우리는 호텔 구내 식당에 모여 즐겁고도 감사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한 후 와인을 곁들인 이태리식 식사를 들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일행 일부는 신부님을 모시고 다시 호텔 리셉션 옆 방에 모여 즐거운 뒤 풀이 시간을 갖었습니다.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주로 성당을 위해 봉사와 수고를 해 주시는 사목담당, 전례담당및 성가대원등을 위시한 희망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와인을 마시고 성악을 전공 하는 분들의 멋진 음색의 노래를 듣거나 대화를 나누는 친교의 시간이었습니다.
친교의 시간이 파 할 무렵 호텔 로비에서는 음악 연주에 맞춰 주로 근교에 사는 노년층 부부들로 구성 된 이태리인 들이 모여 와 쌍쌍이 춤을 추는 경쾌한 무도회가 벌어져 한동안 구경을 하거나 잠시 함께 해 보기도 하며 늦은 시간까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연후 고단한 밤을 잠으로 쉬며 보낸 우리는 다음 날 또 다른 찬란한 바닷가의 아침을 맞았습니다.
호텔 방 테라스에서 아드리아 해에 새로이 떠 오르는 찬란한 빛의 일출을 바라 볼 수 있었고 신선하고도 짭조롬한 아침 바다의 공기를 마시며 철썩이는 파도 소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맞은 아침의 날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맑고 찬연한 것이었습니다.
그 세째 날(2007년 11월 4일),
아침 식사를 호텔 식당에서 간단히 마친 우리는 호텔을 체크 아웃하고는 두번째 방문 한 성지인 란치아노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버스가 란치아노(Lanchiano)를 향해 달리는 동안 아침무렵의 아름다운 남부 이태리의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으로 조성된 구릉과 눈을 머리에 얹고 있어 희게 빛나는 산들의 경치가 바라다 보여 우리를 즐겁게 했습니다.
버스가 란치아노에 다다를 무렵 우리는 차내에서 아침 기도를 했습니다.
란치아노(Lanchiano)는 호텔에서 약 30여km 떨어진 곳의 해안에서 그리멀지 않은 내륙에 아담하게 자리한 오래 된 도시였습니다.
*란치아노(Lanchiano) 성지*
성체에 대한 신심이 깊은이라면 누구라도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이태리의 란치아노 일것 입니다. 끼에띠 부근의 란치아노는 고대에는 안싸눔이라고 알려졌었습니다. 이 곳은 역사상 첫 번째의 성체 기적이 일어 난 곳입니다. 성체 기적이 일어 났던 다른 곳들, 즉 볼세나, 시에나, 페라라등과 더불어 란치아노는 이태리 및 전 세계에서 아주 중요한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란치아노가 속해 있는 아부르찌 지방은 많은 성인들을 배출 했으며 성지들도 많이 위치해 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약 1200여년 전, 그러니까 8세기 중의 어느날 아침, 성 바실리오 회 소속의 한 수사가 미사를 드리면서 예수님께서 성체 성사에 실제로 현존 하심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가 막 빵과 포도주의 성 변화를 위한 축성을 끝낸 순간, 그는 갑자기 면병이 살아 있는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외양이 살아 있는 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놀란 신부는 이 사실을 숨길 수 없어서 미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곧 뛰쳐 나가서 이 소식을 란치아노 시 전체와 인근 지방들에 알렸습니다. 이 기적이 일어난 성당은 성 론지누스에 봉헌 된 초라한 시골 성당이었습니다. 성 론지누스는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던 로마군의 백인대장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일어난 역사상 최대의 성체 기적은 성체성사에서의 예수님의 현존에 대하여 한 수사 신부가 가졌던 의심에 대한 하느님 응답이셨습니다.
이 기적이 일어난 후 1200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그때의 성체와 성혈은 손상 되지 않은 채 보존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1252년 부터 오늘 날 까지 꼰벤뚜알 프란체스코 회 수도자들이 란치아노의 성체성당을 맡고 있습니다.
1974년 이래 여러차레에 걸쳐서 관할 주교들에 의한 인정이 있었으나, 1970년과 1971년에 해부학, 병리 조직학, 화학, 및 임상 현미경학 교수이며 아레쪼(Arezzo) 병원의 수석의사였던 오도아르도 리놀리(Odoardo Linoli) 박사가 성 프란체스코 성당을 맡고 있는 프란체스코회 수사 신부들의 요청에 따라 기적의 성체와 성혈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인 조사를 시행 하였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성체 기적의 성체는 참된 살이며, 성혈은 참된 피이다.
2. 성체는 심장의 근육조직으로 이뤄져 있다.
3. 성체와성혈은 사람의 것이다.
4. 성체와 성혈의 혈액형은 일치하며 AB 형이다.
5. 성혈에는 일반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정상적인 단백질이 발견 되었다.
6. 성혈에는 또한 염화물, 인, 마그네슘, 칼륨, 나트륨등의 미네랄이 감소된 양으로
함유되어 있으며, 반면 칼슘은 증가 된 양으로 함유 되어 있슴이 확인
되었다.
