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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귀로(歸路)를 찾다.
2017년 12월 31일
글/ 지린성 수련생 구술
[밍후이왕] 나는 올해 66세로 인생의 전반 부분은 순탄하지 못했다. 1995년 운 좋게도 파룬따파(파룬궁)를 만나 사람은 우주의 본성에 동화되어 천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왔음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大法 수련으로 들어왔다.
나는 책을 단 하루라도 읽어본 적이 없고 큰 글자 하나도 알지 못했지만 수련 후 빠른 시간 내에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진상을 알릴 때 사람들은 내가 어쩌면 그렇게 잘 말할 수 있냐고 하면서 “교수보다 더 교수 같네요!”하고 말하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에 감사드렸다.
나의 수련 이야기를 말해보겠다.
고난의 어린 시절
우리집은 베이다황(北大荒)에 있었고, 집에는 형제자매가 9명인데 나는 여자아이 중에 맏딸로 태어났다. 그 시절 부모님은 다 출근했기에 나는 6살부터 밥하는 것을 배워 부뚜막 앞에 낮은 의자를 놓아야만 도마에 닿을 수 있었으며 그렇게 일가족의 밥을 했다.
8살에 학교를 가야 할 때 신청만 하고 수속하지 못했는데 추수를 해야 했기때문이다. 나는 보리 이삭을 주어야 했기에 그해에는 공부를 못했고, 9살 되던 해 또 신청은 했지만 밭에 김을 매야하기에 또 공부를 못했다.
10살 되어 신청하자마자 어머니가 여동생을 출산해 나는 산후조리를 돕고 동생을 돌보며 집을 정리하고, 닭을 기르며, 돼지 먹이를 끓이고, 세끼 밥을 준비해야 했다.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매 끼마다 나는 조금이나마 잘 드시도록 작은 솥에 따로 밥을 해드렸다.
일하기 바빠 학교에 다니고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40일의 산후 휴가를 마치고 출근했고 집안일은 모두 내 몫이었다.
옷을 빨고 기저귀를 바꾸며 동생을 잠재워야 했으며 동생이 울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내 아래 입술을 빨도록 했다. 그 후로 학교에 가는 얘기는 다시는 꺼내지 않았는데 이렇게 평생 공부할 기회를 잃었다.
몇 살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어릴 때 나는 이곳은 내 집이 아니며 내 집은 천상에 있다고 느꼈다. 밤에는 하늘에 있는 별을 보면서 내 집이 어딘지 찾았는데 너무 높아 닿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각종 상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막대기를 하나하나 묶고 그 위에 젓가락을 하나하나 이어 하늘까지 이어서 젓가락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사람으로 사는게 너무 고달파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면 죽는 것이 더 나았다고 여겼다.
그때 내 천목(영안, 천안, 제3의눈)은 열려있었는데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다른 생명들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나는 그의 상황을 볼 수 있었지만 나는 다들 나와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했다.
저녁 구들에 누워 잠잘 때 창문 위쪽 벽과 인접한 곳에 뭔가 두 생명체가 보였다. 알록달록한 갑옷을 입고 손에는 창과 작살을 들고 있었으며 얼굴은 험상궂었는데 매우 무서웠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지 않으려 했으며 가족들이 놀랄까봐 말도 못했다. 한쪽에 한 명씩 그들은 매일 그곳을 지켰다. 수련한 후에야 그들은 금강호법 神들임을 알았다.
14살 되던 해, 농장에서 일꾼을 모집했다. 나는 갖은 방법을 다해 가려했고 집안일에서 벗어나려 했다. 집 문을 나서자 나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남자 일꾼들과 함께 온종일 일하고 힘든 일을 다 했다.
‘다자이(大寨: 문화혁명 시절 모범 지역)를 따라 배우고’, 토지를 개간하며, 수로를 만들고, 짐을 지며, 땅다지개를 굴렸는데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으며 남자 일꾼과 같은 노동 점수를 받았다.
나는 일하는 솜씨가 좋았고 속도가 빠르며 세심했는데 속일 줄 몰랐다. 내가 일하면 다른 사람이 안심할 수 있기에 일을 배치할 때 내가 혼자 한 가지 일을 독립적으로 하게 했다.
번 돈은 모두 어머니께 드렸으며 이렇게 결혼 전까지 일했다. 단 하루도 공부하지 못했고 일자무식이었다.
