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3대 대선은 그렇게 민주화를 열망하던 전국민에게 깊은 배신과 아픔으로 또 한번의 좌절을 안기며 막을 내리고 군사정권 쿠테타로 수 많은 양민을 학살한 군사세력의 주동자이자.2인자인 노태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13대 대선은 단순히 선거에서 군사 정권에게 져 군사 정부를 연장시켰다는 단순한 외형적 결과를 넘어서 민주화를 바라던 국민에게는 패배의 쓴 잔보다는 그 동안 이나라의 민주화의 대명사로 자임하며 평가를 또 받기도 했던 양김씨와 재야인사들에 대한 분노감과 함께 허탈감과 상실감을 안겨준 측면이 뼈 아픈 역사적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즉 이런 측면에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고 모두가 똑같다는 정치에 대한 냉소와 정의를 말하는 자에 대한 혐오감을 안기며 진리에 대한 심각한 가치관에 대한 혼란을 야기 시킨 역사적 과오로써 양김씨와 그들의 편에서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분열의 길을 간 재야 인사들은 역사와 국민앞에 참회 하여야 할 것이다.민주화의 꿈은 언젠가 이루어 질 꿈이지만 인간과 역사에 대한 배신의 상처는 모두에게 도덕적 불감증을 야기시켜 국가적 측면에서 국민의 정신건강을 해쳐 막대한 정신적 동인을 잃는 손실을 주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선거는 끝났고 아뭏든 양김과 재야는 정권을 흭득 못한 것보다도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전투구 하며 국민에게 한을 심어준 장본인으로써 언론과 국민앞에 엄청난 질타를 받아야 했고 그들의 신비처럼 베일에 가려 있던 이미지가 그들의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져 도덕성에 막대한 타격을 받으며 과연 재기를 할수 있을 까에 국민의 초점이 맞추어 졌다.
그러나 양김 그들이 누구인가? 희대의 정치적 동물인 그들이 이한 번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양심의 선택을 할 그들도 아니거니와 국민정서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비난 받아 마땅한 그들이지만 군사 정권에 맞설 대안으로써 그들을 제외한 대체세력이 없었기에 그들의 제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줄 모르겟다.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기만적으로 말하며 출발한 노태우 군사 정부는 전두환과의 차별을 시도하며 문민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그리고 역사적 수순이 전두환의 무식한 이미지와 군인의 냄새와는 다른 여러 조치들을 발표하면서 민심을 아우르고자 한다.실상 순진한 국민들은 그의 보통사람들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에 속아 또 한번의 한을 남기지 않앗는가?
이런 새로운 기만적 정부의 민주화에 대한 제스처는 다분히 선거를 의식한 측면이 있었고 다수당을 통하여 일당독재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그들은 자신의 출생의 고향인 전두환 전 정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며 새로운 정치를 하겟다고 국민을 속였다.이러한 가운데 1988년 제 13대 국회의원 선거가 막을 올리며 양김씨에게 재기의 무대를 제공한다.
노태우 정권들어와서 민주화의 일환으로 독재시대의 산물이라고 한 중선구제에서 소선거구로 정당들이 합의를 본후 처음 치루어진 선거의 관심은 과연 여당이 다수다을 획득할 것인가?하는 것과 양김은 재기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당시 기회주의적 언론은 양김이 국민에게 모멸찬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분위기를 잡아 갔고 국민적 정서 역시 양김에 대한 분노가 작용 양김이 어렵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주류였다,
그러나 현명한 국민은 노태우의 독주와 양김에 대한 또 한번의 용서와 또 소선거구가 준 지역감정의 혜택으로 거소야대 정국으로 정권을 압박하고 양김은 화려하게 부활한다.이 선거 역시 지난 대선에 이어 배수의 진을 친 양김에게 지역적으로 몰표를 안기며 그들에게 재기의 장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이때 그동안 정치적 선배의 입장에서 그리고 현실 정치에 가까웠던 관계로 김영삼.김대중의 이름 순위가 김대중.김영삼으로 역전되는 결과를 가져 오며 항상 언론의 중심에 섰던 김영삼이에게는 재기 이전에 자신의 평생라이벌인 김대중에게 처음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내주며 제 3의 세력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안긴다.
