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른 다섯 직장인입니다.
팀장 바로 밑, 팀원들 중에는 제일 선배. 중간에 끼어서 일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은 뭐 그런 사람이죠.
때로는 일이 많아 새벽5시까지 야근도 하고,
가끔은 일이 많은데도 '아 하기 싫어~' 하면서 미루고 요령부리고 하는 그런 '보통 사람'입니다.
어제, 마흔 세살 야구선수가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힘을 줄 수 있어서 좋았다"며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고, 모든것을 불태웠기에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했더니 노력...노력...또 노력이라고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그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만나 궁금한 걸 묻고 그의 속내를 듣는 직업을 가진 지 10년 여.
내 앞에 앉은 사람의 눈빛과 표정과 말투를 보면 느껴지는 '촉' 같은 게 있습니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야구했다"고 말하는 이종범의 흔들림없는 말투에서는
단 1%의 허언이나 과장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가 울때 저도 바보처럼 같이 울었습니다.
그의 진심어린 얘기가 내 마음을 움직였고
때로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고 그저 적당히 살았던 내 삶이 부끄러웠고
은퇴 이후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전부 "결정된 게 없다"고 답하는 걸로 보아,
"오랜 준비에 의한 은퇴다"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갑작스런 은퇴'였음을 짐작케 해서였습니다.
케케묵은 옛날 얘기 한 조각 꺼내보겠습니다.
1980년대부터 야구를 보아 온 빙그레 이글스 팬에게
<해태타이거즈>는 증오와 분노, 짜증과 재수없음의 집합체였습니다.
우승의 문턱에서 내리 3번을 좌절시킨 빨간색 타이거즈
거기 있는 사람들은 철부지 초딩 야구팬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한 '나쁜놈들' 이었습니다.
그 호랑이굴에 새로 입성한 젊은 유격수.
저는 참 싫었습니다.
중학교 교과서에다 '도약하는 한화, 웅비하는 이글스' 같은 촌스런 문구를 적어놓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정민철과 송진우를 경배했는데
내 영웅들이 던지는 공을 이종범은 다 쳐냈고
그렇게 1루에 나가면 무조건 2루로 갔고
우리 종훈이형이 친 총알같은 타구도, 가운데로 굴러가면 저 사람이 달려와서 잡았습니다.
그 유격수는 늘 그랬습니다.
그 뒤로, 세월이 참 많이 흘렀습니다.
그 선수가 일본에 진출해 부침을 겪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철부지 초중딩도 제법 어른이 됐고
해태한테 맨날 깨지던 회한의 응원팀도 우승을 한번 했더랬죠.
나이 어린 팬의 가슴에 스며들었던 한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희석됐고
타이거즈 이종범도,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그 시절 영웅으로서 조금씩 존경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다, 언제쯤
저는 이종범을 존경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건 아마 조악한 DMB 화면으로 아래와 같은 장면을 보고 나서부터였을겁니다.
기억들 나실겁니다.
저 순간, 당신의 가슴이 얼마나 벅찼는지
그때 TV를 보던 당신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고 입으로는 어떤 소리를 냈는지
다들, 기억 하시리라 믿습니다.
타이거즈의 캡틴.
아니요. 그는 대한민국의 캡틴이었습니다.
저는 울었습니다.
타구가 좌중간을 딱 가르고 펜스 앞으로 굴러갈 때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면서 막 팔을 허우적대고 방방 뛰면서 광분했는데
느린 그림으로, 저 아저씨가 포효하며 팔을 벌리고 뛰었다는 걸 다시 본 순간
그냥. 울었습니다.
왜 눈물이 쏟아졌는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저 사람은, 내 영웅들을 눈물짓게 만든 나의 적이었습니다.
싫어했고, 미워했고, 팔이라도 확 부러져서 몇달 못나왔으면 좋겠다고 기도까지 한 존재였는데
그 사람의 포효에 내가 같이 우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첫째 이유는 그의 가슴에 새겨진 'KOREA' 때문이겠지만
분면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습니다.
저 노장과 나를 연결하는 그 어떤, 고리, 코드 같은 것 말입니다.
타이거즈 팬들 사이에서 이종범 은퇴 관련 논란이 이는 걸 본 적이 있었습니다.
여느 팬 사이트에서 인기많고 야구 잘하던 노장들이 흔히 겪는 그런 논쟁이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저 사람과 나 사이의 연결고리가 뭔지.
내 학창시절
그러니까, 천지가 개벽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
그때를 뜨겁게 물들였던, 그 시절 기억의 조각들이 자꾸 잘려나가는 것 같아 서러웠습니다.
그래서, 장종훈 송진우 정민철은 없지만 이종범 양준혁은 더 있어주길 바랬습니다.
늙은 팬의 이기심일지 모르지만, 저는 그냥 그랬습니다.
송진우 장종훈 정민철 구대성 양준혁 이종범이 없는 야구
모르겠습니다.
예전처럼 그렇게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볼 수 있을런지 말입니다.
