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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랑의 노래
― 또래면서 꼭 한 세대쯤 늦게 산 어떤 치인(痴人)의 고백
이 문 열
명임(明妊).
이제 그대는 죽어 다시는 돌아 못 올 길을 갔다.
처음 그대의 위급을 알리는 전보가 날아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그것이 나를 그리워하는 그대의 부름인 줄만 여겼다. 스무엿새 달무리가 곱게 지던 그 밤 그대가 가쁜 숨을 모으고 있을 때도 나는 그게 나와 이 세상에 대한 마지막 작별의 준비인 줄은 몰랐었고, 새벽 으스름과 함께 실낱같이 이어지던 그대의 맥박이 멎고 잡은 손에서 따스함이 사라져 갈 때조차도 나는 그것을 언제나 불면증으로 괴로워하던 그대가 길고 평안한 잠 속으로 빠져든 줄만 알았다. 향긋한 생솔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관 곁에서 그대의 마지막 몸단장을 할 때에도 나는 그것이 곧 있을 우리들의 봄나들이를 위한 것으로만 생각했고, 그대의 상여와 함께 넘은 이름 모를 재(嶺〕 위에서조차도 나는 눈이 시도록 맑고 푸른 하늘을 우리들의 나들이를 위해 다행 한 일로 기뻐했다.
하지만 끝내 그대는 갔다. 빛과 생명으로부터, 일찍이 그대의 몸과 마음을 의지했던 세계와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아아, 망자(亡者)여 평안함에 쉬어지이다…….
그러나 ― 그대는 갔지만 나에게서마저 떠난 것은 아니었다. 홀로 돌아와 누운 쓸쓸한 밤 긴 꿈속에, 먼지처럼 쌓여 가는 회한과 그리움 속에 그대는 살아 있다. 어쩌다 편 책갈피 속 곱게 말린 네잎 클로버 잎에서 그대의 잔잔한 숨소리가 들린다. 한집안에 살면서도 종종 건네주곤 하던 쪽지 속에서 가볍게 웃는 그대의 가지런한 치아. 늦어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나를 기다리다 숨는 그대의 펄럭이는 옷자락. 모퉁이를 돌아 먼저 집에 닿으려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 처녀 때처럼 수줍음에 차 문을 열자마자 총총히 돌아서는 뒷모습 이따금 거리의 꽃가게에서 무심코 들여다보는 시클라멘 꽃잎 속에 떠오르는 그대의 얼굴이 있다. 들려오는 속삭임.
꽃은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고 있답니다…….
그리하여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메울 길 없는 슬픔이다. 세상의 어떠한 불안도 다시는 사랑할 수 없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불안만큼 두렵고 절실하지는 않으리라. 그런데 나는 바로 그 불안에 울고 있다. 세상에 사랑할 그 무엇이 있어 그대가 남긴 이 빈자리를 메울 것이며, 그 어떤 기쁨이 있어 이미 놓아버린 이 삶의 잔을 다시 움키게 할 수 있을 것이랴. 나는 지금 죽어 떠나간 그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불행한 나를 위하여 울고 있다…… 얼핏 보아 이기적인 눈물이지만 ― 그러나 그대는 용서하리라. 내가 살아 불행해진 것은 다만 그대를 향해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사랑 때문임에. 세월이 갈수록 날을 세우는 잔인한 회한 때문이며, 모질어지는 고문 같은 그리움 때문임에. 그리하여 이제는 아무도 들어줄 이 없는 넋두리 같은 내 어리석은 사랑 이야기도 그대는 용서하리, 용서하리.
모든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만남으로부터 비롯되는 법이지만, 명임, 나는 우리들의 만남에 앞서 어린 날에 있었던 작은 사건을 하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사랑을 오늘날의 운명으로 이끌어 간 내 불행한 성격의 일단을 보여 주는 사건 ― 어쩌면 이토록 자세하게 듣는 것은 그대도 처음일는지 모르는 ‘포기’의 이야기다.
어렸을 적 한때 나는 거의 병적이리만치 개를 좋아한 때가 있었다. 우리 집에 새로운 개가 들어오면 적어도 이틀쯤은 학교를 빼먹었고 그 뒤 열흘은 학교에서 돌아와도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 개가 우리 집에 머무는 한 어떤 소꿉동무도, 어떤 놀이도 내 열정과 흥미를 끌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 바람에 언제나 내 옷 여기저기에는 개털이 묻어 있었고, 내 몸에서는 흔히 개 비린내라고 불리는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개벼룩 때문에 며칠에 한 번쯤은 DDT를 뒤집어써야 했으며, 어떤 때는 식구들에게까지 옮겨 그들의 구박으로 눈물을 질금거리게 될 때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찬장에 있는 맛난 것은 모두 집어 내 개에게 주어 버리는 짓 때문에 나중에 쥐나 도둑고양이가 물고 간 고기 토막까지 내가 뒤집어쓰게 되었고, 심할 때는 내 몫으로 달인 보약까지 몰래 남겨 억지로 개에게 먹이려다 어머님께 들켜 혼이 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기울인 그 열렬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 보답은 언제나 쓰라린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 한 번은 개 때문에 어머님께 야단을 맞았는데 형들의 알밤이나 누이들의 놀림도 결코 그보다 참아 내기에 수월하지는 않았다. 개가 우리 집에 있는 동안은 담임선생에게도 결코 귀여움 받는 아이가 될 수 없었고, 친했던 동무들조차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거기다가 어린 나를 더욱 괴롭힌 것은 바로 그 개들 자신이었다. 그들이 내 애정에 제대로 보답하는 것은 처음 며칠과 맛나는 고기 토막을 던져 줄 때뿐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개들은 한결같이 내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고, 그중에는 내가 다가가기만 하면 꼬리를 말고 달아나거나 기를 쓰고 짖어 댐으로써 노골적인 배신을 드러내는 개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 괴로운 것은 어린 강아지일 경우 뒤끝이 좋지 않은 점이었다 하나같이 날이 갈수록 까칠해진 털로 비실거리다가 이름도 모를 병으로 죽거나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님께서 들여오시던 개들은 대개 그 무렵에는 제법 귀한 품종들이어서 강아지로 들여오시는 경우가 많았음을 생각하면 그 때문에 내가 받게 될 수난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누구든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 예외 가운데 하나가 이제 말하려는 ‘포기’였다. ‘포기’는 그전에 우리 집에 있었던 개들과는 달리 그리 이름 있는 품종의 개는 아니었다. 내 나이 열 살인가 열하나일 때쯤 안암동 로터리 근처에 있던 우리 집으로 그 개가 처음 들어서는 걸 보고 마침 집 안에 있던 나는 솔직히 실망했었다. 당시 흔하던 전선줄(야전선) 장바구니에 담겨 온 그 개는 황갈색 털의 재래종, 그것도 이제 겨우 젖을 뗐을까 말까 한 강아지였다. 시골 친척이 가져온 것으로 애완용이라기보다는 식구 많은 우리 집의 음식 찌꺼기를 처리해 준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포기’란 서양식의 이름은 그 무렵 연극에 열중해 있던 큰누나의 서구 취향에서 나온 것으로 그 강아지가 암컷이란 데서 어떤 미국 연극(「섬머 타임」이던가.)의 여주인공 이름을 딴 것이라 들었다.
