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태왕사신기에서 백제국 아신왕으로 설정했던 라이벌이 국내 정쟁으로 이동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한 문제들과 직접적인 관련은 적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대소 왕이 소설가들에게 미운 털이 박힌 까닭을 다른 각도로 한 번 살펴보지요.
"(부여)왕의 장사(장례)에는 옥갑을 사용하였다. (서)한(나라) 조정에서는 항상 미리 옥갑을 만들어서 (서한) 현토군에 보내 두었다가 임금이 죽으면 이것을 갖다가 장사 지내게 했다."
『후한서』권 팔십 오「동이 열전 제 칠십 오 夫餘國(부여국)」
이 기록은 부여와 서한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핏 살피기만 해도 서한이 부여에게 예우를 한다는 사실 내지는 적어도 화친관계라는 짐작은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하면 하나 하나 살펴보지요.
우선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옥갑(玉匣)'입니다. 사전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지요.
옥갑(玉匣)[―깝][명사] : 1.옥으로 만든 갑. 2.옥돌로 장식을 한 갑.
갑 (匣) Ⅰ [명사] 1. 작은 상자. 2. 형체가 다 만들어진 도자기를 구울 때 담아 넣는 큰 그릇. Ⅱ [의존명사] 작은 상자를 세는 단위. ¶담배 두 갑 ./성냥 한 갑 .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옥으로 만든 작은 상자'가 뭐 어쨌다고?"
아마 이렇게 항의하거나 짜증을 내실 회원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저도 그것을 납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줄여서 말해도 (서)한(나라)에서는 유씨 왕실과 견줄 수 있는 최상위 귀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자였습니다.
한데 그러한 것을 부여왕이 죽을 때마다 선물로 보냈다는 사실은 한(漢)나라에서 부여를 얼마만큼이나 중요한 파트너로 인식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상대국의 군주를 적어도 자국 내의 최상위 귀족에 준하여, 심지어는 제왕의 예에 준하여 예우하는 것이니 이 정도면 더 설명이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바람의 나라』에서도 대소 왕이 한(漢)에게는 그다지 적대감정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건국 초기부터, 특히 무휼 시대에 이르면 어떤 식으로든 한 군현과의 마찰도 있었던 고구려와 얼마나 대비가 되겠습니까?
후세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해버린(즉 감정을 불어넣은) 고구려의 반 중화적·진취적 입장에서는 대소 왕 내지는 부여가 한족(漢族)과 놀아난 나라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요.
물론 대소 왕이 한(漢)나라와 유독이 가깝게 지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기록은 있습니다.
"(광무제의 건무) 이십 오년에는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서 공물을 바치니 '광무제'는 여기에 후하게 이에 보답하였다. 이에 사신들의 왕래가 해마다 서로 통했다." [출처는 위의 책과 같습니다.]
여기서의 부여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의문의 여지가 많은 기록이기는 합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동)한과 부여는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이 있으니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연히 '진취적'인 고구려와 '붙어 먹는' 부여가 엄연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하면 대소 왕은 그냥 평가 절하 되어야 하는 인물인가?
제가 보기에는 결코 아신왕이나 연가려(?) 수준으로 떨어질 인물이 아닙니다.
『바람의 나라』에서는 역사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더 더욱 대소 왕의 그릇을 알 수 있는 면면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구라든가 그 휘하 마수(魔獸)들을 등용한 점입니다.
대소 왕은 대외적으로는 외국과 가능한 한 친화정책을 사용하고(그 방식에 문제성이 다분했을지언정) 대내적으로도 많은 인재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려 한 듯합니다.
안정된 대외정책과 더불어 대소 왕은 이질세력[마수(魔獸)로 상징되는]을 발탁하는 정치 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어(꼭 마수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결국은 후일의 일이지만 연의 친할아버지인 갈사왕이 무휼에 투항하는 등 전쟁이 아닌 정치에서 대패하고 말지요.
흔히 야합으로 치부하기 쉽지만 6권과 7권에서 보듯 대소 왕과 사구는 그저 정치적 이익을 목적으로 뭉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신수씩이나 되는 존재가 마음 속으로라도(심지어는 노골적으로도) 한낱(?) 인간에게 수 틀리면 '개XX, 소XX' 같은 말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음에도 그는 항상 대소를 '내 왕' 내지는 '우리 왕'이라 칭합니다.
