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判決事申公[瀚]墓碣銘 - 소세양(蘇世讓)
삼가 살펴보건대, 신씨(申氏)는 고령(高靈)의 대성(大姓)이다.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관찰사(觀察使) 신면(申)을 낳고 관찰사가 좌의정(左議政) 문경공(文敬公) 신용개(申用漑)를 낳았는데, 이분이 신군의 아버지이다.
신군의 이름은 한(澣)이고 자는 중용(仲容)인데, 어머니 박씨(朴氏)는 밀원 부원군(密原府院君) 공간공(恭簡公) 박건(朴楗)의 딸이다. 신군은 어려서부터 기골(氣骨)이 준수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미목(眉目)이 그림과 같아 바라볼 때 신선 속의 사람 같았다. 나이 12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공간공이 데려다가 집에서 길렀다.
신군이 병인년(丙寅年, 1506, 중종 즉위년)에 중흥원종공신(中興原從功臣)의 대열에 들어가 정묘년(丁卯年, 1507년 중종 2년)에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그해 가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510, 중종 5)에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사한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고 신미년(辛未年, 1511, 중종 6)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전직되었다.
계유년(癸酉年, 1513, 중종 8)에 평시서 령(平市署令)으로 승진하였다가 호조 정랑(戶曹正郞)ㆍ공조 정랑(工曹正郞)ㆍ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517, 중종 12)에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에 임명되었다. 개성은 왕씨(王氏)의 옛날 국도로서 인물이 번화하여 사시꾼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났으나 신군이 근면 청렴하고 일에 임하여 엄숙 명확하게 하니, 간교한 무리들이 숨을 죽이고 감히 방해하지 못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519, 중종 14) 가을에 문경공이 병환이 나 자리에 누워있자 신군이 벼슬을 버리고 와서 약시중을 들었는데, 특별히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에 임명하였다. 문경공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신군이 죽을 손수 끓이고 약을 직접 맛보며 옷띠를 풀지 않은 지 몇 달이 되었는가 하면, 문경공이 세상을 떠나자 상복(喪服)을 입고 야위어 예절에 지나칠 정도였다.
신사년(辛巳年, 1521, 중종 16)에 상복을 벗고 내자시 첨정(內資寺僉正)을 거쳐 배천군(白川郡)으로 나가 도리에 맞게 어루만지고 이끌었으며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풀었다. 객관(客館)이 지은 지 오래되어 협소하고 기울어졌다. 신군이 자신의 봉급을 떼어서 노는 사람을 고용하여 몇 달만에 중건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526년 중종 21년)에 임기가 차 교체되었다가 다시 내자시 첨정이 되었고 이어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나갔는데, 한결같이 배천에서 다스린 것처럼 다스리니, 백성들이 열복(悅服)하였다.
그때 명(明)나라 사신이 두 번이나 평안도(平安道)를 경유하였고 거기다가 명나라에 가는 통역관 무리들이 무역할 물건을 많이 실어간 바람에 역참(驛站)이 피폐해졌으므로 조정에서 신군을 선발하여 대동 찰방(大同察訪)으로 임명하였다. 신군이 부임하여 청탁을 막고 법을 엄하게 하여 쌓인 폐단을 모두 제거하니, 한 방면이 힘입어 안정되었다.
신묘년(辛卯年, 1531, 중종 26)에 사섬시 부정(司贍寺副正)으로 전직되었다가 사도시 정(司導寺正)으로 승진하였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가 민간에게 있는 폐단을 제거하고 정사에 방해되는 일을 개혁하며 공평하고 준엄하게 하니, 사람들이 두려워서 스스로 피하였으므로 언어나 안색에 드러내지 않고 일제히 교화되었다.