그러나 그 실망스러운 첫 대면에도 불구하고 포기는 곧 전과 다름없이 내 열렬한 애정의 대상이 되었다. 그 전에 있던 스피츠가 어느 날 집을 나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아 나는 벌써 대여섯 달째 허전한 마음으로 지내 오던 터였다. 거기다가 알맞게 살이 오른 몸집이며 부드러운 황갈색의 털은 그전에 내가 안았던 그 어떤 고급 개에 못지않은 애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별로 값나가지 않는 재래종 강아지라 그랬는지 식구들도 이번에는 내 앞뒤 없는 몰입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내 무절제한 사랑이 일쑤 가학적인 성향으로 흘렀던 점을 생각하면 식구들의 그런 방임은 포기에게는 커다란 불행이었다. 포기는 괴로웠을 것이다. 나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숨이 막히도록 포기를 껴안고 돌아다녔으며, 개의 콧기름이 내 얼굴에 얼룩을 만들고 나중에는 내 머리칼에서까지 포기의 잔등에서 나는 것과 같은 냄새가 나도록 부벼대고 했다. 부엌 바닥을 뒹굴던 재래종의 강아지에게는 매일 한 번씩은 목욕을 시킨답시고 물을 뒤집어씌우는 일이 괴로웠을 것이고, 식물성 먹이로도 제대로 채울 수 없었던 작은 위는 토할 때까지 먹여 대는 육류로 여간한 부담이 아니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또 잠자리에선, 말리는 식구들의 눈을 피해 껴안고 자다 내 몸에 깔린 포기의 깽깽거림과 할큄으로 어린 날의 곤한 잠에서 깨어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포기는 그 전의 개들과는 전혀 달랐다. 스스로에게는 고통일 뿐이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보내는 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기라도 한 듯 다소곳이 그 모든 것을 참아 냈으며, 어떤 때 내가 다른 일로 잠깐 자기를 잊고 있으면 스스로 찾아와 그 고통스러운 사랑을 구할 때마저 있었다. 사람의 손때 묻은, 이른바 그 혈통 있는 개들과는 달리 표현이 그리 신통치는 못했지만 포기가 누구보다 나를 좋아하는 것은 분명했다. 예를 들어 포기를 가운데 두고 여러 가족들이 일시에 부를 때면 포기는 어김없이 나에게로 왔다. 야단스레 꼬리를 치며 달려와 안기는 것이 아니라, 한참 동안을 어리둥절해 있다가 느릿느릿 마치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다는 듯 내게로 다가와선 손끝이나 슬쩍 핥고는 슬그머니 주저앉는 식이었다.
포기의 그러한 태도는 그때껏 다른 개들에게서 배신감만 맛봐온 내게는 그대로 감격이었고, 나는 당연히 그 감격의 몇 배를 한층 뜨거운 애정으로 포기에게 되돌렸다. 결과적으로 포기에게는 한 재앙과도 같은 사랑이었다. 그 결과 포기는 다른 강아지들보다 빨리, 그리고 더 참담하게 시들어 갔다. 한 달도 안 돼 곱고 윤기 나던 황갈색 털은 까칠해지기 시작하고, 두 달을 넘기면서부터는 드디어 군데군데 빠지기까지 했다. 자라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드는 듯한 몸피에 자주 눈곱이 꼈으며, 드러나게 움직이기를 꺼려했다. 밥통에는 남은 먹이가 점점 쌓이고 ― 나중에는 누구의 눈에도 금세 띌 만큼 쇠약해지고 말았다.
마침내 그런 포기의 상태는 가족들 모두에게 분노를 샀다. 그들은 그 모든 원인이 나의 무분별한 애정 탓임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으며, 그리하여 어느 날 내게 떨어진 아버님의 호된 꾸지람과 함께 포기는 내게서 해방되었다. 포기의 잠자리는 그날로 내 방에서 부엌으로 옮겨졌고 나는 포기를 안거나 쓰다듬는 것은 물론 그 일 미터 이내로 다가가는 것조차 엄하게 금지되었다. 모든 것이 포기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을 뿐인 내게는 부당하게만 느껴지던 어른들의 횡포였다.
포기도 가족들의 예상처럼 쉽게 회복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게서 벗어나자마자 더욱 급속히 쇠약해 가서 나중에는 아예 음식마저 입에 대지 않는 날이 잦아졌다. 뿐만 아니라, 내가 가족들의 감시 때문에 멀찍이서 애정 어린 눈으로 건네 보며 그 이름을 부를 때면, 힘없이 늘어져 있던 몸을 애써 추슬러 꼬리를 흔들며 말가니 나를 올려다보는 눈길에는 어떤 희미한 열망 같은 것까지 서려 있었다. 결코 어린 내 나름의 억측이 아닌, 아픈 추억이었다.
그러다가…… 내게서 놓여난 지 채 보름도 안 돼 포기는 기어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바람이 몹시 차던 어느 겨울 새벽 벌겋게 단 연탄아궁이에 처박혀 숨을 거둔 일이었다. 코를 찌르는 듯한 누린내에 잠에서 깨어나신 어머님이 부엌으로 달려가셨을 때에는 포기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그을려 버린 뒤였다.
원인은 아무도 몰랐다. 그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이불 속에서 자던 포기에게는 그 밤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추웠을 것이라는 추측뿐, 나도 왜 포기가 그 불구덩이로 기어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식구들은 모두 말 없는 비난의 눈길을 내게 모았다. 나도 까닭 모르게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반쯤 타다 만 포기의 시체를 애기능 부근의 야산에 묻으면서도 그 개에 대한 내 애정까지 후회하지는 않았다.
포기의 끔찍한 최후 때문인지, 아니면 그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 집은 그 뒤 다시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아니 길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결국 포기는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한 개였고, 그 뒤 나는 두 번 다시 개를 안지 않았다. 이 과장의 혐의가 짙은 이야기를 명임, 그대는 이해할는지.
우리가 만난 것은 내가 스물셋 그리고 그대가 열아홉 나던 해의 여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내 어두운 열정의 편력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없이는 어떻게 생판 낯선 삶을 살아온 우리들이 그렇게 공교롭게 만날 수 있었던가를 설명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에 대한 앞뒤 없는 몰입에서 벗어남과 함께 내 유년도 끝이 났다. 그러나 내가 잃은 것은 외곬로 치닫는 열정의 대상이었을 뿐 열정 그 자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두운 열정은 자랄수록 치열해져가 거의 내 소년기 전부를 치정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비뜰어진 몰입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거의 자폐증상(自閉症狀)에 가까운 정신 상태에서 내 소년기의 초입을 장식한 것은 책에의 몰입이었다. 동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남들이 중학 시절이라고 말하는 기간의 태반을 당장 내게 필요하지도 않고 또 그 나이에 합당하지도 않은 책에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또 어떤 계기로 거기서 벗어나자 이번에는 곧바로 격렬한 행동 속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축구나 럭비 같은 운동이었지만 나중에는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운동 중에는 가장 본능적이고 정직한 단련 ― 각종의 투기(鬪技)로 빠져들었고, 다시 거기서 싫증을 느끼자 똑바로 싸움 자체를 즐기게 되는 식이었다. 남들이 고등학교 시절이라고 부르는 시기의 여러 날들을 채우고 있는 그 수많은 싸움들. 어떤 날은 하루에 세 번이나 상대를 때려뉜 적도 있다. 아무것도 요구함이 없는 그 싸움은 어쩌다 된통 걸려 넙치가 되도록 맞을 때조차 상쾌하였다. 그때 진실로 나는 무엇을 위해 싸웠던 것인지, 그 어떤 힘이 버스 칸에서 우연히 흘려들은 말 한마디를 쫓아 도시 반대편 끝에 사는 생면부지의 어깨와 주먹다짐을 벌이게 하였던지…….
