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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목포문학상』시부문 신인상
김영진(전북 전주시)
시원始原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을 물고기가
삭아가는 암자 추녀 끝에 매달려
영원을 헤아리듯 그네를 탄다.
은빛 비늘을 물방울로 튕기며
요리조리 대양을 누빌 날쌘 몸이
놋쇠 종발鐘鉢에 갇혀 몸부림을 친다.
이따금 스치는 바람에 떨렁떨렁
맑은 소리는 시원으로 향하는데
투박한 형해形骸는 굴레를 빗겨가지 못한다.
저녁공양 목어의 간절한 울림이
쉰 목소리로 텅 텅 메아리 치고
산그늘 드리워 밤은 깊어 가는데
갇힌 물고기는 제 몸으로 공양을 한다.
풍경風景과 풍경風磬 속에서
풍경諷經으로 뱃속을 채우고
빈속을 채워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신호를 일상 보내지만
울림은 바다를 향해 가고 싶다는
은빛 비늘을 번득이며 나아가자는 신호일 뿐
암자 추녀 끝에 매달린 물고기는
영원을 가늠하듯 그네를 탄다.
『제3회 목포문학상』 단편소설부문 신인상
「쥐가 눈을 치켜뜬 이유」
이연초(광주광역시 남구)
아랫입술이 둔감하다. 발치(拔齒)라도 하려고 마취시켜놓았을 때처럼 얼얼한 이 느낌이란 제기랄, 아픈 게 더 낫겠다. 화끈화끈 쑤시거나 찌르는 듯한 통증이라면 진통제 두 세알로 한소끔 늦추기라도 할 터이고 그러면 잠시 이놈의 육신과 정신 사이에 일말의 커뮤니케이션이라도 되는 기분이 들 터인데, 이건 도통 백일도 안 된 젖먹이에게 어디가 어떻게 아픈가 묻는 꼴이다. 입술이라면 이비인후과 쪽도 뭣하겠고 둔중한 이 느낌이라면 아마 신경외과 쪽일 수도 있겠는데 혹여, 혈액순환의 장애라면 한의원에서 침을 맞는 게 더 빠를는지.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와 비슷한 적이 있었다.
비 탓이라 해두자. 금세 소나기라도 쏟아질 듯 세상이 다소 소요스럽게 느껴지는 초저녁이었다. 이른 저녁밥을 먹고 학원에 가는 작은 딸아이의 단단한 뒤통수를 5초쯤 바라보다가 나는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하나를 그윽이 입에 물었는데, 여느 날처럼 맞은 편 아파트 창에 꽃처럼 돋아나는 불빛들을 바라보고 섰던 것인데, 그 불빛 사이로 빗방울들이 소리 없이 스며들고 있었고 돌연 나는 집을 나서고 싶어졌던 것이다. 순전히 비 탓이랄 밖에. 비를 머금은 바람이 오소소 내 피부에 와 닿아 나를 저항할 수 없는 이끌림으로 불러내지만 않았던들 내가 그렇게 추리닝 차림으로 막무가내 집을 나섰겠는가. 500cc 맥주 하나로 목만 축이자 싶던 것이 그만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게 늘어난 것은 그렇다손, 겨울비답지 않게 줄기차게 내리는 비만 아니었던들 방금 돌아 나온 골목의 옆 골목 술집을 다시 찾아들어가기야 했겠는가. 혼자 술 마시는 걸 자제해온 내가, 혼자 술 마실 때는 죽으려고 작정할 때가 아니면 안된다고 스스로 굳게 다짐해온 내가 그렇게 끝까지 혼자 술을 마셨겠는가 말이다. 초저녁 산책길에 시작하여 자정이 한참 넘도록 버티며 마셨던 건 정말이지 다 비 탓이라고만 해두자. 그 날 내가 무슨 상념에 젖어 얼마나 마셔댔는지, 마침내 다른 취객들과 허튼 수작이나 벌이지 않았는지, 혹여 술집 앞 유리문에 토사물이라도 남기고 만 것은 아닌지, 그런 기억일랑 모두 묻어두자.
문제는 이튿날 눈을 떴을 때 입이 잘 벌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방안 가득 꿉꿉하게 떠도는 술 냄새가 스스로도 역겨워진 나는 눈을 뜨자마자 창가로 다가갔던 것인데, 안방 유리창에는 마침 물방울이 주루루룩 여러 마리의 지렁이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고, 목이 탄 나는 그 결로(結露)라도 핥고 싶었는지 혹은 구취를 토해내고 싶었는지 나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려보려 했던 것인데 아 악, 나는 반쯤 벌렸던 입을 간신히 닫았던 것이다. 이런, 나는 다시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가 다물었다. 입을 열고 닫기는 겨우 가능했지만 그 때마다 통증이 따랐다.
수십 개의 못이 내 전,후두엽을 마구잡이로 쑤시는 듯 했고, 무엇보다도 속이 메스꺼워서 나는 다시 침대로 기어올랐다.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과감하게 여보 물 좀 줘, 하고 누운 채로 말했다. 마침 아내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화장을 마쳤는지 탁, 하고 분갑 닫는 소리가 났다. 머리를 매만지고 나서도 아내는 앞, 뒤태까지 다 살핀 다음에야 말없이 방을 나갔는데 어쩌면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입이 벌리지 않아 나는 우물거렸을 뿐인지 몰랐다. 내 목소리가 터무니없이 작았음에 틀림없어,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내를 다시 부르고 싶진 않았다. 그때 스르르 방문이 열렸다. 마치 민달팽이라도 손바닥에 붙어 털어내는 듯 아내가 사납게 물 한 컵을 내 머리맡에 내려놓고 휑하니 방을 나갔다. 술 처먹더니 이젠 별 지랄을 다 하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아내가 출근하고 나자마자 나는 물 한잔을 더 마시려고 어기적어기적 주방으로 나왔다. 평소대로 설거지감은 싱크대에 처박혀 있었다. 이런 날엔, 남편이 고주망태에서 덜 깨어난 이런 특별한 날엔 설거지쯤 해 놓았을까 했지만 아니었다. 아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모진 여자는 아니었다. 다 내 탓이려니. 근 몇 년 만에 모든 것이 변했다. 나는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했고, 실제로 거의 다 받아들였다고 믿었다. 더러 기억이라는 것이 딸기 주스의 씨앗 앙금처럼 껄끄럽게 남아 문득문득 과거를 돌아보게 했지만 나는 재빨리 방향감각을 되찾곤 했다.
나는 흰 쌀죽 하나 쒀주지 않는 아내가 전혀 서운하지 않다, 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물을 마시려는데 아 악, 또 입이 벌리지 않았다. 이게 뭐야. 이 작은 얼굴에 턱뼈까지 비틀리고 마는 건가. 천천히 입을 벌려봤다. 우지끈, 우레 같은 이명이 따라붙었다. 풍 맞은 환자처럼 물을 턱 밑으로 질금질금 흘려가며 컵을 비우고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딱 딱. 윗니 아랫니를 부딪혀봤다. 눈에 불똥이 튀었다. 하, 손바닥을 비벼 마찰열을 냈다. 따뜻해진 두 손바닥으로 양 뺨을 감쌌다. 아무래도 턱뼈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아니, 안면신경에 이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이빨이 잘못된 것 같기도. 하고보니 잇몸부리가 죄다 후들거리며 아픈 것도 같았다.
입을 상하좌우로 움직여보려다 그만 포기했다. 입 언저리를 손으로 감싸 쥔 채 일단 자리에 눕기로 했다. 울렁거리는 속과 두통이야말로 당장 바닥에 등을 대게 만들었다. 나는 죽은 듯이 누웠다. 눈을 감았다. 평온을 잠시라도 맛보길 원했지만 침을 삼킬 때마다 고요 속에 삐걱거리는 악관절이 넌, 아직 살아있지, 하고 놀려댔다. 위장 또한 살아있음을 잊지 말라는 듯 시위를 멈추지 않는 통에 나는 몇 번인가 토사물을 더 내놓았다. 노오란 연겨자 빛깔의 위액을 게워놓고 나자 비로소 편한 잠이 다가와 주었다.
한숨자고 나자 악관절의 통증은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말썽이었다. 시원한 북어국 생각이 간절했지만 생각뿐이었다. 냉장고 속을 한번 휘 둘러본 나는 냄비에 밥 두 술을 떠 넣고 물을 부었다. 팔팔 끓는 밥물냄새가 식욕을 당기는지 오히려 욕지기를 나게 하는지 그 경계가 모호했지만 일단 나는 안경을 식탁에 내려놓고 뜨거운 밥물을 목에 넘기기 시작했다. 부옇게 흐린 눈을 연신 껌벅이며 울렁대는 위장을 달래랴 비틀린 턱을 달래랴 여간 고단한 게 아니었다. 다행히 따뜻한 기운이 조르르르 들어가자 위장도 얼굴 뺨도 스르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순간이었다. 어차피 영구적인 게 뭐 있나, 나는 다시 찾아온 위통과 안면통을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벌써 날이 저무는지 하늘에는 붉은 자줏빛 햇발이 걸려 있었다. 태양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 혼신을 다해 불타고 있었다. 문득 실내가 터무니없이 춥다는 걸 깨달았다. 내 몸은 덜덜 떨고 있었고 뺨 또한 얼얼했다. 보일러 난방을 켜고 부엌에 들어서자 어둠이 물컹하게 출렁거렸다. 어느새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긴장해야 했다. 작은 녀석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이 추레한 몰골에서 벗어나야 했다. 흠, 뭘 먹인다지? 오므라이스나 만들어봐? 음식 냄새를 떠올리자 다시 속이 울렁거려왔지만 정말이지, 작은 녀석에게만큼은 아직 괜찮은 아빠로 머물고 싶었다.
