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4명 딱 한그릇 시켰다 명동의 ‘전지현 짜장면’ 실화
2023.08.30
에디터 채인택
지난 8월 24일로 한‧중(중화인민공화국) 수교와 한‧대만(중화민국) 단교가 나란히 31주년을 맞았다. 그날에 맞춰 찾은 명동 중국대사관(서울 중구 명동 2길 27) 주변은 언제나처럼 높은 담과 대문 앞에서 경비하는 경찰과 화교들이 하는 인근 중화요리점을 찾아온 손님으로 붐볐다.
대사관 부지와 건물은 1992년 한‧중 수교로 소유권이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갔다. 대만 외교관들은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내리고 떠났다. 대만은 현재 서울 광화문에 주한대만대표부를 운영한다.
중화요리로 남은 중화민국의 흔적
하지만 중화민국의 흔적은 이 일대에 여전히 남아 있다. 더욱 강한 역사의 흔적은 대사관 정문부터 회빈장(會賓莊‧건물 재개발로 폐문)‧산동교자(山東餃子)‧개화(開花)‧행화촌(杏花村)‧향미(鄕味) 등 줄지어 늘어선 화교 운영 중화요리점이었다. 모두 수많은 한국인에게 추억의 가게다. 명동 중화요리 거리는 한성화교중고 근처의 서울 마포구 연남동 중화요리 거리, 인천 중구 옛 청나라 조계(租界)가 자리 잡은 차이나타운, 청나라 영사관이 들어섰던 부산역 앞 초량의 청관골목(현 상하이 거리)과 더불어 한국 화교의 중화요리 심장부에 해당한다. 전국 곳곳에 화교들의 중화요리점과 한국인이 하는 중국음식점이 2만 개 넘게 있다지만 이곳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중화요리 문화의 고향이자 심장부다.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정문 앞 오른쪽에는 중화요리점(오른쪽)이 즐비하고, 왼쪽에는 중앙우체국이 있다. 중국대사관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민씨 일족이 청나라에 요청한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주둔했던 자리다. 사진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중국대사관 정문 오른쪽에 자리 잡은 대만 계열의 한성화교소학교‧부설유치원(중구 명동2길 35)은 최근 수리를 마치고 말끔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았다. 1909년에 개교한 유서 깊은 학교다. 대사관 정문에서 50m쯤 직진하면 오른쪽 건물 4층에 한성화교협회(중구 명동 2길 26) 사무소가 있다. 한성화교소학교와 화교협회 건물은 중화민국 소유가 아니어서 중국에 넘어가지 않고 화교들에게 남았다.
4층에 한성화교협회가 자리 잡은 명동의 빌딩. 중화민국(대만) 정부 소유가 아니라서 1992년 한‧중 수교 당시 중국에 넘어가지 않고 화교들 소유로 남았다. 사진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대사관의 높은 담장 앞 2층 건물 입구에 ‘한화교민복무위원회(韓華僑民服務委員會‧Overseas Chinese Service Association)’ 간판이 보였다. 중화민국 건국자 쑨원(孫文)의 사상을 전파하는 삼민주의대동맹 한국지구가 둥지를 틀었던 장소다. 건물의 중앙 위쪽에 청천백일기 문양이 각인돼 과거 중화민국이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카페로 바뀌었다.
명동 중국대사관 담장 앞의 '한화교민복무위원회(韓華僑民服務委員會‧Overseas Chinese Service Association)' 건물. 중화민국 건국자 쑨원(孫文)의 사상을 전파하는 삼민주의대동맹 한국지구가 둥지를 틀었던 곳이다. 중화민국 시설의 흔적인 청천백일기 문양이 건물의 중앙 위쪽에 보인다. 지금은 카페로 쓰인다. 사진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화교들의 중화요리 vs 한·중 수교 이후 중국요리
중국대사관 정문에서 왼쪽으로는 중앙우체국이, 오른쪽으로는 중화요리 가게와 과자점‧중화물품가게‧항공물류업체가 줄지어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와 중국의 근현대 교류사의 가장 강력한 흔적으로 남은 화교들의 중화요리는 한국인과 애환을 함께했다.