그사이 소년 시절은 지나가 버리고 이젠 싸움에도 시들해져 버린 내가 다시 몰두한 것은 모든 종류의 도취였다. 술, 마리화나, 도박 그리고 그대에게는 죄스럽지만 도취로서는 여자까지도 그때에 이미 경험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모든 것에 밤낮으로 취했다. 삼 주일을 내리 마신 슬로 한 달이나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고, 어른들의 진짜 도박판에 끼어들기 위해 어머님의 패물함을 훔쳐 나온 적도 있다. 스물한 살 때인가는 단골 창녀를 빼내 첩으로 삼으려는 어떤 늙은 호색가의 허리를 부러뜨려 놓은 적도 있다.
그 모든 무모한 일을 저지르고도 험한 꼴을 면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재력과 인내를 다한 가족들의 보살핌이 있었다. 조그만 직물 공장으로 시작한 아버지는 당시 신흥 재벌의 대열에 끼어들려 발돋움하시는 중이었고, 사람까지 사서 나를 돌보게 하는 어머님 외에도 사법관을 남편으로 둔 큰누나와 그 자신 엘리트 관료로 착실한 길을 가고 있던 형님은 하나같이 시라소니 같은 이 막내를 파멸에서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셨다. 덕분에 나는 그 같은 세월을 보내면서도 때가 되면 고등학생이 되었고, 다시 나이가 차면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비록 고등학교는 네 번인가 다섯 번만에 변두리의 어떤 신설 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은 당시만 해도 돈만 싸들고 가면 되던 어떤 사립의 어정쩡한 과였지만 나를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운명은 그때껏 나를 그 같은 어두운 열정으로 몰아갔던 때와 마찬가지로 특히 이렇다 할 계기도 없이 돌이킬 수 없는 곳에서 한발 앞서 나를 돌려세웠다. 이름뿐인 대학교 생활도 삼 년째 접어든 어느 날 이것저것 모두 시들해져서 아프리카 어디에나 있다는 용병(傭兵) 부대나 찾아갈까 하고 있던 나는 실로 우연한 기회에 내 전공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며칠 만에 등교했지만 전날 그렇고 그런 친구와 어울려 포커로 지새운 탓에 아무 강의실이나 뒷자리를 골라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꿈결에서처럼 들려오는 얘기 소리가 있었다.
“북명(北冥)에 한 마리 고기가 있어 그 이름 곤(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 모른다.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은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 또한 몇 천 리인지 모른다. 성내어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날아 장차 남명(南冥)에 도달하려 하는바 남명은 곧 천지(天池)라…….”
이상하게도 뚜렷이 들려오는 구절이었지만 나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다시 깨어나니 교수는 아직도 그 구절에 붙들려 있었다.
“장자의 철학은 노자처럼 조화와 부드러움을 숭상하고 있으나 방법의 특질은 힘참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성냄에, 즉 어떤 대립과 부정에서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북명(北瞑)을 어떤 불확정의 세계 혹은 초탈을 필요로 하는 세계로 본다면 남명(南冥)은 어떤 완성의, 또는 그 도달을 위한 지향의 세계로 볼 수 있을 것인데, 장자는 그 발전의 힘을 어떤 강한 부정의 논리에서 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 힘찬 비상의 기세를 다른 곳에서 보이는 풍부한 수식어에 의지하지 않고 ‘성내어 난다[怒而弄印]로만 서술한 것 같습니다. 이게 그 구절에 대한 충분한 설명 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직 젊은 그 교수는 방금 누군가의 질문에 그렇게 성실하게 대답하고는 교재를 챙겨 강의실을 나갔다 그제야 나는 그 시간 이전에도 이따금씩 들른 적이 있는 철학과의 어떤 시간인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것은 집에 돌아온 뒤였다. 까닭 없이 노이비(怒而飛) 라는 구절이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형들과 아버지의 오랜 서가를 뒤져 장자의 번역판을 펴 보았다. 공교롭게도 맨 앞의 구절이었다. 왜 노하여 날아가는가, 무엇을 향하여 날아가는가, 어디서부터 날아가는가. ―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읽어 가는 사이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깊이 그 책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뒤 한동안 내 내면에서 전개된 정신적인 추이를, 더러는 설명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 심리적 변화를 장황하게 얘기하는 것은 피하련다. 지금 와서 그런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또 이 이야기는 거기에 바쳐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때껏 나를 사로잡고 있던 어두운 열정에서 벗어나 비로소 학생다운 학생이 되어 있었음은 말해야겠다. 동양학부로 적을 옮기고 난데없이 노장(老莊)의 사상에 빠져들게 된 일인데 ― 거기서 비로소 나는 당신을 향해 출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지난날의 게을렀던 공부를 한꺼번에 벌충하려는 듯한 그 1년이 지난 뒤에 나는 문득 그런 그들의 가르침이 우리들의 전통적인 정신 속에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궁금하였다. 지금껏 내가 읽고 공부해 온 것이란, 기실 군자(君子) 를 젠틀맨으로 상인(上人)을 슈퍼맨 따위로나 번역하고, 도(道)는 ‘웨이’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타오’라는 고유명사로 된 나름의 관념 덩어리로 만든 서양인 번역을 중역(重譯)한 것이거나, 일본인들의 아집(我執)에 찬 번역에 의지한 것에 불과함을 차츰 깨닫게 된 것이었다. 우리 전통적인 선비 계급에 의한 해석은 어떠한가? 오랜 기간 동안 한문화(漢文化)에 접맥되어 발전해 온 우리의 해석은 바다 건너 사람들과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 그런 의문들에다 마침 졸업논문도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어서 나는 이름은 없어도 옛 선비 출신으로 노장(老莊)에 정통한 사람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 가까이 지내게 된 급우 가운데는 경상도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북부 어딘가의 산골 마을에 해체되다 남은 문중(門中)과 아직도 한학을 숭상하는 집안 어른 몇몇을 모시고 있는 뼈대 있는 가문의 후예로, 그는 나를 위해 자기의 고향을 소개해 주었다. 이제 짐작하겠지만 명임, 그는 바로 그대의 삼종 오빠였고, 내가 그 여름방학을 이용해 찾게 된 그의 고향은 바로 그대가 살고 있던 마을이었다.
안동에서도 동쪽으로 백 리나 더 들어간 태백산맥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던 그 동족 부락, 깎아지른 듯한 벼랑길에 숨을 혁헉거리는 버스 차창으로 내다보면 반듯한 바위마다 희고 검은 페인트로 간첩 자수 권고문과 반공 표어가 쓰여 있던 두 시간을 지나 한군데 산모퉁이를 돌자 옛이야기 속의 마을처럼 퇴락한 고가(古家) 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 마을, 그리고 이제는 그대로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된 그곳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서늘한 감동이다. 도회에서 나고 도회에서 자란 내게는 그만큼 그 마을이 새롭고 신기했던 까닭이다.
