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피했으나 두 번째 찾아온 「癌礁(암초)」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한국학을 실어 나르던 巨艦(거함) 「이규태號」는 좌초했다. 그리고 엔진마저 꺼져 버렸다. 그렇다. 이젠 우리 곁에 더 이상 이규태가 없다. 그러나 「이규태學」은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겨졌다.
이규태는 1933년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났다. 그가 기억하는 고향은 늘 이랬다.
『내가 태어난 장수는 시골 중에서도 아주 외딴 곳이야. 흔히 산간벽지를 일컬어 「무진장(무주·진안·장수)」이라고 하잖아. 그 장수가 바로 내 고향인데, 내가 어릴 때 종이를 처음 보고서 너무 신기해 그걸 접어 놓고 잠자다가 중간에 깨서 펴 보곤 했어. 꿈에도 나타날 정도였지』
1933년생이면 13세 무렵 조국의 광복을 맞게 된다. 산골 소년 이규태에게 日帝(일제) 시절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었다. 일제와 광복, 3년간의 전쟁을 한창 나이 때 겪어야 했던 그에게 나름대로 각인된 시대상이 없을 수는 없다.
생전에 간혹 베풀어 준 술자리에서 이규태는 후배기자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사실 1950년대에 대한민국에 뭐가 있었어? 20代를 고난 속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에, 특히 나 같은 청년들은 내가 태어난 나라, 그리고 나 자신의 운명을 혐오하기까지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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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과 함께. |
그는 연세大 화공과를 나온 工大(공대) 출신이다. 화학의 뿌리는 연금술이다. 말년의 그가 화학기호야 일일이 기억하진 못했겠지만, 돌아보면 그의 일생이 온갖 쓰레기 같은 파편까지 주워 모아 「한국학」이라는 빛나는 황금을 빚어 냈다는 점에서 연금술사의 그것이었다. 그 점에서 그가 화공과 출신이라는 학력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대학을 마친 청년 이규태는 군산商高(상고)의 교사로 짧게 재직한 적이 있다. 그러나 평생을 던질 만한 직장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무작정 上京(상경)했다.
이 무렵 서울 종로의 음악다방에서 DJ로 일한 적도 있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나름의 음악 애호가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1959년 3월1일 공채 2기로 朝鮮日報에 입사했다.
예전과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신문사의 사회부는 군대식 위계질서가 많이 남아 있는 부서로 꼽힌다.
하물며 이규태가 신참기자였을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바로 윗세대는 철저하게 일본식 조직문화를 신봉하던 선배들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숨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회부 초년병 시절 군대에서 부하 일병의 연애편지를 훔쳐보던 상관이 부하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 터졌다. 데스크의 지시에 따라 어렵사리 병사의 애인을 마포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나를 흥밋거리로 만들지 말라』는 그 애인의 항의를 받고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 그는 취재를 중단했다. 데스크의 불호령이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생전에 이규태는 『당시 나의 행동이 옳았다는 소신에는 지금도 변함 없어』라고 말하곤 했다.
이규태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사가 사람에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焚身(분신)하는 학생을 구하지 않고 사진취재에만 몰두했던 사진기자의 경우를 놓고 우리 사회가 논란을 벌인 적이 있었다. 직업정신이 사람의 생명에 우선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어느 한쪽을 정하기가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규태는 단호했다.
『그 따위 사진 하나 안 찍으면 어때? 사람 목숨부터 구해야지!』
그랬기 때문일까? 사회부 기자로서 그의 활약상을 전해 주는 무용담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러나 1961년 소록도 나환자촌 연재기사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바다를 메워 「천국」을 만들어 보겠다는 나환자들의 피나는 苦鬪(고투)를 취재한 것이다.
이방인에 대한 나환자들의 위협은 심각했다. 그러나 기사보다 인간을 더 사랑했던 이규태는 취재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작가 이청준은 이 연재를 보고서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썼고, 이규태도 소설 속의 등장인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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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펄벅 여사와 함께 경주 첨성대 앞에서. |
사회부로 발령받기 전 이규태는 문화부 기자로 잠시 일한 적이 있다. 바로 그때 「대지」의 작가 펄 벅이 1960년 10월 한국을 방문했다. 역시 세계적인 작가는 한국을 보기 위해 시골여행을 원했다.
