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 이은 연속 2> 백범 김구 그에게는 민족을 위한 새로운 구상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즉 그가 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와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통해 깨달은 신지식에 의하면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취했던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민지(民智)를 깨우쳐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하였다.
1902년 부친상을 당한 백범은 그 이듬해 해상과 함께 예수교에 입교함과 동시에 구국교육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예수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예수교가 애국계몽운동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는 과거 시험을 위한 공부와 잡학에서 시작하여 동학·유학·불교를 거쳐 예수교에 정착하는 사상적인 방랑을 경험하였다.
백범은 장연의 광진학교와 봉양학교. 문화의 서명의숙, 안악의 양산학교와 안신학교, 재령의 보강학교 등에서 가르치는 한편 사범 강습회를 열어 교사를 양성, 훈련하였고 '해서교육총회' 를 조직, 학무총감으로 활동하였으며, 환등기를 가지고 황해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왜놈' 원수들을 갚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잠시 진남포 감리교회의 의법 청년회 총무의 일을 맡아 서울에 올라와 상동교회파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을사조약반대 상소운동에 앞장섰고 1907년에는 안창호·전덕기·이승훈 등과 함께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였다.
백범은 고능선의 손녀와 혼약이 깨어진 후에 결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부친의 거상 중에 여옥을 만나 해상 후에 결혼하기로 했으나 여옥의 죽음으로 불가하였고 평양 사범강습 중(1904)에 최광옥의 소개로 안창호의 동생 신호를 만나 약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신호 측의 사정으로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해 말에 최준례를 만나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혼하고 최준례를 서울의 정신학교에 유학시킨 후 곧 결혼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한국강점을 서둘렀다.
한국인의 저항은 여러 형태로 일어났다. 1909년 10월에는 안중근의 의거, 12월에는 이재명의 의거가 있었다. 백범은 안중근의 의거로 잠시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무혐의로 곧 출감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연말 "안악사건(일명: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15년 징역을 언도 받아 수감 중에 터진 "105인사건" 에 걸려 또 2년을 추가 받아 17년의 징역에 처하게 되었다. 처음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14년에는 17년 전 치하포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항만 축조공사 등에 강제 노역을 당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이름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바꾸고 호를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호를 바꾼 것은 "우리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의 정도는 되고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소원을 가지자"는 뜻에서였다. 1914년 인천감옥에서 가석방된 백범은 안악으로 돌아왔다. 출옥은 하였지만 아직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부인이 교원으로 있던 안신학교의 일을 돕다가 신천 동산평의 농감이 되어 농장 내의 소작인들에게 근검절약, 상부상조의 질서를 가르치는 한편, 학교를 세워 자녀교육에 힘쓰도록 하였다. 술과 노름으로 일삼던 그 농장은 백범의 노력으로 희망의 새 동산으로 변화되어 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백범은 자유롭게 뛰어들지 못하는 자신의 가석방 신세를 생각하면서 민족독립을 위한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망명이었다. 3월 3일 사리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백범은 안동을 거쳐 독립운동을 돕던 이륭양행의 선박 편으로 그 해 4월 13일 상해에 당도하였다. 그 날이 마침 3.1운동의 결정으로 성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포 일이었다. 백범은 바로 애국계몽운동 시절의 선배이며 임시 의정원 의장인 이동녕을 찾아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1945년 11월 임정 정부의 주석으로 임정 요인을 이끌고 환국할 때까지 전후 27년 동안 임시정부의 보위발전과 국내외 독립운동을 영도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김구는 안창호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하였다. 초창기 임시정부를 주도하던 안창호는 국무회의 결의를 거쳐 백범을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5년 남짓 그 자리에 재임한 백범은 당시 다망다난하던 임시정부 요인의 안녕과 임시정부 수호의 중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백범에게 주어진 임무는 다양하였다. 이동녕과 안창호는 물론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그를 이은 제 2대 대통령 박은식 연해주에서 부임한 국무총리 이동휘 국치이래 상해에서 독립운동 기반을 닦은 신규식 등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을 모시고 임시정부의 보위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20여명의 정복 또는 변복의 경호원을 거느리기는 했지만 일제 측의 파괴공작과 임정요인 위해 공작으로 백범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다음주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3 연속-
<자비원 지안 스님 213-268-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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