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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천년사찰 - 여수 흥국사
여수시 중흥동 여천공단 바로 옆에 위치한 흥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승려인 보조국사 지눌은 20대의 비구승으로 전국의 고승들이 모인 담선법회에서 “부처님이 가신 지는 오래됐지만 법은 멀고 가까움이 없다”고 백여 명의 고승들에게 수행할 것을 설한 뒤에, 팔공산의 거조암에서 결사하고, 그 후 수행처를 찾다가 여수 앞바다의 금오도에서 기이한 노승을 만나 그의 안내로 지금의 흥국사 자리를 찾게 된다. ‘흥국(興國)’이란 절이름 역시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559년(조선 명종 1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법수대사가 중창했다. 임진왜란 때 기암대사가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이 절의 승려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승군(僧軍)의 본영인 주진사가 되었으나 정유재란 때 모두 불에 탔다. 그 뒤 1624년(인조 2년) 계특대사가 3창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천왕문 보수중인 법왕문 보수중인 봉황루 심검당 사찰 건물 배치도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보물 제396호)·원통전(圓通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불조전(佛祖殿)·무사전(無私殿)·적묵당(寂默堂)·심검당(尋劍堂)·백련사(白蓮舍)·법왕문(法王門)·봉황루(鳳凰樓)·영성문(迎聖門)·천왕문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 홍교 (보물 제563호) ▶ 대웅전 (보물 제396호) ▶ 대웅전후불탱화 (보물 제578호) ▶ 흥국사 목조석가여래 삼존상 (보물 제1550호) ▶ 흥국사 노사나불괘불탱 (興國寺盧舍那佛掛佛幀, 보물 제1331호) ▶ 흥국사 수월관음도 (興國寺水月觀音圖, 보물 제1332호) ▶ 흥국사 십육나한도 (興國寺十六羅漢圖, 보물 제1333호) ▶ 여수 흥국사 동종 (麗水 興國寺 銅鍾, 보물 제1556호) ▶ 여수흥국사목조지장보살삼존상·시왕상일괄및복장유물 (麗水 興國寺 木造地藏菩薩三尊像·十王像 一 括 및 腹藏遺物, 보물 제1566호) ▶ 여수흥국사삼장보살도(麗水 興國寺 三藏菩薩圖,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9호) ▶ 여수흥국사제석도(麗水 興國寺 帝釋圖,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0호)를 비롯해 경판 236매, 경전 93권, 부도 13기 등이 있다 흥국사 일주문 여수는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과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될 정도로 예부터 군사적 요충지의 하나였으며 이곳에 위치한 흥국사 역시 호국사찰로 남해안을 지키는 주요한 역할을 맡아온 사찰이다. 옛날에는 흥국사의 입구에 일주문이 없이 공북루(拱北樓)라는 성문(城門)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찰에서 이런 구조는 찾아보기 힘들다. 공북루(拱北樓)는 일종의 성문으로서, 예전에는 남쪽 성문을 진남(鎭南)이라 하고 북쪽문을 공북(拱北)이라 했다. 공북은 임금이 북쪽에 있으므로 예를 갖춘다는 뜻이다. 이렇듯 성문이 사찰의 일주문처럼 있었다는 것은 승군(僧軍)이 군사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흥국사가 호국사찰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중의 1593년 1월 26일자에 쓰여진 ‘장계’를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의승수군(義僧水軍)이 조직되었다고 쓰여 있다. 1594년 1월에 쓰인 ‘장계’에도 의승수군이 자원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스스로 군량미를 조달하고 있다고 전한다. 여기에서는 또 1592년에 규합되었던 승군 조직이 동절기에 흩어졌다가 이듬해에 다시 모여 상설 조직으로 바뀌었음이 나타나고 있다. 의승수군 조직은 1592년 8~9월에 4백 명으로 조직되었다가 이듬해 재조직되었으며, 이후 상설군으로 조직화되어 평시에는 축성(築城-성을 쌓음)과 수성(守城-성을 지킴), 제지(製紙-종이를 만듬), 제와(製瓦-기와를 구움), 무기 제작 등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흥국사 중수비 흥국사 입구 계곡 지금은 성문이 없어졌지만 성곽은 일부 남아 있으며, 성의 북쪽문이던 공북루의 현판은 흥국사내 승군유물전시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공북루와 함께 없어진 것이 영성문이다. 성인을 맞이한다는 의미의 영성문은 흥국사 앞 시내를 건너지르는 수박다리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몇십 년 전 큰 수해 때 떠내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흥국사 자리에 절을 지으면 국가의 흥망성쇠와 같이 한다는 신인(神人)의 말에 따라 1195년(고려 명종 25년) 비보사찰로서 흥국사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지눌은 흥국사 터를 잡은 뒤 토굴을 마련하였고 제자들이 법당과 요사채를 지었다.
