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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慧蓮
7.『왕생예찬』한 권
『왕생예찬往生禮讚』의 완전한 명칭은 『왕생예찬게』이고, 간략한 명칭은『왕생예찬』·『예찬』또는 『육시예찬』이다. 이 책의 목적은 일체중생에게 극락왕생발원을 하도록 권장하는데 있고, 내용은 하루를 가지고 ‘아침·정오·일몰·초야·중야·후야’여섯 시간대로 구분하여 육시 중에 각각 찬탄문을 읊으면서 예참禮懺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는 평소행법尋常行法으로서 다섯 가지 정행가운데 별도로 예배정행을 밝혀 칭명정정업으로 들어가도록 돕고 있다.
이 책은 「전서前序」·「정찬正讚」·「후서後序」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서」와 「후서」에서는 왕생발원의 요지를 밝혔고, 「정찬」에서는 정식으로 수행하는 의식의 규칙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중에는 「전서」에서 밝힌 정토종의 ‘안심安心·기행起行·작업作業’, 본원칭명으로 쉽게 왕생함·전수와 잡수의 득실, 「정찬」가운데 대사가 직접 지은 『예찬게禮讚偈』, 그리고 「후서」의 ‘본원사십팔자석本願四十八字釋’이 가장 긴요하다.
그리고 정업행자들이 끊임없이 염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열 번 아미타불을 부르며 잠을 자기 전에 관을 하는 법을 언급하면서 크게 영험이 있다고 하였다.
8. 『반주찬』한 권
『반주찬般舟讚』의 정식 명칭은 『의관경등명반주삼매행도왕생찬依觀經等明般舟三昧行道往生讚』이다.
반주삼매는 「상행삼매常行三昧」·「불립삼매佛立三昧」라고도 불리는데, 『반주삼매경』에서 설한 일종의 정행正行으로서 7일에서 90일 동안 항상 걷되, 앉지도 멈추지도 눕지도 않는다. 이렇게 삼업에 끊임이 없으면 지극한 마음에 감응하여 부처님의 경계가 현전하게 되고, 몸과 마음에 희열로 가득하게 되므로, 「입정견제불立定見諸佛」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어떻게 반주삼매를 닦는가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관경』·『대경』·『소경』·『반주삼매경』등에 의거하여 반주삼매행도의 의미는 칭명왕생에 있다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성도문의 행자들을 칭명염불법문으로 인도하려는 것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간단한 전·후서序 및 천백이십육구에 달하는 칠언찬게七言讚偈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별한 행법의식을 규정하지 않고 단지 정토의 의정장엄에 대해 마음껏 노래하고 찬탄함으로써 행자들의 귀명하고 왕생을 원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무량한 법락法樂을 얻도록 한다. 『반주찬』은 별시행법으로서 다섯 가지 정행가운데 별도로 찬탄공양정행을 밝혀 칭명정정업으로 들어가도록 돕고 있다.
이 책은 찬게讚偈의 형식으로 정토삼경 특히 『관경』의 교리를 해석하였는데, 대체적으로 『관경』의 현의玄義·십삼정관十三定觀·구품왕생·득익분得益分·유통분의 순서대로 『관경소』와 대조할 수 있으며, 『관경』의 교의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저서이다. |
제5장 안심 安心
제1절 안심의 의미
안심安心이란 정업행자들의 마음을 지니는 형태를 말한다. 「안」은 편안히 두다安放·편안히 머물다安住는 뜻이고, 「심」은 심념心念이니, 「안심」이란 곧 마음을 한곳에 편히 머물게 하는 것이다. 중생들의 행위의 선善·악惡·사邪·정正과 결과의 고苦·락樂·승升·침沉은 마음의 인도를 받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떤 마음을 지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안심은 만행의 근원이자 행자의 지요(至要:가장 중요함)임을 알 수 있다.
안심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일체 법 가운데 선이 있고 악이 있는데, 선에 안심하고;
선법가운데 세간의 선世善1이 있고, 출세간의 선出世善2이 있는데, 출세간의 선에 안심하며;
출세간의 선에도 대승이 있고 소승이 있는데, 대승에 안심하고;
대승가운데 예토穢土3에서의 불퇴가 있고 정토에서의 불퇴가 있는데, 왕생정토불퇴에 안심하며;
왕생정토가운데 시방이 있고 서방이 있는데, 서방에 안심하고;
서방왕생의 행법가운데 제행諸行4이 있고 염불이 있는데, 염불에 안심하며;
염불중에 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하는 행이 있고, 자신의 수행력에 의지하는 행이 있는데, 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하는 행에 안심한다.
요컨대 마음은 아미타불의 구제에 머물고 한결같이 칭명하며 왕생발원을 하는 것, 다시 말해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아미타불의 정토왕생을 염원하는 것’이니, 이것이 정토종 행자들의 안심이다.
제2절 총안심
정토종에는 「총總」·「별別」두 가지 안심이 있다.
‘총안심總安心’이란 총체적으로 아미타불께 귀명하고 극락을 흠모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수행을 이끌어내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총안심의 기초위에서 행업이 갖추어 수반되는 것, 다시 말해 구하는 바(所求:극락왕생을 구함)·귀명의 대상(所歸:아미타불)·실천의 행(去行) 이 세 방면이 구비된 것이 곧 ‘별안심別安心’이다.
안심과 기행起行이 상대적일 때의 안심은 별안심을 말하는 것으로, 곧 ‘지성심至誠心·심심深心·화향발원심迴向發願心’의 삼심三心이다.
총안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리심菩提心이요, 둘째는 염흔심厭欣心이다.
1. 보리심 菩提心 보리심이란 곧 성불을 원하는 마음으로 완전한 명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며, 무상도심無上道心이라 번역한다. 이 가운데 다시 별도로 ‘보리심원菩提心願’과 ‘보리심행菩提心行’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보리심원’이란 곧 도度·단斷·학學·증證의 사홍서원四弘誓願5이고, ‘보리심행’은 바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도만행이다.
정토법문은 본래 범부를 위한 것이다. 역겁歷劫 동안 육도만행을 닦는 것은 난행도이므로 범부로서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정토왕생을 구함으로써 왕생한 뒤에 바로 보현의 덕을 닦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정토문의 보리심은 곧 ‘보리심원’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일체 중생과 함께 예토를 벗어나 함께 정토왕생을 하며, 함께 법문을 배우고 함께 불도를 이루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토문의 사홍서원이다.