1973년에 이태리의 의사이며 생물학자인 요셉 비온디니(Joseph Biondini)교수는 그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세계보건기구(WHO : World Health Organization)에 리놀라 교수의 검사결과를 제출하였습니다. 이 제출 결과는 세계 보건기구에서 위임한 7개국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과학위원회의 15개월간의 조사 연구 끝에 리놀리교수의 결론들을 완전히 확인 하였습니다. 그들의 보고서는 세계 보건기구의 공식출판물에 게재되도록 준비되었습니다. UN산하의 그 과학자들은 란치아노의 성체 기적이 “유례가 없는 케이스”이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성체와 성혈에 대한 과학적 인증이 있은 이래, 더욱 많은 순례자들이 란치아노를 찿아왔습니다. 1978년에는 이탈리아에서만 700개이상의 순례단이 방문 하였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1,000개가 넘었으며 그 이후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전체와 북미등 전 세계에서 수 많은 순례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란치아노에서의 성체기적은 주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귀중한 선물이며,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신비의 징표이며, 우리 신앙 상태를 반성해 보라고 하는 주님의 부르심 입니다.
우리 일행은 란치아노에 도착해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의
란치아노 성체 성당 부근의 광장으로 이동해 가 잠시 양 박사님의 설명을 듣기 위해 모여 서 있었습니다.
그 무렵 마침 지역 참전 용사회 주관의 참전 기념상에 대한 헌화 증정 행사가 준비되고 있던 참이어서 특이한 복장의 참전 용사들과 더불어 이 행사에 참석 차 나오신 주교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신부님을 위시한 우리 일행은 주교님께 성지순례를 온 취지를 말씀드린 후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사진을 찍은 후 주교님으로 부터 강복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곳 광장은 오래 된 도시 답게 고풍한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이었습니다.
광장 인근의 기적의 성체 성당(Santurio Del Miracolo Eucaristico)인 성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가 성당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 서서 양 박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돌아 보던 도중 우리는 뜻 밖에 한국의 대구지역에서 25년간 선교 활동을 하시다 돌아 오신 한 수사 신부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한국말을 아주 잘하셔서 우리를 위해 특별히 한국 말로 기적이 일어 났던 당시 상황을 잘 설명 해 주셔서 우리의 이해를 돕게 해 주셨습니다.
기적의 성체 성혈이 모셔져 있는 제대 앞 성전에서 신부님 주관하에 미사를 드린 후 신부님과 수사 신부님으로 부터 우리 교우들은 영성체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미사를 마친 우리는 각기 성당 안 밖과 광장 주변을 둘러 보면서 묵상과 기도를 하거나 기념 사진을 찍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울러 성당안 성물가게에서 각자 묵주나 고상등 필요한 성물을 구입 하기도 했습니다.
성당을 나온 우리는 광장을 가로 질러 골목 길을 걸어가 점심식사를 위해 예약 된 이태리 식당(Taverna Del Marinaio)으로 가 지하 1층의 식당 안으로 들어 섰습니다.
식당안은 지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정은 아치형으로 벽돌을 쌓아 지어져 있고 벽은 단조로우면서 분위기 있는 깨끗한 흰색의 회벽으로 되어 있어 편안한 느낌의 분위기를 내고 있는 식당이었습니다.
식사로 제공되는 빵과 와인 그리고 스프와 스파게티 및 고기 요리등도 맛 있는 편이어서 식사를 하는 우리를 만족 스럽게 했습니다.
아울러 주인과 종업원의 서빙도 친절하고 훌륭한 것이어서 매우 인상에 남는 것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흩어져서 인근 일대의 성지 답사를 한 후 오후 두시 반 경 버스가 주차 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서 이동 해 갔습니다.
오후 세시 경 아쉬움을 남긴채 여정의 마무리를 위해 두대의 버스에 오른 우리는 란치아노를 출발 했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란치아노 시내를 벗어 나 곧 오던 길 그대로의 A14 고속도로에 들어서서는 밀라노를 향해 오후의 햇살을 한껏 받고 있어 풍광 좋은 남부 이태리의
올리브 밭과 포도 밭이 펼쳐지는 풍경 속을 달렸습니다.
우리가 달리는 왼쪽으로는 하얀 눈을 얹고 있는 높은 산들이 보이고 오른 쪽으로는 포도밭과 올리브 밭 저 아래로 간간히 아드리아 해가 하얗게 빛나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것이었습니다.
짧은 석양이 지나가고 곧 어둠이 내렸고 그 어둠 속을 우리가 탄 버스는 밀라노로 밀라노로 오던 길인 A14 고속도로와 A1 고속도로를 되 짚어 밤 시간을 달렸습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난 과연 무엇을 보고 느꼈던가.
내 부족하디 부족한 영성과 믿음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더욱 더 애써야 할 것이 아닌가.
많은 상념들을 달리는 버스속에서 떠올리고는 했었습니다.
여하튼 이 모든게 주님의 뜻일 것 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주님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늦은 밤 어느새 11시가 넘어 버릴 무렵에 우리는 출발하기 위해 버스를 탔던 밀라노 한인 성당 인근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함께간 동료들과 더불어 7인승 택시를 불러타고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산 도나토로 돌아 옴으로서 우리의 순례 여행은 끝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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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엄지척!
잘봤습니다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대리만족합니다
멋집니다, 나그네님!!!
혹시 신부님이신가요?
요즘은 저도 너무나 이런 여행이 절실합니다.
내 안의 성숙을 위한 가식 없는 여행을 하고 싶은데, 나그네님 너무 멋진 여행 하셨네요.
아마도 사제이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