흥국사는 구한말 전라좌수영이 폐지될때까지 전라좌수영과 연계한 승병체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전국의 승병들과 연계한 조직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부도전
흥국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쪽 축대 위에 고려 후기 고승들의 사리를 부도밭이 있다.
출가한 승려는 열반 후에 다비하여 재를 산천에 뿌리지만, 고승들은 그 제자들이 스승의 덕(德)를 그리기 위하여 유골 일부를 모셔다가 탑을 조성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곳곳에 이러한 승탑이 많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여수, 고흥, 광양 지역의 불교계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스님들의 부도로서 12기가 있다.
보조국사탑, 중흥당법수대사탑, 낭월당탑, 일명승탑, 호봉당탑, 금계당탑, 능하당탑, 취해당탑, 경서당탑, 응운당탑, 우룡당탑, 응암당탑이다.
보조국사는 창건주로서 고려시대를 대표하던 도인이었으며, 법수대사, 계특, 통일스님은 흥국사를 중창, 삼창을 한 스님이다. 응운과 응암스님은 도총섭의 승군대장이었다.
부도 12기는 원래 세 곳에 따로 안치되어 있었고, 특히 보조국사탑은 정수암 계곡 입구의 부도전 옆에 방치되어 있다가 현재의 부도전으로 옮겨졌으며 나머지 부도 3기는 현 위치보다 아래쪽 계곡에 있던 것을 옮겨와 모두 12기의 부도를 모시게 되었다.
탑신석에 ‘호봉당(虎峰堂)’이란 당호가 세로로 음각되어 있으며
기단부에는 복련과 앙련의 8판 연잎을 새겼다. 탑신부는 원형이고, 약간 둔중해 보이는 사각지붕 위에
보주를 올린 옥개석에는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네 곳의 전각 아래쪽 귀꽃 부분에는 동물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대웅전-보물 제396호
대웅전의 어칸 위의 용장식
몸체를 길게 빼내어 매우 사실감이 드러난 우수한 조각이다
임진왜란 때 이 절의 승려들이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적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으나 정유재란때는 절이 모두 소실되었다.
지금 있는 대웅전 건물은 인조 2년(1624) 계특(戒特)대사가 건물을 3창하였으나 너무 비좁아 1690년 통일(通日)대사가 개조하여 4창을 하였으며, 1962년 9월 2일 보물 제396호로 지정된 후 1985년 명선스님에 의해 해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건물로,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절의 중심 법당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놓은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이 공포를 기둥 사이에 3구씩 배치하여 매우 화려한 느낌을 주며 앞면 3칸은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키가 큰 빗살문을 달았다.
정방형의 초석(礎石)위에 기둥은 배흘림의 둥근 원주(圓柱)를 세워 마당에서 보면 고대(高大)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고 불상이 앉아 있는 자리를 더욱 엄숙하게 꾸민 지붕 모양의 닫집을 만들어 놓았다.
같은 양식을 가진 건물들 중 그 짜임이 화려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대웅전 기단의 조각
대웅전 기단의 게 장식
활주 옆의 거북 장식 석물
활주 옆의 용머리장식
기단(基壇)은 단층으로 긴 장대석(長臺石)으로 바른 층 쌓기를 하여 그 위에 갑석(甲石)을 깔았다.
흥국사 대웅전을 흔히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도 하는데, 중생을 고통의 세계로부터 고통 없는 피안의 세계로 건너게 해주는 것이 배이고, 이 배를 용이 호위하므로 용선이라 한다.