단지 보리심만 가지고는 안심이 될 수도 있고 기행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관경』의 상품하생에서는 보리심을 행자가 받드는 법으로 삼았으니, 곧 기행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말하는 보리심은 가까이는 왕생을 원하고 멀리는 불과佛果를 기대하는 것이므로 안심에 속하는 것이니, 이를 ‘총안심’이라 부른다.
2. 염흔심 厭欣心 ‘염흔심’이란 예토를 싫어하여 벗어나려하고 기꺼이 정토왕생을 구하고자하는 마음이다. 이 현실세계의 수많은 허물과 허망하여 진실 되지 못함을 싫어하여 벗어나고자厭離 하고, 극락세계의 진실한 청정을 흔모欣慕함으로 인해 보리심 및 삼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염흔심은 삼심 및 보리심의 기초가 된다. 삼심에는 반드시 염흔심을 포함하고 있지만 염흔심에는 반드시 삼심을 구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삼심이 포함하는 범위는 좁고 염흔심이 포함하는 범위는 넓다. 설사 정토를 흔모하더라도 진실치 않은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 그리고 회향하지 않는 마음이 있을 수 있으므로 염흔심은 총안심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싫어함厭과 기뻐함欣이 반드시 동시에 갖춰져야 하는 것은, 마치 배를 타고 갈 때 모름지기 먼저 밧줄을 풀고 그다음 노를 저어야 하는 것과 같다. (정토왕생을) 기뻐하기는 하나 (사바세계에 대한) 싫어함이 없는 것은 마치 밧줄을 풀지 않고 헛되이 노만 젓는 것과 같고, 싫어하기는 하나 기뻐하지 않는 것은 마치 밧줄은 풀었지만 노를 젓지 않고 수수방관만하는 것과 같다. 서로 한 가지가 빠진다면 그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
염흔심은 실로 삼심의 기초이다. 마치 건물을 짓는 것처럼 삼심이 견고하려면 반드시 염흔심의 기초를 잘 다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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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심심 深心
심심이란 곧 깊이 믿는 마음이다.
믿음의 내용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근기機를 믿는 것이요, 하나는 법法을 믿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합하여 ‘기와 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이라 부른다.
⑴ 근기를 믿음 信機
즉, 자신은 죄악생사범부로서 무량겁 동안 항상 침몰하고 항상 유전하여 벗어날 기연이 없음을 깊이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능력이 없음을 믿는 것으로, 자력으로는 생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정토교 특유의 신앙으로서 나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인해, 비로소 모든 걸 내려놓고 완전히 기대어 의지하면서 아미타불의 원력을 깊이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⑵ 법을 믿음 信法
즉, 아미타불의 사십팔원이 이미 성취되어 오로지 나와 같은 죄악범부·(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기연이 없는 자들을 위해 벗어날 수 있는 강력한 증상연이 되어 주시므로, 의심과 걱정 없이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음을 깊이 믿는 것이다.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여 왕생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므로, 곧 부처님 원력의 불가사의함을 믿는 것이다.
중생들의 근기가 천차만별인 것은 마치 각자 생김새가 다르듯이 신심 역시 얕음과 깊음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기준에 의거하여 깊은 마음이라 말하는가?
선도대사의 『관경소』에서는 네 종류의 비난으로 정토교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이 ‘네 종류의 비난’을 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정토왕생의 신심이 파괴되지 않는다면 곧 심심深心을 구족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만, 이와 반대라면 심심을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있으니, 이로써 신심의 깊고 얕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첫 번째는 이해와 행이 다르고別解別行 배움과 견해가 다른異學異見 사람들로서, 곧 성도문의 수행자들이 비난하며 파괴를 하는 것을 말한다. 현세에서 보이는 염불왕생을 믿지 않을뿐더러 온갖 비난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대승의 초지이전의 삼현三賢6 및 소승의 아라한·벽지불7과 같은 성인들의 비난이다.
세 번째는 대승의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즉 초지8에서 십지9에 이르기까지의 비난이다.
네 번째는 위없는 깨달음을 원만히 성취하신 보불·화불 등의 비난이다.
다시 말해 범부로부터 시작하여 이승10의 성인, 높은 지위의 보살, 제불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구동성으로 “번뇌를 구족한 범부들은 죄업의 장애가 가득하여 단지 염불만 한다면 진실하고 청정한 보토에 왕생할 수 없다.”라고 설하더라도, 비록 이 말을 들었으나 범부가 결정코 왕생한다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왕생에 대한 신심이 더욱 견고해질 뿐이다. 이로써 이 사람은 심심을 구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비난과 파괴를 만났을 때 마음이 흔들리고 왕생하지 못할 것이라 의심한다면, 심심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세 번째·네 번째의 비난과 파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믿음을 견고히 하고 의심을 다스리기 위해 방편으로 설한 것일 뿐이다.
의심에는 법에 대한 의심과 자신에 대한 의심이 있다.
법에 대한 의심이란 곧 염불의 법을 의심하여 왕생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예컨대 ‘염불은 겨우 여섯 자밖에 안 되어 삼척동자도 모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범부로서 고묘高妙한 극락에 왕생하는 일대사를 어떻게 이처럼 쉬운 염불에 의지하여 달성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의심하는 것이고, 자신에 대한 의심이란, '비록 염불법문과 부처님의 본원을 믿고는 있지만 자신은 죄업범부로서 전혀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설사 염불을 하더라도 아마 왕생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의심과 법에 대한 의심, 이 두 가지 의심을 대치對治하기 위해 기와 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을 설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깊은 믿음을 세울 수 있는가?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람으로부터 믿음을 세우는 것이고, 하나는 행으로부터 믿음을 세우는 것이다.
⑴ 사람으로부터 믿음을 세움 就人立信
‘죄업의 장애가 있는 범부가 칭명을 하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말은 평범한 사람의 말씀이 아닌 석가모니불이라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자·대비심을 만족한 사람이 설한 것이며, 또한 석가모니 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께서 다함께 증득하시고 다함께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상, 일체 인인因人11의 언사言辭로부터 파괴되지 않으므로 자신의 신심을 확립하여 타인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 것이다.