그 친구가 소개한 그 선비는 명색뿐이긴 해도 아직 그 마을에 남아 있는 서당의 훈장으로, 내게는 여러 가지로 만족한 노인이었다. 그를 만나고서야 나는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진 선비의 모습이라는 것이 얼마나 조잡하게 분식되었으며, 왜곡(歪曲)과 비하(卑下)의 폐해를 입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거기다가 정말로 다행스러운 것은, 그분이 일견 고루한 유학자로 보이면서도 노장(老莊)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서 먼저 듣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도덕경(道德經)이나 장자(莊子)가 아니라 논어(論語)였다.
“자네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왔으면 나는 동학(同學)의 예로 더불어 노장(老莊)을 담론할 수 있겠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부터 거쳐서 오게.”
석 달 예정의 짧은 체류 기간이었고, 또 사서삼경이라면 불완전한 번역본으로나마 제법 정통해 있는 나였지만, 그가 그렇게 나오자 어쩔 수 없었다. 그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도 한 달쯤은 논어에 할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첫날이었다. 나는 이상하게 엄숙해져 그 노인이 거처하는 낡은 서당으로 찾아갔다. 학교가 파한 뒤에 찾아드는 몇몇 조무래기들이나 하루 일을 끝내고 저물어서야 찾아드는 청년 두엇이 학동의 전부여서 낮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인 줄 알고 아침상을 물리기 바쁘게 찾아간 나는 한 시간도 안 돼 옆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다.
“그럼 지금까지 풀이한 구절을 익히고 있게. 생각이 몸뚱이라면 문자는 의관일세. 그런데 자네는 성현의 알몸뚱이만 살펴보고 의관을 입히는 일은 소홀히 하고 있어.”
음(音)은 알아도 훈(訓)은 제대로 새기지 못하고 뜻은 알아도 토(吐)는 전혀 모르는 나에게 읽은 구절을 외게 하고 나서는 것으로 보아 그도 그 기척을 들은 것 같았다.
이윽고 옆방에서도 맑고 조용한 목소리로 강(講)을 외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어디서 나오는 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직나직한 풀이가 들려오자 나는 비로소 그게 말로만 들은 여사서(女四書)의 일부일 거라는 추측을 했다.
“……부모님의 말씀을 심상하게 여기지 말며, 가르치고 깨우쳐 주심을 따라 크게 그르침이 없게 할 것이다. 만일 깨닫지 못함이 있거든 다시 물어도 안 될 것 없느니라. 부모가 드시면 아침저녁으로 근심하며 염려하고, 신과 버선을 기우고 꿰매며 아래위 옷을 장만하여 계절이 바뀌고 철이 지남에 맞게 모실지니라. 부모가 병환이 나시거든 몸이 침상 곁을 떠나지 말 것이며, 옷의 띠를 풀지 말며, 탕약을 스스로 맛보며, 하늘과 땅의 신령께 아무 탈 없이 보우해 주심을 빌지니라…….”
듣고 있다 보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이런 시대에 그 낡은 가르침을 되뇌는 사람이 있다니. ㅡ 그러다가 나는 문득 그게 누구인가 궁금해졌다. 그 바람에 나는 돌아온 그 노인에게 은근히 방금 읽은 글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다. 대답하는 폼을 보아 그걸 배우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어볼 작정 이었지만 틀린 일이었다.
“송(宋) 약소(若昭)의 여논어(女論言吾) 일세.”
그런 대답이 얼마나 엄격하던지 다른 결 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과 상면할 기회는 뜻밖에도 오래잖아 찾아왔다. 내가 그 서당에 나가기 시작한 지 열흘쯤 된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낮에 출타할 일이 있어 저문 뒤에 찾아오라는 말을 듣고 밤에 서당을 찾은 나는 누군가 내가 쓰던 방에 미리 와 있는 듯한 기척을 느끼며 방문을 열었다. 바로 그대와의 첫 대면이었다.
그 밤을 생각하면, 아아, 지금도 세찬 충격 같은 감동이 인다. 그때 그대는 단정한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늙은 스승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대의 길게 묶은 머리칼은 서안(書案)에 갈아 놓은 먹물보다 더 검게 빛나고 있었고, 방 안을 가득 채운 은은한 향기도 질 좋은 묵향(墨香)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그 삼단 같은 머리칼 내음 때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마주하고 있는 그대의 스승도 더는 그저 한문에 정통한 시골 늙은이는 아니었다. 낮의 출타에서 마신 술 탓인지 얼굴이 약간 불그스레하기는 해도 꼿꼿이 앉아 그대가 나직나직 읽어 나가는 구절에 정신을 쏟고 있는 모습은 옛 사부(師父)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듯했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멍청하게 문고리를 잡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맑은 등피가 씌워진 남폿불이 오히려 어울릴 만큼 고색창연한 그 분위기에 압도된 탓이었다. 연극의 한 무대로 착각하여 당신들 사제 간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지 않은 것만도 이른바 아스팔트 킨트인 나에게는 여간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먼저 발견한 것은 그대였다. 그러나 그대는 눈썹 하나 까닥 않고 읽던 것을 계속하였다. 원래도 좀 잔귀 먹은 데다 술기운마저 돌아 더욱 귀가 어두워진 채 눈까지 감고 있던 그대의 스승이 그런 내 존재를 알아차릴 때까지.
이윽고 나를 알아본 그대의 스승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대와 내가 낮선 타성(他姓) 남녀 간이라는 데 생각이 머문 탓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이내 나를 불러들여 그대와는 좀 떨어진 구석에 자리 잡게 하였다. 자리를 가르기가 귀찮기보다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줄곧 자기 집을 드나든 그대의 나이를 잊어버린 까닭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대는 달랐다. 내가 이상하게 설레는 가슴으로 지정한 곳에 자리를 잡기 무섭게 그대는 조용히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의아롭게 그대를 바라보는 늙은 스승에게 나직나직하면서도 찬기운이 서린 어조로 하는 말이었다. 그대의 늙은 스승도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황망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를 내보내는 폼이 남녀칠세부동석 (男女七歲不同席) 이란, 잠시 잊고 있었던 구절을 되뇌고 있는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명임, 내 영혼이 헤어 갈 길 없는 수렁과도 같은 사랑에 첫발이 빠진 것은. 내가 그 마을을 찾음으로써 풀려나오기 시작한 클로토(운명을 직조하는 여신(女神))의 실은 그 순간 나를 얽어 거의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그대에게 끌어가 얽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가 빗나가겠지만, 그 밤 뒤의 전개를 말하기 전에 나는 다시 그전에 있었던 내 어설픈사랑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 어두운 열정의 편력을 얘기하면서 나는 잠깐 도취로서의 여자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내 나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내가 아무리 어둡고 거친 열정의 세월을 보냈다 해도 사랑을 위한 시도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원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부패한 성(性)에 먼저 탐닉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냐하면 매음은 성(性)을 몇 푼의 돈으로 손쉽게 구입할 수 있으면서 또한 얻을 수 없는 사랑의 보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최소한의 외형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쨌든 그전에 있었던 몇 가지 사랑의 시도가 실패한 전말을 돌이켜 보는 것은 지금에조차도 약간은 쓸쓸하다.
“어머, 우리는 그저 친구가 아니었던가요?”