18살, 결혼 상대를 찾아야 하는데 나는 죽어도 싫었다. 차라리 절에 가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욕설에 견딜 수 없었고 부모님을 화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비구니가 될 수 없으니 시집을 가겠다고 하고 20살 되던 해에 목수에게 시집갔다.
그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는 요리사였는데 아버지는 도시에 있는 대학교에서 일하다 상사에게 미움을 사 농장으로 내려왔다. 그의 집에는 그들 부자 두 명뿐이었는데 보기에 안됐다고 생각해 그에게 시집갔다.
결혼 후 처음 몇 년은 그나마 평탄했다. 나는 열심히 일하며 몇 푼 저축했다. 하지만 셋째 딸을 낳은 후 시아버지는 나에게 이혼을 강요했으며 나를 내쫓았다.
왜냐하면 내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인데 그의 집은 독자여서 대를 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혼을 거부했다.
남편도 나를 때리고 가라고 강요했으며 딸 셋을 기차에 버리려 했는데 누가 주우면 안아가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심지어 밖에서 망을 보면서 아들에게 아가씨나 대학생을 찾아주겠다고 했다.
문화대혁명 이후 정책을 시행하면서 시아버지는 도시로 전근하게 됐다. 나도 시아버지가 도시로 전근하길 바랐는데 그러면 아이들도 공부하고 장래성이 있을 것 같았다. 연이어 아들이 태어났지만 계속 병을 얻었다.
어느 날, 옆집에 티벳불교 라마승 한 분이 오셨는데 그는 나를 보더니 복이 많다고 하면서 내가 남쪽으로 엄청 멀리 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시아버지가 지금 정책이 시행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연말 마지막 날에 당신 시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결정이 정정될 것이니 위에 큰 철인이 찍혀있을 겁니다”라고 말했고 또 “당신 시아버지가 이 일을 하는데 두 마리 용이 구슬을 갖고 놀고 있고 용 앞에는 등이 길을 비춰 주고 있는데 온 가족은 당신 덕을 본 것입니다”라고 말해줬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과연, 연말 31일 시아버지는 돌아오셨는데 손에 종이 한 장을 들으셨다. 나는 글자를 모르기에 종이에 쓰인 내용은 모르지만 그 위에는 정말로 큰 철인이 찍혀 있었고 우리는 도시로 갈 수 있었다.
1981년 온 가족은 도시로 가게 됐고 호구도 올렸지만 나는 온 몸에 병을 얻었다. 관절염, 류머티즘성 관절염, 요근(腰筋) 손상으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반시간 이상 천천히 움직여야만 일어날 수 있었으며 심장병, 히스테리로 매일 잠을 잘 수 없었고 입으로 왜 죽지 않냐고 중얼거렸다.
심한 부인과 질환으로 양측자궁부속기염, 자궁경부미란을 앓았으며, 가장 심각한 것은 비염이었다. 또 많은 것들에 대해 알레르기가 생겼다.
한 원로 중의사는 내 맥을 짚어 보더니 나에게 무슨 화가 그리 많으냐고 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화가 안날 수 있냐고 생각했다. 이 집을 위해 많은 것을 헌신했다며 마음속으로 불평이 많았다.
건강이 나쁜 관계로 가슴은 항상 답답했다. 길을 찾을 수 없었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었으며 살아 있는 것이 너무 고생스러운데 어떻게 할까?
그리하여 나는 절에 가서 불교에 귀의하고 거사가 되어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에는 절에 다녔다.
1994년 연말, 절에 있는 한 비구니는 내 가게에 와 삭발을 했는데 그녀는 파룬궁 리훙쯔 사부님의 광저우설법 비디오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급히 듣고 싶어 설날 후에 돌려주겠다고 했다. 9개 비디오에서 그녀는 나에게 마지막 3강 비디오를 주었다. 나는 그 3개의 비디오를 갖고 고향에 설을 쇠러 갔었다.
이 비디오를 나는 반복으로 들었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기타 비디오를 바꿔 들었다. 당시 ‘전법륜’은 아직 발행하지 않았기에 나는 ‘파룬궁’ 앞 페이지에 있는 ‘개론’과 사부님 경문 ‘미혹 속의 수련’, ‘인과’를 외웠다. 그것은 비구니가 베낀 것이었는데 그녀가 읽어주자 나는 바로 기억했다.
수련하기 전 몇 달간의 불교와의 인연은 나로 하여금 불법의 기본 상식을 알게 했고 인과응보, 생사와 윤회, 운명 등을 알게 됐다.