⑵ 행으로부터 믿음을 세움 就行立信
왕생의 행에는 잡행·정행·염불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하나하나의 행을 회향하면 모두 왕생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염불일행은 정정업으로, 아미타불의 본원에서 선택한 행이다. 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하는 것이므로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반드시 왕생할 수 있으니, 실로 가장 진실한 법이여서 의심해서는 안 된다.
3. 회향발원심 迴向發願心
과거와 금생에 스스로 지었거나 수희隨喜를 한 일체 선근을 모두 진실하게 깊이 믿는 마음 가운데 회향하여 저 나라에 왕생하기를 염원하는 것을 회향발원심이라 부른다.
‘회迴’는 회전이요, ‘향向’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감이다. 본래 닦은바 모든 선근공덕에는 낱낱이 모두 과보를 감득하는 기능이 있는데, 지금 전부 회전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므로 회향이라 부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근을 가지고 왕생을 기원하는‘협선추구挾善趨求’를 회향심이라 부르고, 곧장 왕생을 발원하는 ‘직이추구直爾趨求’를 발원심이라 부른다. 오념문에서는 바로 이것을 작원作願과 회향의 두문으로 열은 것인데, 지금은 하나의 마음으로 합하여 회향발원심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전수염불을 하는 행자로서 염불 외에 따로 잡행을 닦아서 회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수염불을 하기 전에 지은 선근을 회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전수염불을 하는 이상, 조그마한 선이라도 모두 염불과 하나가 되어 염불 외에는 여타 선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지 자신이 지은 선근만을 회향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지은 선을 수희한 공덕도 회향하는 것이다.
이른바 ‘타인의 선을 수희함隨喜他善’이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선을 고의로 태만하여 짓지 않고 보시할 수 있는 재물을 일부러 애착하고 아끼느라 보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한된 조건 속에서 스스로 선근을 지을 수 없을 때 타인이 온갖 선을 닦는 것을 보고는 내심으로부터 깊은 환희심과 인정하는 마음을 내어 마치 자신이 직접 지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타인이 지은 선을 보고 수희를 한다면 곧 자신이 지은 선근과 다르지 않다.
회향에는 다시 ‘왕상往相’과 ‘환상還相’(다음 장 『오념문』에서 서술한 내용을 참조 바람)이 있는데, 자신의 왕생을 위해 닦은 선근을 회향하는 것을 ‘왕상회향’이라 부르고, 회향발원으로 정토왕생을 한 뒤에 다시 예토로 돌아와 인연 있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환상회향’이라 부른다.
요컨대 회향발원심은 간절히 왕생을 염원하여 끊임없이 물러나지 않는 마음이다.
이상 삼심과 관련해서 경문에 비록 ‘첫째·둘째·셋째’라고 설하셨지만, 각각 독립된 세 가지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귀명하고 왕생을 발원하는 한 마음을 각각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한 것일 뿐이다. 왕생을 발원하는 이 마음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음을 밝히기 위해 지성심을 설한 것이고, 왕생을 발원하는 이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않음을 설명하기 위해 심심을 설한 것이다.
어떠한 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이 반드시 진실하여 거짓이 없어야 하므로 먼저 지성심을 설한 것이고, 초심은 비록 진실하나 타인으로부터 파괴되어 동요한다면 역시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으로 결정된 심심을 설한 것이다. 진실하고 결정된 이 마음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가? 그래서 다음으로 회향발원심을 설한 것이다.
즉, 최초의 일념이 자신을 버리고 부처님께 귀명하면 안과 밖이 상응하므로 지성심이라 말하는 것이고, 진실한 이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않는다면 심심이란 명칭으로 바뀌게 되며, 진실하고 결정된 이 마음이 끊임없이 정토를 향해 나아가면 회향발원심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관경소』에서 해석하시길, ‘결정된(심심) 진실심(지성심)가운데 회향발원함(회향발원심)’이라 하셨으므로, 삼심은 단지 부처님께 귀명하고 왕생을 발원하는 한 마음일 뿐이며, 앞의 것은 뒤로 나아가고 뒤의 것은 필히 앞의 것을 포함한다.
부처님께 귀명하며 왕생을 발원하는 이 한 마음은 그 체성體性의 측면에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으므로 진실심이라 설한 것이고, 그 형태의 측면에서 결정되어 흔들리지 않으므로 심심이라 말하는 것이며, 역용力用의 측면에서 왕생을 염원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를 기한으로 삼으므로 회향발원심이라 부르는 것이다.
거짓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진실심을 설한 것이고, 의심을 다스리기 위해 심심을 설한 것이며, 회향발원을 하지 않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회향발원심을 설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삼심은 하나하나 모두 부처님과 중생의 두 방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부처님의 진실하고 결정된 마음으로 일체중생을 구제하여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있도록 죄업의 장애가 있는 중생들에게 공덕을 주기 위해 발원회향한 것이고, 범부가 부처님께 귀명하면 범부의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 되므로 지성심·심심·회향발원심을 설한 것이다.
중생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가로로 삼심을 갖춤(橫具三心)과 세로竪로 삼심을 갖춤(竪具三心)이 있다. 가로로 갖춤이란 차제(순서)를 거치지 않고 동시 단박에 삼심을 갖추는 것이고, 세로로 갖춤이란 차제에 따라서 먼저 진심을 갖추고 다음에 심심을 갖추며 그 다음에 회향발원심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또 지혜로 삼심을 갖춤(智具三心)과 행으로 삼심을 갖춤(行具三心)이 있다. 지혜로 말미암아 삼심에 관한 문구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삼심을 일으키는 것을 ‘지혜로 삼심을 갖춤’이라 말하고, 삼심의 문구를 모르고 삼심의 의미도 모르지만 한결같이 염불하는 가운데 저절로 삼심이 갖춰지는 것을 ‘행으로 삼심을 갖춤’이라 부른다.
일단 삼심이 갖춰지면 자연히 퇴전하지 않게 되는데, 부처님의 자비로 회향해주시는 까닭이요, 부처님의 본원력이 주지住持하는 까닭이요, 부처님의 광명이 섭취하는 까닭이요, 중생과 부처가 한 몸인 까닭이요, 제불이 호념을 해주시는 까닭이다. 선도대사가 말하기를, ‘광명에 닿는 자의 마음은 물러나지 않는다.’‘마음은 금강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중도에서 퇴전을 한다면 애초부터 삼심을 갖추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선도대사는 ‘나무아미타불’명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나무’라는 말은 곧 귀명이요, 또한 발원회향의 뜻이다.
