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번째 봄
2015. 4. 2. 금계
휘파람소리 음악. 핸드폰 시그널 뮤직. 열어보니 김종승 선생의 전화. 김 선생은 지난 2월 말로 명예 퇴직하여 우리
와 같이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형님, 다 왔습니다.”
“응, 지금 화장실이네. 곧 내려감세.”
보름 전에는 김 선생의 차를 타고 유 선생이랑 함평 손불중학교로 놀러갔다. 나랑 유훈영 선생이랑 함께 일중학교
친목계 모임 회원인 주 선생이 손불 중학교 교장이었다. 학교 가까운 식당에서 먹는 점심이 일품이었다. 때마침 꽤
크지만 보돌보돌 연하게 씹히는 생낙지에다가, 그 때 아니면 맛보기 어렵다는 쭈꾸미 볶음 하며, 갖가지 맛깔스런 시 골 반찬이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오늘은 또 김 선생 차를 타고 서 헌 선생한테 놀러가기로 한 날이다.
요즘 연금 때문에 걱정이 많다. 옛날에 낼 돈 다 내고 약정 금액을 타먹고 있는 나는 괜찮겄제? 설마 소급해서 지금
받는 액수까지 깎자고 덤벼들지나 않을지 은근히 염려스럽다.
김 선생은 지난 토요일 서울에서 열린 연금법 개악 반대 집회에 갔다. 거기에서 서 헌 선생을 만났다. 올해 일로에 자
리 잡은 전남체육고등학교로 전근을 갔다 했다. 퇴직해서 한가한 나랑 유 선생이랑 함께 한번 놀러오라 했단다.
터미널 부근에서 유 선생을 태우고 출발한 시각이 오전 열한 시 오십 분 경. 학교에서 서 선생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
각이 한 시 오십 분. 시간이 널널하니까 서 선생 학교 가기 전에 어딘가 돌아다녀야 한단다. 종승 선생은 차를 목포대
학교로 몰았다. 대학교 캠퍼스 안의 벚꽃이 볼 만하다. 그러나 아직 좀 철이 이르지 않을까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며
갔는데 아니나다를까, 역시 아직 팝콘을 활짝 터뜨리기 전이었다.
아직도 약속 시각이 멀었다. 우리는 목포대학교를 되돌아 나와서 회산 백련지로 갔다. 거기는 아직 잎과 줄기가 거멓
게 말라 비틀어져서 연꽃 축제를 벌이려면 까마득했지만 유 선생 왈 근처의 백목련이 볼 만하다고 적극 꼬드겨서 방
문했다. 연 방죽 끄트머리에 가게가 있었다. 막걸리 한 병에 땅콩 과자 한 봉지. 목포 막걸리는 달착지근한 맛이 있어
서 별로 즐기지 않는데 일로 막걸리는 달지 않고 쌉쌀하니 옛날 집에서 담던 막걸리 냄새가 났다. 단숨에 가득 찬 잔
을 쭈욱 들이켰다. 유 선생과 나는 땅콩과자를 맛나게 먹었지만 김종승 선생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냉큼 먹으려
들지 않았다. 우리들은 종승 선생이 조금 있다 우족탕을 맛나게 먹으려고 땅콩과자를 먹지 않는다고 놀려댔다.
그 가게를 출발하여 일로 쪽으로 얼마 가지 않아 백목련이 활짝 핀 곳에 도착하였다. 백목련을 가로수로 심은 곳은 꽤
드물지 않겠나 싶었다. 아직 며칠 더 지나야 활짝 피어날 모양이었다. 그런 대로 봄 냄새를 물씬 맡을 수 있어서 좋았
다. 봄에 피는 꽃이 한두 가지일까만 그중에서도 가장 우아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꽃이 백목련 아니던가.
1시 50분에 일로면 전남체육고등학교에 도착. 서헌 선생과 문희경 선생이 정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희경 선
생은 그 학교 근무한 지 벌써 4년째라 했다. 나는 작년 봄에도 혼자 버스를 타고 일로에서 내려 체육고등학교를 구경
했다. 그 때가 점심참 부근이었으니 문희경 선생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틀림없이 점심은 얻어먹었을 텐데 기회를 놓
친 것이 아깝다. 예전에는 학교 중앙 현관에 들어서면 교사들의 신발장에 칸칸마다 이름을 줄줄이 써놓았는데 요즘
에는 이름이 없어서 그 학교에 어떤 선생이 근무하는지, 혹시 내가 아는 선생이 근무하는지 어떤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고 탄식했더니, 문 선생 왈, 지금은 인터넷에서 방문할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선생들 이름을 알 수 있다고 해설
했다. 그러니 말하자면 내 버전은 낡은 버전인 셈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서 선생이 안내한 곳은 일로 농협 맞은편 한우식당이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인지라 손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식당
안이 복작거렸다. 그래도 우리들은 안다. 점심시간이라고 아무 식당이나 바글대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바글
대는 식당이 하나라면 파리 날리는 식당이 아홉 열이라는 것을. 비록 점심시간일지언정 하루에 한 번씩만 바글거려
도 그 식당은 떼돈을 벌기 마련이라는 것을.......