그리고는 결국, 치과엘 갔다.
그거, 치과 소관일걸? 아내는 남 이야기하듯 한 마디만 툭 던져주고 현관 밖으로 사라졌는데, 그 말투가 치과엘 가보라는 건지 마라는 건지 애매했다. 나는 치과에 가는 걸로 결정했다. 최소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고무되었다. 더구나 치과는 집 바로 앞에 있었고, 한 푼도 벌어들이지 못하는 가장이라지만 그 정도 병원 출입할 자격은 아직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작 문제는 치과의사가 다른 큰 병원, 그러니까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추천한 데에 있었다. 하악관절에 생긴 이상은 원인규명이 꽤 복잡하고 치료도 까다롭다나. 하여간 자세히 사진 찍고 정밀검사를 해봐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대학병원 대신 내가 찾은 곳은 인터넷이었는데 참으로 당연하고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에게 투자할 돈이 없었다. 대학병원까지 찾아갈 열정은 더더구나 눈곱만큼도 없었다. 흠, 더 솔직해보자, 겁이 났다고 말이다. 오만가지 잡동사니 병명 중 몇 개가 턱, 하고 달라붙을 것만 같았고, 그것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던 거라고. 내 몸은 삶의 기습적인 공격 스타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모든 걸 유예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슬그머니 인터넷을 뒤져보기 시작했는데, 악 관절 통증의 대부분이 신경성에서 유래한다는 설명을 읽은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나야말로 전형적인 그 케이스거니 믿어버렸다. 틀림없었다. 뜻밖에도 아주 많은 뇌신경이 안면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고약한 악 관절 이상이 신경성에서 온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는 순간부터 과연 나에게서 병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엔, 언제 그런 증세가 있었나, 완전히 망각하였던 것이다.
정작 악 관절 통증은 거짓말같이 잊어졌지만, 그 통증이 생기기 며칠 전의 사소한 일은 아직 잊히지 않았다. 잊히지 않는 그것을 이제 나는 잊으려 애쓴다.
그 날도 비가 흩뿌렸다. 때 아닌 겨울비가 사흘거리로 질금거리고 있었다.
- 앞으론 차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그렇게 말했다. 뭔가에 독이 오른 양, 한껏 벼르고 벼른 말이나 되는 것처럼 녀석은 그렇게 주문했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우산을 씌워주고 싶어 교문 앞에서 서성거렸던 나는 멀리서도 금방 딸아이를 알아보았다. 영민하게 튀어나온 아이의 앞이마를 발견한 순간 내 마음은 환해졌다. 그러나 녀석은 내 곁을 미끄러지듯 비껴갔다. 먼저 차에 올라탄 녀석은 그렇게 선고했다. …나오지 마세요. 안전띠를 매면서 나는 그러마,하고 웅얼거렸는데, 그 순간 뭔가가 맹렬한 속도로 내 몸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동시에 시커먼 우물이 나타났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식은땀이 전신의 모공에서 스멀스멀 솟는 듯 했다가 이내 온 몸이 가려워졌다. 뭐, 내가 과민한 게지 싶었고, 이 낡은 소형차가, 아니, 머리숱이 쑥 빠지고 반백이 되어버린 애비의 늙은 모습이 창피하겠거니 싶었다. 나는 백미러를 통해 내 몰골을 훔쳐보면서 딸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다독거리고자 했다. 헌대 그런 노력과 달리 또 하나의 내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첨벙. 뭔가가 깊은 우물 속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두레박 끈을 놓아버린 것일까. 나는 깊고 어두운 우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휩싸였다. 뭔가 뒤바뀐 거 아닌가 억울했지만, 미끄러지고 탈락된 건 분명 나였다. 그러자 나는 상당히 절박한 심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십여 분의 짧은 시간에 두 번의 접촉사고를 낼 뻔했으며 집 앞 주차장에서는 마침내 범퍼를 벽에 박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입을 앙다무는 딸애의 표정은 놀라거나 걱정스럽다기보다는 한심하다는 것이었다. 참말이지 고약한 느낌이었다. 아내가 나를 불필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보다 훨씬 더 고약한 느낌이었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노란 똥 기저귀까지 빨아주지 않았던가. 퇴근하고 돌아와 나는 그 시큼한 똥 향기도 좋다고 매달리지 않았던가. 괘씸한 놈. 내가 회사에서 밀려나와 좌충우돌 끝에 모든 걸 말아먹었다손, 녀석들을 굶긴 적 없었다. 방 두 칸짜리 낡고 작은 아파트로 옮겨 왔다손, 녀석들을 한데서 재우기를 했나, 학원을 안 보내줬나. 괘씸한 놈. 갑자기 목구멍에 대못이 걸린 듯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제 어미를 닮아가느라 두 딸년들 모두 애비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그날 밤, 그렇게 시작된 깨달음과 당혹감은 그러나 자고나니 다소 둔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의 소임을 다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낡은 소형차로 녀석들을 실어 나르며 학교와 학원과 집, 이 삼각형 구도 속에서 나는 햄스터처럼 살아가길 기대했다. 딱 3년만 더. 눈 딱 감고 3년만. 중3인 작은 딸까지 대학엘 들어가고 나면 나는 이렇게 상자에 갇힌 햄스터의 삶을 절단 내리라. 그것은 아내와 나의 계약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엘리트로 키워놓지 않으면 천상 도시빈민을 면치 못한다는 아내의 교육관에 내가 전적으로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카드 빚 독촉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마지막 남은 결혼반지를 아이의 학원비에 털어넣은 아내의 두 눈에서는 푸른빛이 돌았다. 하늘의 달이라도 찌를 듯 기세등등한 아내의 신념- “공부라도 똑바로 시켜야 제 앞가름 할 거 아냐?”- 앞에서 나는 다만 무력했던 것이다. 아니, 그나마 나에게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을 내심 다행스러워 했다면 아, 너무 비열한 애비일까. 하여간, 나는 항상 그래왔듯 집안일에도 성실하려고 애썼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내게 주어진 일만큼은 열심히 하는 데에 단련된 인간이었다. 적어도 내 몸에 이상한 현상들이 출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번엔 아랫입술이었다. 얼얼한 느낌이 입술 중앙에서 시작하다가 차츰 입술 전체로 퍼지는가 싶어졌고, 그럴 때면 아, 이거 안되겠군, 당장 병원에 쳐들어갈 심정으로 면도하고 외출준비를 할라치면 어느 참에 입술은 평상심을 찾은 듯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곤 했다. 악관절의 고통에서 벗어난 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이것도 필시 스트레스나 신경성에서 오는 겔 게지 싶었다. 최근에 무슨 사건들이 있었던가를 헤아려보았지만, 딱히 이거다 할 것이 없었다. 그날이 그날 같은 나날이었다. 일 년여의 시간이란 내가 전업주부 일에 웬만큼 길들여질 만한 시간이었고 솔직히, 이러저러한 바깥싸움에서 집안으로 후퇴한 지금의 생활이 더 나쁠 것도 없었다.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급기야 떠오른 것은 그 소리였다. 시커먼 우물 속에 그 한 마디가 둥둥 울려 퍼졌다. 나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흠, 모든 것이 거기에서 유래한 거라 말이지. 쫀쫀하기는. 회사에서 내침을 당한 이후, 파산선고에서 위장이혼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모든 충격들을 다 이겨냈다 싶었는데 그 사소한 한마디에 이처럼 흔들리다니 알 수 없었다.
아이는 단순히 ‘차’밖으로 나오지 말아달라는 얘기였겠지만 정작 나는 집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선고로 느껴졌다. 짜식, 네가 뭔데. 나는 그렇게 무시할 수도 노여워할 수도 있었다. 아이의 철부지 응석에 내가 과민 반응한 것일 뿐이었다. 아니다. 열여덟 나이가 어리다고? 나는 애써 잊으려던 사소한 기억을 다시 까발려놓기 시작한다. 일찍이 성경에는, 매에 맞으면 맷자국이 날뿐이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 했다.
혀의 공격을 당하지 않는 사람,
그 광분을 겪지 않는 사람,
혀의 멍에를 지지 않고
그 사슬에 묶이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혀의 멍에라. 갑자기 왼쪽 발목 언저리가 뻣뻣해져온다. 입술의 마비기가 몸의 하단부 발목으로 전이된 느낌이다. 섬뜩하다, 분명한 마비기. 이러다 온몸 곳곳이 정지하는 것은 아닐까…. 하, 기어이 병원부터 가보라 이거지.
천리 한의원. 매일같이 지나쳐온 건물이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글씨인양 입간판 앞에서 멈칫거려졌다. 그 '천리'가 천릿길도 한걸음부터의 천리(千里)인지 하늘의 이치를 뜻하는 천리(天理)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전자일거라 정해버렸다. 자신의 의술이 천리까지 미치기를 바란 개업의의 소망이 떠올랐거니와 무엇보다도 내겐 집 앞 한의원까지의 행보가 천릿길 여행을 떠나는 첫걸음 같기도 했던 것이다. 백주 대낮에 한의원을 찾는 일이 내겐 낯선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일 같았고, 그런 상념에 젖어들자 진짜 배낭이라도 챙겨들고 심산유곡으로 떠나버릴까, 충동이 일었다. 그러자, 두 해전 지리산으로의 돌발적인 탈주가 떠올랐다. 이혼서류를 법원에 제출하고 나서도 한참 무덤덤하게 지냈던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집을 나섰다. 시속 60km로 노고단 굽이굽이를 내달리고 있었고, 핸들을 잡은 손이 미끄덩거렸던 어느 순간 나는 돌연히 살고 싶어 하는 내 자신과 정직하게 조우했던 것이다. 다시 돌아올 바에야. 나는 얼른 마음을 추슬렀다.