한국에선 구한말 들어온 청나라 상인과 그 후손인 화교들이 하는 음식을 중화요리로, 1992년 한·중 수교를 전후해 입국한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자들이 하는 음식을 중국요리로 나눠 부르는 경향이 있다. 한국 화교는 청나라가 무너져가던 1898년 의화단(義和團)의 난으로 고향이 전란이 휩싸이자 황해를 건너 가까운 한반도로 이주한 산둥(山東)성 출신이 90% 이상이라고 한다.
이들은 고향의 음식문화인 산둥차이(山東菜‧산둥요리)를 한반도에 들고 왔다. 이는 오랫동안 청요리로 불리며 근사한 접대나 행사 요리의 대명사가 됐다. 서민들에게 파고들어 한반도에만 있는 새로운 중화요리를 만들어냈다. 너무도 유명한 것이 짜장면이다.
전란 피해 한반도 온 산동인이 개발한 짜장면
짜장면에 쓰는 춘장은 산둥 특유의 검은 된장에서 비롯한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짜장면은 한자로 작장면(醡醬麵, zha jiang mian: 자장몐)으로 쓰는데 중국에 같은 이름의 베이징식 음식이 있다. 하지만 맛과 만드는 법 모두가 서로 다르다. 베이징 작장면은 국수를 된장과 숙주나물‧오이‧배추 등을 넣어 비벼 먹는다. 영국 런던의 레스터스퀘어 차이나타운과 중국 베이징(北京), 저장(浙江)성 이우(義烏) 등에서 몇 차례 먹어봤는데 맛도 짠 편이고 면도 짜장면과 달리 후룩후룩 입에 빨려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뻑뻑한 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밖에 없는 음식이었다. 게다가 색도 짜장면은 까맣고 윤기가 반질반질 먹음직스럽게 나는 데 반해 작장면은 노란빛이 감도는 연한 갈색에 윤기도 적었다.
한국인의 추억과 마음과 함께해온 짜장면. 긴 설명이 필요없다. 사진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이유는 재료와 만드는 법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짜장면 소스는 먼저 고온의 기름에 볶은 춘장을 돼지고기와 감자, 채소를 넣어 다시 한번 볶은 다음에 물을 붓고 끓이다 마지막에 전분을 넣어 걸쭉하게 만든 것이다. 춘장과 채소를 함께 볶을 때 재료를 허공에 돌리는 기술을 발휘해 재료를 불꽃에 닿게 해주면 이른바 ‘불맛’이 난다. 춘장은 밀가루를 발효시켜 만든 중국식 된장에 카라멜 색소를 넣은 것이다. 춘장은 베이징과 산둥 등지의 중국 북방에서 먹는 첨면장(甛麵醬)을 한국에서 개량한 것으로 알려졌다. 첨면장은 삶은 대두에 밀가루와 소금을 넣고 발효한 중국식 된장이다.
한국 짜장면과 중국 작장면의 차이
베이징 작장면은 첨면장과 노란 콩으로 만든 황장을 섞어 고온의 기름에 볶다가 여기에 숙주나물, 배추, 오이, 무 등을 넣어 익힌 다음에 면 위에 부어 먹는다. 짜장면은 볶은 뒤 끓이지만 작장면은 끓이지 않고 볶기만 한다.
짜장면 소스에는 전분이 들어가 걸쭉하지만 작장면은 그런 게 없다. 짜장면의 춘장에는 캐러멜이 들어가 단맛이 나지만 작장면은 단맛은 없고 짠맛만 난다. 짜장면은 중화권 음식문화가 한국의 환경에서 융합작용을 일으켜 새롭게 탄생한 ‘메이드 인 코리아’ 음식문화라고 할 수 있다. ‘한식 중화요리’라고도 부른다. 한식 세계화에 포함해야 할 아이템이다.