따라다니는 강아지에게 멸치를 뿌려 환심을 사듯 자신을 둘러싼 기사(騎士) 들에게 값싼 친절을 뿌리던 숙녀, 그 얼간이 기사들 가운데 하나였던 내가 대수롭지 않은 친절에 감격하여 열렬히 사랑을 고백했을 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새침하게 돌아서 버렸다.
“명백한 타락과 범죄를 무슨 수행(修行)처럼 혼동하시는 분, 이제 더는 속지 않겠어요.”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 왔다가 타산의 냉정한 눈빛으로 돌아간 숙녀, 어느 착실한 공학도(工學徒)로 애인을 바꾸었다.
“썩은 고기 토막을 두고 개하고 다투지는 않겠다구요? 야비해요. 제 친구들을 그렇게 험담하다니. 천한 복수예요.”
사귀는 남자의 수가 곧 자신의 가치와 비례한다고 착각하고 있던 숙녀, 더블데이트를 분노하는 내게 절교를 선언하며 그렇게 비양거렸다.
“당신은 저를 숨 막혀 죽게 하시려는 거예요? 정말 못 견디겠어요. 좀 쉬게 해 주세요.”
참을성 없는 숙녀, 내가 무엇을 했기에. 두 달 동안에 겨우 육십번 정도 만나고 백 번 정도 전화한 것밖에 없는데. ― 이것이 바로 몇 번 시도했던 사랑의 전말이었다. 이른바 도회의 교양 있는 숙녀들이 안겨 준 그 숱한 좌절감 때문에 내가 더욱 무분별한 행동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 나는 그대에게서 무슨 예감처럼 그 모든 어리석은 실패들이 보상될 것 같은 어떤 가능성을 본 것 같다. 나의 사랑은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난날의 속단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날 그렇게 돌아간 그대는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솔직한 말로 내 심정을 털어놓고 친구의 도움을 청했다. 삼종 누이라는 혈연을 이용해 그대와 다시 만날 길을 열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내가 몇 마디 꺼내기도 전에 단호히 거절했다. 그대는 그 친구의 일문 중에서도 가장 고풍에 엄격한 집의 딸이며, 그 자신 삼종 간이라고는 해도 그대와 별 내왕이 없다, 거기다가 그대의 아버지는 그 몇 해 전까지도 새알 같은 상투를 달고 있던 완고 덩어리다. ― 친구는 그렇게 이유를 댔지만,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살피는 것으로 보아 또 다른 말 못 할 이유가 있는 듯했다.
그래도 단념하지 못한 나는 우연히 골목에서라도 만나기를 기대하며 시간이 나는 대로 일없이 마을을, 어쩌면 그대가 나올지도 모르는 해거름의 우물가를 돌아다녔다. 끝내 허사였다. 그대가 집 밖을 나오는 것은 하루에 한 번 글을 배우러 나올 때뿐이었는데 그나마도 그대 집에서 부리는 계집아이와 함께였다. 방은 달라도 한 지붕 아래 있는 셈이 되는 서당에서 호젓이 말 붙여 볼 기회를 노려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는 또 이상한 위엄으로 나를 압도하던 그대의 늙은 스승이 완강히 가로막고 있었다.
기껏 진전이 있었다면 나중에 그대의 집 뜰 안이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언덕을 찾아낸 일과 떠나올 무렵 그 친구에게 애원하다시피 하여 정식으로 그대의 집을 방문한 것 정도일까. 그때 그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말라 버린 작은 연못가의 무성한 해당화 줄기가 보였는데, 어쩌다 그곳을 거니는 그대는 그대로 한 송이 청초한 해당화였다. 또 그 친구를 앞세우고 집 구경을 핑계로 찾아갔던 그대의 집에서는 깐깐한 그대 아버지의 질문에 진땀만 흘리다가 도망치듯 나온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 마침내는 그곳을 떠나야 할 날이 왔다. 원래의 목적이었던 노장(老莊)은 뒷전에 두고 홀린 듯, 취한 듯 그 마을을 배회하는 사이에 기한한 석 달이 지나 버린 까닭이었다. 만약 그때가 그보다 두세 해 전만이었더라도 틀림없이 나는 그곳에 눌러앉아 무언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어쩔 수 없게 된 뒤에야 떠났으리라. 그러나 다행히도 그때는 이미 1년 이상 결이 삭은 뒤였고, 또 친구의 감시도 용의주도하여 나는 결국 맨 정신으로는 그대와 말 한 마디 나눠 보지 못하고 그 마을을 떠났다. 유일하게 지난날의 무분별한 행동에 짝할 만한 그곳에서 기억이라면, 떠나기 전날 하루 종일 술을 퍼마시며 마을을 어슬렁거리다가 끝내 그대 집 골목 부근에 곯아떨어져, 잠든 나를 밤이 이슥해진 뒤에야 찾아낸 그 친구가 자기 방에 데려가 뉜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도시로 돌아온 뒤에도 그대를 향한 내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나는 그대의 삼종 오빠인 그 친구에게까지 숨겨 가며 몇 번이나 편지를 냈고, 번번이 수취 거부의 노랑 딱지가 붙어오자 ― 그대는 모르는 일이라지만 ― 한번은 다시 한 번 그대의 마을을 찾으러 정거장까지 나온 적도 있었다. 그제야 그 친구도 내 열정이 예사 아님을 알고 숨겨 놓았던 마지막 이유를 대며 나를 붙들었다.
“그 애에게서 무얼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너는 중요한 것을 잊고 있어. 그 애는 그저 놀기보다 낫다는 기분으로 종숙부의 서당을 다니는 평범한 시골 처녀 아이야. 학교도 겨우 국민학교를 나왔을 뿐이고……. 생각해 봐. 도대체 어느 것 하나 네게 어울리는 것이 있어? 교육, 자란 환경, 지식 내용 ― 거기다가 극과 극에 선 두 집안. 족보도 제대로 따져 볼 길이 없는 도회의 신ᅟᅳᆼㅎ 재벌과 오현(五賢) 자손이란 긍지만으로 버티고 있는 첩첩산중의 몰락한 양반 사이의 벽이란 것이 앞뒤 없는 격정만으로 해소될 것 같애? 그 모든 걸 불보듯 훤히 알고 있는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그렇다고 일시적인 연애라면 더욱 안 되는 일이야. 너야 그 일로 얼마간 상처를 입는다 쳐도 회복할 길이 있지만, 그 애는 그걸로 끝장이야. 그애는 아무리 사소한 상처라도 치유할 능력 이 전혀 없어.
그리고 ― 이건 정말 못할 짓이지만, 이미 너는 내 친구이니까 말해 주지. 그 애는 건강에도 무언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소문이야. 듣기로는 1년의 절반을 누워서 지낸다는 말도 있어. 어쩌면 네가 본 아름다움 가운데는 환자 특유의 창백함이 끼어 있을지도 몰라…….”
거기다가 뒤이은 졸업과 입대 같은 사건들도 내 무분별한 감정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럭저럭 1년쯤 지났을 무렵에는 제법 그대를 잊고 근무에 충실한 신병(新兵)이 되어 갔다.