천리 한의원은 2층에 있었다. 1층에는 안경점과 사진관, 빈 점포 하나가 있었고 3층은 ‘홍익 태권도장’이었다. 얼추 점심시간이 지난 두시쯤 집을 나섰다. 직장인들이나 학생들과 부딪치지 않을 거라는 나름의 계산이 적중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환자의 발길이 뜸한 것인지 한의원은 한가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의료보험카드를 돌려주면서 간호사는 안마의자를 권했다.
머리와 어깨, 등짝과 엉덩이를 차례로 주무르고 난 의자는, 좀 더 센 강도로 다시 안마를 시작하더니 마침내 탈수기 돌아가는 소리를 내면서 내 상반신을 흔들어댔다. 문득 집에 돌아가면 세탁기부터 돌려야한다는 생각이 떠올라주었다. 손으로 주물러 빨았던 두 딸들의 양말을 요즘은 그냥 세탁기에 집어 던졌고 자연 두 것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 것들. 제 손으로 양말짝 하나 빨지 못하는 것들. 그렇게 키우는 우리 부부는 또 뭔가. 끝났나 싶었더니 머리부터 어깨, 등짝 순서로 다시 더듬듯 조물거리기 시작하는 안마의자는 그 은근하기가 문득 여인네 손길을 떠올리게 했다. 이것 봐라? 사람보다 낫네. 확실히 마누라보다 나은 구석이 있다 싶어졌고 잠시 나는 이 안마의자를 집안에 들여놓으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이놈은 결코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법은 없겠다. 방금 그 시원한 마사지는 확실히 마누라보다 공손했다. 아니, 여느 안마사들보다도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기계에게서 일종의 위안을 느꼈다. 텅 빈 집안에서 나에게 살뜰한 안마를 해주는 이 검정의자야말로 나에게 온기를 주는 가족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간호사가 나를 원장실로 안내했다.
위가 안 좋군요. 입과 관련된 것은 거의가 위장하고 관계있지요. 선생님은 지금 간도 꽤 피로해 … 화기가 모두 상부로 올라와있어요. 지금 눈동자가 모두 위로 향한 상태… 상찬(上竄)이라고 아시나요, 마치 쥐(鼠)가 구멍(穴) 찾아 흡떠보듯 눈 치켜뜰 찬(竄)자를 쓰는데……
나는 한의사의 소견을 흘려듣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가스냄새가 새어나왔던 것이다. 도통 의사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의사의 자상한 설명은 나에게 전달되는 1m간격 사이에 이미 가스 속으로 휘발해버렸다. 나는 의사의 말을 따라잡을 염사가 나지 않았다. 마침내 의사와 나의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동시에 원장실에서 튕겨 나왔다.
김 간호사, 무슨 일이야?
대기실 역시 가스냄새가 심했다.
모르겠어요, 우리 병원엔 이상 없는데요, 밖에서 나는 것 같아요. 나가보고 올게요.
나는 잠시 심호흡을 조절하며 서 있었다. 최대한 들숨을 적게 들이키려는 듯 역시 입을 다물고 있던 한의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문득 자신의 임무가 생각난 듯 말했다.
일단 며칠 동안 침부터 좀 맞으셔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미색 커튼이 쳐진 침구실이 눈에 띄었다. 출입구에 놓인 신발들로 보아 그 안에는 얼추 서너 명의 환자들이 누워있을 성 싶었다. 혹, 이 가스에 취해 잠든 건 아닐 테지? 너무 조용한 침구실의 반응은 나의 상상을 터무니없이 부풀려 주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위아래 입술끼리 비벼보았는데 그 둔중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밖의 비상사태에 대한 예감 탓인지, 그 비상사태라는 것이 어쩌면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까짓 입술의 마비기야 아무 것도 아닐 거라는 기분이 들었고 급기야 나는 원장실 옆 벽면에 놓인 안마의자를 힐끗 일별하고는 의사에게 말했다.
내가 나가보고 오지요.
슬리퍼를 갈아 신으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등 너머로 의사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실 것까진 없습니다.
문득 나는, 내가 이대로 줄행랑을 치고 가버릴 것을 이 자는 염려하는 게 아닐까? 싶었고, 그런 생각이 들자 정말 아주 병원을 나가고 싶어졌다. 그때, 나갔던 간호사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네, 그게 말이죠, 관장이 웬 쥐를 잡는다고 부탄가스를 터뜨려서 그런 건데, 걱정 안하셔도 된대요.
그래도 그렇지, 무슨…
간호사 둘이 환기를 시키느라 새삼스럽게 창문을 열기 시작했고, 의사는 뭔가 미심쩍다는 듯이 이마를 찌푸렸다.
이건 너무 심한데, 정말 괜찮은 거야?
한의사는 흰 가운만 아니라면, 그러니까 진료시간만 아니라면, 더 정확히 환자인 나만 면전에 없다면, 직접 내려가 보련 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한 번 나가보지요. 난 바쁠 게 없으니까요.
나는 다시 몸을 돌렸고 의사는 더 이상 제지하지 않았다.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의사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의사의 말없음을 그런 뜻으로 읽었다. 현관문을 나서자, 가스냄새가 더욱 심했다. 태권도장이 있는 위층을 슬쩍 올려다보았지만 진원지는 아래쪽이었다. 지독한 가스냄새였다. 계단을 내려가자, 총을 든 키 큰 사내를 네댓 명의 아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아이들은 신이 난 듯 들떠있었고, 관장으로 보이는 사내는 컴퓨터 기기 앞에서 조준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총싸움 놀이중이라기엔 안개처럼 뿌연 가스냄새가 불길했다.
지금 뭐하는 거요? 이 가스냄새는 대체 뭐요?
네? 걱정 마세요. 이제 가스는 다 썼습니다.
총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보는 관장의 얼굴은 얼추 삼십대 후반은 지나 보였다. 헌데도 다시 보니 그의 표정에는 큰 몸집과 어울리지 않게 퍽이나 순진한 기색이 감돌았다. 조무래기들에게 에워싸여 총놀이를 하는 풍경 탓인지도 몰랐다. 이제 갓 훈련을 마친 사격수처럼 그의 조준자세는 꽤 안정되고 자연스러워 일견 내 눈에도 그럴싸해보였다. 조무래기들이 흠뻑 빠져들 만했다. 앞니가 조금 튀어나온 사내는 멋쩍은 듯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았고, 이미 한차례 간호사에게 해명을 한 뒤끝이라선지 기가 한풀 꺾인 듯 다소곳했다. 출입구가 도로와 면한 1층 상가들과 달리 각기 2,3층을 독차지하고 있는 천리한의원과 홍익태권도장의 입구는 건물 옆면으로 돌아가 있어서 자연히 입구에는 서너 평 남짓의 공터가 있었다. 그 공간이 관장과 조무래기들에게는 적당한 전쟁놀이터가 되고 있었다.
그 총은 또 뭐요? 이 가스 속에서 아이들과 뭐하는 거요? 그 총을 진짜 쏘고 있단 말이오?
바닥에 흩어진 하얀 비비탄 총알을 본 나는 순간적으로 아이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따져 물었다. 관장은 총부리를 손바닥으로 쓱 쓸어보였는데, 그 큼직한 손을 흔들어 보이면 진한 화약 냄새라도 물씬 풍겨 나올 것 같았다. 그의 사소한 동작에는 총에 대한 긍지가 깃들여있었다.
그럼요. 지금 이 속에 쥐가 한 마리 들어가 있거든요. 나는 기어이 이놈을 총으로 쏴 죽여야 해요.
아까의 다소곳한 표정은 사라지고 당당한 기세로 관장은 내게 컴퓨터 본체를 들어보였다. 먼지 낀 낡은 기기 속 어딘가에 생쥐 한 마리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설마, 하고 그 하드웨어를 들여다보았는데 내 눈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쥐가 빠져 나올 것 아니오? 그렇게 몰아세우면 어디 쥐가 나오기나 하겠소?
아니오, 난 기어이 쥐를 내 손으로 잡아 죽여야 해요. 그것도 이 총으로 쏴 죽여야 해요. 내가 며칠 동안 저 쥐 때문에 잠도 못자고, 알레르기가 생긴 걸 생각하면 이가 갈려요, 내 기어이 죽일 테요, 저 놈을.
관장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아, 그래서 저 부탄가스를 그 컴퓨터 속에다 쏟아 부었다는 거요? 쥐더러 빠져 나오라고?
입구 벽면에 자전거 타이어의 공기 주입기와 함께 부탄가스 통들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일일이 흔들어 보았다. 다섯 개의 캔이 모두 비어 있었다. 더 이상 가스냄새가 심해질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혹시 이 사람 싸이코 아냐? 의심스러워졌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곧장 위험에 처할 것처럼 위태해보였다. 나는 관장의 손에서 총을 빼앗고 싶어졌다. 총이 아니면 그 비비탄 총알이라도 몰수하고 싶어졌는데, 웬일인지 관장의 어깨와 나란히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총을 본 순간 달리던 생각이 뚝 멈췄다. 총이 꽤 멋지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이들의 장난감 수준 이상으로 보였다. 관장은 어쩌면 서바이벌 게임의 동호인인지도 몰랐다. 문득 나는 그 총을 한번 쏴보고 싶어졌다.
