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제게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를 아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초한지의 항우와 한신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초패왕 항우는 70번의 전쟁을 연전연승했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한신에게 단 한 번 패하게 됩니다. 가까스로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애첩 우희마저 잃은 항우는 강동에서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자는 측근들의 말을 마다한 채 자결하고 맙니다. 평생 승리만을 이뤄왔던 그를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게 될지 걱정을 이기지 못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한편 한신은 어려서부터 남루하게 살았고 불량배들의 사타구니 밑을 기어가는 수모를 겪었을지언정 자신 안에 품고 있던 원대한 꿈을 위해 행동했고 결국 한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존감은 그 기준이 남이 아닌 자신 안에 존재합니다. 흔히들 자존심은 버리고 자존감은 높이라고 말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실 자존심도 자존감도 아닌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언제 건강해질까요?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초음파상으로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습니다. 정밀검진을 받아보라는 원장선생님 말씀에 짧은 순간이지만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내 안에 있던 자존심과 자존감이 모두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검사 결과 다행히 걱정할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일을 겪으면서 당연하게 지내는 일상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고 감사한 일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저는 선교학 박사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강의 첫날 들은 내용의 80% 이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같은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그 분들이 말하는 내용과 제가 생각했던 내용들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 속의 선교’에 대해 저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들이 말하는 선교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의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보내심의 전제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복이 그의 본토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가 가는 곳마다 그와 함께 흐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다른 인물로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 노예로 팔려간 것이었지만 성경은 그를 애굽으로 보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형통함이 뒤따르며 큰 신임을 얻었지만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고 주인에게도 신의를 지키기 위해 했던 행동 때문에 오히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감옥으로 보냄을 받은 것이었고 결국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훗날 요셉은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이 아닌 역사 속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어떠할까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건강문제, 재정문제, 혹은 말도 안 되는 문제들이 선교사의 주변을 옭아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그들은 결국 이겨냅니다. 선교사들의 삶을 쭉 따라가다 보면 결국 문화와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어도 외모도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도 모두 다른 상대에게 단지 예수님만 전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꿔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선교는 먼 나라로 가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선교는 거리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할 때는 넘어야 할 경계가 분명 있는데 그 경계선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가는 것이 이미 선교입니다.
그렇다면 선교 현장에서 겪는 난감한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 전할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동시에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어쩌면 이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연약함을 아시고 취하신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면 방종이 뒤따를 것이 당연하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면 장차 올 구원을 갈망하기만 하다 지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심성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를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정리하자면 우리 삶의 모든 곳이 선교 현장입니다. 그 날이 그 날 같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고 평범했던 장소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곳입니다. 그 현장에서 느끼는 피조물의 특징은 연약함이고 극한의 내몰림에서 기도조차 방향을 잃고 나오지 않을 때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언젠가 한 목사님께서 기도에 대해 말씀해 주신 내용으로 말을 맺고자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영역의 기도제목을 만난다면 그 기도는 여러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