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연금술, The Alchemy of Happiness>
- 아부 하미드 무함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 가잘리
“사물의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이란 반드시 신을 아는 것과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신체 각 기능은 그것이 창조된 바의 목적을 좋아한다. 욕정은 거기 따르는 욕망을, 화는 복수하기를, 눈은 아름다운 것 보기를, 귀는 화음 듣기를 좋아한다. 인간 영혼의 최고 기능은 진리를 감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진리를 감지하는 데서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인간은 장난으로나 무작위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놀랍게, 그리고 어떤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인간이 비록 영원하지는 않지만 영원토록 살 수는 있다. 인간의 몸이 비록 비천하고 티끌 같지만, 그 정신은 존귀하고 거룩하다.”
핵심 우리는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더 높은 진리를 배우기 위해 존재한다.
같은 계통의 책 무함마드 아사드, <메카로 가는 길> 칼릴 지브란, <예언자> 마이클 뉴턴, <영혼들의 여행> 이드리에스 샤, <수피의 길> 엠마누엘 스웨덴보그, <천국과 지옥>
가잘리 Ghazzali
아부 하미드 무함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 가잘리(간단히 ‘가잘리’라 알려짐)는 1058년 지금의 이란 북쪽 투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지도적 지성의 하나로 여겨져 30대 초반에 이미 바그다드 니자미야 대학 이슬람 법학 교수라는 명예로운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전 생애를 통해 그는 ‘사물의 깊은 진실’을 알겠다고 하는 목표를 가지고 살았고, 그의 지력 때문에 그는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 그가 그의 전문 분야에서 최고봉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기의 이성적 사고력이 정말로 자기를 진리로 이끌어 주었는가 하는 데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자서전 <오류로부터의 구출>에서 언급된 대로, 그는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 더 이상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적 위기를 맞은 셈이다.
어두운 밤과 현현(顯現)
이런 회의의 기간 동안 가잘리는 우리의 감각이 제공하는 증거가 틀릴 수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 증거는 더 높은 질서에 속하는 진리에 의해 반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육안으로 보면 하늘의 별이 아주 작게 보이지만 수학에서는 그것이 이 지구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꿈을 꿀 때는 환상적인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지만 깨고 나면 그런 것이 실재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우리가 일상의 일을 구성하고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쓰는 이성적 사고라는 것도 좀 더 높은 차원의 깬 상태에서 보면 허구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가잘리는 수피 신비주의자들이 자기들의 더 높은 의식 상태에서 보면 이성적 사고라는 것이 무용지물이라고 하던 말을 기억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한 말, “사람들은 자고 있다. 죽으면서 깨어난다.”고 한 말을 상기했다. 허상의 베일이 벗어지고 비로소 진리를 보게 되는 것이 오로지 죽을 때, 그리고 이성적인 마음을 뒤로 할 때라는 이야기다. 이런 것들을 놓고 골몰하고 있을 때, 가잘리는 ‘현현’을 경험하게 되었다. 밝은 빛줄기가 자기의 심장으로 꿰뚫고 들어오는 것 같고, 한 순간에 지금까지 자기가 진리에 대한 근거라고 여겨오던 ‘잘 짜여진 논증들’들이 거룩한 진리를 직접 체험하는 것에 비해 전혀 무의미하게 되고 말았다.
