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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삼상8장) 2022. 4. 24일 주일
1. 사무엘의 아들들의 비리
1절. 사무엘이 자기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았다. 하나님이 책망하지 않으셨음을 볼 때에 사무엘이 사사를 세우는 것은 불법적인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하나님이 임명하여 세울 수 있는 권세를 사무엘에게 주셨던 것 같다(사울과 다윗의 예에서-물론 이들은 하나님이 세우도록 하셔서 세운 자들이었다). 하지만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은 사무엘이 선지자, 제사장, 사사 즉 통치자(왕)의 위치에서 이스라엘을 위한 강력한 법률과 제도를 제정할 수 있는 권세를 사무엘에게 주셨던 것을 암시한다. 사무엘은 이러한 권세를 가지고 사무엘을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권세를 사무엘에게 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은 사무엘이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세우는 것을 용인하셨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무엘에게 부여셨던 권위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무엘이 한 일에 대하여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사무엘이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세울 때에 성령이 특별히 사무엘의 아들들에게 내리지 아니한 것은 문제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성령이 내려야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라는 것이 확증이 되는데, 사무엘의 아들들에게는 성령이 내리셨다는 언급이 없다. 이것은 사사들에게 있을 수 없는 결격 사유이다. 성령이 내려야 하나님의 권위와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사역을 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은 결정적인 결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무엘의 아들들의 근본 문제는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무엘이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세운 것은 잘못한 실책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하나님의 허락을 확실하게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나이가 들자 조바심을 가지고 행한 실책이라고 생각된다.
2절. 아들들: “요엘laeAy”(“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아비야hY"+bia]”(“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다”). 요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뜻을 가졌다. 이 이름은 당시 이스라엘의 혼란스런 상황에서 교훈을 주려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들의 우상숭배와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방 민족들의 신들은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만든 거짓된 신 곧 우상들이었다. 이런 신들을 ‘다른 신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반대로 이스라엘의 신은 곧 여호와이시다. 여호와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요, 또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이루어내시면서 자신을 증거하신 신이시다.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여호와’라는 말은 영원히 계시면서 자존하시는 창조주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신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증인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이 많이 있지만, 이스라엘의 신이 참 신 곧 참 하나님이다. 이러한 뜻을 강조하는 이름이 ‘요엘’ 곧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또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라는 뜻을 가진 ‘아비야’라는 이름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뿌리를 잘 밝혀 주는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그들의 존재 근원으로 하고 있는 민족이다. 여호와에 의해서 계획되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고, 온갖 어려움과 방해와 제거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존속되면서 여호와를 증거하는 민족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교훈하는 상징이 ‘아비야’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무엘이 자기 아들들을 낳고 이름을 지어 줄 때에 적어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자기를 증거하신 하나님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교훈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이러한 이름을 지어주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생각하면서 사무엘은 자기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을 것이다.
3절. 하지만 사무엘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교훈하려는 목적에 부합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사사로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방해가 되는 짓을 했다. 그 행실을 3절은 ‘자기들의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라고 정리하여 설명한다. ‘자기들의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했다’는 것은, 아들들이 아버지의 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아니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아버지 사무엘은 어린 아이 때부터 성전에서 자라면서 하나님 앞에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과 같은 사역을 감당하는 자로서 자라났었다. 그리고 혼란스런 사사 시대 말기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해서 왕정으로 이어주는 특수한 사역을 감당했다. 그를 통해서 세상의 왕들과는 성격이 완전하게 다른 이스라엘의 메시야 왕 제도가 제정되었다.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무엘을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과 같은 인물로서 사역하게 하셨으며, 이 일에 사무엘은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 사역을 감당했다. 그의 사역은 흠이 없는 사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된다. 이런 사무엘의 사역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참으로 중차대한 사역이었다.
그런데 사무엘의 아들들은 이러한 아버지의 사역의 중요성을 훼방했다. 그들은 아버지의 사역에 대하여 주의 깊게 이해하지 못했음이 틀림없고,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목숨을 걸고 경외하면서 섬겨야 하겠다는 의식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 증거를 사무엘의 아들들이 “이익을 따라서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다”라는 구절이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입법적 사법적 행정적인 판단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정이 생명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판결에 있어서 공정해야 함을 이미 모세의 율법에서 누누히 가르쳤다. 사무엘은 나름대로 공정하게 판결하려고 사력을 다해서 그의 생애를 살았었다. 그런데 사무엘의 아들들은 이런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사무엘의 투쟁이 보이지 않았으며, 또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심이 의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는 그들이 눈이 어두워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이렇게 어두운 가운데 빠졌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이 어두운 가운데 빠졌다고 할지라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깨우치고, 교정하고, 회개하게 하면서 신앙에 이르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가 그러했고, 이상과 야곱이 그러했었다. 이런 사람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두운 가운데 빠질지라도, 버리지 않고 다시 세우시면서 구원 곧 하나님 나라에 이르도록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인간이란 이렇게 연약하고 우둔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죄와 어두움에 빠지기 쉬우며, 그래서 엉뚱한 짓을 쉽게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좋은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고도 그와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것과 같이 어리석고 보잘 것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점이다. 사무엘의 아들들의 어리석음 곧 우리들의 어리석음이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위대한 교육자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하신 사역이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르게 가르치는 교훈이 주어질 때에, 우리는 그 의미를 심각하게 고찰하면서 받고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 이 신앙에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인지를 심사숙고 하면서, 이 신앙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 신앙에 굳게 설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무엘의 아들들처럼 신앙의 바다 속에 있으면서도 정작 신앙에는 겉돌다가 어두움에 빠지고 헤매게 되고 돌고 돌다가 그래도 은혜가 있어서 나중에야 구원을 얻는 자리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신앙인의 역사에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2. 이스라엘의 반응과 여호와의 판단(4-9).