원장선생님이 기다리시는데요!
간호사가 계단 층계참에 서서 소리쳤다. 엉거주춤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던 중 나는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관장이 고개를 들고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곧 폭발할 것 같은 어떤 열기로 충만되어 있었다.
다시 한의원을 나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내 우려와는 상관없이, 마치 물로켓이라도 쏘아 올리는 축제 분위기에 젖어있던 아이들도, 진지한 표정의 관장도, 까만 컴퓨터 본체도, 부탄가스통도, 모두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사이 불길한 가스냄새조차도 사라지고 없었다. 허 참. 나는 잠시 한의원 입구에 서서 고개를 쳐들었다. 홍익태권도장에서 아이들의 기합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허 참. 나는 결국 느릿느릿 도로를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움직일 때마다 내 몸에서 쑥뜸 냄새가 새어나왔고, 담배생각이 간절해졌다. 어쩌면 담배생각이 먼저였고, 그래서 내 코트 안쪽에서 미세하게 새어나오는 쑥뜸냄새를 큼큼 맡아댄 건지도 모르겠다. 해로운데요, 당분간만이라도 끊어보시지요. 한의사 충고가 떠올랐으나 나는 맛있게 줄담배를 피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꿈속에 관장이 나타났다. 나는 항상 옅은 잠 속에서 그렇고 그런 꿈속을 헤맸고 정작 일어났을 때는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했다. 이번엔 달랐다. 나는 그의 매끈한 총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홀연 그가 몸을 획 돌리더니 총부리를 나에게 겨누었다. 1미터 장총을 나를 향해 조준하는 사내의 희번덕거리는 눈빛과 희열에 찬 미소. 나는 사색이 되어 어디론가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급히 까만 상자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어두운 상자 속을 잘 들여다보려는지 사내의 흰자위 많은 눈알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내 주둥이를 최대한으로 뾰족하게 모았다. 콩알만한 틈새로 사내의 눈알을 쪼았다. 가히 놀라운 순발력이었다. 그의 한 쪽 눈에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성난 사내가 나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자 우지끈 소리와 함께 상자에서 생쥐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유혈이 낭자한 채 녀석이 찍찍거렸다. 나도 말야, 한 때는….
기분 나쁜 꿈이었다. 더구나 생생하기까지 했다. 나는 얼얼한 입술을 문지르며 멍하니 앉았다. 쥐새끼라니, 오물과 핏물에 축축하게 젖어 등뼈마저 앙상하게 드러난 까만 쥐새끼라니. 더구나 짓밟힌 지렁이가 꿈틀대듯 저항하는 꼴이라니. 아니, 없는 부리를 만들어 일격을 가하던 그 주둥이에서 나오는 소리라니. 그 찍찍거리는 소리를 나는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해독해낸 걸까? 아하, 녀석이 바로 나였으니까? 더러운 꿈이었다. 나는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내는 간밤에 꽤 취해 들어온 기색이었는데도, 어느새 출근하고 없다. 고객관리 차원이라지만 아내는 갈수록 술이 느는 것 같다. 부지런하다 못해 맹렬하기까지 한 아내가 요즘엔 무서울 지경이다. 아내가 대견하다는 생각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다. 헌대, 내가 사람 속에서 살아가고나 있는 걸까. 나는 점점 사람들과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내나 딸아이들이 문제일리는 없겠고, 나만 사람스럽지 않는 건가, 결국 나만 사람이 아니면 되는가, 합리적인 결론이군, 하, 이러다 정말 내가 쥐새끼로나 둔갑하는 건 아닐는지.
나는 다시 콩벌레처럼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식탁엔 큰 딸, 작은 딸, 아내가 차례로 밥술을 뜨고 난 흔적이 화석처럼 아침의 시차를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어젯밤에 지어진 윤기 잃은 밥풀은 그릇에 그대로 눌러 붙어 내 남루한 삶을 반추하게 하리라. 어떤 젊은 남성 주부는, 현미, 보리, 콩, 팥, 조, 기장, 수수를 넣은 칠곡(七穀)을 짓는다 했던가. 그가 이끄는 소위 남성주부클럽은 내게 아득히 먼 세계다. 이미 머리 희끗한 세월을 살아온 내게 전업주부의 신념이나 열정일랑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렇긴 해도 나는 확실히 요즘 게을러졌다. 지난번 하악관절의 이상 때부터 흐름을 놓쳤다. 도대체 뭣 때문에 아이 운전도 못해준다는 거예요? 아내의 눈초리는 가히 나를 밥벌레 대하는 것 같았다. 큰 녀석의 등하교 운전에도 손을 떼고 말았으니 정말이지, 난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인 부리듯 도도하고 버릇없는 딸자식에 대한 반감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수능 1등급 점수를 확고부동하게 지키고 있는 딸자식이 자랑스러웠으면 자랑스러웠지 녀석을 탓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도통 내 자신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되도록 아홉시까지 침대에서 뭉그적거렸다. 모두 출타하고 없는 휑한 시간, 낡은 냉장고가 홀로 웅웅거리며 오전의 적요를 깨우는 그 시간에야 비로소 나는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 내내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기분 나쁜 꿈을 전복시키기 위해 다시 꿈꾸고자 했지만 어디 쉬운 일이 있으랴, 꿈꾸려던 꿈을 포기하고 마침내 방에서 나온 것은 정오가 지나서였다. 사실 말이지, 내가 다시 꿔보고 싶은 꿈은 그저 소박하고 하찮은 것이었다. 미끈한 총을 거머쥐고 시원스레 쏘아보는 것, 내 총탄에 박살나는 것은 그 사내여도 좋고 새앙쥐여도 좋고 시커먼 우물 속 어둠이어도 좋고, 어느 계집아이가 놓아버린 두레박 옆구리여도 좋고, 아아, 내가 그 미끈한 총을 잡고 위풍당당하게 휘둘러보는 것. 단순히 그런 꿈이었다.
나는 설거지와 청소를 미루고 한의원으로 달려갔다. 입술의 마비기는 다행히 아랫입술에만 머물고 있어 당장 확산될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왼쪽 장딴지와 발목께의 먹먹한 기운이 여전히 기분 나쁜 예감을 주었지만 다 무시하기로 했다. 자기최면이라는 걸 떠올리면서, 나는 내가 너무 내 몸 구석만 들여다보고 있는 거 아냐? 하는 반성을 해보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내가 매사에 과민하거나 불필요한 자의식에 붙들려 있다 싶어졌고, 까짓 이 한 몸뚱이에 뭐 그리 연연하누 싶어졌고, 그러자 나의 의무란 오직 3년만 버티면 된다, 그리고는 해방이다 싶어졌고, 그러자 그깟 3년쯤이야 이러구러 몸이 버텨주겠지 싶어졌고, 그러면 뭐 하러 굳이 이렇게 한의원으로 득달같이 달려가느냐 싶어졌는데, 이내 나는 그 답을 알았다. 나는 침을 맞고 부항을 뜨고 한약 한 재를 지을 거냐 말거냐를 결정하는데 관심 있는 게 아니었다. 오직 그치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과연 쥐를 잡았을까? 총을 내려놓고 애써 미소지으려하던 관장의 곤혹스런 눈빛이 기묘한 열정에 덧씌워져 흔들거리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열정은, 그 집요하고도 열기에 찬 맹목의 복수욕은 어디서 온 걸까. 생쥐 한 마리에 분기탱천한, 튀어나갈 탄총처럼 단단히 뭉친 그의 적개심이 가당치나 한 것인가?
나는 2층 천리 한의원을 건너뛰고 곧장 3층으로 들어섰다. ‘홍익’이라는 노란 글씨판의 ‘ㅎ'이 떨어져나간 유리문이 눈에 띄었고, 나는 마치 상처에 손을 대듯 조심스레 손잡이를 밀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손잡이에 걸리는 자물쇠의 찰그락 소리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완고하게 느껴졌다. 한의원부터 들러봐? 천천히 몸을 돌리는데, 투드득투두득, 낯익은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나는 문을 쾅쾅 두들겼다. 낡은 유리창들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흔들고 두들겨댈 때마다 건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았다. 문이 삐끗 열렸다.
뭐요?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관장을 비켜서며 나는 다짜고짜 도장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제, 그 쥐는 잡았소?
관장의 대답을 들을 새 없이 나는 파란 비닐 매트가 깔린 도장 바닥을 뛰듯 가로질렀다. 중앙에 검정 컴퓨터 본체가 뒤집어진 채 놓여 있었고, 그 곁에 다소곳이 놓여있는 까만 총을 나는 순식간에 덮쳤다. 이윽고, 맞은 편 벽면 가득 군데군데 균열이 간 대형거울 속에는 희열에 찬 사내 하나가 총을 거머쥔 채 서있었다. 낯익은 그 얼굴이 고개를 숙이자 투타투타투타, 하얀 총알들이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퍽! 동시에 뭔가가 맹렬한 속도로 내 가슴을 강타했다. 허걱, 숨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을 참으며 나는 방아쇠를 잡은 손을 필사적으로 움켜잡았다.
뭐야, 도대체 당신 뭐야!
내가 쥐를 잡아 주겠소.
뭐라구? 이봐요, 그 쥐는 내거요, 내가 쏴죽일 거란 말이오. 썩 비켜나지 못하겠소?
나는 방아쇠를 잡은 손아귀에 다시 힘을 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키 큰 관장의 억센 두 주먹이 부르르 떨더니 이내 개머리판을 움켜잡고 뒤흔드는 통에 나는 턱을 총 상판에 얻어맞고 나가 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관장의 어깨로 돌진했고, 내 손은 다시 총구를 붙들었다.