그러나 명임,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고, 또 그 때문에 뒷날 그대의 잦은 원망을 들은 터이지만, 그때 이미 운명은 우리들을 한 사슬로 얽어 놓은 뒤였다. 그래 놓고도 감쪽같이 나를 속이고 있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후방이라고는 해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인 일등병 시절의 어느 토요일, 나는 뜻밖의 사람들로부터 면회를 요청받았다. 바로 그대와 그대의 남동생이었다. 하도 놀라운 일이어서 나는 처음 그대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겨우 알아본 뒤에도, 나는 무슨 몽롱한 꿈속에라도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꿈은 아니었다. 그대는 분명 처음부터 나를 목표로 하여 멀고 어려운 길을 찾아왔고, 두 살 아래인 그대의 동생, 누이와는 달리 도회에 나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뒷날의 내 처남도, 그런 누이를 위하여 학교조차 결석하고 따라나선 길이었다.
나를 대하자 곧 그대의 두 눈 가득 눈물이 괴었다. 당황 못지않게 까닭 모를 슬픔이 느껴지게 하는 눈물이었다. 이어 그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속하신 분, 정말로 너무하셨어요.”
나로서는 전혀 이유를 알 수 없고 그래서 뜻밖이라 멍하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런 내 태도를 시치미 떼는 걸로 안 그대의 눈에는 일순 슬픔 이상의 어떤 싸늘한 빛이 떠돌았다. 냉정해진 그대의 차근차근한 설명이 내게 끝 모를 기쁨을 일으킬 때까지는 섬뜩하게만 느껴지던 빛이었다.
그대가 그날 들려준 놀라운 내막은 이러했다. 내가 그냥 몹시 취해 골목에 쓰러져 잠들었다고만 기억하는 그대 마을에서의 마지막 밤 나는 사실 그대를 만났었다. 그날 밤 그대는 초저녁부터 그대의 집 근처를 배회하는 나를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진작에도 그대 주위를 일없이 서성대는 내가 짜증스러우면서도 조금은 안쓰러워하던 그대였는 데다, 그날따라 취해 비틀거리는 폼이 무슨 일을 벌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말 많은 이웃과 완고한 아버지의 눈길을 두려워하던 그대는 안절부절하던 끝에 달래 본답시고 대문께로 나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대가 채 몇 마디 건네기도 전에 난폭하게 그대를 끌어안은 나는 취한 사람답지 않게 날랜 동작으로 입술을 홈쳐 버렸다고 한다.
“당신은 나를 불량배 취급을 하고 있지만 나는 진정이오. 기다려 주시오. 반드시 정식으로 다시 찾겠소. 당당히 당신 아버지에게 구혼하겠소.”
그게 비틀거리며 사라지는 내 말이었다고 그대는 일깨워 주었다.
나는 전에 얼핏 그 비슷한 꿈을 꾼 것 같은 적은 있지만 한 번도 그게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그대를 잊으려고 괴로운 노력을 계속하는 동안도, 그런 내 사정을 알 길 없는 그대는 원망스레 나를 기다렸던 것 같다. 반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자 끝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편지를 내기에 이르렀고, 그마저 회답이 없자 벼르고 벼른 끝에 나를 찾아온 길이었다.
오오, 그랬던가, 그대……. 나는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고, 마침내는 쓰라린 마음으로 찾기조차 단념해 버린 귀중한 물건을 되찾은 아이처럼 기쁨과 흥분으로 어쩔 줄 몰랐다.
“저는 이미 그때 정혼한 사람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좀 엉뚱하고, 자칫 경우 없이 사람에게 부담을 주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그대의 그런 말도 내게는 한 감격이었다. 사랑은 사랑이고 결혼은 결혼이라는 편리한 주장 아래, 마음 내키는 대로 이놈 저놈에게 줄 것 안 줄 것 다 주고도, 정신적인 순결 어쩌고 하는 구실로 태연히 면사포를 쓰는 이 시대의 똑똑한 숙너들만 보아 온 내게, 술 취한 치한으로부터 어거지로 끌어안겨 입술 한번 스친 것을 순결이라도 잃은 것인 양 고민하는 그대가 어찌 한 감격이 아닐 수 있겠는가.
갑작스럽고 거의 폭발해 버릴 것 같은 격정에 들뜬 나는 그날로 함께 외출 나간 친구와 그대의 남동생을 증인으로 약혼을 했다. 부모님의 허락을 앞세워 그것만은 뒤로 미루자는 그대를 얼러 대듯 달래어, 조촐한 선물을 마련하고 사진까지 찍은 약혼식이었다. 그대가 스물, 내가 스물넷 나던 해의 구월 어느 날이었다.
그 뒤 내가 제대를 할 때까지의 2년 남짓은 지금도 그대의 서랍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편지 외에는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어쩌면 나는 그대를 향한 사랑으로 위험한 삶의 고비 하나를 넘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군대 전체가 옛날 같지 않고 내가 있었던 부대는 후방의 특수부대여서 더욱 고생스럽지 않았다고는 해도, 내 나이 또한 더는 소년적인 치기에는 어울리지 않고 성격도 그 몇 년 결이 삭은 뒤라고는 해도, 아직은 무슨 휴화산(休火山)처럼 이따금 불과 연기를 뿜는 격렬한 희비(喜悲)가 살아 있던 때라, 행동 하나하나가 규율에 얽매여 있는 3년의 병영 생활에는 충분히 사고의 위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크나큰 어려움은 바로 그 제대 뒤에 있었다. 스물일곱이면 결혼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는 되었다고 판단한 내가 우리들의 약혼을 한 기정사실로 밝히고 그대와의 결혼을 원했을 때 가족들이 한결같이 반대하고 나선 일이었다. 가족들 가운데 유일하게 나와 그대의 일을 알고 있는 바로 손위 누이의 반응을 너무 믿은 게 탈이었다. 원래가 다정다감하고 누구보다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녀가 기꺼이 그대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아무런 준비나 사전 공작도 없이 나는 그대를 있는 그대로 가족들에게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맹렬한 반대를 표시하는 것은 어머니였다.(그대는 용서하기를. 그래도 어머니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며, 그대가 없는 지금에는 이 땅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유일한 여인임에.) 원래 나는 제대와 함께 학교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형들의 성공에 비해서는 불만스럽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정신을 차렸으니 대학원에나 보내 교수로 만들어 보자는 어머니의 발상에 내가 순순히 따른 결과였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위해 장래의 교수 부인에 합당한 몇몇 신붓감을 골라 놓고 내 제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대학은 나와야 하며, 학문적인 소양도 어느 정도 갖추어 내조를 더할 수 있고, 집안도 내 전공 학맥(學脈)에 이어져 교수로서의 출세를 도울 만해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기준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기준으로 보면 그대가 아무런 쓸모없이 보이는 것은 차라리 당연했다. 사서삼경을 다 읽었건 사군자(四君子)를 잘 치건 그대의 학력은 여전히 국졸(國卒)이었고, 그대의 성품과 자질이 아무리 빼어나도 어머니에게는 그저 본 바 없고 미련한 시골 처녀로만 여겨졌으며, 오현(五賢)의 자손이건 옛날에는 삼정승 육판서를 했건 그대의 집안 역시도 내 교수로서의 출세에는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산골 토반(土班)일 뿐이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애원도 하고 사정도 하고 심지어는 내 목숨을 가지고 위협도 해 보았다. 그러나 신혼 때부터 남편과 함께 시장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마침내는 재벌 소리를 들을 만큼 살림을 일으킨 여걸다운 고집에는 나의 그 어떤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나머지 가족들의 생각도 저절로 굳어져 나중에는 우리에게 호의적이던 바로 손위 누이마저 불안한 눈으로 우리를 보기 시
작했다.