신의 존재 증명을 찾아서
그러나 이런 경험 자체로는 그를 지탱하는데 역부족이었다. 그는 자기가 목격한 그 진리에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철학, 종교, 신비주의 등을 찾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독서도 하고 연구도 했다. 이런 연구 결과가 그가 쓴 <종교학의 부흥>이라는 기념비적 저술로 나타났다. 이것은 수피 사상 이외의 모든 철학 체계의 허구를 점차적으로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수피 사상만이 이슬람이 잃어버린 직접적인 신체험으로 나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가잘리는 연구를 너무 열심히 한 결과 신경쇠약에 걸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해 강의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교수직에서 사임하고, 가족과 동료들을 남겨둔 채 10년이 넘도록 시리아에서 방랑하는 신비주의자의 삶을 시작하고, 여러 해가 지나서야 교직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행복의 연금술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종교를 부흥시켜려는 가잘리의 노력이 인정을 받아 그는 ‘하자트-엘-이슬람’ 곧 ‘이슬람의 증거’라는 특별한 칭호를 얻었다. 수피 신비주의자로서 그가 이슬람 주류 밖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상당한 영예였다.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아퀴나스가 차지했던 것과 같은 위치를 가잘리는 중세 초기 이슬람 세계에서 차지한 셈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가잘리의 사상이 유럽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거기서 그는 알가젤(Algazel)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신학자로서 중량급 학자였지만 가잘리의 현명한 행동 중 하나는 <종교학의 부흥>을 요약하여 더 많은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물이 <행복의 해부학>, 아랍어로 <키미야 이 싸아다트(Kimiy’-yi sa’adat)>라는 책이다. 처음 4장은 ‘하디스(hadiths)’, 곧 무함마드의 어록을 따라 가면서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떠나서는 참된 행복이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현재 서양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책은 지난 9백 년 동안 이슬람의 위대한 영감의 문헌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가잘리는 평균적인 사람이 ‘동물로부터 천사로’ 탈바꿈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요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네 가지 요소란 :
• 나 자신을 아는 지식 • 하느님을 아는 지식 •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식 • 다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식
나 자신을 아는 지식
가잘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뭔가 알지 못하면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 주목한다. 나 자신을 아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마음이다. 육체적 심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준 마음으로서, 이 마음은 ‘나그네처럼 낯선 땅에 찾아왔다가 이제 그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세상일과 근심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의 참된 근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한편 하느님께서 주신 그 마음을 알면 우리가 누구이고 왜 여기 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가잘리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정욕에 넘어가고 마는데, 이는 ‘천사를 힘 있는 개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고 한다. 또 그는 다른 비유를 드는데, 마치 쇠를 잘 닦으면 거울이 되듯이, 마음도 훈련을 통해 잘 다스리면 그 속에 있는 지적·영적 녹을 없애고 거룩한 빛을 참되게 비출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가잘리에 의하면, 인간의 신체 기능은 주어진 역할을 하는 데서 기쁨을 갖는다고 한다. 화는 복수하는 데서, 눈은 아름다움을 보는 데서, 귀는 음악을 듣는 데서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기능은 진리를 간직한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찾는 데서 최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욕정적이고 음식을 탐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식욕을 충족시킴으로 최고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자신들과 하느님을 아는 데서 오는 더 큰 기쁨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성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이 황홀한 기쁨을 맛보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우리가 죽는 즉시 모든 육체적 식욕은 없어져 버리지만,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알게 된 지식은 죽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일부가 되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한다. 자기들의 영혼에 주목을 거의 하지 않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내세에서도 실패하는 사람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스로를 동물의 수준에서 더 높은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개인적 연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가잘리는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것들이 매력적인 한편, 우리에게 최선인 것들은 ‘고생과 수고가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