파룬궁 사부님의 설법을 녹음으로 듣고 나는 절에 가서 관음보살상에 향을 올리면서 “저는 대법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오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1995년 초 40여세 나이에 나는 정식으로 법륜대법 수련을 했다. 이것이야말로 나를 진정으로 천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법보임을 알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
그동안의 고통은 오늘날 대법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 후로 나는 죽을 생각을 다시는 하지 않았는데 딸들은 기뻐하며 “이제 잘됐네요. 우리 엄마 이제 죽을 생각을 안 하네요!”라고 말했다.
연공장에 나가서 많은 노수련생들을 알게 됐다. 어느 날 한 노수련생 집에 갔는데 벽에 사부님 교공도(教功圖)가 있는 것을 봤다.
사부님 몸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금빛이 줄줄이 내려 왔는데 촘촘히 눈꽃처럼 눈부셨다.
그날 저녁 꿈을 꿨는데 연공장에서 사부님께서는 보도원에게 나를 화단에 있는 작은 길옆에 있으라고 전하셨다. 보도원이 나에게 알려주자 나는 가서 서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내 뒤에 서서 내 신체를 정화해주셨는데 나는 사부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보지 못했다. 돌아서서 사부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려 했으나 사부님께서는 이미 가셨다.
이 꿈을 꾼 이후 며칠 동안 땀구멍에서 찬바람이 휙휙 나가는 것 같았으며 걸음을 걸을 때는 힘주어 걸어야 했는데 힘주지 않으면 발은 땅에서 뜨려고 했다.
아침 연공을 마치고 장갑을 벗어보니 손에 뼈와 힘줄 그리고 살가죽만 남아있었는데 나도 막 무서웠다. 집에 돌아온 후에야 차츰 나아졌다.
그 며칠 온 몸에서 찬바람이 휙휙 나갔는데 나는 추워서 덜덜 떨었고 치아가 부딪쳤으며 열이 나고 입과 코에 물집이 생겼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자면 몸이 뜨는데 이불을 덮으면 이불마저도 떴다. 나는 사부님께서 내가 믿음이 부족할까 봐 내 몸에 기적을 모두 현현해주신 것임을 알았다.
파룬궁을 4~5일 연공했는데 내 전신에 있던 병들은 감쪽같이 다 나았다! 당신이 얘기해보라, 어떻게 수련하기 싫을 수 있겠는가!
한겨울에 눈이 오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큰 빗자루를 들고 연공장의 눈을 깨끗이 모두 쓸어 놓고 다른 사람들이 연공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보도원은 “아! 누가 눈을 쓸었나요?”라고 물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 후 게시판을 만들었는데 나는 매일 아침 메고 와 연공장에 걸어 대법을 알리고 더욱 많은 인연 있는 사람들이 대법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연공을 시작해서 오늘까지 23년간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는데 간혹 어떤 일로 한 장이라도 빠뜨리고 연마하지 못하면 다른 공간에 있는 본체(本體)의 어느 한 부분이 연화가 안 되는 것을 보게 되어 바로 보충한다.
나는 연공장에서 사부님의 지난, 광저우, 다롄, 창춘, 옌지 설법 테이프를 한 세트 청해 여러 번 반복적으로 들었는데 법리에 대한 이해가 많이 빨라졌으며 신체 변화도 빨랐다.
1995년 초,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을 정식 출판하셨는데 금방 내가 대법에 입문했을 때였다. 4월에 보도소에 가니 두 배낭으로 책을 가져왔는데 나도 한권 요청했다.
‘전법륜’을 받고 너무 기뻤다! 하지만 나는 한 글자도 몰라 매우 조급했다. 이 좋은 법을 몇 십년간 찾아서 겨우 만났는데 볼 수가 없다니! 나는 그 때까지 누구도 원망한 적 없지만 부모님을 원망하게 됐다.
어릴 때 나에게 공부를 못하게 해 현재 대법책을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연공장에서는 수련생들을 몇 개 소조로 나눴다.
하지만 몇 명의 늙고 지식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법공부 소조에 안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저희 집에 오세요. 우리도 법공부 소조를 만듭시다”라고 말했다.
우리집의 법공부 소조에는 처음 몇 명밖에 안됐지만 점차 많아졌는데 가장 많을 때에는 30여 명에 달했다.