따라서 기단 주위는 바다가 되는데 바다를 상징하기 위해서 앞마당에 있는 석등의 기단이 거북이이며 기단 갑석에도 거북이를 새겨 놓았고 기단 정면 면석에는 게, 해초 등을 조각하여 고통의 세계인 차안(此岸)에서 중생들을 지혜의 배인 반야용선에 태우고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으로 실어 나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계단 소맷돌의 용장식. 양쪽에 두마리씩 모두 4마리이다
대웅전 정면 계단의 양쪽 소맷돌에는 용을 조각하여 대웅전을 호위하는 형태를 취했는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뛰어난 표현 기술이 느껴진다
흥국사 대웅전 기단과 같이 바다를 뜻하는 게, 거북 등의 조각이 새겨져 있는 곳은 경북 청도의 대적사, 전남 해남의 미황사 등이 있다.
조선 중기 전라도 지역 불상의 양식적 특징과 개성을 보여주고 있는 목조석가여래삼존상은, 대웅전의 주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17세기 전반의 숭정연간(1628~1644)에 조성된 것이다.
삼존불은 석가여래좌상본존과 제화갈라보살입상, 미륵보살입상이다.
석가여래좌상본존의 경우 높이 140㎝, 무릎 폭 101㎝이고, 제화갈라보살입상은 높이 144㎝, 어깨 폭 36.5㎝. 미륵보살입상은 높이 147㎝, 어깨 폭 47.9㎝이며. 석가여래와 좌우 협시인 제화갈라보살입상과 미륵보살입상 모두 나무로 만든 목조불상이다.
협시 보살상의 보관(寶冠) 뒷면에는 각각 ‘자씨보살대명숭정(慈氏菩薩大明崇禎)’, ‘제화보살대명숭정(提花菩薩大明崇禎)’이라는 명문이 타출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본존인 석가모니불
목조석가여래삼존상은 통견(通肩)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목불이다. 조각 수법도 매우 뛰어나서 몸체의 양감 표현과 옷자락의 자연스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손과 발의 표정 또한 잘 살아 있고, 특히 제화갈라보살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의 옷주름의 양감표현은 몸체의 균형과 변화를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으며, 장신구의 자연스러운 곡선 표현도 유려하다.
17세기 전반의 불상으로, 삼존불이 동반한 보살상의 크기는 아주 큰 편에 속한다. 도상과 양식 면에서도 조선 중기 불교 조각을 대표하는 불상이라 평가할 수 있다.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존상 후불탱-보물 제578호
후불탱화(문화재청 사진)
삼존불 뒤에 걸려있는 탱화는 석가모니 부처님 께서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4.27m, 세로 5.07m이다.
석가여래가 인도에서 영지 법회를 주재할 당시 모습을 그린 그림을 '영산회상도' 라고 하는데, 『법화경』이 지닌 의미를 압축하여 묘사한 그림이다.
화면 중앙에 석가모니가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을 하고 연꽃좌대에 앉아 법화경을 설법하고 있으며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앞쪽 양옆으로 여섯 명의 보살들이 배치되었고, 그 옆으로는 사천왕을 거느리고 있다.
석가여래상의 바로 옆과 뒤편으로는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따르는 무리들이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은 왼쪽 어깨에 옷을 걸쳤고, 얼굴은 둥글고 풍만한 모습이다
대웅전 후불탱화
탱화에는 1693년 4월 영산회를 조성하여 봉안한다는 내용과 주상전하(主上殿下)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아울러 50여 명의 비구와 일반 신도의 시주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불화를 그린 화공(畵工)은 의천(義天), 천신(天信)이며, 그린 후에 이 불화를 증명(證明)한 승려의 기록이 나타난다.
불화로서는 드물게 보물로 지정된 이 탱화의 화면 윗부분에는 정교하고 화려하게 수놓아진 다라니(多羅尼) 주머니를 매달아 치례장식을 했다.
대부분의 후불탱화의 높이가 넓이에 비해 높기 때문에 종군적(縱群的) 구도를 지니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 탱화는 횡군적(橫群的) 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등장인물 모두가 안정된 대칭 구도를 이루고 있다.
원만한 형태와 고상한 색채의 조화로 17세기 후반기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흥국사에 오시면 꼭 대웅전 문고리를 ......