문화부 기자 이규태가 동행취재하는 행운을 잡았다. 이때의 일은 그의 인생관을 바꿔 놓았고, 결국은 운명까지도 새롭게 열어 주는 계기가 된다.
당시 시골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펄 벅이 이규태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며 차창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게에 볏단을 진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가고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던 이규태에게 펄 벅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같으면 저렇게 안 하고 농부도 지게도 다 달구지에 올라탔을 거야. 소의 짐마저 덜어 주려는 저 마음, 저게 내가 한국에 와서 보고 싶었던 모습이야!』
이규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심 가난에 찌든 조국 농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부끄럽기까지 했던 자신이 더욱 부끄러워졌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은 기자 경력 2년차에 불과했기 때문에 시각전환에 따른 성과물이 나오는 데는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1965년 3월12일부터 4월24일까지 43일간 베트남 특파원으로 현장취재를 하게 된다.
이규태로서는 난생 처음 해보는 해외여행이기도 했다. 펄 벅으로부터 받은 충격이 늘 뇌리를 떠나지 않던 가운데 베트남 체험은 그가 한국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데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됐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면들이 거꾸로 보이더라구』
생전에 그가 한 말이다.
사람이 없어 入社 10년차도 되기 전에 웬만하면 신문사 부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이규태도 입사 7년 만인 1966년 4월1일 문화부장이 된다. 이때 그는 몇 가지 혁신적인 조처를 취했다. 이규태 하면 떠오르는 고리타분한 이미지는 실은 잘못된 것이다. 이규태는 溫故知新(온고지신)을 몸으로 실천했던 기자다. 시선은 역사를 향해도 그의 발이 현재를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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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와 문화부에서 근무하던 젊은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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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 문화면이 외부 필자의 글을 받아 싣던 체제에서 오늘날과 같이 기자들의 기사 중심으로 바뀐 것은 그의 결단에 의해서였다. 문화부 기자들이 직접 기사를 쓰지 않고 외고를 받는 일만 해와서 사소한 사진설명 하나 제대로 달 줄 모를 정도였다. 생전 그의 회고다.
『한번은 막내 여기자에게 「내년은 닭의 해이니 멋진 닭 그림이나 사진을 찾아서 설명을 쓰라」고 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어 저녁에 가판을 보지 않고 퇴근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신문을 보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닭 사진 밑에 「사진은 닭」이라고 되어 있었다』
1969년이 기유년 닭의 해였으니 1968년 말에 있었던 일인 것 같다.
이후 조사부장과 기획위원을 지낸 이규태는 1970년 10월부터 주간조선의 主幹(주간)을 맡으면서 그동안 쌓아 두었던 내공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11월8일자부터 연재를 시작한 「奇俗(기속)」, 말 그대로 우리 역사 속에 전해 내려온 기이한 풍속들을 찾아가는 기획이었다.