사무엘의 아들들이 부패하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모여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요구했다(4-6):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요구했다.
문제를 가지고 아뢰는 사무엘에게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다: “그들이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7-8)라고 응답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시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를 꿰뚫어보면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즉 당시에 이스라엘의 눈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너무나 어설프게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주변 나라들은 똑똑하고 힘세고 싸움 잘 하는 왕들이 등장하여서 강력하게 나라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들 주변에서 이런 왕국들을 보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블레셋이었다. 이 블레셋에게 이스라엘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정함이 없는 사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스렸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이 신으로 임하셔서 사사들을 세워서 백성을 이끌도록 하시는 식의 다스림을 하셨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눈에는 이런 하나님의 통치가 도무지 믿을 만하지도 안전을 보장할 것 같지도 않았던 것이다. 강력하지도 통치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래서는 나라가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무엘의 아들들의 비리를 기회 삼아서 사무엘에게 나아와서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권과 다스리심을 불신하여 거부한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왕 됨을 거부한다’고 말씀하셨다. 19-20절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강경한 거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신뢰하였더라면, 사무엘의 아들들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로써 아뢰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문제에 대하여 해결책을 제시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셔서 다스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장로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에 세상 나라들의 왕과 같은 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신앙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행동이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요구한 세상 왕권과 하나님의 왕권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세상 왕권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세상 왕권을 이렇게 설명하셨다. 세상 왕권은 백성의 젊은 아들들을 데려고 가서 왕의 전차병을 만들며, 말을 몰고 타고 싸우는 사람으로 만드는 제도라고 하셨다. 군대를 조직하여 싸우게 하며, 왕의 밭을 갈고 추수하게 하며, 각종 무기와 장비들을 만들게 한다고 하셨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왕의 종으로 살도록 만드는 제도라고 하셨다(11-12). 또 딸들도 강제로 데려다가 궁을 위하여 살게 만들며, 제일 좋은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을 왕의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며,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1/10을 세금으로 바치도록 하며(13-15), 남녀종들과 좋은 짐승들을 왕 자기가 사용하기 위해서 가지고 가며, 짐승들의 1/10도 바치도록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한 마디로 왕은 백성을 종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6-17).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은 이런 왕의 다스림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각자가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의 말씀을 따라서 살면서 다른 사람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는 나라를 의도하셨다. 그래서 각 가정마다 땅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셨다. 땅이 없으면 남의 종이 되어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두에게 골고루 땅을 유업으로 공평하게 나누어주셨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따라가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섬기면, 복을 주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먹고 사는 일에 걱정하지 않으면서 살게 될 것이며, 이방 나라들에서도 보호하시며 지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런 약속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통해서 그리고 사사 시대 300년 동안 사사들을 세우시면서 반복해서 가르쳐졌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약속이 헛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체험하였다.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들을 따라 갔을 때에는 여지없이 이방 나라들의 압박과 침략과 괴롭힘을 받았지만, 돌이키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사사들을 세우셔서 구원과 안식과 평안을 누리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이 평안하게 사는 길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길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산성과 방패가 되시며, 땅에도 복을 주셔서 곡식과 먹을 것이 풍족하게 되어서 태평성대를 누리도록 하실 것을 반복하여 가르치셨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는 물론이고, 자기 나라 백성들끼리도 지배하고 종이 되는 일이 없이, 각자가 자기 땅에서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 밑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사시 시대 300년 동안 교육하셨다. 사사 시대는 이런 것을 교육하시는 시대였다. 사사들은 이런 하나님의 통치의 심부름꾼들이었다. 그들은 백성을 지배하는 독재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만 두라고 하시면, 언제든지 그만 두어야 하는 임시적인 심부름꾼들이었다.
그런데도 사무엘 시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런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세상의 왕정에서 안정을 구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던 것이다(19-20).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어리석음을 욕하며 탓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그들과 똑 같은 죄성에 이끌리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끊임없이 보이지 아니하게 말씀 곧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며, 저항하고 대 들면서, 불신앙에 빠져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러한 무지와 불신앙은 인간의 본성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런 인간의 완악성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역사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이러한 본성적인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택한 사람들을 일깨우시며, 돌이키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셔서, 믿는 자로 세우신다. 그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구원을 이루어 내신다. 이렇게 하여서 나타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 곧 구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이다. 보잘 것 없는 교회 같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이 그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 나라는 대량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여기저기서 하나씩 혹은 둘씩 나타나서 하나의 공동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 같다. 하나씩 둘씩 소수가 모여서 나중에는 하나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의해서 일깨움을 받고, 돌이키고, 회개하게 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리에 서게 되는 사람들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은혜에 의해서 항상 깨우침과 회개와 믿음의 과정을 거치는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으로 사는 모습은 말씀 곧 복음의 말씀에 이끌리며 순종하는 삶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은 억지로 강요함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원함으로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은 복음을 따라서 살지만,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교회의 다스림에 대하여서도 생각하자. 교회는 왕이 강압적으로 다스리는 곳이 아니다. 곧 백성을 지배하고 강요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이 다스리는 곳이다. 그리고 이 말씀의 다스림은 자유를 주는 가운데서 즐거이 참여하게 하는 다스림이다. 복음이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을 설교하는 목사도 이스라엘이 요구한 것과 비슷한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세우시는 사사들과 비슷하다. 왕이신 주님의 자유하게 하는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일시적으로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이 전해지는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