문고리는 310년이나 된 것으로 한 번 잡기만 해도 41분의 원력(인연공덕)으로
불가에서 말하는 삼악도(축생, 아귀, 지옥)를 면 할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대웅전 후벽 백의관세음보살 벽화(백의관음도)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화의 뒷쪽 벽면에 그려져 있는 벽화로서
조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대웅전이 1690년에 건립되고, 후불탱화가 1693년에, 괘불탱화가 1759년에 완성되었으므로 대체로 1760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대웅전 중앙에 불단을 설치한 양고주(兩高柱)의 벽 뒷면 토벽에 한지를 덧바르고 그 위에 수월백의관음(水月白衣觀音)을 벽화로 그려놓았다
관세음보살은 바다에서 솟아난 연꽃을 보좌(寶座)로 해서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리고 손은 자연스럽게 양 무릎 위에 얹어 반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약간 각이 진 듯한 관을 쓰고 푸른 연꽃 위에 왼발을 내리고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남순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대웅전내의 뒷쪽 벽에 그려진 백의관음도
관세음보살이 반가상을 하고 흰 두건을 머리로부터 내려쓴 모습이 특이하다. 웃옷은 하얀 장삼이며, 아래는 하얀 바탕에 붉은 풀 무늬가 있는 치마의 형태이다.
마리 뒤의 두광(頭光)은 빛나는 초록색을 사용하고 화관의 중심에는 관세음의 본존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화불(化佛)로 모셔져 있다.
얼굴은 비교적 근엄하며 입이 작고 볼이 두툼하여 근엄하면서도 자비가 풍겨 나온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남순동자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은 어머니가 아기를 내려다보듯 자애로움이 넘치며 자연스럽다.
보살의 오른쪽 편의 연꽃 위에는 관세음보살의 상징인 감로(甘露)병이 있으며 그 위에 극락조(極樂鳥)가 앉아 있어 극락을 상징하는데 자비(慈悲)를 실현한 국토가 극락임을 상징한다.
전체적인 면에서 터치가 조금 부드럽지 못하고 균형이 조금 미흡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 후벽의 관음벽화로는 매우 귀하여 학문적인 사료로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벽화의 크기는 가로 340㎝, 세로 390㎝ 이다.
괘불대
괘불이란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 놓은 부처를 가리키는데, 모인 신자가 많아 본전이 비좁을 때 본전 앞마당에 불상 대신 괘불(걸개 그림)을 걸고 행사를 진행하며 이 괘불을 걸어 놓는 지지대를 괘불대라고 한다
괘불을 걸기 위해 구멍이 뚫린 두 개의 깃대를 세우는데, 형태는 당간 지주와 비슷하다.
괘불대는 대웅전 소맷돌(돌계단의 난간) 좌우에 쌍으로 조성되어 있다. 상부를 둥글게 처리하고 나머지 면은 빗살무늬에 가깝게 대강 다듬었고 다른 한쪽의 괘불대 바깥 면에는 구름 속에서 용트림하는 용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상부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두가 조각되어 있어 특이하다
두 쌍 모두 상하에 하나씩 홈을 파서 장대를 세울 수 있게 하였다. 좌측 바깥쪽에는 세로글씨로 새긴 6행의 명문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거의 어렵다.
그중 명문의 첫 줄은 ‘강희십육년일건(康熙十六年日建)’으로 추측된다. 이것으로 보아 1677년(숙종 3년) 세운 것으로 생각되나 정확한 판독이 아니기 때문에 확언할 수는 없다.
괘불대의 높이는 약 110㎝이다.
근간에 만들어진 괘불대
흥국사 괘불대 앞에는 세 쌍의 괘불대가 더 있는데, 이는 1985년 7월 15일 주지인 명선스님이 세운 것이다.
흥국사 석등
대웅전 앞의 석등. 정면을 비켜 서 있다
받침돌 귀부
화창과 옥개석
화창
상륜부
석등 옥개석에 피어난 와송(바위솔) 옥개석에 피어난 이름 모르는 꽃
대웅전의 앞에 있는 석등이다.
석등 기단부는 거북의 형태로 귀부의 등 위에 방형의 간주석을 세우고 정방향의 화사석을 그 위에 올렸다. 화사석 네 곳에 화창(火窓)을 뚫고 화창의 기둥에는 공양상을 새긴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팔각기둥과 팔각의 화사창을 지닌 일반적인 석등과는 그 형태가 많이 다르며 자연 암반 위에 기단 귀부가 얹혀 있다.