법공부 소조가 우리집에서 법공부를 하면서 나의 법공부에 엄청 큰 도움이 되었다. 모두 함께 법을 읽었고 통독했는데 나는 수련생들이 읽는 것을 들으면서 한 줄 한 줄, 한 자 한 자 따라 봤다.
혼자 법공부 할 때는 사부님 설법 테이프를 대조하며 했다. 나는 모든 설법 테이프를 다 갖고 있다. 하지만 ‘전법륜’은 사부님께서 정리해 출판하셨기에 각지에서의 설법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중 광저우 테이프의 내용이 ‘전법륜’과 별 차이가 없이 맞았다.
수련생은 나에게 “글을 배우려면 먼저 어떻게 쓰는지 보고 읽는 발음을 보며 그 다음에 글자의 뜻을 아는데 당신은 어떻게 배우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법을 배우고 글을 익히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부님 설법하신 내포를 먼저 이해하고 글이 어떻게 생겼는지 배웁니다.”
몇 개 글자 외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예를 들면, 사부님께서는 “어떤 소수의 사람은 또 잠을 잘 것인데, 내가 강의를 끝내면 그도 잠을 깬다. 무엇 때문인가? 그의 머리 안에 병이 있어 그에게 조정(調整)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조정하면, 그는 전혀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서 반드시 그를 마취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데, 그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청각부분에 문제가 없어 그는 잠을 달콤히 자지만 도리어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듣는다. 사람은 이때부터 정신이 나며 이틀을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는다.”[1]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먼저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뜻을 이해하고 머리에 있는 병을 제거할 때 어떠한 상태가 나타나는지 알며 자신을 대조하는데 마찬가지로 나도 자고 있었지만 다 들었고 마지막에 한 글자 한 글자 어떻게 생겼는지를 본다.
이 ‘수(修)’자를 말하자면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큰소매가 펄럭이며 나부끼는데 수련은 너무나 아름다우며 나쁜 것들을 수련해 버리고 천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 글자는 오색찬란하며 너무 예쁘다! 조금씩 아래로 나쁜 것들을 버리는 것이 수련이다. 책에 있는 공백 부분에는 모두 法輪 또는 금빛이었는데 다 법이었다. 사부님께서 뭐라고 얘기하시든지 나는 다 그대로 믿었다.
법공부에 집중하고 글을 익히기 위해 나는 반년 간 집에 있으면서 연공장에 가지 않았는데 ‘전법륜’을 읽을 수 있게 됐다. 그 후 연공장에 갔더니 보도원은 “어디 갔었나요? 찾으러 집까지 가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집에 반년 있었고 이 시간에 ‘전법륜’을 한 번 읽었다고 말했다. 반년에 1번만 읽었지만 나는 독립적으로 법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날 아침 연공장에서 돌아올 때 대법을 수련하는 교수와 함께 걸어오게 됐다. 그는 어제 하루에 ‘전법륜’ 4강을 읽었다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아, 나는 반년에 9강을 1번밖에 못 읽었는데, 너무 차이가 크네!’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어제 저녁 꿈을 꾸게 됐는데 꿈에서 그가 하루에 4강을 읽은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어떻게 먼저 알게 됐냐면 그들이 너무 부러워서였다고 했다.
지식이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교수보다 더 교수 같아요.” 나는 절로 ‘그래 전생에 나도 교수였겠지’라며 위로했다.
집에 와서 딸과 이 일을 말했는데 딸은 나에게 “어머니,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금방 글을 배웠지만 천서(天書)를 읽지 않습니까.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도 ‘전법륜’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얼마나 심오한가요. 어머니는 참으로 교수보다 더 교수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전법륜’을 읽는 기초 상에 다른 많은 글자도 알게 됐고 사부님께서 발표하신 경문도 나는 혼자 읽을 수 있었다.
어떤 글자의 발음은 정확하지 않지만 단체 법공부 때 수련생들이 정정해주며 정확한 발음을 알려준다. 그날 법공부 할 때 내가 읽을 차례였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모두 정리해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은 제거해 버림으로써 당신이 앞으로 수련할 수 있도록 보증하지만, 반드시 진정으로 대법(大法)을 배우러 온 사람이어야 한다.”[1]를 읽을 때 ‘리순(理順)’을 ‘루순(捋順)’으로 읽었지만 나는 틀린 것을 몰랐다.
