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익 金貞益 (1891 ~ 미상)】 "1909년 이완용 처단 의거"
1891년 2월 1일 평안남도 평양군(平壤郡) 대흥면(大興面) 이리(二里)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에 입문하여 평양의 경흥야학교(慶興夜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09년 이재명과 함께 이완용 처단에 나섰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07년 미국의 공립협회(共立協會) 지도층이 일제에 협력한 매국적(賣國敵) 처단 계획을 세우자, 이 실행에 자원한 공립협회 회원 이재명(李在明)은 1907년 10월에 귀국한 후 매국적 처단 거사를 함께 할 동지 규합에 착수하였다. 이재명이 평양 지역에서 처단 활동에 동참한 동지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한 야학교 학생으로서 이 계획에 동참하였다.
이후 이재명과 같이 서울과 평양 각지를 오가며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錄)·조창호(趙昌鎬)·전태선(全泰善)·이응삼(李應三)·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김용문(金龍文) 등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09년 9월 하순경 평양의 동산현(東山峴)에 위치한 평양 경흥학교 내 서적종람소(書籍縱覽所)에서 열린 비밀회의에 함께하여 제일 먼저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 처단 거사를 투표로 결정하고, 이재명과 함께 거사 실행을 자원(自願)하였다.
평양에서 매국적 처단을 준비하던 중인 12월 4일 일진회의 「합방성명서」가 발표되자, 12월 6일 다시 비밀회의를 열고 이재명·박태은·이동수·이응삼·전태선 등과 함께 모여 일진회의 거두 이용구 처단을 논의하였다. 회의 중 이재명이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 처단이 더 시급하다고 주장하자, 격론 끝에 이완용과 이용구를 동시에 처단하는 계획으로 수정하였다.
12월 7일 회의에서 조창호와 함께 이용구 처단조가 되었고, 이재명과 이동수·김병록은 이완용 처단조로 나누어 2인의 매국적 처단거사를 확정지었다. 또한 오복원·박태은·이응삼 3인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조창호와 전태선은 거사에 사용할 권총과 단도 등 무기 구입을 담당하였다. 거사를 실행하기 위해 12월 12일경 이재명·전태선 등 동지들과 서울로 이동해 학생으로 가장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같은 달 17일경 최후의 회합에서 여러 여건을 고려한 결과 처단 계획을 다시 조율하니, 먼저 이완용을 처단하고 뒤에 이용구를 포살하는 계획으로 바꾸었다. 이 결정과 동시에 각자 무기 분배를 마치고 이완용의 거취를 살피던 김용문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기회를 엿보던 중 김용문으로부터 이완용 등 매국적(賣國敵)들이 12월 22일 오전 종현(鍾峴) 천주교당(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이완용 처단팀은 계획 실행에 착수하였지만, 이용구 처단은 이완용 처단 성공 이후에 결행할 계획이었으므로 이용구의 동정을 감시하며 거사할 시기를 탐색하였다. 12월 22일 이재명·김병록·이동수가 천주교회당 앞에서 이완용 처단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 거사에서 이완용에게 중상을 입혔지만 이재명은 현장에서 호위 순사에게 체포되었다. 다행히 거사에 함께한 다른 동지들과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거사 후 피신하였지만, 1909년 12월 22일 평양에서 이른바 ‘이완용 암살사건’ 연루자로 붙잡혀 재판에 념겨졌다. 1910년 4월 13일 경성재판소(京城裁判所)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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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익에 대한 선고 보도(『신한민보』 1910. 6. 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