‘아미타불’이란 말은 곧 그 행이다.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한다.
‘귀명歸命’은 지성심·심심이요, ‘발원회향’은 회향발원심이다. 귀명과 발원의 주체가 ‘나무’이고, 귀명과 발원의 대상이 ‘아미타불’이다. 주체와 대상이 일체一體이므로 삼심의 전체가 나무아미타불명호이며, 삼심이 곧 명호인 까닭에 경에서 ‘삼심을 갖춘 자는 반드시 저 나라에 왕생한다’고 설하신 것이다.
또한, 한결같이 칭명을 하는 사람은 저절로 삼심을 구족하게 된다. 이른바 ‘행으로부터 믿음을 세움’이란, 다른 행으로부터 믿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행으로부터 반드시 왕생한다는 믿음을 세우는 것이다.
삼심은 자리리타를 위한 대승의 마음이므로, 염불과 제행諸行을 전부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염불은 아미타불의 본원의 행인 까닭에 육자의 행체行體가 본래 진실하고 청정하여 범부들의 탐욕과 성냄으로부터 물들지 않으며,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하는 것이다.
제행은 본원의 행이 아니여서 범부들의 탐욕과 성냄으로부터 물들므로 독이 섞인 선·허망하고 거짓된 행이 되어 본래 진실하고 청정한 보토에 왕생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삼심을 갖추고 제행을 닦는다면 역시 왕생할 수 있다. 이는 삼심이 명호를 본체로 삼고 삼심이 곧 염불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삼심으로 말미암아 제행을 거두어 염불로 귀속시키므로 본래 독이 섞인 작디작은 선은 청정하고 광대한 공덕으로 바뀌어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신령한 강靈河에다 물을 부으면 오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한 방울의 물이 바다로 흘러들면 (바다와) 똑같이 깊고 넓게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제행의 왕생은 제행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삼심을 통해 염불로 귀속되어 육자 자체 내의 공덕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선도대사가 다음과 같이 해석한 것이다.
‘모든 선악범부들이 왕생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아미타불의 대원업력大願業力을 증상연으로 삼았기 때문이다.’‘이 경의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글 중에 오직 명호를 불러 왕생함을 밝히고 있다.’‘지금까지 비록 정선과 산선 두 법문의 이익을 말씀하셨으나,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데 있다.’
따라서 삼심은 왕생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이고, 명호는 실로 독을 제거하는 신비한 영약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생각하고 입으로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심심이 갖춰져서 왕생의 대사를 성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6장 기행 起行
제1절 기행의 의미
안심을 통해 삼업의 수행을 일으키는 것을 ‘기행’이라 부른다. 안심은 신앙적 의식이고, 행위는 실천적 행위이다. ‘안심·기행’의 의미는 ‘발심·수행’과 같다.
앞장에서 제시한 삼심은 안심에 해당하고, 이하 설하게 되는 정행正行·잡행雜行과 정정업正定業·조업助業은 기행에 속한다. 단지 안심 또는 기행만으로는 모두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반드시 안심과 기행이 구비되어야만 비로소 왕생의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안심과 기행은 행자의 눈과 발과 같다. 지혜의 안목과 실천의 발을 갖춰야만 청량지(淸凉池:극락)에 도달할 수 있다.
안심은 기행을 수호할 수 있고, 기행 역시 안심을 수호할 수 있다. 안심과 기행은 서로 도움을 주지만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음이 마치 구슬과 빛은 구슬을 떠나 빛이 없고 빛을 떠나 구슬이 없는 것과 같다. 다만 근기가 다름에 따라 안심과 기행에는 시간의 차별이 있을 뿐이다. 가로로 삼심을 갖춘 자는 안심과 기행을 동시에 구족하지만 세로로 삼심을 갖춘 이는 먼저 안심을 갖추고 난 뒤에 수행을 일으킨다. 제2절 정잡이행 正雜二行
기행은 크게 정행과 잡행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정’과 ‘잡’은 극락왕생이라는 목표를 두고 하는 말로서 ‘정’은 곧 ‘순수함純’·‘올곧음直’이다. 순수하게 아미타불과 극락의 행이며, 아미타불과 극락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행이 곧 정행이다. 정행에는 다섯 종류가 있어서 오종정행五種正行이라 부르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 절을 보시기 바란다.
‘잡’은 ‘순수하지 않음’·‘올곧지 않음’으로, ‘통잡通雜’과 ‘간잡間雜’두 가지 의미가 있다. 과보를 감득하는 측면에서 그 수행이 인천과 삼승1 및 시방정토에 통하므로 ‘통잡’이라 부르고, 행인行因의 입장에서 서방정토 일행一行외에 중간에 다른 행을 닦는 것을 ‘간잡’이라 부른다. 아무튼 오종정행 외의 모든 선과 만행은 전부 다 잡행이라 부른다.
정토삼경에 입각해 말한다면, 『대경』 삼배문三輩文의 ‘한결같이 오로지 무량수불을 부르는一向專念無量壽佛’ 염불이 정행이고, 그 외에 출가·발심·불상을 조성함·탑을 세움 등의 모든 선은 전부 잡행이다. 『관경』의 유통분에서 설한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니는持無量壽佛名’ 염불이 정행이고, 그 외의 정산이선定散二善은 잡행이다. 『아미타경』에서는 일일에서 칠일 동안 염불을 하는 것 외에 다른 행을 설하지 않았으므로, 『아미타경』에서 설한 것은 전부 정행만 있을뿐 잡행은 없다.
또한, ‘정잡이행正雜二行’과 ‘전잡이수專雜二修’는 대동소이하다. ‘이행二行’은 닦는 행체行體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이수二修’는 닦는 심상心相의 입장에서 말한 것으로, 상호간에 교착交錯이 되어있다. 정행에는 반드시 전수를 요구하므로, 오종정행의 하나하나에 ‘일심으로 오로지一心專’라고 설한 것이다. ‘전수’의 대상은 반드시 정행인데, 만약 수행의 대상이 잡행이라면 ‘잡수’라고 부른다.