밑 안주로 가느다란 고구마와 번데기가 나왔다. 유 선생은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나는 번데기를 먹었다. 나는 젓가락
으로 번데기를 한 마리씩 집어먹는데 문 선생은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나는 번데기도 숟가락으로 여러 마리 한꺼에
깨물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흔 살 먹어서야 문 선생 보고 처음 알았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나도 60년 전 소년
시절부터 숟가락으로 많이 떠먹었을 텐데....... 그 먹을 것 귀하던 시절에는 번데기가 너무나 눈물 나게 고마운 주전
부리였다. 큰할머님 댁에서 누에고치를 삶아 실을 뽑는 날은 내가 유일하게 번데기를 포식할 수 있는 날이었다. 커다
란 바퀴가 빙빙 돌면 솥단지에 둥둥 떠서 뱅글뱅글 돌면서 위에 달린 도르래에 몽땅 실을 뽑혀 투명해진 누에고치 안
에서는 번데기가 훤히 들어나 보였다. 얇아진 고치를 찢고 따끈한 번데기를 꺼내어 한쪽 끝을 이빨로 살짝 깨물어 구
멍을 내면 야구르트보다 달콤하고 고소한 액체가 한 모금 입안으로 쑥 흘러 들어왔다.
밑 안주 다음으로는 쇠고기의 부산물 한 접시가 들어왔다. 아마도 오늘 일로 장날을 겨냥해서 소를 잡은 모양이다.
간, 등골, 지라, 처녑. 싱싱하지 않으면 절대로 날로 먹지 못할 부위들이었다. 등골을 먹으면서 우리들은 이게 바로
‘부모 등골 빼 먹는다.’할 때의 등골이라고 웃었다. 지라 때문에 또 한 바탕 소동이 일었다. 나와 문 선생은 허파라 우
기고 유 선생은 전에 먹어보니 지라라 하더라고 우겼는데 식당 일하는 아줌마한테 물어보니 지라란다. 나와 문 선생
은 코가 석 자나 빠져 무안했다.
그 다음으로는 내가 기다리던 살코기가 나왔다. 양짓살과 등심살. 특히 나는 그 싱싱하고 야들야들한 양짓살을 좋아
한다. 기름이 붙어 있어 유달리 고소하고 쫄깃하다. 그 맛깔스러운 생고기에 소주를 기울이는 기분은 먹어본 사람만
이 알 수 있겄제. 문 선생과 서 선생은 오후에 수업은 없지만 얼굴이 붉어진다고 술을 사양했다. 김 선생은 운전하느
라 술을 마실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다 보니 그 아까운 술안주에도 불구하고 둘이만 술을 마셨다. 유 선생은 막걸리
를 마시고 나는 혼자서 소주 한 병을 다 비웠다.
마지막 메뉴이자 핵심 메뉴인 우족탕이 나왔다. 한 그릇에 12000원이라는데 그렇게 받게 생겼다. 뭉텅뭉텅 뼈에 붙
은 쫀득한 살이 굉장히 맛났다. 나는 이미 술에다 생고기에다 배가 불룩해져서 그 아까운 고깃점들이 들어갈 곳이 없
었다. 몇 토막 남기고 일어서자니 아까운 생각이 가득하였다.
군대에서도 어쩌다가 쇠고기 국이 나왔는데 막상 살점을 구경하기 어려웠다. 눈을 씻고 봐야 기름 한 조각 찾을 수 없
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황우도강탕(黃牛渡江湯)이라 불렀다. 황소가 텀벙텀벙 발을 적시고 건너간 국물이라는 뜻이
었다. 참으로 인생이 야릇하고 아이러니했다. 고기를 간절히 원하던 시절에는 국물밖에 먹을 수 없었는데 일흔 살에
는 뼈다귀, 고깃살 그득한 우족탕이 나와도 비만, 고혈압이 걱정되어 살점을 제대로 실컷 먹을 수 없으니 이것이 인
생의 반어법이다.