옆에 있던 수련생 한 명이 퉁명스럽게 바로 “뭘 읽는 거예요? 어떻게 읽는지 알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바로 잘못했음을 알았는데 어떻게 법을 잘못 읽을 수 있는가? 매 한 글자는 모두 불도신인데!
나는 가책을 느꼈다. 나는 사부님께 감사드렸고 내 발음을 정정해주고 내 심성을 제고해준 수련생에게 너무 감사했다!
지금 모든 대법책을 나는 모두 읽을 수 있으며 법공부 할 때 글에 대한 장애가 없으며 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글도 다 알아본다.
모두들 “한 글자도 모르든 데에서 이 짧은 시간에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아는데 참으로 교수보다 더 교수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나에게 주신 지혜이고 대법이 나의 지혜를 열어줘서인데 나는 너무 행복했다!
남편과의 관계
남편은 도박을 좋아해 누가 부추기면 바로 갔으며 돈을 다 잃으면 돌아왔다. 그는 성욕도 강했는데 마치 이것을 위해 사는 것 같았다.
수련 전에 내가 양측 자궁부속기염으로 부부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남편은 참을 수 없어 이혼하자고 말했다. 나는 동의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자기가 다 키우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건 안 되고 누가 네 명의 아이를 키워주겠냐고 반문했다.
89년 법원에서 이혼수속을 마쳤는데 나는 건강이 나빠서 언제까지 살지 몰라 아이들은 모두 남편에게 맡기는 것으로 판결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이혼은 했어도 집은 떠나지 않겠어요. 애들을 버릴 수 없어요. 그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책임져야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때 큰딸은 18세, 작은 아들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아이들을 그에게 맡기려니 나는 시름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혼자서 네 명의 아이를 양육하게 됐다. 그는 집에 계속 있었지만 나는 아이 한 명을 더 키운다는 생각으로 아이들 옷을 사면 그의 옷도 사주고 용돈도 줬다. 나중에 그는 내 돈을 훔쳤는데 내가 물으면 그는 얼버무렸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미용실을 맡아 경영했는데 하루 종일 서 있어서 너무 힘들었지만 애들을 키워야 하니까 참았다. 우리는 이혼한지 10년 됐지만 그간 그는 늘 도박하고 여자를 찾으며 자유로이 보냈지만 실제로 나를 떠나 생활한 시간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누가 그와 진심으로 생활할 수 있겠는가?
그는 돌아왔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검사를 받았는데 방광암이어서 종양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그는 덩치가 커서 그를 부축해 일으키고 눕히는데 많이 힘들었고, 대변이 나오지 않아 나는 손으로 파냈다.
이때 그는 울면서 애들과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것은 운명이니 치료를 잘하라고 위로해줬다.
나는 법을 얻고 나서 대법을 그에게 알렸으며 그와 함께 법공부하고 연공했다. 법공부를 한 후 그는 모든 것을 알게 됐는데 울면서 “나는 본체를 갖고 갈 수 없겠네”라고 말했다.
입원 8개월 좀 더 됐을 때 암세포는 폐까지 전이되었지만 나는 줄곧 병원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 보살폈다. 그는 질병으로 20여만 위안을 썼으며 내 저축도 대부분 썼다.
내가 남편을 보살필 때의 정성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은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는지 그들은 나를 모두 칭찬하면서 “너무 대단해요, 이혼한지 오래 됐는데도 지극히 돌봐주는데 쉽지 않네요!”라고 했다.
내가 남편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한 병실에 있는 환자, 병원 의사, 간병인들은 모두 감탄했고 나는 그들에게 법을 전해 대법을 알려줬는데 책을 본 사람도 있고 대법을 수련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화장터에서 돌아올 때 남편의 동료는 나를 그녀 친척에게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녀의 친척도 배우자가 질병으로 사망하고 돈도 지위도 있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말할 수가 없어서 그냥 “그럼 4년을 기다려 아들이 대학 졸업하게 되면 그때 보죠”라고 말했다. 누가 4년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이 일은 자연스럽게 거절됐다.
남편이 사망한 후 나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생각났다. 그것은 베이징의 지식청년들이 하향해 우리 농장에 왔을 때인데 한 청년은 나에게 유달리 잘해주었다.