병신년(丙申年, 1536, 중종 31)에 임기가 차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다가 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로 전직되었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좌통례(左通禮)로 승진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39, 중종 34) 봄에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장예원 판결사(掌藝院判決事)가 되었고 경자년(庚子年, 1540, 중종 35)에 첨지로(僉知)로 전직되었는데,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의 조회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에서 돌아와 광주 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신축년(辛丑年, 1541, 중종 36)에 진주 목사(晉州牧使) 자리가 비어있었는데, 여론이 모두 광주는 작고 진주는 업무가 복잡하므로 반드시 신군을 진주로 옮겨 다스리게 해야 걸맞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신군이 진주 목사로 부임한 지 1년이 되자 과연 정사의 고과(考課)에 최고로 뽑혔다.
그런데 신군이 피로가 쌓인 끝에 비장(脾臟)에 병이 나 임인년(壬寅年, 1542, 중종 37) 가을에 이르러 갈수록 심해지자 사직하고 돌아갔다. 계묘년(癸卯年, 1543, 중종 38)에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이미 병환이 위독해져 이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때는 9월 22일이었고 향년 62세였다.
신군은 모습이 단정하고 행실이 곧았으며 명문의 가문에서 낳고 자라 학문에 연원이 있었다. 평소에 성실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한 것 같았으나 일에 임하여 단안을 내릴 적에는 확고하여 동요할 수 없었다. 비록 한 겨울이나 한 여름에도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꿇어앉아 나태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아침에 관아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반드시 먼저 집안을 살펴보되, 거른 적이 없었다.
벼슬살이할 때 정도를 지켜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하지 못하였다. 다섯 번 업무가 복잡한 고을에 부임하여 명확하고 신중하게 명령을 하달하여 법을 범하였을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았으며 교묘하게 숨어서 비리를 저지른 것을 적발하는 데 힘을 쏟아 고을의 소문을 경동(驚動)하니, 백성들이 신군을 신으로 여겨 기만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신군이 매양 과거를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늙도록 손에 책을 놓지 않았으니, 신군은 도를 지키는 독신(篤信)의 군자(君子)라고 이를 만하다. 이해 12월 27일에 양주(楊州) 금촌리(金村里) 선영의 곁에 묻히었는데, 그의 부인 숙부인(淑夫人) 임씨(任氏)는 같은 자리에 따로 묻히었다. 임씨는 풍천(豊川)의 저명한 씨족으로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임맹영(任孟瑛)의 딸인데, 가정을 화목하게 다스려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공보다 19년 전에 죽고 신군과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때는 성화(成化) 임인년(壬寅年)이었다. 2남 4녀를 낳았다. 큰 아들 신여주(申汝柱)는 부여 현감(夫餘縣監)이고 둘째 아들 신여량(申汝樑)은 장예원 사의(掌藝院司議)이다. 큰 딸은 장예원 사평(掌藝院司評) 최금(崔嶔)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김돈(金暾)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승정원 정자(承政院正字) 이순효(李純孝)에게 시집가고 넷째 딸은 구효연(具孝淵)에게 시집갔다.
현감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신방(申撥)ㆍ신백(申栢)ㆍ신권(申權)이다. 사의는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신식(申栻)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천리마는 빨리 달려도 넘어지지 않고 백 번 단련한 강철은 내리쳐도 부러지지 않도다.
하얀 칼날을 착착 내려치니 눈앞에 얽힌 것이 없고,
마음의 거울이 해맑으니 간교한 것들이 숨을 곳이 없었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할 수 있지만 들쭉날쭉한 하늘의 운명을 가지런히 할 수는 없도다.
어찌하여 지위가 높지 않았고 어찌하여 수명이 연장되지 않았는가?
다섯 번 큰 솜씨를 발휘하여 정사를 널리 시행하니,
이름이 공황1)(龔黃)과 맞먹어 천고까지 찬란하리도다.