「씨받이」와 「달먹이」도 이때 再발견된 것이다. 씨받이는 그 후 영화화되기도 했고, 달먹이 혹은 달맥이는 여자들이 시집가기 전에 뒷산에 올라가 달의 기운을 받기 위해 심호흡을 하던 풍속이었다. 식민지·건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한구석에 밀어 두었던 우리의 역사와 풍속을 다시 불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규태는 현장기자는 아니다. 사회부기자 6년을 제외하면, 그는 늘 현장과는 한걸음 떨어져서 글을 썼다. 그의 경력에 「정치부 기자」는 없다. 정치부장도 한 적이 없다. 생전에 그는 『정치부 기자를 하고 싶은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朴正熙 시대는 그런 그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1971년 8월15일자 주간조선은 「날으는 50억짜리 청와대」라는 특종기사를 실었다. 대한항공이 도입한 비행기가 대통령 전용기라는, 지금 와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이규태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배포된 주간조선은 모두 거둬들여야 했고, 다음호에는 「대통령 전용기로 도입한 것이 아니라는 식」의 거짓해명까지 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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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사회부장이 됐으나 그의 관심사는 여전히 문화 쪽이었다. 1973년 5월24일 고려大 도서관이 「直指心經(직지심경)」보다 79년 앞선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며 「심요법문」이란 책을 공개했다. 온 언론이 발칵 뒤집혔다. 朝鮮日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문화부 기자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한 이규태는 직접 검증을 시도했고, 「심요법문」에 있는 작위나 관직이 모두 元나라 것임을 들어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주장을 뒤집어 버렸다. 얼마 후 전문가들도 이규태의 손을 들어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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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편집국에서 오수를 즐기고 있는 이규태. 문화부장 시절로 추정된다. |
1967년은 쇄국이 끝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朝鮮日報 방우영 사장은 신년기획의 하나로 개화, 혹은 개국 100년을 돌아보는 기획을 지시했다. 기본 골격은 당시 쟁쟁한 원로 문필가들을 대거 동원해 릴레이 연재를 하자는 것이었고, 이규태는 필자 선정 및 원고 챙기기를 맡았다. 아마도 원래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이규태의 기자 행로도 바뀌었을지 모른다. 그때 이규태의 나이 35세였다.
이미 1968년 신년호부터 시작한다고 대대적인 社告(사고)까지 나갔는데 문필가들이 자신 없다며 두 손을 들었다. 자칫 「대형사고」가 날 판이었다. 결국 苦肉之策(고육지책)으로 이규태가 몇 차례라도 연재하고 끝내기로 했다.
그 길로 이규태는 인사동을 비롯해 서울의 古서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현재 물가로 月 300만원 정도씩 들어가는 고서 구입이 시작됐다.
이렇게 시작한 「개화백경」은 1968년 한 해 내내 60회까지 연재했다. 역사물 기획취재 전문가로서 이규태라는 이름 석 자가 한국 언론사에 각인되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힘을 받은 이규태는 1969년에는 53회짜리 「인맥」 시리즈를 히트시켰고, 1970년에는 신문 컬러化의 붐을 타고 「新왕오천축국전」 등을 연재해 국내 역사물뿐만 아니라 해외 기획취재 분야로 관심을 넓혀 갔다. 그리고 그의 연재는 폭발적인 인기에 대부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970년대는 민족 주체성의 문제가 학계나 언론계의 큰 화두였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朴正熙 정권의 어용 민족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은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뤄지면서 한국인들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데서 생겨난 현상으로 보는 것이 실상에 더 어울릴지 모른다.
1975년은 광복 30주년이었다. 돌진적 근대화는 전통문화를 곳곳에서 파괴하고 있었다. 전통은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으로 여겨 왔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것도 전통문화의 낙후성 때문이라는게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물밀듯이 밀려드는 서구문화, 특히 미국의 대중문화가 그 자리를 채울 수는 없었다. 溫故知新의 이론가 이규태가 활약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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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가 몸담고 있던 朝鮮日報가 초대형 기획을 준비했다. 1975년 8월23일~1976년 12월25일까지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이름으로 장장 72회에 걸쳐 한국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의식을 72가지로 분류해 제시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내면의 한 부분을 발견하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필자는 당연히 논설위원 이규태였다.
朝鮮日報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7년 5월12일~12월24일까지 「외국인이 본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연재됐다. 1978년 1월7일~1979년 8월25일까지는 「한국인이 본 외국인의 의식구조」가 연재됐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2중 비교를 통해 밝혀 낸 것이다. 「개화백경」을 능가하는 충격파가 국내외에서 몰려왔다. 결국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全4권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일본 동양서원과 대만 예명공사에서는 각각 일본어판과 중국어판을 냈다.
이때부터 이규태는 더 이상 언론계에 한정된 인물이 아니었다. 출판계는 「돈이 되는 작가」로서 이규태에게 눈독을 들였다. 1980년대 들어 이규태는 「의식구조」 시리즈를 연이어 출간했다. 「선비의 의식구조」, 「동양인의 의식구조」, 「서양인의 의식구조」, 「한국 여성의 의식구조」 등이 그것이다.