실제로 한국을 수시로 찾는 일본인 중에는 짜장면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서울이나 경기도 사람도 잘 모르는 수도권 짜장면 맛집 명단을 들고 와서 안내를 부탁한 일본인 친구도 여럿 있다. 중국의 한식당에서도 짜장면과 짜장밥은 한국인은 물론 현지인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다고 한다. 짜장은 중국에서도 이방의 맛인 셈이다. 영국 런던의 한식점에서도 짜장면은 인기 ‘한국식 중국음식’ 또는 ‘중국식 한국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동북아시아와 역사 함께한 한반도 화교들
화교의 역사는 한국인의 역사,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만주사변 직후 일제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를 내세워 중국 동북 지역에 괴뢰국가 만주국(1932~1945)을 세우자 화교의 일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생활의 편의를 위해 만주국 국적을 얻었다고 한다. 화교 대신 ‘만교’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만주국은 의주와 청진 등에 영사관을, 경성에 명예총영사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중화민국도 일제가 통치한 한반도에 영사관을 운영했다. 여기에 근무한 중국인 영사관 직원은 일제와의 협력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 중 일부는 1945년 일제 패망 뒤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한간(漢奸‧일제에 협력한 중국인)으로 처벌받았다고 한다.
화교들은 1949년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자 고향과의 교류가 끊겼다. 대신 국민당 정권이 옮긴 대만이나 1997년까지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을 왕래하며 본국과의 끈을 이어갔다. 한국 화교의 대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한다.
명동 중국대사관 인근의 근현대사
임오군란 때 대원군 납치한 청나라 군대 주둔지
중국대사관 자리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민씨 일족의 요청으로 조선에 파병 온 청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우창칭(吳長慶) 휘하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이들이 조선에서 한 첫 작전은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중국 톈진(天津)으로 끌고 가 4년간 억류한 것이었다. 명나라‧청나라 시절 책봉‧조공의 외교 형식만 취하면 내정에 개입하지 않았던 중국이 처음으로 조선 내부 정치에 간섭한 사례다. 평화 시 중국 군대가 드물게 한반도에 주둔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그해 조선이 청과 맺은 불평등 통상조약인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에 따라 조선이 청에 항구를 열면서 민간 양국 통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화교 상인들이 한반도에 들어온 계기다. 인천(1884)‧부산(1887)‧원산(1889)에 별도의 치안‧법률 체계가 적용되는 화상조계지도 설치됐다.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는 인천‧부산의 차이나타운은 이때 생겼다. ‘띵호와(挺好阿‧ting hao a‧매우 좋다는 뜻), ‘짱깨(掌柜‧zhang gui‧가게 주인)’ 등의 중국말을 한국인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계기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훈자 세 명 탄생
중앙우체국 앞에 서 있는 초대 우정총국장 홍영식의 동상. 우정총국 낙성식 때 개화파를 이끌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살해됐다. 사진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그 바로 앞의 중앙우체국도 유서 깊다. 중앙우체국 입구에는 한반도에 우편 제도를 도입한 홍영식의 동상이 서 있다. 홍영식은 1884년 우정총국(중앙우체국) 낙성식을 계기로 개화파인 김옥균‧서재필‧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내정혁신을 요구하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민씨 일족의 부탁을 받은 한성 주둔 청군에 진압됐다. 당시 청군을 지휘한 20대 군관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본국의 신임을 얻어 1894년 청일전쟁 직전 귀국하기 전까지 10년간 조선 내정에 간섭하며 위세를 떨었다.
우정총국 초대 총판이던 홍영식은 이 과정에서 청군에 살해됐다(대역죄로 처형됐다는 주장도 있다). 그 뒤 남양홍씨 일가 20여 명이 집단으로 음독했다. 1881년 신사유람단에 참여해 일본을, 1883년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해 선진문물을 돌아보고 우편‧전신 등의 도입을 주장한 선각자였다.
중국대사관이 있는 지역은 과거 낙동으로 불렸으며,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측근인 이경하의 집이었다. 이경하는 포도대장을 지내며 천주교를 탄압했으며,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총지휘관을 맡았던 인물이다. 간도관리사를 지낸 이범윤과 아관파천을 주도했으며 러시아공사를 지내다 한·일 강제 병합 이후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결한 이범진이 그의 아들이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당시 밀사로 갔던 이위종은 이범진의 아들이자 이경하의 손자다. 이위종은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복무하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적군에 가담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이범윤‧이범진‧이위종은 해방 뒤 건국훈장을 받은 애국자다.
