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 : 발행일 : 2015-11-01 [제2967호, 13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복음의 권고에 따라 완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삶이다. 신앙선조들, 특히 순교자들은 완덕
으로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완덕을 이루기 위해 신앙선조들이 일찍부터 동경하던 생활이 있었으니 바
로 동정생활이었다. 많은 이들이 동정생활을 선택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분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
한 동정부부 순교자 복자 유중철(요한)과 복녀 이순이(루갈다)일 것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는 유중철·이순이 부부와 관련된 소중한 유물들이 보존돼 있다.
이순이는 1782년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신앙을 이어받았다. 179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1795년
에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첫 영성체를 했는데, 이순이는 첫 영성체를 위해 나흘 동안이나 집 안에 들어앉아 영성체를
위해 준비했다고 한다. 첫 영성체 이후 이순이는 오로지 덕행을 쌓는 데만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천상배필을 위해 동
정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다짐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어머니는 이 말
을 듣고 매우 놀랐지만 딸의 선택을 허락해 주었고, 주문모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그때 주문모 신부의 기
억에 동정생활을 결심한 바 있던 전주의 유중철이 떠올랐다. 1795년 5월, 전라도 전주에 사는 양반으로서 대부호이며
가성직제도 시절 전라도 선교 책임자였던 복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유항검의 큰아들 유중철
이 아버지와 주문모 신부에게 동정생활에 대한 결심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에 주문모 신부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느
껴 즉시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했다.
1798년 9월 이순이는 남편의 고향 전주 초남리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
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동정서원을 깨뜨릴 뻔한 유혹도 십여 차례 겪게 되는데, 1800년 12월에는 그 유혹이
너무 심해 모든 것이 끝장나는 듯한 고통을 겪었지만 예수님의 성혈공로(聖血功勞)에 힘입어 이겨낼 수 있었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이순이의 십자가는 동정부부 서약을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도운 힘의 원천이었다.
1800년 12월, 두 사람은 예수님이 겪으신 광야의 유혹에 부딪혔다. 본능 속에서 잠자던 음욕의 거센 불길이 미친 듯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가슴은 창에 찔려 열린 채 매달리신 예수님의 크신
은혜, 크신 사랑, 크신 아픔을 우러러보며, 주님을 저 지경에 이르게 한 죄를 뼈가 아프도록 통회하는 눈물을 흘리면
서 유혹의 불길을 끌 수 있게 힘을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 두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이순이가 평생
지니고 있던 십자가는 그 몸체가 다 닳아 문드러져 있다.
순교 신심과도 연결되는 이순이의 십자가는 1914년 초남리 근처 바우배기에 모셔져 있던 유항검 일가족 묘를 정리해
치명자산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작업하던 인부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
몰래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꽁꽁 숨겨졌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그 인부의 가족들이 이 십자가는 자기들 집에 모실
것이 아니라 생각해 호남교회사연구소 초대 소장 김진소 신부에게 기증하면서 교회공동체의 유산으로 소중히 모셔
지게 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돼 이순이가 살던 초남리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시아버지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돼 갔다. 이어 그녀의 남편 유중철도 체포되면서 전주로 잡혀갔다. 이후 연좌형에 의
해 이순이와 나머지 가족들도 그 해 9월 중순 경에 전주로 끌려갔다. 전주로 끌려간 이순이와 가족들의 옥중 생활은
두려움·걱정·고통도 있었지만 순교에 대한 열망이 더 컸기에 모든 잡념이 사라지는 희망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내용
이 「루갈다 남매 옥중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옥중편지는 현재도 보존상태가 뛰어나 순교자들의 옥중 생활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중요 유물로 평가된다.
이순이는 옥중에서 옥리들의 눈을 피해가며 완덕으로의 삶의 여정을 정리했다. 주문모 신부는 이순이에게 박해를 당
하거든 그 상황을 소상히 기록해 두도록 일러뒀다. 그리하여 이순이는 박해의 자초지종을 적어 시동생 유문석 편에
친정으로 보냈다. 또 친정 어머니에게 유서인 옥중편지를 보냈다. 이순이는 가족들에게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은 참
되다”며 간곡한 유언을 남겼다. 참으로 이 옥중편지 안에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형제간의 뜨거운 우애, 그
리고 깊은 신앙이 절절하고 진솔하게 담겨 있다. 이 옥중편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순교자들이 쓴 최초의 옥중편
지이기도 하다.
1858년 다블뤼 주교는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을 쓰고, 1859년부터는 약전에 대한 「보유편」을 작성하던 중 이
순이 삼남매의 옥중편지를 발견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어느 곳에도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1868년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김종륜의 필사본이 유일하게 남아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이 필사본은 김종륜의 손자인 김병옥이 소중하게 보관해 오다가 교회사가인 지원 김구정 선생께 기증
한 것인데, 후에 다시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전해졌다.
한국천주교회 순교역사 안에서 동정부부 순교자 유중철과 이순이 두 분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삶의 표본으로 남겨준
은총이며, 이순이가 몸에 지녔던 십자가와 옥중편지는 그 은총을 증언하고 있다.
※문의 010-6689-2070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
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