그리고 ‘전수’와 ‘일향전수’에도 약간의 차별이 있다. ‘전수’라는 단어는 오종정행에 전부 통용되어 잡행을 가려내지만, ‘일향’이라는 단어는 오직 칭명의 정정업에만 사용할 수 있어서 조업을 걸러낸다.
잡행잡수로 왕생할 수 있느냐에 대해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일설에는 왕생할 수 없다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탐·진·치 번뇌가 있는 범부가 닦은 모든 선은 열반계와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일설에는 잡행이라고 해서 전부 왕생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삼심을 갖추지 못했다면 왕생할 수 없지만, 삼심을 갖춘다면 역시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잡행의 행체行體가 아미타불과 무관하고 안심과 기행이 서로 어긋나므로 삼심을 갖추기 어렵고, 정행의 행체는 아미타불과 일치하므로 당연히 쉽게 삼심을 구족할 수 있다. 이 설에 의거하면 잡행으로는 왕생하기가 어렵고, 정행으로는 쉽게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일설에 잡행을 하더라도 삼심을 갖추면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은, 삼심이 곧 염불심이기 때문에 잡행으로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잡행자체의 공이 아니라 그 공은 삼심으로써 잡행을 염불로 거두어들이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자력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왕의 힘에 의탁하면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표면적인 사실에 따르면 일이 그 사람으로 인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왕의 힘에 의해 해결된 것이다. 따라서 표상表相에 의하면 잡행과 염불이 모두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오직 염불만이 왕생할 수 있다.
첫 번째 설은 간단명료하고 두 번째 설은 여유가 있지만, 오직 세 번째 설만이 염불을 극성極成하고 교묘하게 다른 행들을 거두어들인다. 제3절 오종정행 五種正行
1. 독송정행 讀誦正行 정토삼경을 독송하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정토삼경 및 정토종조사들의 상승론석을 독송·강설하는 것을 듣는 것도 모두 독송정행에 속한다.
2. 관찰정행 觀察正行 극락의 의정이보依正二報의 장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의정이보’란 곧 의보와 정보이다. ‘정보正報’란 불보살의 오음신五陰身2을 말하는데 정과正果라고도 부른다. ‘의보依報’란 극락세계의 국토를 말하는데, 예컨대 보배로 된 땅·보배로 된 연못·보배로 된 나무·보배로 된 누각·궁전 등이 모두 불보살의 정보인 몸과 마음이 의지하는 경계이므로 의보라 부르기도 하고 의과依果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음으로 어떤 일을 반연하는 것을 ‘관’이라 하고, 관하는 마음이 분명함을 ‘찰’이라 한다. 관찰은 정선과 산선에 다 통한다. 예컨대 집중된 마음定心으로 십삼정관을 닦는 것과 산란한 마음으로 극락의 장엄을 사유·상상·흠모·억념하는 것은 모두 관찰정행에 속한다. 범부는 근기가 하열하여 대부분 산란한 마음으로 관을 한다.
3. 예배정행 禮拜正行 아미타불께 예배한다.
4. 칭명정행 稱名正行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한다.
5. 찬탄공양정행 讚歎供養正行 아미타불을 찬탄공양한다. ‘찬讚’은 그 공덕을 찬하는 것인데, ‘찬’만으로는 부족하여 다시 칭양을 덧붙여서‘탄歎’을 하는 것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께 올리는 것이 ‘공供’이고,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받드는 것이 ‘양養’이다.
찬탄은 구업에 국한되지만 공양은 신구의 삼업에 두루 통한다. 예컨대 향기로운 꽃과 밝은 등 등을 올리는 것은 신업의 공양이고, 입으로 ‘손에 향화를 들고 항상 공양한다’라는 글을 외우는 것은 구업의 공양이며, 마음속으로 향과 꽃을 올리는 것은 의업의 공양이다. 만약 찬탄과 공양을 두 가지로 열면 곧 육종정행이 된다. 그러나 보통은 모두 찬탄과 공양을 하나로 합쳐서 오종정행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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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절 이행과 이수의 득실 二行二修得失
정잡이행과 전잡이수의 득실은 정행과 잡행·전수와 잡수의 행체行體의 입장에서 논한 것이므로, 행자의 근기의 영리함과 둔함·행업의 부지런함과 게으름과는 무관하다.
정잡이행에는 다섯 가지 손실이 있고, 전잡이수에는 열세 가지 손실이 있다.
1. 다섯 번의 득실 五番得失
선도대사의 『관경소·산선의』의 해석에 의하면 정행에는 다섯 가지 이득이 있고, 잡행에는 다섯 가지 손실이 있어서 ‘오종득실五種得失’혹은 ‘오번상대五番相對’라고 부른다.
⑴ 친밀함과 소원함의 배대 親疏對
정행을 닦는 자는 아미타불과 아주 친밀하므로 친행親行이라 부른다.
반면에 잡행을 닦는다면 아미타불과 늘 소원하기 때문에 소행疏行이라 부른다.
⑵ 가까움과 멈의 배대 近遠對
정행을 닦는 자는 아미타불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근행近行이라 부른다.
만약 잡행을 닦는다면 아미타불과 아주 멀기 때문에 원행遠行이라 부른다.
친親과 근近·소疏와 원遠은 얼핏 보면 별다름 없어 보이지만 선도대사의 『관경소·정선의』에서는 ‘친’과‘근’의 두 연緣을 세워 차별을 보이셨다.
‘친’은 친밀하다는 뜻으로,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이 세계와 극락정토가 비록 십만억 불국토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미타불과 행자는 항상 서로 억념憶念하며 서로를 버리지 않으므로 친이라 말하는 것이다.
‘근’은 가깝다는 뜻으로, 장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미타불께서 자주 오셔서 행자를 수호함이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함께 계시며 잠시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양자의 차별이다.
⑶ 간격 있음과 간격 없음의 배대 有間無間對
‘간間’은 간격間隔·간단間斷이다. 정행을 닦는 자는 아미타불에 대한 억념이 항상 끊어짐이 없으므로 ‘간격 없음無間’이라 부른다.
반면에 잡행을 닦는 자는 아미타불에 대한 억념이 자주 끊어지므로 ‘간격 있음有間’이라 부른다.