그는 내 오빠와 동갑이었는데 각종 구실로 우리집에 와 나를 만났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그는 바로 내 앞에 나타났지만 연애나 혼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해 그는 베이징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는 나에게 “나를 따라 가요. 베이징에 데리고 갈게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부모님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그와 함께 가면 도피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때 주변에 많은 여자들이 연인과 함께 도피하는 현상이 적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뒤에서 듣기 거북한 말을 많이 했다. 나는 집에서 맏딸인데 내가 이렇게 하면 여동생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또 나는 글도 모르는데 그렇게 멀리 있는 베이징에 가서 그가 나를 구박하면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오는 길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거절했다.
그때 그는 책상에 엎드려 울었는데 “당신을 아내로 맞지 못하면 나는 평생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맹세했다. 다음해 그는 베이징에서 나를 찾아 왔지만 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가 결혼준비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를 만나지 않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나는 어머니 집으로 갔는데 그와 함께 하향한 동창들을 만나게 됐고 그가 줄곧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여동생들은 베이징에 가서 그를 찾으라고 부추겼다. 그들의 부추김에 못 이겨 마음이 일어났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다시 만나서 타당치 않은 거동을 하면 지금까지의 수련이 헛된 것이 아닌가! 나는 자신을 단속하고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법을 얻었는데 이 좋은 법을 그도 얻게 해야 할 것인데, 만약 그를 만나면 꼭 그에게 법을 얻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일하러 간 다음 조용해지자 그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지만 나는 될수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마음이 무척 고달팠다.
어느 날 꿈을 꾸게 됐다. 꿈에서 나는 금색 사막 위에 홀로 누워있었는데 의식 속에서 사부님께서는 공중에 황금색 가사(袈裟)를 입고 높고 높은 곳에서 하신 말씀이 아래로 울렸다 “하나의 속인 마음이 있어도 올라갈 수 없다!”
그 소리는 큰 종소리와 마찬가지로 윙윙 울렸다. 내가 눈을 떠보니 내 몸은 9개의 링에 의해 묶였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묶여 있었다. 나는 나가야지! 몸을 곧게 펴고 조금씩 위로 뽑았다. 몸은 천천히 위로 올라갔으며 링은 아래로 빠졌다. 다 빠지고 난 다음 나는 내가 자주색 나는 도가 도포를 입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부터 그에 대한 생각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됐다. 사상업은 제거됐고 정마(情魔)는 소멸됐는데 나는 이 한 마디 “하나의 속인 마음이 있어도 올라갈 수 없다!”를 더욱 명심했으며 나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더욱 엄격히 다스리게 됐다.
나는 아이들이 많아 집도 크다. 사위와 다음 세대들을 다하면 10여 명 되는데 그들은 대법을 수련하지 않는다.
대법의 아름다움과 수련인의 풍모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이는 가정 내에서의 사소한 일처리에 반영된다.
속인의 이치로 말하면 나는 60세가 넘었고 아이들은 다 젊은데 우리집에 오면 나는 편하게 쉬고 일은 아이들이 해야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수련하는 사람의 수련 층차와 경지는 모든 일에서 표현되는데 제거하지 못한 사람 마음은 모두 구체적인 일에서 표현된다.
그들이 오면 이것저것을 먹고 싶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한 것은 다른 사람이 한 것과 맛이 달라요!” “외할머니가 볶은 반찬은 정말 맛있어요!”라고 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해 잘해준다.
가끔은 힘들고 아플 때가 있어 조금 쉬고 싶었지만 나는 수련인이고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으며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하면 안됐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1]라고 알려주셨고, 대법제자는 표준에 도달해야 하는데 “큰 뜻을 품고서도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는다(懷大志而拘小節)”[2]라고 말씀하셨는데 작은 일은 보통 가정생활에 표현된다.
작은 딸이 대학 1학년 다니던 해에 아들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작은 딸에게 “네 동생 바라지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 너는 아버지 보고 돈 달라고 해라. 네 아버지가 또 도박판에 가서 잃게 하지 말고”라고 말했는데 딸은 화를 내면서 내가 동생 편을 든다면서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바라지 할 수 있겠어요? 나 스스로 장학금을 탈게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오해가 생겼는데 9개월간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도 않고 나와 말하지도 않았으며 고의적으로 나를 화나게 하고 욕했다. 나는 속상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아들딸은 한 생의 인연인데 예전에 내가 잘못 대하고 화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이지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어떤 물질이 배후에서 교란해서인지도 모르는데 너무 가엽구나! 또 내 업력이 그에게 떨어졌을 수도 있는데 사부님께서는 “왜냐하면 업력이 누구에게로 떨어지면 바로 그가 괴롭기 때문인데, 보증코 이러하다.”[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막내딸은 괴롭기에 화내는데 그것은 내 업력이고 그녀가 나를 대신해 제거하고 있다. 참음을 수련하는데 그 ‘인(忍)’자는 칼이 마음에 박혀있어 아프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나는 마음이 움직이면 안 된다.