이 식당은 한우를 제대로 맛볼 수 있으니 돈을 벌어 마땅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구마, 번데기 - 등골, 간, 처녑,
지라 - 양짓살, 등심살 - 우족탕! 소주를 곁들여 이 환상적인 과정을 섭렵하다 보니 얼이 빠지고 넋이 달아나 사진 찍
을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내 카메라를 안 가져왔으니 유 선생 핸드폰으로도 얼마든지 찍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문 선생, 서 선생한테 맛난 우족탕 대접받았으니 얼굴이라도 소개해야 마땅한 일 아니겠는가. 나는 하는 수
없이 묵은 사진첩을 뒤적거리기로 한다.
2009년 3월, 구례중학교 이용원 선생한테 놀러갔다가 어느 당구장에서 찍은 사진. 서 헌 선생의 좋은 점이 한두 가
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점은 잘 웃는 성품이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품은 누구에게나 바람직하다.
자주 웃는 사람한테는 암도 달라붙지 못할 것 같다. 어찌나 착한 사람이던지 남의 입에서 나오면 험담으로 들릴 이야
기도 그의 입에서 나오면 칭찬으로 착각할 정도다. 그를 칭찬하려면 한정 없지만 너무 치켜세우면 우족탕 때문이라
고 비아냥거릴 것 같아 그만 그쳐야겠다.
그러고 보니 문희경 선생과는 작년 이맘때 고금중학교 정권율 선생한테 함께 놀러갔던가 보다. 충무공의 사당 부근
애서 찍은 사진 같다. 문 선생과는 저 치열했던 1989년 8월, 명동성당에서 600여 명이 모여 단식투쟁을 벌일 때 함
께 참여했던 동지다. 내외간에 아남팎으로 굳은 지조와 절개는 아조 알아주어야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더라고 일로 재래시장을 구경하고 다시 체육고등학교로 가서 차를 한 잔 마신 다음 서 선생, 문 선생
과 작별했다. 또 유 선생이 권하여 나주 동강면 화정부락 뒷산 ‘느러지’에 들렀다. ‘느러지’란 강줄기가 한 바퀴 빙 휘
감아 돌면서 속도가 ‘느려진 곳’이라는 뜻이란다. 여기도 가운데가 한반도 모양 비슷하단다. 유 선생 따라 이번이 두
번 째 구경이지만 내 보기로는 이곳이 영산강 ‘제 1경’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느러지’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산길 예쁜
정자 앞에 술에 취한 나처럼 얼굴이 불콰해진 진달래가 피어 있다. 나의 일흔 번째 봄도 황홀하기 그지없다. 누군가
는 얼마나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그래도 역시 오래 살아서 일흔 번째
봄을 맞이하여 우족탕을 먹고 진달래 사이에 취해 눕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미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새봄만 맞이하고 싶다. 맛난 것을 먹으며 마음에 기꺼운 친구들만 찾아다니며 별에서
온 그대처럼 지구를 아무데나 둥둥 떠다니고 싶다. (끝)
첫댓글 '일흔 번째의 봄'... 예순은 예절바르고 순한 듯 얌전하고 야든은 여하튼 든직하고 야물어서 그런지 일흔은 어감에서 '흥이 일어나는 듯' 봄 냄새가 많이 납니다...^^! 제 마흔 살 초입에 해남의 한 전교조 행사장 식당에서 선생님 자리로 불려갔던 적이 있었죠. 그날 제가 여쭸던 질문이 이거였습니다. "선생님.. 제가 사십이 넘고보니 하루에도 열번은 인생을 중얼거리게 되던데, 선생님은 오십을 넘기면서 어떠시던가요?" 했더니 즉설주왈 "훨씬 스무스하데." 하셨습니다. 제가 그 시절의 선생님의 나이를 열살이나 넘겼어요. 잘 모르시겠지만, 선생님은 제 인생의 나침반 같습니다.
늘 십년 앞선 시간의 여행을 앞당겨 머리오리를 고쳐보고 스킨도 바르며 표정도 지어보고 주먹도 쥐어보는 거울 같기도 합니다. 10년 앞당겨서 느껴보는 세월은 일방적으로 제가 선생님으로부터 편취하는 정신적 문화적 수익인 셈이죠. 건강하시어 여행도 음식도 벗도 다 풍족하시니 감사하면서 새삼 선생님의 일흔 번째의 봄을 축하해 드리고 싶군요... 진달래 벙긋 웃는 나무 아래 홀로 볼그레 달아오른 도톰한 입술이 봄바람처럼 기분 좋게 다가옵니다. 너무 쓸쓸해 마세요. 물껍질을 박차고 아득히 달덩이에 깃드는 물오리의 날개처럼 생은 시작도 마감도 없는 오롯 사선 하나! 아, 작렬하는 사월의 핑크빛 햇살이여!! 선생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