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서화 가운데 여러 작품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작품의 예술성보다 창작자의 명성으로 지정된 보물이 안중근의사 유묵이다. 일본 강점기 하얼빈역에서 침략원흉을 저격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의사다.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조국을 위해 굵고 짧게 살다간 생을 마감하면서 몇몇 유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 왼손 약지가 잘린 손바닥 낙관으로 유명한 모필이 보물 569-2호다.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다 돋아난다. 아마 이보다 더 각별한 권독문은 없을 것이다. 생활의 여가에서 읽으라는 책이 아니라, 살점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지속해서 읽어야한다는 논리다. 나는 이를 패러디해서 “일일불산행족하생형극(一日不山行足下生荊棘)-하루라도 산에 가지 않으면 발바닥에 가시다 돋아난다.”로 바꾸어 보았다.
영웅 안중근의사는 죽음을 앞두고도 흔들림 없이 대범한 붓끝을 휘갈겼다. 거기 비해 필부인 나는 안중근의사의 글귀를 조심스레 본떠 생활에 견주어보았다. 책이야 기본으로 읽어야 하기에 더 강조하지 않아도 됨직했다. 중년이 지나면 이재나 명예는 거의 판가름 나게 마련이다. 덜 채웠다 해서 욕심 부려서 안 된다.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기에 나는 돈 들지 않는 산행이 제일 덕목이었다.
전문산악인들의 세계 최고봉 등정이 가끔 뉴스를 탄다. 우리나라 어느 여성 산악인이 올랐다는 8,000미터 이상 14좌의 사실 여부가 세인들 입방아에 오른 적 있기도 했다. 우리 주변 평범한 이웃들도 동네 산악회를 통해 100대 명산이니 200대 명산이니 올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부러움 반, 남의 얘기 반으로 그냥 흘려들었다. 나하고 거리가 있는 얘기여서다.
모두들 어느 분야에서나 최고기록에 관심이 많다. 최고는 늘 그렇듯 한 사람만 누리기 마련이고 기록은 언젠가는 누구로부터 깨기지 마련이다. 나는 산행에서 등정기록은 무의미하다고 여긴다. 산이 높다고 해서 거룩하지도 않고, 산이 낮다고 해서 허름하지도 않다. 산은 그곳에 있는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다. 그리고 계절 따라, 날씨 따라, 주야 따라, 동행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오는 산이다.
짧은 여름방학 막바지로 개학을 며칠 앞둔 때였다. 내가 십여 전 어느 여고 근무할 때 알게 된 미술교사가 있다. 그간 나처럼 외곽으로 나가 지내다 올봄에 창원으로 복귀했다. 나보다 연상인 그는 정년을 5년 앞두고 있었다. 며칠 전 이분이 산행을 함께 가자고 해서 시간을 내어 동행하였다. 목요일 오후 이분이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로 차를 몰아왔다 차내에서 어디로 갈까 목적지를 의논했다.
길거리는 마침 민방공훈련경보가 발령되었다. 우리는 차내에서 공습경보가 해제되길 기다려 안민고개로 향했다. 평인인지라 산행객은 아주 뜸했다. 고개갓길은 물론 주차장에도 공간이 몇 자리 있었다. 주차 후 고개에서 진해를 내려다보았더니 안개가 자욱해 속천바다와 시가 전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시루봉 쪽으로 걸어갔다. 여름인지라 해가 내리쬐었다면 땀을 제법 흘렸을 것이다.
이분은 두 자녀가 학업을 끝내고 아들은 취업을 한 상태였다. 승진에 마음을 접어서인지 올 연말 명예퇴직을 신청할 것이라고 했다. 이분은 부부교사로 아내는 아직 연금 수혜 연한이 안 되어 몇 년 뒤에 퇴직을 고려한다고 했다. 그사이 이분은 산악회도 가입하고 나름대로 취미생활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분은 투기성보다 안정적인 수입원이 될 만 해 눈여겨 보아둔 사업이 한두 가지 있다고 했다.
내가 여러 번 올랐던 안민고개고 시루봉이다. 이날따라 산마루에 걸쳐진 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내딛는 발걸음 앞만 겨우 보였다. 멀리 보여야할 불모산 송신탑이나 시루봉은 운무에 가렸다. 능선 좌우 발아래 펼쳐 있을 창원과 진해 시가지도 전혀 보이질 않았다. 대신 운무 속에도 선선한 날씨라 산행에 더 없이 좋았다. 우리는 석동 갈림길에서 되돌아와 장어구이 안주로 잔을 채우고 비웠다. 11.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