정말 이러기요?
갑자기 손바닥이 불붙은 듯 뜨거워졌고, 투드드득, 소리와 함께 불길이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순간, 가슴까지 뜨거워지더니 알 수 없는 희열이 몰려들어 왔고, 이내 속이 후련해지기 시작했다. 10년 먹은 체증이 내려간 듯 통쾌해진 나는 그대로 벌러덩 누웠다. 그 때였다. 어흑, 어디선가 목울음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수 십 마리 벌에 쏘인 듯 얼얼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마침내 눈을 떴다. 관장이, 거인같이 거대한 관장이 두 주먹으로 얼굴을 훔치고 있었다. 핏발 선 그의 눈동자가 상찬(上竄)되어 있었다. 웅크린 그의 몸이 점점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또한 쥐처럼 작아지고 있음을 나는 한 눈에 알아봤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3회 목포문학상』 희곡부문 신인상
김수용(경기도 군포시)
. 등장인물
학생
평론가
기자
교수
. 곳: 교수실
. 때: 현대
. 시간: 오후
. 무대: 무대는 교수실
무대 중앙에는 크고 긴 책상이 있고 그 책상에는 여러 책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으며 또 여러 가지 기괴한 조각상이 있다.
그리고 그 책상 뒷 편에는 각양 각색의 책들이 정신 없이 꽂혀 있는 긴 책장이 있다.
그리고 무대 왼쪽 끝은 이 교수실로 들어 올 수 있는 출입문이 있으며 그 반대편인 무대 오른쪽 끝은 다양한 크기의 액자에 이 교수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리고 책상 앞에는 고급스러운 긴 탁자가 있는데 그 사방에는 넓고 값비싸 보이는 고급 소파가 있다.
막이 열리면, 한 학생이 소파에 앉아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그 학생 앞의 탁자에는 난해한 그림 한 점이 놓여 있다.
조금 있자, 무대 왼쪽에 있는 출입문에서 ‘똑’ ‘똑’ 하는 노크소리가 조심히 울려 퍼진다.
그러자 학생은 그 소리와 동시에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조금 있자, 다시 ‘똑, 똑’ 하는 노크 소리가 더 조심히 울려 퍼진다.
그래도 학생은 문은 열지 않고 문만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다.
다시 ‘똑’ 하고 울리려고 할 때 학생은 재빠르게 문을 열어 재낀다.
그래서 평론가와 기자는 교수실로 넘어지면서 들어온다.
그리고는 서둘러 일어나서 학생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90도로 인사를 한다.
평론가.기자:(여전히 90도 인사한 자세에서)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도 학생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기만 한다.
그러자 한참을 90도 자세로 있던 평론가와 기자는 조심히 고개를 들어서 학생의 얼굴을 살짝 보고는 재빠르게 다시 90도 자세를 취한다.
기자:동안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지만, 정말 이정도 이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역시 천재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세계적인 예술가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그냥 시간이 20대에서 멈춰 버린 것 같네요. 자세하지는 않지만 소문에 의하면 저와 비슷한 또래라고 들었습니다만,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밖에서 만나 뵈면 제 아들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겠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90도로 숙이고 있던 평론가는 기자의 어깨를 ‘툭’ 친다.
기자:아,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제 말씀은…… (옆에 있던 평론가가 다시 어깨를 치려고 하자) 아, 제 말은 그만큼 대단한 동안이시라는 거죠.
평론가:우선, 이렇게 교수님을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워낙 교수님께서 외부 노출을 꺼리는 분이시라 저희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흔쾌히 4년하고는 6개월 그리고 7일 만에 허락해 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기자:아, 그리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데로, 카메라를 비롯한 방송장비는 일절 가져오지 않았고. 또한, 지금의 인터뷰 1시간 전에는 온몸 구석구석을 목욕 재계 했으며 그리고 방금 전에는 구석구석 양치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전에 미리 양해 드릴 것이 하나 있는데요, 제가 간이 좀 안 좋아서 구치가아주 조금 있습니다. 그러니 아주 조금의 냄새가 나더라도…….
평론가:(이어서) 아, 그 냄새는 걱정하지 마세요. 이 기자 분을 교수님 앞에 앉히지 않고, 그러니까 바로 제 옆에 앉혀서 저를 보고 제 얼굴에 대고 말을 하게 조취를 취하겠습니다. 그러니 교수님께서 구치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구치는 제가 책임지고 맡겠습니다.
학생:(조용히 웅얼거리며) 저……. 저는……. 교수님……. 교수님이……. 아닌데…….
기자:네? 지금 뭐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제가 군대에서 사격을 하다가 가는 귀를 먹게 돼서요. (평론가를 툭치며) 혹시, 알아 들었어요?
평론가:무슨 불어를 하신 것 같은데……. 맞나요? 교수님? (사이) 저, 혹시, 영어는 안될까요? (기자를 툭치며) 불어 좀 할 줄 알아요?
기자:아, 어쩌죠. 제가 할 줄 아는 말은 이 서울 말과 (갑자기) 아따. 시방 이게 뭐하는 짓거리여! 이렇게 전라도 사투리 밖에 못하는데. 부모님 두분 다 전라도 분이셔서.
학생:(좀 더 큰소리로 그리고 좀 더 또박또박) 저기……. 교수님께서는……. 잠시, 밖에 나가셨는데……
그러자 평론가와 기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든다.
기자:이보게 학생! 그럼 진작 이야기 했어야지! 내가 이 나이에 학생 앞에서 생쇼를 해야겠나!
평론가:지금 뭐 한 건가! 우릴 가지고 논 거야!
학생:아니……. 그게……. 죄송합니다……
평론가:괜히 힘만 뺐네. 그렇지 않아도 너무 긴장했는지 온몸의 힘이 다 빠져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
그리고는 기자와 평론가는 학생을 밀치고 소파에 가서 쓰러지는 앉는다.
그러자 학생은 열려 있는 방문을 조심히 닫는다.
기자:그래, 교수님은 어디를 가신다고 하고 나가셨는데?
학생:그건……. 저도……. 잘……. 그냥……. 잠깐 나갔다 오신다고…… 하시면서 손님들이 오시면…….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기자:이봐, 학생.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패기가 없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큰소리로 또박 또박 이야기 해봐.
평론가:놔두세요. 요즘 젊은 것들은 저게 문제에요. 핵가족이다 뭐다 해서 오냐 오냐 하며 온실 속의 화초로 키워나서……. (긴 한숨을 쉬며) 말을 맙시다. 또 우리 막내 녀석이 생각나서 지끈지끈 두통이 밀려오네요. (그러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다가 일어서며) 역시, 예술가의 방은 뭐가 틀려도 틀리지 않습니까? 뭔가 지저분하고 복잡해 보여도 다 의미가 있고 깊은 뜻이 있는것 같아요.
기자:(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며) 그러게 말입니다. 이방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아요. (그러다가 문득 무대 왼편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보며) 와~ 대단합니다. 정말 너무 대단해서 이 말 밖에 나오지 않네요. (평론가에게) 이 그림들을 보세요.
평론가:(뛰어와서 그림을 보며) 이러니 전 세계가 난리법석을 떠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나도 모르게 감동이 밀려오고 또 왜 갑자기 울컥하는 건지…….
기자:그러게요. 난 눈물이…….
평론가:아닙니다, 안 돼요. 이러면 우린 안 되는 겁니다. 지금부터 우리의 감정에 취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우린 세계 최고의 예술가이자, 국보급 미술가 그 무엇보다도 세계 최초로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하는 영광인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도 떠안고 있습니다.
기자:아, 감사합니다. 잠시 잊고 있던 것을 일깨워 주셔서요. 우선, 앉아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겠습니다.
그리고는 기자와 평론가는 다시 소파에 앉는다.
그런데 학생은 여전히 서 있다.
기자:이봐. 학생. 학생도 앉아.
학생:아니…… 전……. 이게……. 편한데…….
기자:내가 안 편해서 그래. 신경 쓰게 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앉아!
그러자 학생은 평론가와 마주보게 앉는다.
평론가:학생. 나도 안 편해서 그런데, 내 옆자리에 앉아 주겠나? 자네를 보고 있으면 내 막내아들이 떠올라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거든.
그러자 학생은 조심히 일어나서 평론가 바로 옆에 앉는다.
평론가:(학생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참, 자네도 앞으로 살아 갈 인생이 딱, 보이네. 장담 하건데, 절대 순탄한 삶은 아니겠어.
기자:그런데 교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학생:네……?
기자:아니, 수업은 들었을 것 아냐? 그냥 뭐, 교수님의 생김새나 특징, 취향 같은 것 있으면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 말해봐. 그분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어서 그냥 맨손으로 왔으니까.
학생:그냥 뭐……. 교수님은…….
평론가:(말을 끊고 깜짝 놀라며 탁자를 가리킨다.) 여기! 여기를 보세요!
그러자 기자와 학생은 깜짝 놀라며 평론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기자:(덜덜 떨면서 탁자위의 그림을 들고) 이런……. 이런……. 내가 이런 대단한 그림을 앞에 두고……. 이것을 못 알아보다니……
그런데 기자가 들고 있는 그림은 뭐가 뭔지 모를 난해한 그림이다.
평론가: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기자:네?
평론가:지문이요! 지문!
기자:아, 내 정신 좀 봐.
기자는 조심히 탁자위에 그림을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다시 그림을 바라본다.
기자: 이렇게 다시 봐도 난, 앵무새처럼 대단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네요.
평론가:어떻게 이 시대의 혼동과 혼란을 저렇게 잔인하게 표현을 했을까?