대만‧대륙 요리 들여와 메뉴 개발…화교 3대 식당 ‘향미’
3대가 이어가는 명동의 중화요리점 향미. 25년 전에 문을 열었으며, 연남동에도 같은 이름의 음식점을 가족이 운영한다. 사진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명동 차이나타운에 있는 향미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3대가 연남동과 명동에서 중화요리점을 운영한다. 중화요리점은 한국인의 영양과 기념일을 책임진 소중한 추억의 장소다. 언제 누구를 데리고 가도 환영을 받는다. 꿔티에(鍋貼‧과첩)로 불리는 철판에 빠짝 눌러 구운 군만두와 아무런 양념도 소스도 없이 소금에만 찍어 먹는 고기튀김, 그리고 중국식 누룽지탕을 주문했다. 이 가게는 한국 화교 중화요리점에서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해온 짜장면‧짬뽕‧우동‧울면‧탕수육‧군만두를 손님에게 제공하면서도 늘 새로운 요리를 개발해 추가로 도입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주 가는 이유다.
명동 중화요리점 향미 앞에 소개된 새로운 요리들. 짜장면‧우동‧짬뽕‧울면‧볶음밥‧탕수육을 뛰어넘는 새로운 맛으로 소비자와 만나려는 정성이 엿보인다. 사진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가게 입구에는 일반 중화요리점에서는 찾기 힘든 특색 요리를 줄줄이 적어놓았다. 대만‧홍콩에서 국민음식으로 인기를 끄는 우육면(牛肉麵)과 군만두를 대체할 수 있는 꿔티에(鍋貼), 그리고 대만식 돈가스인 중식돈가스(排骨飯)가 눈에 띄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인기를 모아가는 조개볶음(炒蛤蠣‧초합여)과 속이 빈 중국 채소를 조리한 공심채볶음(炒空心菜)도 있다. 한국 중화요리점은 대만을 다니면서 다양한 음식문화를 배워 와 한국에 전했다.
명동 중화요리점 향미의 다양한 요리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①재료 자체와 불에 튀기는 솜씨 없이는 맛이 나지 않는 간단하지만 고난도의 고기튀김. 대만에서 가져온 허브 소금에 찍어 먹는다. ②대만‧홍콩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널리 확산 중인 우육탕면. ③가운데 속이 빈 중국 채소인 공심채를 마늘과 소금으로만 볶았다. 간단하면서도 채소의 풍미를 최대한 살린 요리다. ④해물 누룽지탕. 가게마다 맛과 모양이 천차만별이다. 사진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중화요리의 매력은 끊임없는 개발과 융합
한국에도 유명한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중화요리 식당 딘타이펑(鼎泰豐)은 국공내전 이후 대륙에서 옮겨온 산시(山西) 출신의 주인이 1958년 창업해 현재 전 세계 15개 국가와 지역에 지점은 둔 글로벌 맛집 체인이 됐다. 딘타이펑은 샤오룽바오(小籠包‧소룡포)를 홍콩‧한국‧일본 등에 보급해 중화권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알렸다. 가장 중국적인 것, 또는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와 통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와 함께 평범한 음식도 재료와 정성, 그리고 스토리로 승부하면 글로벌 요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향미 입구에는 최근 중국 대륙에서 인기를 누리는 양념오징어요리인 향라오징어(香辣魷魚)도 보였다. 대만은 물론 중화권 전체에서 인기 높은 중화요리 메뉴를 계속 새롭게 추가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조개볶음은 처음엔 재첩 수준의 작은 조개를 볶았는데 요즘은 구하기 쉽고 알이 굵은 바지락을 쓴다. 일본의 감각적인 작가 무라카미 류(村上龍)가 음식을 이국여행과 남녀관계로 풀어낸 소설집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에는 이와 비슷한 요리가 등장한다. 싱싱한 재첩을 강한 불로 순식간에 볶아 카르파초 식으로 겉만 익힌 광폭재첩(狂暴河蜆)이라는 요리다. 뉴욕에서 만난 대만 여성이 고향 생각이 난다며 사랑하는 남성의 손을 잡고 골목골목을 다니며 찾아 먹는 음식으로 등장한다.