9개월이 지났다. 나는 마치 아무 일 없었듯이 막내딸을 대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관을 넘은 것을 보고 변화를 가져다주셨다. 학년이 끝나고 막내딸은 2천 위안의 장학금을 받아왔는데 나에게 겨울신발을 사왔다.
언니 둘은 막내딸에게 나에게 사과하라고 했는데 막내딸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했다. 언니 둘은 “어머니가 우리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드셨니?”라고 말하자 자매 셋은 서로 껴안고 울었다.
내가 주방에 있을 때 막내딸은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막내딸은 울면서 “어머니, 제가 너무 철이 없었어요. 잘못했어요. 어머니를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를 다독이면서 “엄마는 화 안 났어. 엄마가 어떻게 너에게 화낼 수 있겠니?! 엄마는 괜찮아”라고 말했다.
딸은 겨울신발을 내 놓으면서 연공할 때 신으라고 했는데 나는 신발이 있으니 딸에게 신으라고 했다. 우리 둘의 발사이즈는 같았는데 거절할 수 없어 하루 신고는 발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딸에게 줬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딸은 대법에 더욱 가까워졌는데 대법책을 읽기도 하고 알고 있는 대법 진상을 지인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얼마 전 막내딸은 자가용으로 티베트 여행을 떠났는데 출발하기 전에 호신부를 달라고 해서 여행 내내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웠다. 일행 차량은 5대인데 기타 4대는 산사태 등의 사고를 당했지만 딸의 차는 아무 일 없이 주자이거우(九寨溝) 대지진 전에 그곳을 떠났다. 딸은 “사부님께서 저를 보호해주셨어요”라고 말했다.
몇 년 전 작은 아들은 결혼준비를 하려고 새집을 샀다. 하지만 기업이 부도나면서 일자리를 잃었는데 은행대출을 상환할 방법이 없었다. 아들은 내가 알면 걱정할까 봐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누나를 찾아가 고충을 말했다.
나는 딸집에 가서 아들을 만났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일을 말했다. 아들은 의아해하면서 “어머니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들에게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좋은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리고 또 내가 살고 있는 집을 팔아 대출을 상환하자고 했다.
급히 돈을 써야 했기에 30만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집을 27만5천 위안을 받고 팔았다. 나는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잃어야 하고 수련하는 사람이 무엇을 잃지 못하겠는가?!
누나들은 동생을 원망했고 또 내가 동생 편을 든다고 말했지만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들에게 빨리 직장 찾으라고 재촉하지 않았고 여유시간 있을 때를 이용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자신을 향상시키라고 권했는데 아들은 밥하고 반찬하는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1달 내에 3가지 자격증을 취득했다. 운전면허, 회계자격증, 회계출근허가증이었는데 빠른 시간에 취직이 됐고 월급도 기존 월급의 3배나 받게 되어 경제적인 문제가 완화됐다.
자신의 이익을 버린 것은 중생을 위해서이고 사사로운 감정에 좌우지되어 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몸소 이 모든 것을 다 봤기에 대법 사부님의 가르침이고 대법이 정념을 갖고 있는 생명에 대한 배려임을 알았다.
자녀들은 그들의 환경에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는데 효과가 좋았다. 그들이 대법 수련에 들어올 수 있도록 좋은 기초를 닦았다.
우리 대가족은 늘 밖에 가서 외식하고 여행하는데 국내 국외 여러 곳을 다녀왔다. 휴일이면 나는 아이들이 나를 찾아오기를 바랐다.
오면 나는 그들에게 사전(史前)문화, 전통문화, 사람의 이치와 업무 중 도를 어떻게 장악하는지 말해줬는데 아이들은 매우 믿었다. 그들은 “우리 어머니는 교수보다 더 교수 같아요!”라고 말했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성자(聖者)’[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홍음2-두려워 떨게 하다’
(밍후이왕 제14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원문발표: 2017년 11월 11일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1/11/356197.html
법륜대법(파룬궁)은 중국 길림성 출신인 李洪志 대사께서 1992년부터 중국에서 전하기 시작한 심신수련법으로, 몸과 마음의 정화효과가 탁월하여 현재 전세계 100여개 국가에 전파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의 사람들보다 業이 많아 대부분 몸에 질병이 많기에 몸은 등한시하고 마음만 닦는 방법으론 병든 사람들을 해탈시킬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홍지 사부님은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성명쌍수의 大法으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제도하고 있습니다.