기자:잔인하다니요? 그것은 이 그림의 한 면만을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기 보이시죠? 저기 구석에 있는 아주 작은 빨간색 한 점이요? 저것이 바로 희망의 불씨를 뜻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잔인하다고만은 할 수 없죠.
평론가:(고개를 갸웃하며) 아, 그런가요? 저게 희망의 불씨인가요?
기자:지금 이 그림을 모독하는 겁니까?
평론가:아니, 아닙니다. (안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서 쓰며) 역시, 안경을 안 쓰고 그림을 봤더니 이것을 못보고 지나쳤네요. 내가 미술 작품들을 감상 할 때는 꼭, 안경을 쓰고 보거든요. (탁자위의 그림을 자세히 보며) 맞네요! 희망의 불씨!
학생:저건……. 희망의 불씨가 아니고……. 저건…….
기자:이봐. 학생! 학생이 뭘 안다고 어른들이 말씀 하시는데 껴드는 건가!
학생:이 그림은…….
기자:어허! 그래도!
평론가:요쯤 젊은 것들은 다 비슷비슷 한가? 자네를 보면 볼수록 겉모습과 말투가 우리 막내랑 판박이구만, 판박이야. 무엇보다도 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저 흐리멍텅한 눈동자가……. (머리를 만지며) 아, 그만해야지. 다시 두통이…….
기자:(평론가에게) 저기, 죄송한데요. 제가 한번 호기심이 생기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다른 집의 집안일을 궁금해 하고 또 물으면 안 되는 것은 잘 알고 있고 또 그게 엄청난 실례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한두 번도 아니시고 가시는 곳마다 그렇게 막내 아드님의 이야기 하시니까 너무 궁금하네요……
평론가:(헛웃음을 지으며) 아, 그게요……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내가 원래 그런 것은 잘 믿지 않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거기에 지적인 사람인데,
기자:(이어서) 그럼요! 그것은 제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죠.
평론가: 그래서 이야기 드리자면, (잠시 망설이다가) 아, 이건 비밀인데…….
기자:걱정 하지 마세요! 제가 이 바닥에서는 입 무겁다고 소문난 사람입니다!
평론가:예, 그래서 이야기 드리자면 내가 그냥 재미삼아 아주 간혹, 아주 가끔,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가는데요. 아니, 글쎄 가는 곳마다 (망설이다가) 내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 녀석이 글쎄! 패륜을 저지른다는 겁니다.
기자:네? 패륜이요? 패륜? 아, 그 패륜. 그래요, 다른 것도 아니고 패륜이면 그럴만하시네요. 아마 성인군자들도 다 그랬을 겁니다.
평론가:그렇죠? 또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 드리자면, 아주 간혹, 아주 가끔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다보니까, 내가 반 무당이 다 되었는데, 그 녀석을 보고있으면 어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고 그 무엇보다도 그 녀석이 내 친자식이 아니라는 느낌까지…….
평론가는 기자에게 흥분해서 이야기하다가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학생과 눈이 마주치자 난감한지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면서 헛기침을 한다.
평론가:자세한 것은 이 인터뷰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기자:아, 기대하겠습니다. 아니, 기다리겠습니다. (사이) 그런데, 교수님 오실 때까지 뭐하고 있죠? (문득, 탁자위의 그림을 보며) 아, 이것을 하고 있으면 되겠구나. (평론가를 보고) 워밍업 좀 하시겠어요?
평론가:어떻게요?
기자:방금 이 학생이 저 나이를 먹고도 옹알이를 해서 무슨 말인지는 자세하게 알아 듣지는 못했습니다만, 이 대단한 그림에 대해서 어떤 모욕적인 말을 한 것을 얼핏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뭐겠습니까! 이건! 미술계의 패륜아 같은!
평론가:(말을 끊고) 저기, 패륜아는 좀…….
기자: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저 무지한 학생에게 (자기 말에 취해가며) 미술에 대해서 그리고 미술과 인생에 대해서 하나하나…….
그러다가 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재채기를 해서 탁자위의 그림에 그대로 다 튄다.
평론가: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기자:(탁자 위의 그림에 대고 입으로 바람을 불며) 빨리 말라라. 빨리!
평론가:무슨 이유로? 이 위대한 작품에 침을 뱉으신 겁니까!
기자:내가 지금 뱉고 싶어서 뱉었습니까? 나도 모르게 기침이 나와서…….
평론가:조심 좀 하셨어야죠! 우린 이제 망했습니다.
기자:아, 이를 어째……. 이를…….
평론가:큰일 났습니다. 정말 큰일이 났어요! 어제 꿈자리가 사납더니 이런 일이…….
학생:괜찮은데…….
평론가: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 학생 가만 보니, 아주 기초도 안 되어 있구먼! 이 위대한 작품에 그렇지 않아도 간이 안 좋아서 구치와 악취로 가득한 그 침이 지금 이 시간에도 그림을 썩히고 있는데 그게 괜찮아?
기자:저기, 평론가님. 다 맞는 말씀이시지만 듣기가 좀 거북합니다.
평론가:아, 강 기자님. 죄송합니다. 이 학생을 보면 자꾸 내 막내아들에게 감정 이입이 돼서 나도 모르게……. 그만…….
학생:아, 기자분과……. 평론가 셨구나……
평론가:그래, 학생이 딱, 봐도 기자와 평론가의 품위와 기품이 물씬 풍기지?
기자:두말하면 잔소리죠. 오늘 점심때만 해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제가 순두부를 먹으려고 한 식당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바로 물을 갖다 주더라고요.
평론가:물을요……?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기자:예, 당연하죠. 그러나 거긴 물은 셀프라고 그 가게 간판 크기만큼이나 크게 적어 붙여 놓은 가게라서 그게 당연한 것이 안 되죠. 거기에 밑반찬까지 정성껏 담아서 내 탁자에 올려놓는데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이 더 필요 하겠습니까? 거긴에선 밑반찬이 부폐식이라 각자 필요한 만큼만 가져 가게 되어있는 가게인데요.
평론가:그래서요……?
기자:그래서라뇨? 답답하십니다. ‘척’하면 ‘착’하고 알아 들으셔야죠. 왜 그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겠습니다? 다 기자의 품위와 기품이 느껴져서 그랬겠죠.
평론가:당연히 기자 수첩이나 카메라 같은 것을 가지고 식사하러 가시진 않으셨겠죠?
기자:그런 것은 다 차에 있었죠. 신입 때나 ‘나 기자다!’라고 자랑하려고 그랬지만, 지금 짬밥에…….
평론가:아, 그럼요! 강 기자님께선 홀랑 벗고 목욕탕을 활보하고 다니셔도 기자 특유의 품위와 기품이 느껴지는 것은 저번에 사우나 같이 갔을 때 저도 느꼈습니다.
학생:저……. 기자님……. 그때……. 식사하러 가신……. 시간이……. 언제 쯤이세요……?
기자:그때가 언제더라? 마감 전 이었으니까, 한 오후 4시쯤 되었을 거야.
학생:그러면……. 그 식당에 손님이……. 거의 없었겠네요……
기자:그랬지. 혼자 오신 할아버지 한 분만 계셨지. 그 할아버지께서는 그 가게 순두부가 너무 연한지 틀니를 빼고 잡수셨었어.
학생:그래서……. 물과……. 밑반찬을 갖다 준거네요……
기자:그게 무슨 소리야?
학생:손님이 없는……. 시간이니까……. 서비스로……. 저도……. 가끔 그런 시간에 가면 언제나…….
기자:뭐라고? 아니, 이런 뭣도 모르는 학생이 뭘 안다고 입을 나불거려! 내가 한때는!
평론가:(말을 끊고) 됐습니다. 이런 어수룩하고 숙맥인 학생한테 이야기 해봐야 뭐하겠습니까? 강 기자님 입만 아프시죠.
기자:그러게요. 저 학생 때문에 열 좀 뻗쳤더니 정말 입이 아프긴 하네요.
평론가:그런데, 강 기자님. 저도 이 얼굴에 평. 론. 가. 라고 적혀 있는지 어딜 가든 특별대우를 받기는 합니다.
기자:그러시겠죠. 제가 평론가님을 처음 뵈었을 때 얼굴을 뵙고 단번에 평론가님 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또, 성함이 ‘평’씨를 쓰시는 줄 알았어요. (평론가의 얼굴 한 곳을 가리키며) 저 쪽에 ‘평’자가 보여서요.
평론가:참, 강 기자님은 같은 말이라도 사람 기분 좋게 하시는 뭔가가 있습니다. 아무튼, 제가 집 앞에 있는 작은 호프집에 가서 혼자 마시고는 하는데 거기에서는 단 한 번도 안주를 시켜서 먹은 적이 없습니다.
기자:아, 그럼 그냥 생맥주만 드시고 오십니까?
평론가:아뇨. 당연히 안주랑 같이 먹죠.
기자:네? 그런데 방금 안주를 단 한 번도 시킨 적이 없으시다고 하셨잖습니까?
평론가:아, 저는 그 가게의 강냉이 하나면 충분하니까요. 그 호프집의 강냉이는 유달리 사각 사각하며 달콤하고 맛있거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가게는 내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호프집에 들어와 앉기 무섭게 그것을 내옵니다. 뭘요? 바로 강냉이를요. 그때부터 나에 대한 특별대우는 시작됩니다. 정말 내 얼굴에 평론가라고 쓰여 있는데 나만 모르는 건지, 아무튼, 난 언제나 500하나만 시켜 놓고 그것을 천천히 마시며 강냉이를 먹는데 서빙 하는 직원은 언제나 내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면서 뭐 더 시키겠습니까? 뭐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하면서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죠. 그때면 난 언제나 교양 있고 품위 있는 목소리로 “강냉이 좀 더 주세요.” 라고 말을 하죠. 그러면 강냉이를 어떻게 주는지 아십니까? 그거 먹고 죽으라는 듯이 강냉이를 담는 그릇에 넘치도록 주는데 정말 먹다먹다 지쳐서 집에 갈 때는 늘 한주먹씩 손에 쥐고 갈 정도죠.