즉 소선거구는 김영삼 보다도 상대적으로 확고한 불변의 지지 기반이 있는 김대중에게는 유리하게 작용 세인의 예상을 넘어 김대중의 평민당이 여당에 이어 제 전국구를 합쳐 71석의 제 2당이된다.그리고 상대적으로 지지 기반은 호남에 비해 약하고 민정당과 공유하고 있는 영남의 한계에 따라 전국적으로 호남을 제외하고는 나름대로 고른 지지를 얻은 김영삼의 통일 민주당은 득표율에서는 김대중의 평민당을 앞섰으나 의석수에서는 밀려 60여석으로 제 3당이된다.
여기서 고찰 할것은 김대중의 평민당은 호남의 37석을 전부 석권하였고 개혁적 성향이며 호남인들의 결집이 확실한 서울에서 18석을 흭득한 것이 전체 지
역 의석수라는 심각한 호남대 반호남이라는 구도와 함께 지역정당이라는 초유의 야당이 나타난 것이다.그러나 김영삼의 민주당은 제 2당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호남을 제외하고 강원.충청,경기.제주.등 영남을 제외한 타 지역에서 고른 표와 분포로 의석을 흭득 전국당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결과가 나왔다.그리고 김종필의 공화당도 이제 지역의 분할 구도에 양김보다는 세력이 미약하지만 합류 충청권을 장악 35석 정도의 전체 의석을 확보 그야 말로 한국 정당 사상 초유의 4강구도가 이루어 졌다,
야 3당은 정책적으로 공조할 부분은 연합하여 소수당인 민정당이 독단적으로 의회를 장악하고 노태우가 자신의 의지대로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기능이 원천적으로 마미되어 집권 초 부터 노태우는 불행하게도 레임덕 현상에 걸린 반쪽짜리 대통령이었다,이때 3당 공조는 노태우 정권을 압박 5공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개최하엿고 결코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던 노태우는 완전히 전두환 죽이기로 그를 백담사로 보내면서 철처히 전과 차별화 전략을 통하여 생존의 몸부림을 친다.
이때 양김의 정치형태는 부정선거로 졌다는 김영삼이가 대선 후 줄기차게 노태우에 대항하여 그의 국민대선 공약이던 중간평가제를 거혼하며 정권에 가장 강력한 투쟁형태를 보인다.그리고 김영삼은 성격상 늘 자신이 정권의 대칭축으로 20여 년 이상을 군림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그 시절이 가고 이제 정권의 파트너가 오히려 김대중이 되어 잇는 현실을 못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줄기차게 사사건건 정부에게 강공 드라이버를 구사하며 노태우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생애 처음으로 김영삼을 제치고 정권의 파트너로서 언론의 주목을 받던 김대중은 노태우 정부에게 상당한 우호적 제스쳐로 밀월 관계를 즐긴다.그리고 김종필은 태생적 성격인 물에 물탄듯 하면서 정권의 충실한 원조세력의로 또 야당으로 써 그 역시 자신의 생애에서 케스팅 보트를 쥐며 2인자가 아닌 한 당의 총재로서 자신감을 가지고 이 시국을 즐긴다.
이러한 이상한 정치적 기류는 5공청문회,광주 청문회를 통하여 정치권이 역사적 진실 규명을 통하여 책임자 처벌을 원하는 국민적 분노를 희석시키고
그들이 야합을 한 측면이 강하게 있다.
이 야합은 김대중 지지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김영삼을 제외시키고 노태우와 김대중이 주도 되어 김종필을 끌어들여 그들 3인이 역사적.민족적 문제를 그들의 정치적 이해 관계에서 흥정하며 국민을 기만한 측면이 강하다.
이때 김대중은 대선에서 보여 주었던 이중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며 군사정권의 만행을 규명하여 역사의 준엄함을 보고자 하던 국민과 특히 광주 시민들을 기만한 점에서 대선의 실패와 함께 역사적 비판을 받을 만한 그의 술수 정치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즉 김대중은 노태우 집권후,선거에서 자신의 당이 제 1야당이 되자.대선 후 제기 했던 중간평가를 받게 하여 부정선거한 노태우 정부를 마김시키자는 자신의 논리에 반하여 이제는 만약 대선을 다시 하여도,자신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그럴 방에야 지금의 제 1야당 총제로써 초유로 누려 보는 제 1야당 총재에게 주어지는 기득권을 누리는 것이 편하다고 판단한 얍삭한 정치적 사고로써 또 한번의 국민을 기만하는 중간 평가 유보도 나라를 위해 생각할 수 있다는 발언을 거듭 하며 여론의 분위기를 탐지 하기 시작한다.