옥개석에는 기와골이 모각되었고 상륜부에 앙화와 보주를 얹었는데 그 사이에 염주알 모양의 띠를 둘러 장식하였다. 간주석에 명문이 있다고 하나 석질이 좋지 않은데다 풍화마저 심해 글씨를 판독할 수 없다.
크기는 전체 높이가 200㎝이며, 귀부는 높이가 55㎝, 길이가 120㎝이다. 화사석은 가로, 세로 각 46㎝이며, 화창은 가로 26.5㎝, 세로 25㎝이다. 옥개석의 폭은 75㎝이다.
불조전
불조전의 불상들
무사전(無私殿)
대웅전 좌측에 있는 이 무사전(無私殿)은 다른 절에서는 대개 명부전이나 지장전이라는 편액을 걸고 있으나 이곳에서는 특이하게 무사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명부의 세계는 사사로움이 아닌 그 사람의 업에 의해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결정된다는 뜻에서 ‘무사(無私)’란 편액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1624년 계특(戒特)이 창건하고, 1750년 묵암(黙庵)이 중수한 것을 1895년 경허(鏡虛)가 중수하고 1980년대 초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주심포 양식인 이 전각은 18세기 전반에 축조된 이곳의 응진당과 비슷한 양식을 보이고 있어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내부는 간결하고 소박하게 꾸며져 있으나, 천장 가운데 칸은 연화문·당초문을 섞어가며 조각하였고, 또 좌우 칸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하였다. 그리고 가운데 문 안쪽 천장에는 6판 연잎의 꽃술에 6자대명왕진언(옴마니반메훔)을, 연잎에는 각 대왕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무사전의 지장보살삼존상
무사전(無私殿)에는 본존으로 중앙에 목조 지장보살상이 위치하고, 법의는 통견에 아미타불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지장보살상은 동그란 얼굴에 살이 적당히 올랐으며, 부푼 눈두덩 사이로 짧게 치켜 올린 눈이 인상적이다. 단정한 신체에 표현된 옷 주름은 강직한 직선과 부드러운 곡선을 잘 조화시켜 신체의 굴곡과 양감을 잘 살려내었다.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바라보아서 오른쪽에는 도명존자, 왼쪽에는 무독귀왕을 모셨다. 그 좌우에는 왼쪽에 진광대왕과 송제대왕을, 우측에는 초강대왕과 오관대왕을 모셨다. 그리고 좌측면에는 염라대왕·태산대왕·도시대왕을, 우측면에는 변성대왕·평등대왕·전륜대왕을 모셨다.
출입구 좌우에는 금강역사와 권속들을 모셔 놓았다.
소조 시왕상은 높이 127㎝에 폭은 60㎝이고, 지장보살상은 높이 130㎝에 무릎 폭이 90㎝이고, 도명존자는 높이 137㎝에 폭이 47㎝이고, 금강역사는 높이 135㎝에 폭은 50㎝이다.
봉안돼 있는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한 시왕상 일괄은 1648년(인조 26) 수조각승 인균(印均)을 비롯한 12명의 조각승들이 참여해 조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흥국사수월관음도 (興國寺水月觀音圖)- 보물 제1332호
수월관음도(문화재청 사진)
관음보살은 여러 모습으로 중생 앞에 나타나 고난에서 안락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수월관음도에는 관음보살이 사는 정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흥국사 수월관음도에는 둥근 몸광배를 하고 있는 관음보살이 화면 중앙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오른 무릎 아래쪽에는 선재동자가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합장하고 서 있다. 맨 하단에는 일렁이는 물결이 묘사되어 있다. 관음보살의 양팔 좌우로는 푸른 대나무 및 버들가지가 꽂힌 꽃병과 새가 표현되어 있다.