모든 것을 불태워 노력했다던 말에 감동했는데
"그래, 나도 저 아저씨처럼 스스로에게 후회없는 인생을 살자"며 다짐하고 싶은데
왜 그런 감동을 받고 몇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와의 이별에 울어야 하는지
저는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제는 슬픈 하루였습니다.
흙먼지 잔뜩 묻은 유니폼을 입은 타이거즈 7번 선수가
마치 로케트가 날아가듯, 우리 2루베이스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건 응원팀의 승리나 패배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참 마음이 아픕니다.
이종범이 어제 그랬습니다.
여러 기록 중에서 도루 84개가 가장 애착이 간다고
그 기록을 꼭 자기 아들이 깼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약속할게요.
당신의 아들이 깨든, 누가 깨든 간에
나중에 제 손자가 <치고 달리기>를 제일 잘하는 타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의 이름을 꺼내겠습니다.
어제,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팬들에게 절을 했지요. 그동안 감사했다고
아마, 반대로 많은 팬들이 당신께 절을 하고 싶을겁니다.
그 마음, 꼭 알아주고 떠나시기 바랍니다.
잘 가요. 그리고 꼭 다시 봐요.
첫댓글 해태라는 팀에 매번 지는 모습 보기 싫어 야구 안 보던, 군대 때문에 99년 우승도 몰랐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야구장에서 고래고래 응원하는 게 좋은 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종범에 대한 제 마음은 1번 선발님과 같네요. 1번선발님! 늙은 거 아닙니다. 한창인거죠^^
회자정리....
지금 드는 생각이 당시 해태는 선이 굵은 야구를 하면서도 SK처럼 이기는 방법을 아는 최강팀이였던거 같내요.
1번 선발님이 늙으셨다면 저는 머임 ㅡ.ㅡ
1번 선발님이 늙으셨다면 저는 머임 ㅡ.ㅡ(2) 젊은 1번선발님이 부러운 1人
부러운 2인 ㅜㅜ
저도 이종범 선수 대학 때부터 보며 좋아했죠.
이종범도 존경스럽지만, 어찌 보면 타자들 중에 가장 터프한 주루플레이를 많이 해야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전준호 선수도 참 존경스럽습니다.
93년 도루왕을 놓고 겨루던 모습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물론 전준호보다 훨씬 뛰어난 장타력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요.
어.. 종범이는 가고.. .동열이는 오고...
미워했지만 결국은 사랑할수 밖에 없었던..
오랜 이글스의 팬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지만 참 서글퍼지네요..
세월이.. 나이가.. ㅠㅠ
광주팬들이 이종범 이종범 안타 이종범을 연호할때 솔직이 많이부러 웠습니다. 한화에서도 모든팬이 열열히 응원할수있는 그런 선수들의 노래가 좀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한화의 모든선수들의 응원가가 있긴하지만 "이종범"선수처럼 간단하면서도 누구나 따라부를수있는 노래가 그리워집니다. 그만큼 이종범선수의 활약이 대단했다는것을 방증 하는 것이겠죠. 당신의 뜨거운 눈물이 아름다웠습니다. 이종범씨 앞날에 행운이 함께하시길......
이종범은 정말 치고달리는데 있어서는 kbo역사상 최고 타자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클러치히터 본능도 있는데... 타팀이지만 뜻하지 않게 은퇴가 아쉽네요.
전 이종범선수 생각하면 예전에 포수 마스크 쓰고 나와서 경기 마무리 했던 적이 있었죠. 이글스가 지고 있던 상황이라 울면서 이종범선수를 욕했다는....
이런 게 싸우다 정들고, 강한 적들끼리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 아닌가 싶네요. 한 시대의 종언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지도자로 성공하기를 바람니다
이종범 선수 때문에 울면서 이불 많이 물어 뜯던 기억이..ㅠ 그래도 아쉽네요.
양준혁과 이종범의 은퇴가 아쉬운 40대...
해태와 이종범 둘다 엄청나게 싫었죠.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1선발님 말따나 이종범이라는 야구선수를 좋아하게 되더라고요. 열심히하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존경심이 생기고 그런 모습들이 보이면서 좋아할 수 밖에 업는 선수가 된거 같아요. 프로야구 올드팬 입장에서 많은 부분이 와 닿는 글이네요. 현진이가 지금 엄청나게 잘하고 있지만 정민철 코치가 여전히 나의 영웅으로 남아있는 것이 내가 가장 야구에 열광하고 사랑하던 시절의 영웅이기 때문이겠죠. 젊음을 함께한 영웅들이 떠나가는 것은 우리팀이든 타팀이든 마음이 아프고 쓸쓸하네요.
어떤 의미에서 또 한시대가 갔네요. 못내 아쉽습니다 ..
용큐가 그 기록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기대감은 뭔지
저도 초딩시절 해태는 증오의 대상이었는데.. 해태 좋아하는 친구랑 야구할때 같은편 안먹고 그랬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종범 선수는 존경.. 그냥 야구하면 이종범이 되어 버렸죠..
이종범의 해태는 정말 대단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