김종필은 당연히 찬성,이런 면에서 선거를 공정하게 하면 승리 할수 있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노태우 정부를 군사 정부로 몰며 줄기차게 중간평가를 요구한다.
그러던 어느날 노태우는 김대중과 김종필의 원조에 힘을 얻어 중간평가를 유보한다고 발표 일년전 자신이 공약한 중간평가를 사실상 백지로 돌리고 만다.(중간평가 유보를 도와준 덕분으로 김대중이 노래우한테 20억 + 알파 라는 정치작금을 받은것은 이미 김대중 자신의 입으로 실토했다)
이점에서 당시 김대중의 행보는 무엇을 의미 하는 지 그가 과연 국민을 무엇으로 보고 살아 가는 사람인자.그의 대선 불출마와 함께 대선에서도 온갓 기만과 술수로 대선 정국에서 결정적 분열 요인을 제공한 민주투사 김대중과 술수 정치와 거짓 정치,기만 정치인의 모습으로 드러난 현실의 김대중의 실제 인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청문회 정국과 중간평가 정국이 수습을 잡고.1989년 노태우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며 이제 김영삼까지 끌어들여 노와 3야당 총재가 함께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내는 정도로 역사적 군사세력 단죄를 유야 무야 시키는 1989.12,15일 정치적 여야 대타협이라는 국민 기만적 봉합정치를 통하여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원하느 국민에게 또 한번의 배신 정치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단순한 폭압자.살인마 전두환과 또 하나로 대칭되는 천하의 간흉 노태우의 술수와 음모 정치가 싹트기 시작한다
즉 노태우는 소수 정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편으로 야당의 세력을 끌어들이고 자 하는 음모를 이때 부터 진행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김종필은 자신있게 끌어 들일 인물이나 양김중 편한 상대를 물색한다.노태우는 박철언등 자신의 참모를 동원 이 문제에 대한 공작을 수립 호남의 한을 잠재우며 최근 자신과 우호적 밀월 관계에 있는 김대중에게 마수를 뻗친다.그리고 김대중역시 자신의 힘만으로 정권장악이 힘들다고 보고 노태우의 제안에 솔깃하나.호남의 정서로 보아 통합은 불가능하고 지역 연합형태로 정치적 제휴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역 제안한다.
그러나 이를 면밀히 검토한 노태우측은 통합이 아니고 정치적 연합은 위험 부담이 커고 호남을 안고 가는 것 보다는 영남,그리고 김대중과의 라이벌 의식에 경도된 단순한 김영삼이를 끌어들이면 그를 야합이리는 명분으로 정치적 매장을 시킬 수 있고 자연히 시끄러운 인물을 제거 하고 또 이용하고 버리면 될것이라는 단순한 판단을 한다.그리고 김영삼이에게 통합을 제안한다.
이를 접한 김영삼이 역시 자신의 힘으로 정권 쟁쥐는 힘들다고 판단했고 김대중과 노태우의 밀월관계에 정치적 위협과 함께 노.김대중 양자간에 피어나는 내각제 공유 발언에 부담을 느끼고 자신이 먼저 선수를 쳐 일단 김대중에게 빼앗긴 유리한 정치적 고지를 장악하겟다는 야망과 함께 미래의 대권욕을 꿈꾸며 전격적으로 노,김영삼.김종필의 사상유례가 없는 내각제를 고리로 한 3당 야합을 결행하게 된다.이날이 1990.1.22일이다.
모든 국민은 충격과 함께 깊은 배신감과 분노로 김영삼이의 정권욕에 눈이면 도박을 보면서 정권에 눈이먼 자들의 형태를 묵도 하여야 했다.
김영삼이는 호랑이를 잡으려 면 호랑이 굴로 들어 가야 한다 했지만,당시 이는 꿰변이며 순전히 자신의 정권희득과 동물적인 김대중에 대한 라이벌의식에서 국민을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한 야합이다.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타도를 주장하던 세력과 손잡음으로서 자기 존재를 부정한 꼴이기도 하다,
국민들은 분노햇고 지역적으로 철처히 호남고립화 정책의 반민주적 폭거에 김대중은 소외와 갑자기 초라 해진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 하며 극렬한 투쟁을 다짐한다.그토록 노태우에게 호의를 보이고 그에게 원조를 아끼지 않고 중간평가까지 앞서 막아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연합을 무시하고 철처히 그를 고립시킨 노태우와 그의 동물적 라이벌 김영삼이에게 당한 분노가 아닐까?