⑷ 회향하지 않음과 회향함의 배대 不迴向迴向對
정행의 행체자체가 서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인 까닭에 설사 따로 회향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왕생의 업이 되므로 ‘회향하지 않음’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회향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잡행을 닦는 자의 안심과 기행은 서로 상응하지 않아서 만약 특별히 회향하지 않는다면 왕생의 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특별히 회향해야만 비로소 왕생의 인이 되므로 ‘회향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⑸ 순일함과 잡다함의 배대 純雜對
‘순純’은 곧 정행이요, ‘잡雜’은 곧 잡행이다. 정행은 순수하게 극락왕생의 행이므로 ‘순일함’이라 부른다. 잡행은 순수한 극락왕생의 행이 아니라 인천과 삼승에 통하고, 시방정토에도 통하는 행이므로 ‘잡다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2. 열세 가지 득실 十三得失
전수정행專修正行을 하는 사람은 열이면 열 명이 왕생하고 백이면 백 명이 왕생하게 되는데, 이로써 왕생의 이익을 결정하므로 ‘득’이라 말한다.
잡수雜修의 행체는 아미타불과 상응하지 않을 뿐더러 삼심을 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천명 중에 한 명도 왕생할 수 없으므로 ‘실’이라 말한다. 그러나 잡행잡수를 하는 사람이라 해서 일률적으로 삼심을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잡행을 하는 자에 대하여 관용한 태도를 갖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백 명 가운데 드물게나마 한 두 명은 왕생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만약 엄격한 태도를 갖고 부정적으로 말한다면‘천명 중에 왕생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도대사의 『왕생예찬』에서 비록 전수의 네 가지 득과 잡수의 열세 가지 실을 들었지만, 전잡의 배대에 의거하면 전수에도 역시 열세 가지 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잡행의 열세 가지 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니, 이를 뒤집으면 곧 정행의 열세 가지 득이 된다.
⑴ 잡다한 인연으로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 정념을 잃은 까닭이다.
잡행을 닦는 사람은 잡행의 행을 행하고 잡행의 교법을 받들며, 잡행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잡행을 하는 장소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수행·교법·사람·장소’등 네 가지 잡다한 인연이 교착되어 어지럽게 움직임으로 인해 염불의 정념이 퇴실退失하게 된다.
⑵ 부처님의 본원과 상응하지 않는 까닭이다.
잡행은 아미타불의 본원에서 서원하신 행이 아니므로 본원과 상응하지 않아 백명 중에 겨우 한 두 명만이 왕생할 수 있다. 정행은 백이면 백 명이 왕생한다. 양자는 크게 다르다.
⑶ 석존釋尊의 가르침과 어긋난 까닭이다.
『관경』에서 비록 먼저 정선定善의 제행諸行을 설하셨지만 맨 마지막에는 오직 염불만을 권장하셨으므로, 염불만이 세존의 본의本意임을 알 수 있다. 잡행은 세존의 본의가 아니므로 세존께서 권장하신 가르침과 어긋난다.
⑷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까닭이다.
『아미타경』중에 육방제불은 오직 염불왕생만을 허망하지 않다고 증성(證誠:석가세존의 말씀이 진실임을 증명함)하셨다. 그러나 잡행에는 제불의 증성이 없으시다. 따라서 이미 제불께서 증성하신 말씀을 수순하지 않는 이상, 왕생을 하는 자가 드물다.
⑸ 끊임없이 생각하는 마음이 지속되지 않은 까닭이다.
정행은 아미타불과 일체一體가 되는 행이므로, 정행을 닦는 자는 저절로 염념마다 끊임없이 이어져 마음은 극락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잡행은 아미타불과 극락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뿐더러 행자의 마음이 항상 극락을 생각하는 게 아니므로 혹 백명 중에 겨우 한 두 사람만 왕생하거나 내지는 천명가운데 한 사람도 왕생할 수 없다.
⑹ 떠올리며 생각하는데 틈새가 있는 까닭이다.
전수를 하는 사람의 마음은 정토의 경계에 머물며 (극락을) 떠올리며 생각하는데 틈새가 없다. 잡행의 행체는 극락을 떠올리며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므로 ‘실’이 된다.
다섯 번째 실과 여섯 번째 실은 동일한 것 같지만 다르다. ‘끊임없이 생각함繫念’은 곧 기꺼이 구한다는 것으로 안심에 속하고, ‘떠올려 생각함憶想’은 의업意業의 기행에 속한다.
⑺ 회향하여 왕생하고자 하는 발원이 은중殷重하고 진실하지 못한 까닭이다.
‘회원迴願’은 회향발원이요, ‘은중殷重’은 간절하고 정중함이다. 잡행은 비록 회향하여 왕생할 수 있지만 반드시 결정된 진실한 마음가운데 회향발원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잡행은 회향발원이 은중하고 진실하지가 않아 심심과 지성심이 부족하여 왕생할 수 없으므로 ‘실’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회향할 수 있는 마음의 측면이다. 전수정행의 행체는 아미타불과 친밀하여 안심·기행이 전체적으로 상응하므로 회향발원 역시 은중하고 진실하다. 그러나 잡행의 행체는 극락과 무관하고 아미타불과 소원하여 안심·기행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회향발원 역시 은중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또 하나는 회향하는 행의 측면이다. 전수정행의 행체는 아미타불과 일치하여 아미타불께서 중생들을 구제하시려는 발원이 은중하고 진실한 까닭에 행자 역시 진실한 공덕을 얻게 된다. 그러나 잡행의 행체는 아미타불과 무관하여 범부의 유위의 마음有爲心3으로 닦은 잡행은 전부 거짓된 것이어서 진실한 공덕이 아니므로 회향발원 역시 은중하고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⑻ 탐욕·성냄과 여러 가지 견해諸見의 번뇌들이 일어나 틈새가 생기는 까닭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치 더러운 진흙 속에서 자라난 연꽃이 진흙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염불은 번뇌에 물들지 않지만, 잡행은 온갖 번뇌로부터 물든다. 비록 전수을 하든 잡수를 하든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물들고 물들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득과 실은 크게 다르다.
또 하나는, ‘탐욕·성냄’은 오탁五濁가운데 번뇌탁煩惱濁에 속하므로, 곧 오둔사五鈍使4이고, ‘여러 가지 견해諸見’란 바로 견탁見濁인 오리사五利使5이다. 여러 가지 견해들은 사성제·십육행상十六行相6 등에 대한 이치적인 관찰理觀에 손상을 주고, 탐욕과 성냄은 공양과 탑을 쌓고 불상을 조성하는 등의 현실적인 선법事善에 손실은 입힌다.