생활구조·정서구조·사고방식 등을 규명한 책들도 썼다. 그중 「한국인의 정서구조」, 「이규태 한국학 에세이」 등도 일본어로 번역됐다.
1994년 서울 定都(정도) 600년을 앞두고 1993년에 펴낸 「이규태의 600년 서울」은 이규태의 진가가 유감없이 드러난 책이다. 여기서 이규태는 서울 장안의 왕가·궁터, 문관이나 무관의 집터, 근대화 시설, 도성·감옥·시장 등 구석구석에 얽혀 있는 유래와 사람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 내 보여 주었다.
특히 1996년에 펴낸 「김치 천년의 맛」은 이규태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名著(명저)로 꼽힌다. 당시 이규태는 『프랑스 인류학자들은 음식연구를 통해 얼마든지 한 나라의 문화특성을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우리나라 학자들은 김치니 뚝배기니 하면 하찮은 것으로 여겨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고 은근히 우리 학계의 엄숙주의를 비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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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5000여 권의 책들로 빼곡한 이규태의 서재. |
생전에 이규태는 후배들에게 밥이나 술을 사 주면서 자신은 胃(위)가 커서 「胃大(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는 식사량이 많았고, 주량도 셌다. 점심을 같이 하면 수육에 설렁탕, 소주 한 병 정도는 기본이었고, 話題(화제)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두 번째 癌(암)이 찾아오기 직전인 2005년 가을 함께 점심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회사 근처 고깃집에서 「대장암 완치」 기념으로 후배들이 식사를 내는 자리였다. 그때도 무리 없이 고기 2인분에 소주 한 병, 그리고 된장찌개까지 맛있게 들었다. 그때 속으로 「정말 위대한 분이로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偉大(위대)하다는 말에 걸맞은 기자였다. 그는 많은 후배기자들에게 「거인」이었다.
기업을 놓고 보자면 李秉喆이나 鄭周永 같은 인물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거인이다. 정치권에도 李承晩·朴正熙·金泳三·金大中 같은 거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학계에는 그런 분들이 드물었다. 학문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닌데, 식민지와 전쟁 등으로 인해 차분하게 성장한 학자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언론계에는 거인들이 제법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이규태는 우뚝 선 거인이었다. 이규태를 특히 거인으로 느끼게 만들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이규태 코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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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 7000호를 향해 내달리던 순양함 「이규태 코너」는 6701회(2006년 2월11일자)에서 뜻밖의 「癌礁」에 걸려 22년 11개월10일간의 항해를 마쳤다. 3년 후인 2009년 봄쯤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거인을 보낸 아쉬움은 아득할 만큼 깊다.
「이규태 코너」는 5共 정권의 위세가 극에 달해 있던 1983년 3월1일 탄생했다. 당시만 해도 기명칼럼이 익숙지 않던 시절이었다. 파이프를 물고 있는 곱슬머리 필자의 작은 캐리커처와 함께 「명월관」 이야기로 출항을 알렸다. 명월관이 있던 자리에 親日派 이완용이 살았는데, 그 집 고목에 벼락이 내리쳤던 이야기였다. 3·1절에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週1회가 아닌 매일 연재였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한두 달 하다가 말겠지」 하는 우려 섞인 시각으로 보기도 했다. 한국 언론사에서는 최초로 매일 연재하는 기명칼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를 거듭하면서 이런 우려는 눈 녹듯 사라졌다.
그의 내공은 넓고도 깊었다. 「이규태코너」는 「만물상」과 함께 「1등신문」을 향해 수직으로 비상하던 朝鮮日報의 양대 간판칼럼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東西古今(동서고금)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때로는 감칠맛 있게 때로는 가슴 찡하게 써 내려가는 글쓰기의 妙(묘)에 독자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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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연재 1000회 돌파 기념 사진. 당시 朝鮮日報 논설위원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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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朝鮮日報 독자 수만큼이나 다양했다. 日常(일상)에서 의미를 포착해 내는 힘에 이끌린 독자가 있었는가 하면, 「어디서 그런 소재들을 찾아냈는지」가 놀라워 「이규태 코너」에 매료된 독자도 있었다.