학생:그건……. 평론가님께서……. 안주는 안 시키시고……. 공짜인 강냉이에 맥주만 드시니까……. 압박하느라고 그러는 건데……. 그러다가……. 포기하고……. 그 강냉이 먹고 죽으라고……. 그렇게……. 많이 준 것 같은데…….
평론가:이 학생이 정말! 말이면 다 인줄 알아! 내가 이런 말까지 안하려고 했는데 내가 소싯적에는!
기자:(말을 끊고) 됐습니다, 됐어요. 우리가 이런 학생에게 더 말해봐야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힘만 빠지지.
평론가:정말 힘이 빠지기는 합니다.
기자:그러게요. 강 기자님께서 또 그렇게 말하시니까, 저도 힘이 빠지네요. 그런데 교수님은 언제 오시려나?
정적.
학생:(조심히) 저……. 그런데……. 이 그림이……. 어디가……. 좋으시다는 거예요……?
기자:뭐라고?
학생:(탁자위의 그림을 가리키며) 이 그림이……. 어디가……. 어떻게……. 좋으시다는 건지……. 알고 싶어서요…… 저는 잘 모르겠거든요……
평론가:(기자에게) 그래요, 우리 직업이 뭡니까? 이런 학생에게는 백마디 말보다 아니, 그 말로 반복해서 말해줘야 겨우 알아 듣더라고요. 우리 막내아들 녀석을 보니. (탁자위의 그림을 보며) 이 그림은……. (점점 감동 어린 표정으로 바뀌면서) 이 그림은……. (울컥하며) 차마, 말을 잇지 못 하겠네요……
기자:아, 그럼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탁자위의 그림을 보자, 점점 감동 어린 표정으로 바뀌면서) 대단 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저는 다시 앵무새처럼 이 말 밖에 할 수 없게 되네요.
학생:저는……. 아직 학생이고……. 그리고……. 그래서…….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이 그림이……. 어디가……. 어떻게……. 평론가님과……. 기자님을……. 말을 잇지 못하게도 하고……. 또 앵무새가 되게…….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래도 기자와 평론가는 여전히 그 그림에 빠져 있어서 학생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하다.
그러자 학생은 탁자위의 그림을 두 손으로 번쩍 든다.
기자:지금……. 지금 뭐하는 건가! 그 더러운 손으로 감히!
평론가:빨리 내려놓지 못해! 이 위대한 그림에는 아직 강 기자님의 더러운 침이……. 아니, 타액이 마르지 않은 상태일수 있다고!
학생:알았어요…… 내려놓을 테니……. 이 그림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해주세요……
그리고 학생은 그 그림을 탁자 위에 던지듯 놓아서 기자와 평론가를 깜짝 놀라게 한다.
기자:이 학생이 보기와는 다르게 성깔이 있네.
평론가:이것 조차도 똑같군요. (머리를 만지며) 우리 막내 녀석도 욱하는 성질 때문에 내가……. 말을 맙시다.
학생:빨리요……
기자:알았어. 이 학생이 보자보자 하니까, 어디서 재촉이야. 어쨌든, 이 그림을 한번 잘 보게. 잠깐! 절대 만지지는 말고 보기만 해야 돼. (사이) 그래, 학생은 이 그림을 보니까 무슨 생각이 드나?
학생:뭐……. 혼란스럽다……
기자:그렇지. 그게 이 그림에 포인트지. 혼란과 혼동. 하지만, 이 그림은 거기에만 멈춰있는 게 아니지. 저기 위에 파란색이 보이나?
학생:파란색이요……?
기자:저기 왼쪽 위에 파란색의 작은 점이 찍혀 있잖아.
학생:어? 저건 남색인데……
기자:이 학생이 진짜! 파란색이든 남색이든! 저건, 혼란과 혼동의 무질서 속에서도 희망을 표현 한거야. 이것을 다시 말하자면 원초적인 사랑의 회기만이 이 혼란과 혼동의 세계 속에서 유일한 희망이다! 라는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
학생:(고개를 갸웃하며) 그런..가요……?
평론가:그리고 저기 중앙에 있는 몇 개의 분홍색은 뭘 뜻하는 것 같나?
학생:잘 모르겠는데요……
평론가: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어? (갑자기 흥분해서) 넌! 늘! 매사! 그 모양 그 꼴로 도대체!... 아, 미안하네. 또 우리 막내 녀석과 오버랩이 돼서. 내가 어디 까지 이야기했지?
학생:분홍색이요……
평론가:그래, 분홍색. 그러니까 저 분홍색은 (울컥하며) 또 울컥하는 군. (사이) 이 혼란과 혼동에 빠진 전 인류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거지. 쉽게 말해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의 작은 새 생명처럼 한없이 맑고 순수했던 영혼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는 거야.
학생:아……. 저 분홍색이 그런 뜻이었구나……
기자:(갑자기 흥분해서) 그것만이 아니죠! 평론가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실 줄 알고 기다렸는데 하시질 않네요.
평론가:(기분이 상해서) 뭘요?
기자:(그림을 가리키며) 여기, 여기를 보십시오. 그냥 아무렇게나 대충 정신없게 여러 색들을 찍어 놓은 것 같아도 이 그림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봐 보세요. 정확하게 위, 아래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이것이 무엇을 뜻 하겠습니까? 이건 바로 우리가 지금 처한 가슴 아픈 남, 북의 분단의 문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학생:네? 아……. 저게……. 남, 북의 분단 문제를 뜻하는 거였구나……
평론가:(흥분해서) 아니, 강 기자님! 이 중요한 것을 속 빼고 지금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면 어떡합니까? 내일 하시게요?
기자:(기분상해서) 뭘요?
평론가:(그림을 가리키며) 여기, 여기 보이십니까! 이 그림의 핵심은 바로 리듬입니다! 리듬!
기자:리듬이라뇨?
평론가:아니, 어떻게 이것을 못 보셨을까? 여기 보세요! 빨. 노. 초. 그리고 파. 검. 보. 초. 또 여긴 검. 빨. 파. 그리고 노. 주. 남. 파. 이렇게 3. 4 리듬으로 시의 음률처럼 리듬을 띄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이 리듬이 뭐겠습니까? 바로 지금 현재의 이념 갈등과 세대 갈등에서 벗어나 이렇게 리듬을 타고 자연스럽게 흘러가자는 것이 이 그림의 가장 큰 핵심인데 언제이야기 하시려고 아껴두는 겁니까?
기자:그럼, 이것은 보이십니까!
평론가:아니 이걸 보셔야죠!
학생:이제, 그만!
기자와 평론가는 학생의 큰 소리에 깜짝 놀란다.
기자:(학생에게) 이 학생이 정말……. 간 떨어질 뻔 했잖아! 그리고 학생!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시비 거는 건가!
평론가:지금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기자:제가 뭘요? 저는 분명히 학생이라고 말했습니다. 평론가님께서는 학생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평론가:그렇죠. (학생에게) 그런데 이 학생이 어디다 대고 큰소리야! 그리고, 계속 그렇게 뭣도 모르면서 말 만들어서 지껄일 거야!
기자:이상하게 제 귀에는 저한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평론가:이상하네요. 제 입은 분명히 저 학생 귀 쪽으로 말하고 있는데 왜 강 기자님께서 귀에 담아 들으시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기자:뭐라고요!
평론가:뭘요!
학생:이제, 그만!
기자와 평론가는 학생의 큰 소리에 다시 깜짝 놀란다.
기자:아, 진짜! 이 학생이 소리 지르는 것에 재미 붙였나!
평론가:학생! 그만하자고! 참는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학생:죄송합니다…… 두 분께서 싸우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기자:(멋쩍어서) 싸우긴 누가 싸웠다고 그러나?
평론가:(멋쩍어서) 이런 것을 토론이라고 하는 거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늘 이렇게 토론을 하지.
학생:아……. 난……. 그것도 모르고…… 그런데, 이 그림의 가격은 얼마나 될까요……?
기자:아, 가격이라……. 이것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있지. 사실, 이 그림은 가격 자체를 논하기는 힘든 그림인데…….
평론가:이젠 내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가격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기자:아니, 지금 한창 말하려고 하는데 왜 말을 끊으시는 겁니까?
평론가:뜸들이시기에 몰라서 그러시는 줄 알았습니다.
기자:제가 지금 밥 짓고 있습니까? 뜸들이게? 아무튼, 이 그림은 지금까지 미술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붓 터치와…….
평론가:(이어서) 혁명적인 색의 배치 그리고…….
기자:(이어서)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강한 추구와 열망이 보이며 또…….
평론가:(이어서) 또! 완벽한 색을 재창조 했으며 그래서…….
기자:(이어서) 그래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
평론가가 자기 차레가 되서 말하려고 할 때 교수실 문이 ‘철컥’ 하고 열리면서 작고 초라한 늙은 교수가 지팡이를 짓고 힘겹게 들어온다.
기자. 평론가:염감님은 뉘신지……?
학생:(벌떡 일어나며) 교수님……
기자. 평론가:(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교수님?
교수는 힘겹게 지팡이를 짓고 걸어와서 식탁 위에 있는 그림을 보자마자 흥분을 한다.