달리 생각하면 사구 같은 존재를 마음으로 승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자기 나라 안에서는 도량이 컸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대소 왕은 문제성이 있는 대로 상호공존(?)을 추구하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소 왕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합니다.
무휼 비판론이 주요 취지인 글에서 나온 설이지만 자매 카페인 '바람의 나라 카페'의 어느 분의 글에 저는 속된 말로 한 대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대소는 인상부터가 무휼처럼 매끈하지 못하며 살찐 돼지를 연상시킵니다. 아닌가요? 게다가 무휼은 참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받아 자기 변명부터 자기 대의에 대한 것들에서 그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심지어 무휼의 아내, 연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자일까요? 그런 연을 지켜 주지 못한 대소가 더 밉지 않을까요?'
전적으로까지 찬동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위의 말을 절대 간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부분이야말로 의외로 초기 고구려를 집필한 소설가들의 관념이 작은 형태로나마 '확대 재생산'된 부분은 아닐까요?
일반적 고구려 소설들에 비하면 매우 공평한 시각에서 묘사한『바람의 나라』조차 이러한 관념을 온전히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항의하실 분들이 분명 계실 것입니다.
"야! 대소 왕이 '이제는 나라의 틀을 제대로 잡아 대국의 꿈을 키우고 저 북방으로 나아가야 할 때인데'하는 말 못 들어 봤어?"
물론 댕기판 제6권에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보기에 그것은 김 진 선생님의 '장치(?)'가 숨어 있는 듯했습니다.
『바람의 나라』7권에서 대소 왕은 무휼을 만나 분명히 자신의 나라를 '대국(大國: 큰 나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부여는 '이미' 스스로 대국이라는 의식이 있었지요. 물론 어감은 조금 다릅니다만.
또 부여에서 북방으로 나가면 흑룡강과 부여의 북방인 송화강 사이에 있는 읍루(혹은 숙신) 정도가 있을 뿐인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 읍루는 이미 부여의 속국 내지는 제후국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읍루는) '한'이 흥한 이후로 '부여'에 속하고 무리는 비록 적으나 용력이 많고 산세가 험한 곳에 거하고 또한 홀을 잘 쏘니 능히 사람의 눈을 맞추었다."[ 출처: 위와 같음 ]
보통 한(漢)하면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초한지』로 유명한 고조 유 방이나 한사군으로 유명한 무제 유 철이 활동했던 서한 혹은 전한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하튼 부여가 북방으로 새삼 더 뻗을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부여의 북방에 있던 읍루는 이미 장악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북방 어쩌고 운운한 까닭이 무엇인가?
결과론적인 해석이겠지만 저는 이 '북방'이라는 말을 대소 왕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암시로 봅니다.
박원길이라는 분의『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마니즘』에 의하면 샤마니즘을 연구한 학자들은 몽골을 포함한 대부분의 민족들이 아주 먼 북쪽에 저승세계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북방이 단순히 읍루 정복의 의미가 아닌 이상 '북방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는 저승세계를 간다는 것이니 무휼에게 애송이 어쩌고 하는 말이야 어떻든 대소 왕 자신으로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임했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이긴 자의 편인 것 같습니다.
부여, 용이 그리고 특히 그는 끝내 진 자가 된 탓에 그의 결함은 더 크게 그려지고 장점은 빛 없이 묻혀 버렸겠지요.
우리가 살핀 대소 왕의 면면들은 그의 묻혀진 장점입니다.
나라의 존립여부라는 어려움에 처해 오히려 용기를 잃지 않는다는 사실은 범용한 인간에게 실로 얼마나 흉내내기 어려운 미덕이겠습니까?
첫댓글 아 그렇군요. 사실 대소왕은 그다지 눈여겨 본 캐릭터가 아닌지라 그에 관한 이해라든가 뭐 그런 것은 애당초 관심밖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가서 다시 찾아보고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함)
대소왕도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인물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사료를 남기는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지요. 언제나 좋은 이야기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