가잘리는 <쿠란>의 한 절을 인용한다. “인간은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닌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을 창조한 참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찾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는 물리학자들이야 말로 글씨가 쓰인 종이 위를 기어 다니면서 그 글씨가 펜 하나만으로 쓰여진 것이라 믿는 개미와 같다고 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그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 알아보려면, 그들이 의사를 만나느냐 점성술사를 만나느냐, 만나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그들에게 특별한 이유로 병을 주어, 그들이 삶이 주는 정상적인 쾌락으로 만족하지 못하도록 함으로 그들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이르게 하시려 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밖으로 드러난 원인 뒤에는 언제나 참된 원인이 있는데, 그 참된 원인이란 하느님이 주신 원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 죽으면 계산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잘리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은 의사가 그들이 약을 먹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약을 안 먹는 사람들과 같다는 것이다. 문제는 의사가 상관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들의 불순종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킨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우리의 경배를 아름답게 보시지만,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것 때문에 하느님이 손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의 참된 정체성, 곧 우리는 인간의 삶을 받아 나온 신령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식
가잘리는 우리의 몸이란 우리의 영혼이 이 삶의 여정을 지나가면서 타고 가는 말이나 낙타와 같다고 한다. 영혼은 마치 메카로 가는 순례자가 그가 타고 가는 낙타를 보살피듯 몸을 잘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순례자가 낙타를 먹이고 꾸미고 하는 등 낙타 자체를 보살피는 데에 너무 시간을 많이 보내면 순례자도 낙타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 채 사막에서 죽고 만다. 가잘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중도 포기하게 될 때 무슨 대단한 결정을 내려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소한 것으로 시작해서 이 사소한 것이 커져서 결국에는 사람을 통째로 삼켜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끝없이 세상의 쾌락에 몰입한 사람은 임종을 맞은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나서 그것을 다 토해버리는 사람과 같다. 맛은 가버리고 추함만 남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 먹을 만큼만 먹고 향을 즐기고 자기 집주인에게 고맙다고 하고 떠나가는” 길손과 같다고 했다.
다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식
<쿠란>에 의하면 영혼은 스스로 원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는데, 이것은 좀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영혼은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 하느님의 지시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권고를 받는다.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영혼은 지상에서의 삶이 일종의 지옥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쿠란>에서는 “지옥이 믿지 않는 자들을 둘러싸고 있다”는 말을 한다. 가잘리는 땅에 사는 동물들과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계급이나 위치를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인간들만이 자기들의 행동을 통해 동물 수준으로 내려가거나 마찬가지로 천사들의 높이로 올라갈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자유 의지는 인간에게 주어진 짐이기도 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대로 살아가는 대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가면서
가잘리는 자기가 직접 영적 신비를 경험해본 본격적 신비주의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이성만을 사용해서 신의 존재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에서 온 것이다. ‘이슬람의 증거’라는 이름을 받기는 했지만, 그의 저술은 사실 어느 종교의 진리라고 입증할 수 있는 훌륭한 논증이라 할 수 있다. 의심하는 사람이나 신앙을 잃은 사람들을 다시 끌어오는 도구로서 그의 <행복의 해부학>은 거의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9백년이나 된 이 책이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는 이 외에도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제목이 큰 약속을 하고 있고, 책이 <쿠란>에 나오는 무함마드 자신의 말씀이 갖는 권위에 기초하고 있고, 원본에 비해 간결하게 요약 정리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클로드 필드가 지금은 고전이 된 그의 1909년 번역판에서 말한 것처럼, 가잘리의 글이 갖는 강력한 힘은 독자들이 오묘하고 섬세한 영적, 철학적 요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들의 마음에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줄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이것은 위대한 수피 시인 루미가 인정했는데, 루미는 그의 유명한 <마스나비>에서 <종교학의 부흥>에 나오는 몇 가지 비유를 빌려 썼다.
가잘리가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그는 이슬람 문화가 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예배의 몸짓만 계속할 뿐 진정으로 자기들을 변화시키려는 마음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슬람 신앙을 회복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이슬람 세계에서 통속적 철학을 멀리하게 하는 데 공헌하는 등 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서구가 서서히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이슬람 영성의 부활은 이슬람 신앙과 사회 제도가 더 이상 분리하지 않도록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슬람교도이든 아니든 <행복의 해부학>이 주는 더욱 큰 메시지는 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신의 피조물이라는 것, 따라서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지식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평화란 우리가 단순히 ‘낯선 땅을 떠도는 나그네’로서 멀지 않아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영원한 비물질적 세계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톰 버틀러-보우던이 소개하고 해설한 <영적 깨달음을 주는 고전 50선>을 오강남 선생님께서 번역하셔서 그 중의 일부를 이곳, i-새길에도 게재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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