조선시대 관음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따르고 있는 관음도로서 부분적으로 도식적인 면이 엿보이지만, 안정된 구도에 적·녹·청색의 조화로운 배색으로 화려함과 따뜻한 느낌을 준다. 또한 단정하고 적당한 얼굴표현과 신체비례, 바위면 처리에 있어 회화성 넘치는 표현 기법 등을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18세기 최고 화승으로 꼽히던 의겸 스님이 그린 그림으로, 비록 화면 하단부에 일부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한 필치, 조화로운 색채 등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팔상전(八相殿)
팔상을 담은 탱화
팔상전은 석가여래가 중생들에게 보인 일생을 크게 8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한 팔상(八相-8가지의 형태)을 8폭의 탱화로 그려 봉안한 곳이다.
팔상(八相)의 8가지 내용은
1. 도솔천에서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모습,
2.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는 모습,
3. 인간의 근본 고통을 체험하는 모습,
4. 인간의 고정 관념을 깨고 출가하는 모습,
5. 고행을 행하면서 구도의 길로 나아갔던 모습,
6.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 모습,
7. 바로 사는 길을 가르치는 모습,
8. 중생들과 똑같이 육신을 벗고 입멸에 드는 모습 등이다.
팔상전은 1645년 통일(通日)이 창건하고 1815년 응운(應雲)이 중수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근거는 확인할 수 없지만 '흥국사사적'에는 1690년 통일이 법당을 중창·개조하면서, 1624년 가을 계특(戒特)이 중건한 법당을 해체한 목재를 수습하여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웅전을 완공한 뒤에 대중들이 더 많이 모여 다시 팔상전 재건을 열망하므로 옛날 법당에 썼던 나무들을 다시 수습하고 모자라는 부분으로 보충하여 팔상전을 지었다는 것이다
팔상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양식이다. 어간문은 4합이며 양옆은 3합문으로 빗살문과 정(井)자문을 하였다.
팔상전본존불은 우견편단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있는 석가여래좌상이다. 양쪽의 협시보살은 문수와 보현로서 통견에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손에 연꽃 봉오리를 들고 있다. 불상에는 화염무늬의 화려한 광배가 있다.
석가여래의 크기는 높이 143㎝, 무릎 폭 66㎝, 보살상은 높이 126㎝, 무릎 폭 53㎝이다.
불상의 조성 시기는 알 수 없다
후불탱화는 1741년에 그린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으며 1917년에 승려 영봉(榮蜂)이 팔상탱화를 조성하여 모셨으나 1970년대 후반에 도난당하여 지금은 없다
범종루의 범종과 법고
승병수군유물전시관(僧兵水軍遺物展示館)
흥국사 동종-보물 제 1556호
흥국사동종은 1665년(현종 6년) 순천 동리산 대흥사(大興寺) 혹은 대진사(大眞寺)에서 김애립(金愛立)이 주성하였다.
김애립은 조선시대 주종장 가운데 김용암(金龍岩)·김성원(金成元) 등과 더불어 사장계(私匠系)를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이며 사인비구(思印比丘-18세기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와 버금가는 기술적 역량을 지녔던 사람이다.
동종의 외형은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약간씩 벌어져 마치 포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종은 천판에 열 개의 연잎을 양각하였고, 그 위에 간단하면서도 힘이 있는 쌍룡(雙龍)의 용뉴(龍鈕)와 작은 원형공(圓形孔)이 음통(音筒)을 대신하고 있다. 처음부터 음통을 이러한 형태로 조성한 것인지 아니면 후에 음통이 탈락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몸체에는 연곽대와 보살상 및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殿牌)가 마련되어 있다. 종신 4면에는 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역시 네 곳에 유곽을 두어 그 안에 3×3개의 연꽃 봉오리를 양각하였다. 상대는 따로 두지 않고 모두 13개의 작은 원 안에 범자문(梵字紋)을 두른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다. 즉 원 안에 범어인 ‘옴마니반메훔’을 한 글자씩 두 차례 양각하고, 나머지 한 원 안에는 왼쪽으로부터 3단에 걸쳐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 둘러져 있다.
하대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양각하였다. 종신에 새겨진 문양은 전반적으로 섬세하고 화려하며 잘 정돈된 느낌을 보여 준다. 높이 121㎝, 용뉴 24㎝, 음통 지름 5㎝, 종구 78.5㎝, 하대 폭 12㎝, 유곽 상 21㎝, 유곽 하 25㎝, 둘레 222㎝ 의 대종에 해당한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예술성이 뛰어나며 연기가 분명하여 범종 및 전통 문양 연구에 가치가 있다.