나는 마침내 지치고 말았다. 남은 것은 가족들과 그대, 둘 중에 하나를 버리는 길뿐이었다. 나는 결국 27년을 의지해 살아온 집과 가족을 버리는 쪽을 택했다. 어떤 시골 중학교에 자리를 얻어 가족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거기에 파묻혀 버린 일이 그랬다.
두 달 뒤에는 그대도 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도 드물게 쓸쓸한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알리지 않은 탓도 있지만 부모님은 아무도 오지 않았고, 우리 다섯 남매 중에서도 온 것은 쓸데없이 눈물만 쏟고 간 막내 누나뿐이었다. 그대 쪽의 형편도 썩 좋은 것은 못 되었다. 나의 성실한 구혼과 재종질이 되는 친구의 간곡한 권유에 못마땅한 대로 그 혼인을 승낙했던 그대의 아버지는 끝내 결혼식장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사돈들에 노해 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가 버렸고, 참석했던 몇몇 그대 집안사람들도 마침내는 해괴한 듯 혀를 차며 흩어졌다. 그리고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처량해지는 그 신혼여행……. 아무도 한숨 짓거나 울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다음, 명임, 우리들은 진정으로 행복했던 것일까. 이렇게 되어 버린 지금에 와서는 달리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감히 말하련다. 우리는 틀림없이 행복했었다고. 내가 미처 용서를 구할 틈도 없이, 아니 용서를 구해야 마땅한 일을 했다고 깨달을 틈도 없이 그대는 가고 말았지만, 그대는 분명 모든 것을 용서하고 떠났으므로. 용서를 구해야 마땅한 일이란 것 또한 내 어두운 열정으로 가학적이 되기는 해도 내 사랑의 일부였으며 ㅡ 적어도 그때는 그대 역시 그 사랑을 기뻐하였으므로.
그때 내가 그대에게 부린 탐욕은 실로 끔찍한 데마저 있었다. 나는 그대의 검고 윤나는 머리칼부터 국민학교 아이들만큼이나 작고 흰 발끝까지 그대의 몸에 속한 것이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온전히 나 혼자만의 소유 아래 두고자 했고, 과거로부터 미래에까지 그대의 기억과 생각이 머물 수 있는 정신세계 또한 그 구석구석까지 나만으로 채워지기를 갈망했었다. 그때껏 경험했던 그 어떤 무분별한 탐닉이나 몰입보다 더 극단한 탐닉과 몰입이었다.
이를테면 그대의 몸에 대한 내 탐닉은 병적인 것에 가까웠다. 내 몸이 그대와 함께 있는 한 나는 어떤 형태로든 끊임없이 그대를 느끼고 소유를 확인해야 했다. 일요일 같은 날 그대는 거의 밥 지을 틈도 없이 내 곁에 잡혀 있었다. 내가 잡고 있는 교편만 아니었더라도 그대는 훨씬 빨리 치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 탐닉에 질식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심한 것은 그대의 영혼을 향해서였다. 나는 아무리 내 핏줄이라도 나를 향한 그대의 사랑이 분산되는 것이 싫어 아이조차 가지지 못하게 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지도하다가도 문득 그대가 나 이외의 것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떠올리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같은 여자라도 그대가 호감을 보이면 견딜 수 없는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
거기다가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까지 겹쳐 시작된 것이 우리들의 ‘공부’였다. 나는 그 한 해 동안에 중고등학교 6년의 교과과정이 다 들어간 학습 계획표를 짜고 그것을 엄격하게 실시해 나갔다. 정말이지 우리들의 사랑과 앵글로·색슨족(族) 의 언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수학 공식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세계사 연표(年表) 또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그대는 놀라운 진도를 보였다. 분명 과중하게 생각되는 과제를 내놓고 출근해도, 돌아오면 그대는 어김없이 그것들을 이행해 놓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린애처럼 기뻐하면서도, 새롭고 과중한 교과 외의 부담을 그대의 지친 영혼 위에 얹어 갔다. 동양적인 논리와 지식에만 익숙해 있는 그대에게 내가 읽기를 원한 불완전한 번역의 그리스 철학들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 나이 그 기간 동안에 익힌 영어로 멘스필드의 단편들을 번역시킨 것은. 그러고도 어쩌다 그대가 그 과제들을 다 이행하지 못하면 턱없이 실망한 표정을 짓거나 맹렬히 화를 내었다.
언젠가 한번은 옆자리가 허전하여 자다가 깬 적이 있는데, 그때 그대는 방구셔에 조그만 촛불을 켜 놓고 다음 날의 과제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심어 준 한도 깊었을 것이고, 원래도 그대에게는 심한 불면증이 있었지만 ― 나는 확신한다, 그대의 그 피투성이 노력은 무엇보다 면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하기야 그것이 그토록 젊은 나이에 그대를 시들게 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줄 알았더라년 나는 결코 기뻐할 수만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날이 갈수록 광기에 가깝게 나를 휘몰아 가는 어두운 열정은 그대의 그 피투성이 노력을 다만 영롱한 사랑의 결정으로 단정 짓게 만들 뿐이었다. 나와 미친 사랑이 그대의 파리한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두 개의 영혼이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완전한 융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고만 믿게끔 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더욱 가슴 저려 오는 기억은 그런 내게 그대가 조그만 저항조차 보여 준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기껏 있다면 지나치게 과중해서 당연할 수밖에 없는 과제의 불이행을 그대 스스로 슬퍼하고 괴로워함으로써 나를 벌할 뿐이었다. 그대의 불행이 된 동시에 나의 불행이 된 그대의 눈먼 순종이었다.
“제가 천사가 아닌 것은 당신이 불평하지 않아도 제겐 충분히 슬픈 일이에요.”
그래도 결국은 그대가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달은 내가 언젠가 느닷없이 화를 내었을 때 그대는 쓸쓸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대가 맞대 놓고 내게 한 말 가운데 가장 항의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 밖에는 정히 견딜 수 없을 때면 슬픔 어린 눈으로 나를 멀거니 건네 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합당하지 못한 비유가 될지는 몰라도, 그때 나는 그대의 그 눈길에서 내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는 포기의 눈길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이 오늘을 예감케 하는 불길한 조짐은 그해가 다 가기도 전에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첫 번째 변화는 그대가 눈에 띄게 게을러지고 멍 청 하게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내 독려에도 불구하고 과제들이 이행되지 않는 날이 잦아졌고, 둘 만의 긴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 도중에도 그대의 정신은 엉뚱한 곳에 쏠려 있는 듯 느껴지는 일이 흔히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그대의 사랑이 식어 가는 조짐으로 알고 불같이 화를 내거나 탄식 같은 한숨을 내뿜곤 했다. 사실 그대의 몸과 마음이 지쳐 있으리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성화에 못 이겨 안간힘을 쓰는 그 순간순간이 바로 생명의 기름을 한 방울 한 방울 짜내 우리들 사랑의 제단 앞에 불태우고 있는 것이란 사실만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대가 유난히 식은땀을 자주 흘리는 것은 처녀 시절부터 보아온 터라 나는 유의하지 않았다. 때때로 잠든 그대의 숨결에 가냘픈 신음이 섞여 나와도 나는 역시 그것을 피로에서 온 것 이상으로는 염려하지 않았다. 더구나 결국 그대를 앗아 간 병균의 대표적인 증상인 기침 같은 것은 그대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방심하고 있던 그동안도 그대의 몸은 몹쓸 균으로 속 깊이 침식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비로소 그대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은 그해도 다 지나가는 동짓달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때 아닌 비바람에 함빡 젖어 돌아온 나는 옷을 갈아입고 이불을 펴자 왠지 낮부터 그대의 몸을 탐하고 싶어졌다. 번개를 유난히 두려워하는 그대도 오들오들 떨며 내 품에 안겨 있어 일은 더욱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대의 신음 속에는 어딘가 애련하고 꺼져 드는 듯한 그 무엇이 느껴지더니 이내 잠든 것처럼 조용해졌다. 문득 불길한 예감으로 몸을 일으킨 나는 비로소 우리를 향해 출발한 불행의 첫 신호를, 이 멀고 긴 이별을 예고하는 조짐을 발견했다. 그대는 혼절해 있었던 것이다. 성적(性的)인 환희의 절정에서 있다는 그런 종류의 혼절이 아닌 것은, 놀라 젖힌 이불 밑에 드러난 그대의 처참하게 야윈 나신(裸身)만으로도 이내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의 미친 사랑은 끝내 그대의 생명까지 파먹어 들어간 것임에 분명했다.