거창한 페미니즘을 운운하지 않으면서 한국 여성의 힘을 발굴해 내기도 하고, 어려운 시절 자기 비하에 빠진 많은 한국인들에게 한국인 됨의 가치를 불어넣었다.
6700회까지 오게 된 「이규태 코너」는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작은 생명체의 숨결에도 귀 기울일 줄 알았던 따뜻한 그의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불어 쉼 없는 자료수집과 연구가 뒷받침됐다. 그의 자료정리를 위한 「5색분류법」은 유명했다.
그의 서재를 가득 채운 1만5000여 권의 책과 노트, 색인·스크랩 등은 내용에 따라 각각 적·황·녹·청·흑의 다섯 가지 색으로 분류돼 있었다. 인간의 신체에 관한 것은 「적색」, 의식주에 관한 것은 「황색」, 동식물에 관한 것은 「녹색」, 제도에 관한 것은 「청색」, 종교문화에 관한 것은 「흑색」 쪽지를 붙이는 식이다. 그 후 중분류, 소분류로 이어졌다. 생전에 그는 『세상의 모든 정보는 이 분류법에 다 포함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더불어 「이규태 코너」 집필에 들인 그의 功力(공력)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그날의 테마를 일단 정했다. 이유는 그때가 기사가 가장 싱싱할 때여서라고 했다.
오전 6시30분까지 두 시간 반 동안 서재에서 관련 자료들을 뒤져 가방에 집어넣은 다음 운동을 하고 출근해서 집필에 들어간다. 그는 소재를 정하는 일을 가장 힘들어했다. 아무리 좋은 소재라도 뒷받침할 자료가 부족하면 안 된다는 글쓰기 철학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다행스러운 것은 생전에 이규태가 구상했던 「한국학」의 골격을 직접 들어 본 일이다. 130권에 이르는 방대한 그의 책들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직접 정리해 보려는 욕심도 부렸다. 그러나 하루하루 계속되는 「이규태 코너」는 결국 이런 욕심마저 꺾어 버린 셈이다.
그는 세계적인 여성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여사의 이론을 탐독했다. 평생에 걸친 자신의 작업을 정리하는 기초이론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에서 이규태는 솔직했다.
『미드 여사의 「수직 문화」·「수평 문화」·「동일성 문화」라는 문화변증법의 3단계 발전론을 우리 현실에 맞게 수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단계는 전통문화, 2단계는 외래문화, 3단계는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자기정체성 문화로 단계說을 제시했다.
그러나 앞으로 언젠가 이뤄질 「이규태學」이 본인의 뜻대로 진행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역사학자 이덕일 박사는 이규태를 프랑스의 「백과전서파」에 비유해 「백과전서파」로 불렀다. 백과전서파는 체계로서의 지식을 거부하고 博學多識(박학다식)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했다. 물론 이규태學은 지금 그대로 둔다고 해도 훌륭한 한국학의 백과전서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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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부인·두 아들과 함께. |
반면 용인大 이동철 교수(동양철학)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먼저 그의 생애와 업적을 연대기적으로 빠짐없이 정리하는 작업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모은 1만5000권의 장서에 대한 정리와 분석작업도 필수적이다.
이같은 기초적인 작업이 완성되면 본격적으로 再조명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再조명의 첫 걸음은 이규태의 「의식구조」를 규명하는 일이다. 이규태는 「개화백경」을 연재하면서 新문화 수용을 거부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대단히 비판적으로 그렸다.
新문화에 대해 너무 보수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그는 당시 朝鮮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시각을 보였다. 오히려 외세에 무조건 맹종하지 않은 그들에게서 格(격)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 혹은 성숙해 간 이규태의 의식도 이규태學의 중요한 연구대상의 하나다.
이규태가 떠나고 「이규태學」이 탄생 조짐을 보이고 있다.
첫댓글 매사 실천하시면서도 인품도 좋으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