교수:(학생에게) 이 그림은 뭔가? 내가 몇 번을 말했나! 이렇게 기본 기초도 무시하고 뭐가 뭔지 모르게 난해하게 그려놓고 거창한 의미만 붙인... 이런 쓰레기 같은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교수는 그러다가 넋이 나간 평론가와 기자를 바라본다.
교수:아,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 학생이 형편없이 그림을 그려 와서 제가 잠시 이성을 잃었습니다. 혹시, 두 분이 오늘 약속되어 있는 그 기자분과 평론가님 이십니까?
그래도 기자와 평론가는 넋이 나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학생이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기자와 평론가는 동시에 그 학생의 입을 서둘러 막는다.
- 막 -
『제3회 목포문학상』 수필부문 신인상
박시윤(대구광역시 남구)
땅 끝에 와 있다. 물결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바다 앞에 아이를 안고 섰다. 바알갛게 부서져 내리는 노을이 아이와 나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다. 해는 수평선 끝에서야 비로소 마지막 한계를 불살라 놓고 유유히 사라진다. 묽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멀리 보이는 건물과 산들이 엷은 실루엣을 드러내고, 틈틈이 비워진 공간마다 어둠을 채워나간다. 해넘이가 끝난 사방천지는 어둡고 싸늘하다. 끝을 본 전쟁터의 뒷날처럼 숨죽인 채, 어떤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자연의 섭리 속에 파도소리만이 가슴으로 자작이 흘러든다. 모래밭에 다다라서야 조각조각 깨어져 생을 마감하는 파도의 눈물은 가슴으로 쓰디쓴 눈물을 삼켜보지 않은 이는 알지 못하리라.
아이를 품에 꼬옥 안고 바람을 맞는다. 뜻하지 않게 내 몸의 마지막이 된 아이다. 한가위를 보내고도 빛을 쉬이 누그러뜨리지 못하는 달 아래 한참이나 서성인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하지만 아이도, 나도 이 서성임을 끝낼 생각은 없다. 일 년 전, 작은아이를 출산하고 산 정상을 정복한 것처럼 기뻤다. 세상 어떤 행복에도 견주지 못할 만큼 벅찬 행복이었다. 아이를 보며 간간이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몸의 일부를 만지고 갔는지도 모를 만큼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몸살처럼 내 몸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병病이 자리 잡은 몸은 차가웠다. 도려낸 살점의 몇 곱절을 항생제로 채워야 했다. 수술 전날은 뜬눈으로 새웠다. 어쩌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오늘이 인생의 끝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수없는 생각들을 지면 위에 흩어 놓아야만 했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부모님께, 형제자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끝으로 만약에 수술이 잘못되어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다 벗은 몸 위로 차가운 모포 한 장이 덮였다. 누군가의 노련한 손놀림에 의해 자유롭던 사지가 묶였다. 몸을 에워싼 사람들이 족히 열은 넘은 것 같았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체취와 얕은 숨소리마저도 포말처럼 낱낱이 일어나 말초신경을 두드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스크린에 가려져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나의 몸 일부를 도려낼 집도 의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마 위에 커다란 라이트가 강렬하게 켜졌다. 순간 눈을 감았다. 망막을 찌르는 빛의 자극에 혼란이 일었다. 몽환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방금 문 밖에서 배웅해 주던 남편과 돌배기 아들의 기억은 아득히 먼 곳으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어디론가 이끌려가면서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요란한 빛들이 질서정연하게 내려앉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떴다. 바다였다. 정제되지 않고 떨어지는 태양은 비수처럼 몸 곳곳에 들어와 박혔다. 뜨거운 태양 아래 모래알들은 쉼 없는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쏴아- 쓰으-. 나는 여태껏 바다에 오면 모래성을 쌓거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흔한 낙서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토닥토닥 조심스레 다독이며 주인 없는 무덤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홀로 서 있는 바다는 너무도 평온했다. 바다를 앞에 두고서도 쉽게 잊지 못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왜 이토록 집착을 하며 더듬고 있는 것인지, 두고 온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손이 저렸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바늘 같은 차가운 통증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정신이 혼미했지만 본능처럼 감지되는 또렷한 기억들은 생의 마지막까지도 쉬이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살다 떠난 작은 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타 들어가는 살점의 냄새며 삶의 무게만큼 고단하게 했던 병病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처럼 의사는 뜨겁게 손끝으로 병을 도려내고 있었다. ‘톡’ 무언가가 분리되는 느낌이 너무도 또렷이 기억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나는 살아 있었다. 살고자 목숨을 구걸한 대가로 다시는 잉태를 할 수 없는 형틀을 떠안아야 했다. 여자임에도 여자일 수 없는 나의 섬은 구실을 잃었다. 눈물은 쉼 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끝을 몰랐다. 도려낸 상처는 아물면 그만이라 해도 끝을 경험한 마음은 쉬이 아물지 못할 것이다.
몸이 회복될 무렵 남편이 가족여행을 권했다. 그리고는 이 땅이 끝나는 곳 남해로 나를 데려왔다.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허름한 민박집 마당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끝이 없었다.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구분조차 어렵게 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들의 속삭임이 밀려왔다 밀려 나간다. 과연 바다의 가슴에도, 바다의 속삭임에도 끝이 있는 것일까. 이미 끝나버린 내 몸의 섬 하나가 문득 그리워졌다.
남편의 여린 낚싯대 끝에 제법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올라왔다. 바람이 거센 방파제에 하룻밤을 꼬박 기댄 남편이었다. 몸이 약한 나를 위해 싱싱한 옥돔 한 마리 건져 올려 약으로 쓰겠다며 밤이 새도록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인 사람인가. 허탕만 치더니 밤의 끝에서 맛보는 짜릿한 손맛이란다. 한 자에 가까운 물고기가 뜰채에 담겨 오면서도 끝까지 제 힘을 놓지 않고 몸부림을 친다. 방파제 끝에서 잰걸음으로 오는 남편의 손에 제법 크게 요동을 치는 물고기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새벽이 오려는지 어렴풋이 남편의 웃음이 보였다.
제법 날카롭고 예리한 지느러미며 붉은 아가미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도 맑은 눈에 얼어붙은 나는 아무런 기쁨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뻐끔거리는 아가미가 내 눈 끝에서, 심장 끝에서 힘차게 쿵쾅이고 있었다. 감정의 혼란을 일으키듯 내 몸은 경련하며 떨고 있었다. “그냥 놓아주지 그래요.” 물고기를 바다에 방생하고 남편이 살며시 웃었다. 수술대 위에서 어렴풋이 떠올랐던 나의 한자락 공포처럼 물고기도 순간의 끝을 보았던 걸까.
늘 위태로운 모습으로 벼랑 끝에 서 있던 나였다. 그 끝이 두려워 매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도 어쩌면 그 끝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환자실 간호사로 근무하며 얼마나 많은 환자들의 끝을 보아왔던 나였는가. 끝이 날 무렵이면 긴 호흡을 유도하며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열어주려 얼마나 노력했었던가. 그러면서도 정작 나 자신에게는 얼마나 냉정하게 외쳐댔던가. 죽음은 단순히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의식일 뿐이라고.
나는 늘 끝을 보고 싶어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습관처럼 먼저 끝부터 떠올렸다. 일을 할 때도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끝을 보고서야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은 쉽게 포기하거나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끝이 두려워 여러 날을 하얗게 지새우거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술을 마시기도 했다. 나는 이토록 끝을 두려워하면서도 끝을 향해 집착하며 달렸다.
밤의 끝에 새벽이 시작되고 모래밭에 다다른 파도는 다시 일어나 밀려온다. 수평선 끝으로 어제 진 해가 떠오른다. 저마다의 사연들이 내려앉은 풀끝에 이슬이 맺혀 있다. 이슬은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며 바닥으로 떨어져 몸을 숨긴다. 시작과 끝은 함께 한다고 했던가. 끝은 저마다의 시작과 의미를 담고 고귀하게 지어지는 매듭이었으며 새로운 것으로의 시작이었다.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어둡고 차갑던 바다의 물결 위로 은빛 햇살이 바스락히 내려앉고 있다. 잠들었던 아이가 깨어 반짝이는 눈 속으로 가득히 햇살을 주워 담고 있다. 오랜 산고의 끝에 경이로운 출산이 시작되었고, 탯줄의 끝에 잉태되어 있던 질기고도 질긴 생명의 결정체 아니던가. 산고의 끝과 아이의 첫울음과 동시에 나는 어머니로서 질곡의 삶을 열었던 것처럼 시작과 끝은 늘 함께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끝을 가지고 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한계에 다다랐을 때 끝을 보고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길을 돌고 돌아가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끝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다면 궁상맞은 끝은 시작도 없을 것이다. 나는 여태껏 너무나 많은 끝을 보아왔으며, 스스로 또 얼마나 많은 끝을 만들어 왔는지 모른다. 잘된 것이든 못된 것이든 끝은 저마다의 시작과 흐름의 열정을 담고 고귀하게 매듭을 지어 간다는 것을 서른넷의 끝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수평선 끝에서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구실을 잃고 버려진 작은 섬에 다시 고귀한 잉태를 꿈꿔 본다. 무인도에도 꽃은 핀다는 말을 믿고 싶다. 짠 바닷바람과 갈매기가 날라다 준 뭍의 냄새를 맡으며 나만의 색깔로 꽃을 피우고 싶다. 끝은 끝을 맺는 순간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한다는 것을 이제야 본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숱하게 맺은 끝과 더불어 숱하게 많은 시작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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