조개에 매운 양념과 부추를 넣어 강한 불에 볶아내는 조개볶음.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의 '환상소설'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에도 등장한다. 사진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약간 매운 양념에 부추를 듬뿍 넣은 이 요리는 조개를 하나씩 골라 먹은 뒤 남은 국물이 진국이다. 오래전부터 여기에 볶음밥인 공기밥을 비벼 먹었는데 주인이 별도 비용을 받고 면을 추가해 주면서 ‘일타쌍피’의 요리가 됐다. 음식은 상호반응을 거쳐 진화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제는 없어진, 또는 사라져가는 중화요리 메뉴
일출이 있으면 일몰도 있다. 한국 중화요리점에서 명맥을 이어오다 어느 날 사라지거나 찾기 힘들게 된 요리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두부피에 채소나 버섯을 넣어 튀긴 중국식 쌈요리인 ‘짜춘결’이다. 북창동에 있던 중화각에서 이 요리를 가끔 즐겼는데 2019년 이어받을 사람을 찾지 못한 주인이 가게 문을 닫으면서 이를 찾을 수 없게 됐다. 물론 어딘가에서 하는 집도 있겠지만 쉽게 만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곱창의 중간에 대파를 끼워넣고 튀긴 뒤 어긋 썰어서 내는 ‘곱창대파튀김’도 남대문 중화요리점에 있었는데 가게가 문을 닫으면서 사라졌다. 런던 레스터스퀘어의 중화요리점에서도 똑같은 것을 맛본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사라졌다. 손이 가고 재료를 구하고 보관하기도 힘들며 찾는 손님이 많지 않아서일 것이다.
새우를 갈아서 식빵 사이에 끼워 튀긴 멘보샤도 거의 사라지다 갑자기 다시 유행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 중화요리점에서 볼 수 있던 메뉴인데 어느날 보기 힘들어졌다. 그런데 우연히 10년 전쯤 광화문 동성각에서 다시 만났는데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이산가족 찾기’처럼 “찾았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일부 유명 요리사들이 방송에서 소개하면서 이젠 새롭게 인기 중화요리로 부상하고 있다.
해삼(말렸다 불린 것)‧송이‧꿩고기 등 세 가지 진귀한 재료를 넣었다는 삼선짜장이나 삼선간짜장, 삼선짬뽕은 재료 구하기가 힘들었는지 말렸다 불린 해삼과 전복에 새우를 넣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중에는 가격이 더욱 경제적인 오징어, 냉동새우, 버섯 등으로 재료가 완전히 바뀌었다.
한·중·일 하이브리드 음식문화…‘짬뽕’ ‘우동’ 삼국지
한국에서 화교들이 하는 중화요리는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일본식 중화요리의 영향을 받았다. 그 흔적이 우동과 짬뽕이다.
사실 우동(うどん)은 일본 음식 이름이다. 하지만 중국집에서 파는 우동은 국물 중심의 일본 우동과 달리 해산물과 버섯에 청경채를 듬뿍 넣은 청탕면이라는 중국음식과 조금 비슷하다. 맵지 않은 짬뽕에 해당한다.
사실 짬뽕도 중국엔 없는 음식이다. 참퐁(ちゃんぽん)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나가사키의 중화요리점에서 유래했으며 지금은 숫제 나가사키 지방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사전을 보니 ‘돼지고기, 해산물, 채소가 들어가는 일본의 향토요리로 나가사키의 면 요리로 유명하다’고 돼 있다. 최근에는 이자카야를 중심으로 국내에도 나가사키 짬뽕이 들어와 있다.