만약 잡행을 닦는다면, 관법을 닦을 때 여러 가지 견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현실적인 선행을 행할 때는 탐욕과 성냄이 다투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염불은 관법과 무관하므로 여러 가지 견해가 일어나지 않고, 현실적인 선법을 행하는 게 아니므로 탐욕과 성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염불은 탐욕·성냄과 여러 가지 견해들이 함께 일어나지 않고, 오직 잡수만이 탐욕·성냄과 여러 가지 견해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염불은 ‘득’이고 잡행은 ‘실’인 것이다.
⑼ 부끄러운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이 없는 까닭이다.
‘참慚’은 자신에게 부끄러움이요, ‘괴愧’는 타인에게 부끄러움이다. ‘참’은 범어로서 ‘참마慚摩’의 약자이며, 한역으로는 잘못을 뉘우침悔過이다. ‘참회’는 범어와 한문을 합한 명칭으로, 곧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철저히 고친다는 의미이다.
잡행을 닦을 때 번뇌가 함께 일어나게 되는데, 그 속에서 일어나는 미혹은 미세하여 알기 어렵기에 과실의 소재조차 알지 못하므로 부끄러운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는 여덟 번째의 ‘실’과 관련되어 나온 것이다. 그리고 악취공惡取空7에 빠진 자는 참회하는 마음이 없다. 이 허물은 이치를 반연하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므로 행의 ‘실’에 속한다. 만약 정행을 닦는다면 근기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인해 ‘염념마다 칭명하며 항상 참회하게 된다.念念稱名常懺悔8’
⑽ 또 끊임없이 저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는 까닭이다.
‘불은佛恩’이란 곧 아미타불 본원구제의 크신 은혜, 그리고 석가여래께서 전수를 권화勸化하신 크신 은혜를 말한다. 만약 정행염불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아미타불의 본원에 순응하고 석가세존의 본회에 부합한다면, 곧 두 분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잡행을 닦는 사람은 부처님의 뜻을 모르고 불은에 어둡기 때문에 불은에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⑾ 경솔하고 교만한 마음이 생겨 비록 업행業行을 짓지만 항상 명리名利와 상응하는 까닭이다.
만약 정행을 닦는다면 자신은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죄악범부임을 믿고서 오로지 아미타불께 기대어 (생사로부터) 벗어나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경솔하고 교만만 마음이 생기지 않고 명리를 추구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잡행을 하는 사람은 행체의 ‘실’로 인해 혹 ‘나 자신은 계·정·혜 삼학을 닦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든가, ‘중생과 부처는 평등하다.’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부처님과 같이 귀하게 여기게 되는데, 그리하여 교만한 마음이 생기게 되고 명리에 물들게 되므로 ‘실’이 되는 것이다.
⑿ 인아(人我)에 스스로 뒤덮여 동행선지식을 가까이 하지하려 않는 까닭이다.
‘인아에 스스로 뒤덮이다’란, 내가 남들보다 훌륭하다는 생각으로 타인에게 교만하고, 아만我慢이 생김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을 뒤덮고 장애하게 되는 것이다. ‘동행’이란, 서로 뜻과 목표가 일치하여 함께 출리의 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선지식’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곧 외호外護·동행同行·교수敎授이다. 여기서는 교수선지식을 말하고, 위의 ‘동행’은 동행선지식을 말한다.
잡행을 닦을 때 행체의 ‘실’로 인해 저절로 오만불손해지는데, 나의 능력을 믿고서 타인을 경시하고, 전수염불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기를 싫어한다.
⒀ 잡다한 인연을 가까이 하기를 좋아하여 자신과 타인의 왕생정행往生正行을 장애하는 까닭이다.
‘요樂’는 ‘좋아함’이다. 잡행을 하는 사람은 마음의 부름에 감응召感하여 자연히 잡행을 닦기를 좋아하고, 잡행의 가르침을 듣기를 좋아하며, 잡행을 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기를 좋아하고, 잡행을 하는 처소에 가기를 좋아하게 된다. 이러한 기호로 인해 온갖 잡다한 인연에 빌붙게 되어 자신의 왕생정행을 장애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왕생정행도 장애하게 된다.
열세 가지 득실은 전체적으로 전잡의 행을 두고 하는 말로서, 하나하나의 행에 반드시 각각 열세 가지를 다 구족한 것은 아니다. 만약 자세히 분별한다면, 전수가운데 네 번째 칭명정정업에는 반드시 열세 가지 ‘득’을 구족하고, 앞의 세 가지와 뒤의 하나인 네 가지 정행에는 구족하고 빠짐이 일정하지 않다. 그리고 잡행의 ‘실’도 역시 구족하고 빠짐이 일정하지가 않아, 혹 열세 가지 실을 전부 갖춘 경우도 있고, 전부 갖추지 않은 경우도 있다.
정업행자는 반드시 전잡의 득실을 분명하게 변별辨別하여 잡행잡수를 버리고 전수전념으로 돌아와서 왕생의 대사를 성취해야 한다.
제6절 오념문 五念門
오념문은 왕생의 기행으로 천친보살의 『왕생론』으로부터 나온 말이지만, 선도대사의 『왕생예찬』에서 해석을 하였다. 『왕생론』과 『왕생예찬』에서 밝힌 오념문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나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조금 다른 면이 없지 않다. 지금은 주로 선도대사의 해석에 의거하여 설명하겠다.
오념문이란, 곧 예배·찬탄·작원·관찰·회향의 다섯 가지 행이다. ‘념’에는 안심의 의미가 있으며, ‘문’은 곧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다섯 가지 행의 하나하나에 안심을 갖춘 까닭에 왕생정토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으므로 오념문을 설한 것이다. 예컨대 ‘왕생론주’에서 설하기를, “만약 선남자·선녀인이 오념문의 행을 닦아서 성취하면 필경에는 안락국토에 태어나 저 아미타불을 친견하게 된다.”고 하셨다.
오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업예배문 身業禮拜門
한결같이 온 마음을 기울여 합장하여 공경하고 향화로써 공양하며, 저 아미타불을 예배하는 것이다. 예배를 하려면 오로지 저 부처님께만 예배하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를 기한으로 삼으며, (다른 불보살님에 대한) 예배를 섞지 않기 때문에 예배문이라 부른다.