전법륜은 법륜대법의 수련지침서로 중문강의를 번역한거라 이해하기가 다소 어렵더라도 끝까지 여러번 읽어보시면 인생을 살면서 꼭 알고 싶었던 진리에 대한 많은 의문점들을 해결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전법륜 책에는
진정한 나는 누구이며,
왜 인간으로 태어나 고생하며 사는지,
우주만물의 근원인 우주의 특성(우주의식, 우주 정신)은 무엇인지,
업력을 소멸하고 공덕을 쌓는 법
수련과정 중에 나타나는 각종 문제점과 예방책, 제3의눈(천목), 숙명통, 빙의현상과 방언, 주화입마, 공중부양현상, 몽유병, 자심생마의 실체, 살생과 육식문제, 질병의 원인, 영감, 근기, 청정심 등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이나 종교인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이 담겨 있어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수행을 하든 모두 지도적 작용이 있는 책입니다.
사람은 감각기관을 통해 후천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여 인식한 정보를
대뇌에 저장하게 되는데 이런 정보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거짓말을 진실이라 믿고 살면 거짓말에 속아 나중에 낭패를 보는 것처럼
평소 우리가 무엇을 자주 보고 자주 듣는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야동을 보면 음욕이 일어나 음욕을 만족시키려 하듯이
나쁜 사람, 부정적인 기운과 좋지 않은 음식을 늘 가까이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물이 들어 몸과 마음이 탁해집니다.
삼겹살 식당에 가면 누린내가 자연히 옷에 스며드는 것처럼
깨닫지 못한 거짓 선지자와 거짓말을 진리로 포장한 글,
좋지 않은 기운이 발산되는 책이나 부정적인 글,
탐욕과 분노와 악행을 일삼는 사람,
술, 담배, 마약, 해로운 가공식품같이
몸과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들을 가까이 하면
보약 속에 든 비소처럼 자신을 서서히 해롭게 만들 것입니다.
컵 안에 든 흙탕물을 맑게 정화시키는 방법은
깨끗한 물을 계속 부어서 맑은 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옷이 더러우면 맑은 물에 들어가 씻어야 하듯이
우리의 몸과 마음도 청정하게 하려면
맑고 밝은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받아서 탁하고 어두운 에너지를 몸 밖으로 배출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큰 지혜와 도력과 자비심을 고루 갖춘 대각자의
고차원 에너지가 발산되는 진실한 가르침이나 경전을 자주 보고,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하는 명상과
가급적 유해물질이 없는 순수한 식품을 적당히 먹고, 아울러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자신을 정화시키는 길입니다.
따라서 살아생전에 대각자와 正法을 인연하는 것은 우리에게 최고의 행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마음가짐(욕심과 불신여부)과 업력의 크기에 따라 정화효과 또한 다르게 나타나니
단시간에 효과가 크지 않다고 실망하기 보다는 꾸준히 보고 정진하는게 바람직할 것입니다.
성자들이 이르길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대각자를 만나기는 더더욱 어렵고, 설령 대각자를 만나도 믿음을 내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후천적으로 형성한 고정관념이 대각자의 가르침과 상충되면 사상이 혼란해져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가진 지식이나 관념이 과연 진실한 것인가를 먼저 성찰해보고 관념이 아닌 직관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시중에는 깨달음을 내세워 돈벌이에 치중하는 수련단체들이 아주 많은데, 수련의 원리에 관한 체계적인 가르침도 없이 이런저런 수련법을 짜깁기해서 가르치는 곳이 많다 보니 수련자들에게 상기증, 빙의, 정신착란, 금전갈취 등의 각종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이를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곳이나 찾아가서 수련하다간 도리어 좋지 못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으며, 특히 스승이 가르친 법리대로 실천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다간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많은 게 수련의 세계이니 심신수련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전법륜 책을 꼼꼼히 읽어보시고 수련의 원리와 주의할 점 등을 먼저 정확히 파악하신 후에 수련하시길 바랍니다.
전법륜 보기 => https://www.dafamedia.or.kr/book/HTML/zf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