한·일 양국 모두 짬뽕을 즐겨 먹지만 둘은 재료도 맛도 전혀 다르다. 한국은 얼큰한 국물에 쫄깃한 면을, 일본은 해산물을 넣어 시원한 국물에 부드러운 면을 사용한다. 중앙포토
한국 짬뽕은 붉고 맵지만 일본 참퐁은 맵지도 붉지도 않다. 일본 참퐁은 해산물로 인해 시원한 맛이 나는 한국 중국집 우동과 모습이 비슷하다. 하지만 맛은 확연히 다르다. 한국 중국집의 우동과 비교하면 국물이 진한 편이다. 일본 라면의 국물맛과 비슷하다.
참퐁이라는 이름은 중국 남부 푸젠(福建)성 사투리로 ‘식사하셨습니까’라는 뜻의 ‘챵호’라는 인사말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섞었다(掺混)’라는 푸젠 사투리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함께 존재한다. 섞었다는 뜻의 말레인도네시아어 ‘참푸르’라는 말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말레인도네시아 음식 중에 ‘나시 찬푸르’라는 게 있는데 여러 가지 재료를 밥에 얹어 먹는 것이다. 오키나와에도 ‘찬푸루’라는 이름의 참퐁 요리가 있다.
일본에서 참퐁의 유래는 1899년경 나가사키의 중화요리점 시카이로(四海樓)를 운영하던 천핑순(陳平順)이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일본에 진출한 화교들은 처음에 요리사‧이발사‧재단사, 이른바 삼도행업(三刀行業)에 주로 종사했다고 한다. 당시 개항지인 나가사키에는 푸젠(福建)성 출신 중국인 고학생이 많았는데 동향인 천핑순이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해 기운을 내라고 이들에게 여러 가지 재료를 한꺼번에 넣은 국수를 대접한 게 유래라고 한다.
원래 푸젠의 향토음식인 탕육사면(湯肉絲麺)을 일본 재료에 맞춰 변형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895~96년, 1897~1900년 등 여러 차례 일본에 머물며 나카야마 사코노(中山樵)라는 일본식 가명으로 학업과 혁명 활동을 병행했던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이 나가사키에서 가난한 유학생들의 영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수 개발했다는 전설도 전해 온다. 쑨원은 의사였으니 영양에 대해서도 잘 알았을 것이다. 현재 중국에선 짬뽕을 십금면(什錦麵)이라고 부르며 일본 음식으로 취급한다고 한다.
드라마 ‘별 그대’ 보고 짜장면 먹어보러 나타난 중‧일 관광객
한국의 중화요리는 오랜 세월, 역사의 풍상을 겪으며 진화해 왔다. 이제는 한국 음식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중화요리의 다양성과 현지화를 상징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는 동아시아 3국이 모두 즐기는 소중한 음식문화다. 사족 한마디.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2013~2014년 방영되면서 한‧중‧일 모두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별 그대’에는 주인공들이 치킨과 더불어 짜장면을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를 보고 궁금증이 생겼는지, 한국에 온 일본과 중국 관광객들이 명동 중화요리점에 들러 이를 시켜 먹었다.
다음은 중국음식점 주인이 들려준 당시의 실화. 일본인 네 명과 중국인 네 명이 가게에 들어와 짜장면을 맛봤다. 일본인은 네 명이 각각 한 그릇씩 주문해 조금 먹고 남겼다. 중국인 네 명은 한 그릇을 시켜 식가위로 사등분한 뒤 각각 한 부분씩 맛보고 나갔다. 일본인과 중국인의 기질 차이를 보여주는 일화다. 당시 명동 한복판 노점상 거리에는 짜장면을 맛보고 싶어 하는 ‘별 그대’ 관광객을 위해 컵에 담아 파는 노점상도 등장했다. 드라마의 대유행이 사회현상이라면 이를 통한 음식문화의 교류와 확산은 하나의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으로 한국인들에게 대만은 매력적인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파맛 크래커 사이에 누가를 끼운 누가크래커(牛軋餅)와 버터와 달걀 맛이 나는 파인애플 과자인 펑리수(鳳梨酥)는 대만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이 유명 가게 앞에서 줄을 서서 사오는 인기 상품이 됐다. 한국에서도 마트와 전자상거래 사이트에서 인기리에 판매한다. 국교는 끊겼어도 교류는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며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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