2. 구업찬탄문 口業讚歎門
한결같이 온 마음을 기울여 저 아미타불의 신상광명身相光明과 모든 성중聖衆의 신상광명, 그리고 국토의 모든 장엄광명을 찬탄하는 것이다.
3. 의업관찰문 意業觀察門
한결같이 온 마음을 기울여 저 부처님과 모든 성중의 광명, 그리고 국토의 장엄 등을 떠올려 관찰하는 것이다.
4. 작원문 作願門
행자가 온 마음을 기울여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삼업의 사위의四威儀9로 지은 공덕을 전부 다 진실한 마음 가운데 저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5. 회향문 迴向門
회향에는 왕상往相과 환상還相 두 가지가 있다.
행자가 온 마음을 기울여 자신이 지은 선근과 타인인 일체 범부와 성인이 지은 선근을 수희하며, 전부 다 중생들과 더불어 공유하면서 회향하여 저 나라에 왕생하는 것이니, 이것이 ‘왕상회향이다.’
또한 만약 육신통10을 구족하지 못하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지 못하였다면 중생을 자유자재로 교화할 수가 없기에 자신이 정토왕생을 하고 난 뒤에 부처님의 본원력에 힘입어 속히 육신통을 얻고 무생법인을 증득하여 다시 사바예토에 돌아와 미래의 시간이 다할 때까지 중생교화를 발원하니, 이것이 ‘환상회향’이다.
『왕생론』에는 그 외에 근문近門·대회중문大會衆門·택문宅門·옥문屋門·원림유희지문園林遊戱地門의 다섯 문이 있어 ‘오공덕문’이라 부르는데, 오념문과는 인과의 관계이다. 예배 등의 오념문은 이 땅에서 수행의 인修因이고, 이를 의지하여 저 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하여 얻은 이익을 다섯 가지 공덕이라 설했기 때문에 ‘과果’가 된다.
오념문과 오종정행은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펼치고 묶음開合의 차이가 있는데, 반은 펼치고 반은 묶었을 뿐이다. 그중에 예배·찬탄·관찰 세 행은 오념문과 오정행이 피차 완전히 일치하다. 오념문에는 독송과 칭명 두 문이 빠지고, 오정행에는 작원과 회향 두 행이 없다. 만약 피차를 서로 묶는다면 반드시 삼업문의 측면에서 배속配屬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오정행 가운데 독송과 칭명 두 행은 모두 구업에 속하므로 오념문 중의 찬탄문과 묶을 수 있고, 오념문가운데 작원과 회향 두 문은 같은 의업에 속하므로 오정행 중의 관찰정행에 묶을 수 있다.
‘오념문’과 ‘오정행’의 개합開合표
제7장 작업의 행의 作業行儀
제1절 작업의 의미
‘작업’이란, 곧 염불의 정정업, 그리고 정행 가운데 조업을 닦을 때 사용하는 행의(실천의식)를 말한다.
극락왕생의 법문은 반드시 심·행·업 세 가지가 서로 도와야 한다. 다시 말해 반드시 안심·기행·작업을 갖춰야만 비로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이미 안심과 기행의 관계와 구별에 대해 설명을 했으므로, 이제 다시 심·행·업 삼자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겠다. 안심을 눈에다 비유하고 기행을 발에 비유했듯이 작업은 곧 눈과 발을 운용하는 규범과 같다.
작업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사수(四修:네 가지 닦음)과 삼종행의(三種行儀:세 가지 행의)가 있다. 제2절 사수 四修
‘사수’의 명칭은 본래 대소승의 논장1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성도문의 보살수행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만, 선도대사의 『왕생예찬』에서는 정토문의 필요에 따라 이를 인용하여 범부가 닦는 수행의 업으로 바꾸어 설명한 것이다.
사수는 오종정행에도 통하는데, 마치 삼심이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듯이 사수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하나라도 빠짐없이 구족해야 한다. 사수란 곧, 첫째는 공경수요, 둘째는 무여수요, 셋째는 무간수요, 넷째는 장시수이다.
1. 공경수 恭敬修 선도대사『왕생예찬』의 해석에 의하면 오정행과 오념문을 닦을 때 아미타불과 저 나라의 모든 성중들을 공경하며 예배하는 것이다. 공경에는 의업이 주가 되고, 예배는 신업으로 존경을 표하는 것으로서, 몸과 마음으로 함께 공경하는 것이 ‘공경수’이다.
2. 무여수 無餘修 ‘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 등의 다섯 가지 정행 외에 더 이상 다른 일체 행을 섞지 않기 때문에 ‘무여수’라 부른다.
3. 무간수 無間修 ‘간間’은 곧 간격(틈새)이다. 끊임없이 다섯 가지 정행을 닦으면서 다른 행으로 인해 틈새가 생기지 않으므로 ‘무간수’라 부른다. 또한 탐욕과 성냄의 번뇌로 인해 틈새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범부에게 탐욕과 성냄의 번뇌가 전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만약에 탐욕과 성냄이 일어난다면 곧바로 알아차려서 참회하여 항상 청정하도록 하는 것이니, 이른바 ‘범할 적마다 바로 참회하는 것隨犯隨懺’이다.
4. 장시수 長時修 이른바 ‘장시’란 반드시 오랜 세월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처음 발심하고 나서부터 끊임없이 오정행과 오념문을 전수하며 임종에 이를 때까지, 그 사이에 중단하지 않는 것이 곧 ‘장시수’이다. 그러나 사람의 발심에는 이름과 늦음이 있으므로 설령 오늘 발심하고 오늘 죽더라도 다만 그 사이에 퇴전만 하지 않는다면 역시 ‘장시수’라 할 수 있다.
이 장시수는 나머지 세 가지 수에도 통용되는 것이어서 공경수든 무여수든 무간수든 막론하고 만약 도중에 퇴전을 한다면 모두 왕생할 수 없기 때문에 앞의 세 가지 수를 성취하기 위해 ‘장시수’를 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선도대사는 세 가지 수의 끝부분에 ‘목숨이 다할 때까지를 기한으로 삼아 맹세코 중단하지 않는 것이 곧 장시수이다.’고 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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