[각주]
1) 공황(龔黃) :
한(漢)나라의 모범 관리인 공수(龔遂)와 황패(黃覇)를 가리킨다. ≪송서ㆍ영리전(宋書良吏傳)≫에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한나라
때 호구가 번성하고 형벌을 쓸 일이 적었다……공황의 교화가 쉽게 이룩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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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判決事 申瀚 墓碣銘[蘇世讓]
謹按: 申氏, 高靈大姓。 領議政、文忠公叔舟生觀察使㴐, 觀察生左議政、文景公用漑, 卽君之皇考也。 君諱瀚, 字仲容。 妣朴氏, 密原府院君、恭簡公楗之女。
君自幼氣骨稜稜, 大異凡兒, 眉目如畫, 望之若神仙中人。 年十二, 喪先妣, 恭簡鞫于家。 丙寅, 參中興原從功。 丁卯, 授宣傳官。 其秋, 中司馬試。 庚午, 遷長興庫主簿、司憲府監察。 辛未, 拜工曹佐郞, 俄遷刑曹。 癸酉, 陞平市署令, 歷戶、工、刑三曹正郞。 丁丑, 拜開城府經歷。 開城乃王氏故都, 人物繁顆, 欺詐蜂起, 號稱難治。 君勤敏廉簡, 莅事嚴明, 老猾屛息, 莫敢爲梗。 己卯秋, 文景公臥疾, 君棄官來侍, 特除儀賓府經歷。 文景疾大漸, 君饘粥必手調, 藥餌必親嘗, 衣不解帶者累月, 及其捐館, 執喪毁瘠, 有踰禮制。 辛巳, 服闋, 由內資寺僉正, 出守白川郡, 撫馭有道, 威惠幷臻。 客館營搆歲久, 低隘傾圮, 君雇游手捐己俸, 閱數月而重新, 民則不知也。 丙戌, 滿遞, 復僉正于內資, 繼出爲善山府使, 一以白之治爲治, 民乃悅服。 丁亥, 因事罷去。
戊子, 除軍資監僉正。 時平安道再經詔使, 加以朝天舌人輩多輸販物, 驛路凋瘵, 朝議選君爲大同察訪。 至則杜干請、嚴防範, 積蠹盡祛, 一路賴以安。 辛卯, 遞爲司贍寺副正, 陞司䆃寺正。 未幾, 出牧光州, 弊之在民者除之, 事之防政者革之, 廉角竦峭, 人自畏避, 不動聲色而同底於化。 丙申, 政滿, 拜掌樂正, 遷通禮院右通禮, 尋陞左。 己亥春, 特陞通政, 爲掌隷院判決事。 庚子, 遞拜僉知, 以聖節使朝京也。 還牧廣州。 辛丑, 晉州闕牧使, 輿論皆以爲廣小而晉劇, 必移某治晉, 爲可稱矣。 居晉一年, 政果最, 君積勞病脾, 至壬寅秋, 轉痼辭還。 癸卯, 拜上護軍, 病已革矣, 遂不起, 九月二十二日也, 壽六十二。
君器宇端方, 操履貞固, 生長名家, 學問淵源。 平居恂恂然, 似不能言, 至於臨事剸斷, 確乎其不可拔。 雖隆寒盛暑, 整衣冠危坐, 不見有惰容。 朝衙夕退, 必先省庭闈, 未嘗少廢。 居官守正, 人不敢干以私。 五莅劇邑, 明愼號令, 有犯不貸, 務抉奇摘伏, 以警動群聽, 民以爲神, 不敢有欺誣之行。 每以不收科第爲恨, 至老手不釋卷, 君可謂守道篤信君子矣。
是年十二月二十七日, 葬于楊州金村里先塋之側, 與其配淑夫人任氏同原異室。 任氏亦豐川著族, 僉知中樞府事諱孟瑛之女。 治家雍穆, 克盡婦道。 先公十九年卒, 與君同年生, 實成化壬寅也。 生二男四女: 男長曰汝柱, 扶餘縣監; 次曰汝樑, 掌隷院司議。 女長適掌隷院司評崔嶔, 次適金暾, 次適承文院正字李純孝, 次適具孝淵。 縣監生三男一女: 男曰橃、栢、權。 司議生一男三女: 男曰栻。 銘曰:
千里之駒, 迅而不蹶。 百鍊之剛, 決而不折。 白刃差差, 目無盤錯。 心鑑炯炯, 靡遺奸伏。 可盡者我, 難齊者天。 位胡匪峻? 命胡不延? 五把牛刀, 厥施斯普。 名埒龔、黃, 庶耀終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