공복루 편액
흥국사 의승수군 유물전시관에 있는 조선 후기의 공북루 편액으로, 목판재에 글씨를 양각하여 테를 두른 전형적인 편액 형식이다. 서체에 무인의 기상이 흐르며, 현판으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사찰 배치 구조상 공북루가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흥국사도 임진왜란이 끝난 후 300여 년에 이르기까지 승군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성문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만 했을 뿐 근거 자료가 없었는데, 1893년 절도사 이봉호(李鳳鎬)가 쓴 '흥국사공북루중수기(興國寺拱北樓重修記)'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공북루'라는 글씨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직접 쓴 글로 전해져온다
보물로 지정된 시왕상일괄 및 복장유물
흥국사 홍예교-보물 제563호.
흥국사 입구의 횽예(무지개다리)
흥국사 홍예는 일주문 왼쪽 계곡의 아래쪽 50m 지점에 있다. 옆 개울 양 기슭의 바위에 기대어 쌓아놓은 다리로 부채꼴 모양의 돌을 서로 맞추어 틀어 올린 다리밑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길이는 40m, 너비 3.45m, 높이 5.5m이다. 현존하는 홍예형 돌다리로서는 가장 높고 긴 것이며 주변 경치와도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다리이다.
흥국사 진입로를 새로 만들기 전에는 홍교를 건너야 절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홍교는 세속과 불국토의 갈림길이다. 홍교를 건넘으로써 세속을 떠나 불국토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사찰로 들어오려는 사악한 귀신들을 막기 위해 벽사의 의미로 만들어 놓은 용머리장식
홍예의 양쪽과 가운데 각각 1마리씩 3마리가 있다
홍예교의 위 통로
시냇가 암석 위에 편단석(扁單石)을 놓고 그 위에 같은 모양의 86개 석재를 중첩시켜 홍예를 구성하고, 앞뒤의 양측 벽은 자연석을 쌓아 완만하고 긴 노면을 이루었다.
홍예의 한복판에는 양쪽으로 마룻돌이 튀어 나와, 그 끝에 용머리를 장식하여 용이 다리밑을 굽어보고 있다. 이는 잡귀를 막고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는 자비의 표현이다.
홍예의 아랫면 중앙에도 용머리가 수면을 향해 튀어나와 있다. 다리결을 장식하는 용은 용의 여섯 번째 아들 공복(蚣蝮)이다. 용(龍)의 아들이 9명이 있는데 이를 용생구자(龍生九子)라 하여 각기 하는 일이 다르다.
리수, 범공, 공하이라고도 불리는 공복은 물을 좋아하고 물속의 악귀를 물리치는 힘을 지녀 다리나 배수 시설에 주로 새겨졌다. 여기에는 호법, 호국, 호민의 의미와 고통의 세계에서 불국의 세계로 건너오는 모든 중생을 보호하겠다는 신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홍예교는 조선 인조 17년(1639), 주지인 계특대사가 소실되었던 흥국시를 복구할 때 화강석을 재료로 함께 복구한 다리인데, 1981년 폭우로 일부가 붕괴되어 이듬해 다시 복구히였다.
홍예의 상부, 사람이 다니는 통로는 원래 흙을 깔아 자연노면을 이루었다는데 지금은 시멘트로 덧마감되어 있다. 흙길도 좋고 잔자갈도 있는데 왜 하필 시멘트로 덮어야만 했을까?
흥국사에는 본래 일주문이 없으며, 사적기에 의하면 천황문 아래 영성문(迎聖門)이 정문의 역할을 해 왔다고 한다. 이 영성문은 수박다리(水薄다리-나무로 내를 건너질러 만든 다리)로서 성인(聖人)을 맞이한다는 의미가 있다.
즉, 흥국사라는 불국토로 들어갈 때는 홍예교를 건넘으로써 세속을 떠나고, 영성문을 통과하면 사천왕의 보호를 받는 불법의 사계(寺界)에 들어옴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홍예교는 세속과 불국토의 갈림길이며 흥국사의 불이문(不二門)이라 할 수 있다.
홍예교는 1972년 3월 2일 보물 제563호로 지정되었다. 순천 선암사(仙巖寺)의 승선교(昇仙橋)와 함께 빼어난 무지개다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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