다행히도 그대의 의식은 곧 회복되었다. 그러나 왕진 온 시골 공의(公醫)는 무엇 때문인지 노골적으로 내게 화를 냈다. 그 지경이 되도록 그대를 방치한 데 대한 비난의 뜻이었으리라. 그대의 야윈 몸에서 죽기 얼마 전의 마르고 비틀어진 포기의 몸이 연상되자 까닭 모를 두려움에 빠진 나도 그길로 그대를 가까운 도시의 종합병원으로 옮겼다. 진단 결과는 처녀 때 앓은 결핵이 근치되지 않고 있다가 임파선과 장기(臟器)에까지 침입했다는 내용이었다. 진작 데려왔으면 생명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을 것을 너무 손을 늦춰 당분간은 입원시키고 경과를 봐야 되겠다는 게 병원 측의 얘기였다.
그런데 괴로운 것은 시골 사립 중학교 교사의 박봉으로 살아가느라고 우리에게 비축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 새삼 버리고 떠나온 가족들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의 집에 의지할 처지도 못 되는 나는, 가불을 하고 빚을 내어 간신히 입원을 시켰지만 뒤가 참으로 난감하였다.
어머니가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속은 썩여 와도 사랑하던 막내라 언제나 연락만은 닿게 해 두고 있었던지 오자마자 그대를 좋은 병실로 옮긴 그녀는 이어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대의 병세가 호전되어 요양 치료가 가능할 만큼 되었을 때 나에게 간곡히 권했다.
“저 애의 병, 특히 임파 결핵에는 부부 생활이 매우 해롭다는구나 아무래도 당분간은 별거를 하는 게 좋겠다는 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었어. 어떠냐? 저 애는 요양하러 보내고 너는 하던 공부나 마치지 않겠니? 언제까지나 중학교 선생 노릇이나 하고 있을 작정이 아니라면 한 살이라도 털 먹었을 때 석사 학윈가 뭔가라도 받아 놓는 게 좋을 게야 또 그게 저 애를 빨리 낫게 하는 길도 되고…….”
만약 그 길에 그대를 위한다는 뜻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그대와 헤어지는 쪽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떻게 들었는지 그대도 눈물까지 보여 가며 그 길을 권했다. 그대 자신은 특별한 요양지보다 친정집에 돌아가 치료하겠다는 말과 함께였다. 대학에 다니던 처남도 그대와 뜻을 같이했고, 또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대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거듭 다짐했다. 그렇게 되자 내 미친 사랑도 더 이상은 자기주장만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결국 퇴원한 그대는 처남과 함께 친정집으로 떠나가고, 며칠 후 교원 생활을 정리한 나는 새 학기의 등록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대가 처남에게 부축되어 차에 오른 지 두 달이 채 못 돼 그대가 위급하다는 전보가 날아들었다. 그 무렵 나는 진학 준비도 밀쳐 둔 채 그대가 없는 날들의 쓸쓸함과, 나를 한번 사로잡은 뒤 곧 놓아주지 않는 까닭 모를 불안을 연일 폭주로 달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승낙은 했지만, 어머니와 의사와 처남이 공모하여 나로부터 그대를 뺏어간 것 같은 의심마저 키워 가면서. 그런 나였기에 처음 그 전보를 받았을 때 나는 그것이 나를 그리워하는 그대의 부름만으로 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늘과도 같은 이 괴롭고 긴 이별은 내 상상에조차 없었다.
나는 어떤 불안보다는 그리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가능한 빠른 교통수단만을 골라 그대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대는 이미 마지막 숨을 모으고 있었다. 어머니가 차로 보낸 서울의 이름 있는 의사까지도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돌연하고 급작스러운 악화였다. 거기다가 거의 의식이 없는 중에도 간간 나를 알아보고 짓는 미소로 그대의 위급은 더욱 내게 실감이 안 났다.
그런 그대에게서 비로소 내가 어떤 위기를 느낀 것은 새벽 으스름이 가까웠을 무렵이었다. 그대의 숨결이 갑자기 느려지는 대신 정신은 새롭게 맑아진 듯 내게 앙상한 손을 내밀었다. 촛불이 꺼지기 전에 한 번 빛나듯, 다해 가는 그대의 생명이 그 마지막 불꽃을 내게 비춘 것이리라.
“저, 그 개 말이에요. 언젠가 당신이 얘기하신 그 강아지, 포기라던가……. 그 강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세요?”
그대는 느닷없이 포기의 애기를 꺼냈다. 이미 그런 그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여운이 서려 있었다. 나는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그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을 그리면서 죽어 갔어요. 당신의…… 따뜻한 품을 그리다가……. 연탄 화덕이라 하셨던가요? 아마 포기는 거기서 당신의 품을 찾으려 했던 걸 거예요……. 아니, 분명 찾았을 거예요. 그리고…… 그 환희 속에 살가죽이 타는 것도 모르고 죽어 갔겠죠. 당신 잘못은 아니에요. 당신…… 잘못은…….”
그대는 두 번이나 끝말을 반복했다. 그대가 이 세상에서 내게 베푼 마지막 사랑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잠시 감았다가 뜬 그대의 눈길에는 이미 최후를 절감한 자의 광기가 어려 있었다. 약해진 목소리도 흐느낌처럼, 절규처럼 들렸다.
“가까이 와서…… 절 안아 주세요. 힘껏, 힘껏 말예요……. 포기처럼…… 쓸쓸히 죽어 가게…… 버려두지 마세요…….”
그런 그대의 말은 그 어떤 극렬한 고통의 호소보다 더 아프게 내 가슴을 후벼 왔다. 나는 힘주어 그대를 껴안았다. 마치 떠나려는 그대의 영혼을 그렇게 함으로써 움켜잡아 두려는 듯이. 그러나 미처 새벽 으스름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대의 숨은 멎고 끝내 이 땅에는 살아 불행한 나만 남았다.
아아. 망자여 평안함에 쉬어지이다…….
(1994년)
* 미발표 전작을 『아우와의 만남 ― 이문열 중단편전집 5』(둥지, 1994)에 수록.
2016년 12월 6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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