아뭏든 김영삼이는 나중 노태우 정권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는 정권 투쟁으로 군사정부에게 위해를 가하여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조기에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느나 이는 국민의 민의를 군사 정권에게 넘겨주고 대권에 혈안이 된 인물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심어 주기에 충분한 만행이엇다.
앞서 언급한데로 김대중의 대선 정국에서 보여준 술수와 기만,그리고 중간평가유보,또 비록 합당은 거부 햇지만,분명 노태우 정부와 정책 연합 구상까지 한 김대중의 반민주성은 상대적으로 그에 비하여 단순하기는 하나 정직한 면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며 호남을 제외하고 전국민의 고른 지지를 받던 김영삼이에게는 오히려 그의 패악과 야합으로 오히려 더 큰 상대적으로 김댇중의 술수의 정치를 능가하는 도덕적 파탄 권력 추구의 화신으로 도덕적으로 역전되는 현상을 가져 왓다,
그리고 김대중이에게는 위기 엿지만,지금껏 상대적으로 술수정치와 기만,야합정치를 해왓지만,김영삼이가 자신의 이중적 모습을 상쇄 시키고도 남는 거대한 반역사와 반민의의 큰 족적을 남김으로서 도덕적으로 역전된 모습으로 국민에게 가소롭지만 또 다시 정의와 진리를 부르 짓을 수 있는 토양이 생겨난 것은 김영삼이의 야합이 가져다 준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선물이다,
만약 이런 야합이 없엇다면 김대중은 야당에서 김영삼이라는 인물과 늘 야당투쟁의 공을 공유해야 햇고,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보여온 술수와 기만의 정치를 노태우와 협력하여 계속함으로써 국민에게 도덕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할 시점을 또 다시 민주대 반민주의 단순 구도로 감으로써 투사의 이미지를 다시 만들어 냄으로서 어두운 자신의 이중성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참으로 역사는 아이러니하다.영원한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고 동지도 적도 없는 세계 우리의 어두운 인생의 축소판이랄까? 한치앞을 내다 볼수 없는 것이 인생이지만,그 중 정치를 하는 자들의 불쌍한 인생이 아닐까? 아뭏든 김대둥은 김영삼이라는 야당의 필승의 라이벌이 야합이라는 국민적 오명을 듣고 야당의 김영삼이가 몰락한 사이를 유일 야당의 투사로 등극하며 패악하게 국민들에게 최근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 하게 드러낸 실상을 감추고 다시 민주투사로 거듭나,그 이미지 영향으로 노벨상도 타고 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기 까지하다.몰론 노벨상의 결정적 요인이 통일 노력이라 하지만,김대중의 실상이 3당야합의 수혜를 입지 않고 4당체제하에서 있엇다면,양 김은 또 대권을 놓고 5년전의 무서운 기만을 업그레이드 하며 싸우던지,아니면,내각제를 고리로 노태우와의 긴 보이지 않으나 진한 밀월의 야합속에서 자신의 이중적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아마 벌써 정치적으로 국민에게 사형선고를 받고,내통령은몰론이고 노벨상은 수상할 가능성이 전무 할 것인데,
이정도로 역사적 가상은 마치자.그리고 이시기는 뭐니 뭐니 해도 결과적으로 분노의 촛점은 김대중이가 아니라,김영삼이고 그의 대도무문은 도둑놈이 가는길에는 문이 없다라고 까지 하며 국민이 비아냥 거릴 정도로 국민적 배신감과 분노는 하를을 찔럿고 그는 이제 김대중을 넘어 서는 역사의 술수가와 마키아벨리적 인물이라는 혹평을 감수해야 한다.이때 까지 그를 좀 지적 수준은 떨어지나 단순하지만 김대중의 술수 기만 정치와는 다른 정직의 일면을 높게 평가한 필자지만,엄연한 역사적 죄악은 그의 성격을 넘어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 한다.
이상 당시 언론이 경천동지라고 표현한 하늘도 땅도 놀라 자빠질 3당야합 애기는 그만하고 다음호에서는 3당 야합후 김영삼의 새로운 여당,그들이 만든 희귀한 민자당에서 그를 무력화 시키려는 노태우의 공작에 맞선 김영삼의 생존과 권력을 향한 투쟁과 몸부림 .그리고 김대중의 빠를 두뇌회전이 만들어낸 새로운 정국의 긴장관계를 보면서 양김의 적나라한 권력을 향한 줄기찬 모습을 통해 그들의 진면목을 다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