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9)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1021년 최초의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또 그녀는 한국 근대 문화사에서 최초의 여류소설가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숙원은 “그의 소설 <경희>는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텍스트”라고 평가하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신여성론은 동시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맞겨룰 만한 담론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나혜석은 여성도 ‘사람’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여성 계몽적 시 <노라>를 발표, 1920년대 계몽주의 문학의 중요 작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상경은 “나혜석은 자유연애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성취를 추구하며 온몸으로 계몽주의 사상을 밀고 나갔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46)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인덕을 비난했지만, 윤치호는 박인덕을 옹호했다. 그는 1931년 10월 26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로, 나는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것과 똑같이 그녀 역시 남편과 이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런 남자들 중에는 더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하길 바라는 것 말고 어떤 이유도 없는 자들이 많다. 이들 무정한 젊은 남자들은 비난하지 않고 그저 박인덕만 욕하고 온갖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노예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93-94)
마찬가지로 일제는 조선의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사업에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본격적으로 방송을 국민동원과 전시선전의 도구로 삼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화, 내선일체, 일본어 상용 등의 명분을 내걸어 우리말 뉴스방송에서도 일본어 혼용을 강요하였고, ‘궁성요배(宮城遙拜)의 시간’이니 ‘심전개발(心田開發)’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토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나중엔 “일본군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싸우다가 백골이 되어 호국신사에 봉안되는 것이 효도의 길이라는 노래 ‘아들의 혈서’를 당대의 인기 가수 백년설이 매일 방송하느라고 2개월간 방송국에 통근했다.”
(114)
1930년대 조선의 중상류층은 행여 뒤처질세라 서양 냄새를 피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서양화가 곧 계급이요 교양의 척도이자 상징이었다. 1930년 11월 <매일신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경향을 지적하고 나선 게 흥미롭다.
11월 23일자에 따르면, “서양류의 가수는 성악가라 하여 숭상하고 우리 조선의 고유한 가수는 광대라 하여 천시하고 멸시함은 무슨 까닭인고? 물론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동기가 있겠으나 도대체 남의 것이라면 좋으나 그르나 귀하에 여기고 우리의 것이라면 덮어 놓고 천하게 여기는 과도기에 처한 조선의 사회적 결함과 일반 가수의 인격적 저하(低下)가 그 주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니 조선의 가수가 결코 본시부터 천한 것은 아니었다.”
(126)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이 노래의 가사에 의심을 품고 레코드사 사장 이하 관련자들을 불렀다. 경찰이 문제 삼은 건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구절이었다. 손목인의 회고에 따르면, “사장 이하 관련자들은 ‘원안풍은’을 ‘원한 품은’아니라 ‘원안풍은’이라고 극구 해명하고 사정하여 간신히 무마는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 ‘목포의 눈물’의 ‘삼백연 원안풍’은 ‘삼백 년 원한 품은’이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겨레의 분노를 노래한 것이다. ‘목포의 눈물’ SP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잘 팔려 나갔다.
(160)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에 대해 “민족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시적 표현을 왜곡시켰다”거나 “유행 창가 전반의 의식세계는 결국 식민지배에의 봉사로 귀결”되었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나라 잃은 식민지 민중에게 ‘슬픔’을 벗어나라고 주문하는 건 오늘의 관점에서 본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슬픈 노래가 나라 찾고 경제발전 이룬 뒤에도 계속되는 걸 보면, 이는 좀 더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주는 거라고 볼 수 있다.
(179)
이효석은 조선일보사가 발생한 <조선문학독본>(1938년 12월호)에 쓴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가을 낙엽을 태우는 냄새에서 ‘갓 볶음 커피 냄새가 난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커피 냄새가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한 줄 알았다. 1970년대만 해도 원두커피를 갈아서 끓어주는 커피 전문점들이 없었고, 다방은 미성년자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뭔지 알게 된 지금 생각하면 웬걸,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도 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이효석은 커피 냄새를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구태여 익숙하지도 않은 커피 냄새를 들먹인 것은 분명 ‘커피’라는 말이 주는 문화적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
(224)
1920년대 말부터 유행한 남성의 장발에 가해진 탄압은 한 사나이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가 교사 일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 계기에 장발이 관련돼 있다는 게 흥미롭다. 교사 생활 3년째 되던 1939년 가을 연구수업 시찰차 나왔던 일본이 시학(오늘날 장학사)과 교장이 술자리에서 박정희의 장발을 문제 삼자 박정희는 이에 반발, 술잔을 던지는 등 소동을 벌인 후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당시 교사들은 머리를 박박 깎게 되어 있었으나, 박정희만은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뒤에 장발을 혹독하게 탄압하게 된다.
(262-263)
위생에 대한 문화적 차이도 있었다. 일본인들의 기준에선 조선인들이 목욕을 잘 하지 않는 게 야만이었겠지만, 조선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엔 일본의 목욕문화가 야만이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은 1905년 서울 서린동 근방에 등장했지만, 여럿이 벌가벗고 목욕을 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은 문화적 저항 때문에 사람이 오질 않아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대중목욕탕에 익숙해질 때까진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왕실에서도 1919년에서야 목욕실을 두었고,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에서야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266)
쥐잡기운동, 빈대잡기운동, 기생충 박멸운동 등도 병행되었으며, 이는 193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아마도 가장 괴로운 건 빈대의 습격이 아니었을까? 이상은 1936년에 발표한 소설 <날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빈대가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내 방에서도 겨울에도 몇 마리의 빈대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내게 근심이 있었다면 오직 이 빈대를 미워하는 근심일 것이다. 나는 빈대에게 물려서 가려운 자리를 피가 나도록 긁었다.”
(281)
“해마다 화려해지는 유흥가의 축하연 덕분에 크리스마스 이브는 일 년 중 가장 퇴폐적인 밤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는 유흥업소의 크리스마스 축하연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맘먹고 놀겠다는 데야 어디 빠져나갈 길이 없겠는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유흥가는 생뚱맞게 ‘국위선양 기념회’ ‘남경 함락 축하 만찬회’ ‘황국 전승 대연회’ 현수막을 갈아 달고 축하연의 전통을 이어갔다.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으로 왜곡된 것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직전인 12월 16일이 200~400페센트씩 지급되는 연말보너스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월급쟁이들은 12월 봉급까지 더해 평상시 월급의 3~5배까지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았다. 오랜만에 두툼해진 월급쟁이의 호주머니를 털기에 크리스마스 이브 축하연만큼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다.”
(312)
권투의 인기도 그러했을진대 축구의 경우엔 더 말해 무엇하랴.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 치하에서의 축구는 카타르시스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공격을 표현함으로써 분노의 감정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이런 과정을 정화 또는 카타르시스라고 하였다. 프로이트의 카타르시스 이론은 우리는 내부에 공격적 에너지의 저장소를 항상 지니고 있다고 가정한다. 늘 발산시켜버려야 할 공격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축구를 통해 그 공격성을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한국인들의 억눌린 상태는 해방이 되었다고 일시에 해소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에겐 또 다른 종류의 억압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