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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유형론'은 언어의 유형에 관한 학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가 사람을 성격에 따라 16개의 유형으로 나누는 것처럼,
언어도 여러 기준에 의해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다.
MBTI 검사에서 사람의 성격 유형이 '지아는 INFP, 서아는 ESTP, ...'하는 식으로 나뉘듯이,
언어유형론의 접근을 대략 말하자면 '한국어는 A유형, 영어는 B유형, 중국어는 C유형' 하는 식이 된다.
(+ 다만 언어의 유형은 16개 MBTI 유형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한 언어가 어느 유형이다 하고 말하는 것도 마냥 쉽거나 100% 정확한 일이 아닐 때가 많다.)
여러 MBTI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이 각자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구경하는 일이 재미있듯이,
각 유형에 속하는 언어가 서로 어떤 특징을 공유하는지 구경하고,
그런 특징이 왜 나타나는가에 대해 언어학자들의 설명을 듣는 일은 몹시 즐거운 일이다.
MBTI 검사에서는 사람의 성격을 분류할 때에 여러 기준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의 방향"을 분류 기준으로 한다면,
에너지가 바깥으로 향하는 사람의 성격은 E(xtraverted),
에너지가 안으로 향하는 사람의 성격은 I(ntroverted)와 같은 식이다.
언어의 유형을 나눌 때에도 여러 기준이 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각 언어가 단어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기준으로 하는 유형 분류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단어를 만들고 사용하는 방식'을 좀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형태론'이 된다.
즉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형태론의 유형론'이다.
(+ 언어학에서 'XX론'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XX에 대한 학문분야'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 언어의 XX가 조직되어 있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의 '형태론'은 후자에 가깝다.)
형태론의 유형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은 크게 세 개가 있다.
누구나 학교에서 한 번쯤 들어 보았을 법한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분석어)'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 일본어, 터키어(튀르키예어), 스와힐리어 등(의 형태론)은 교착어(agglutinative) 유형이고,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의 형태론)은 굴절어(inflected, 또는 융합어fusional) 유형이며,
중국어, 베트남어, 태국어, 요루바어 등(의 형태론)은 고립어(isolating, 또는 분석어analytic) 유형이다.
(이 글 맨 밑에 정리해 둔 '주의점' 1과 2를 반드시 유념하라.)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는 단어를 만들고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언어를 분류한 것이라고 했다.
과연 각 유형에 속하는 언어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긴 말 필요 없이 우선 교착어의 모습을 보자.
교착어에서는, 실질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실질형태소-어간)에 문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형식형태소-어미?)이 여러 개 붙어 하나의 단어를 만든다.
교착어의 전형적인 모습. '-하-'도 나눌 걸 그랬다.
교착어의 전형적인 모습은 우리말에서 엿볼 수 있다.
(적어도 학교문법 기준으로) 하나의 단어인 '행복하셨겠습니다'를 보면, 실질 의미를 나타내는 어간 '행복하-'에 문법적 의미를 나타내는 어미 '-시-', '-었-', '-겠-', '-습니다'가 줄줄이 따라붙고 있다.
'어미(-尾)'라고 표현했지만, 모든 교착어에서 문법형태소가 늘 어간의 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스와힐리어 등의 교착어에서는 문법형태소가 어간의 앞에 줄줄이 붙는다.
Tu-na-lala. '(스와힐리어)우리가 잠잔다'
1인칭.복수-현재시제-잠자다
전에 주어-동사 일치에 대한 글에서 예문으로 사용했던 스와힐리어 문장을 보면, 어간 '-lala(잠자-)' 앞에 문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굴절접두사 'tu-(1인칭복수 주어일치)'와 'na-(현재시제)'가 이어붙어 있다.
위 문장에서는 어간에 두 개의 접두사만 붙어 있지만, 한국어처럼 아주 여러 개의 문법 접두사가 어간 앞에 줄줄이 붙는 문장도 스와힐리어에는 얼마든지 있다.
감이 잡혔는가?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는 (대략) 실질형태소와 형식형태소를 배치하거나 결합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이다.
'실질형태소(어휘형태소)'와 '형식형태소(문법형태소)'에 대해서는 저번 글에서 설명한 바 있다.
https://blog.naver.com/ks1127zzang/223289530429
어느 언어이든, 대부분의(모든?) 문장은 실질적(어휘적)인 의미와 형식적(문법적)인 의미의 결합으로 만들어져 있다.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는 구체적인 실질 의미와 문법적인 형식 의미를 문장과 단어의 각 부분에 할당하여 표시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계속해서 굴절어의 모습을 보자.
굴절어에서는 실질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실질형태소-어간)에 문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형식형태소-어미?)이 아주 조금, 또는 딱 한 개 붙어 하나의 단어를 만든다.
또는,
한 단어 안에서 실질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과 문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이 서로 너무 긴밀하게 융합되어 있어서 둘로 나누기가 어렵다.
굴절어의 전형적인 모습
(영어가 가장 전형적인 굴절어인 것은 아니지만, )굴절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가까운 사례로서 영어의 단어 'brings'나 'brought'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brings'를 보면, 실질 의미를 나타내는 어간 'bring-'에 문법적 의미를 나타내는 어미 '-s'가 딱 한 개 따라붙고 있다.
이때, 'brings'에 나타내야 하는 문법 의미는 여러 개인데 어간에 붙는 어미는 '-s' 딱 한 개이므로, '3인칭'이라는 문법 의미, '단수'라는 문법 의미, 그리고 '현재'라는 문법 의미가 전부 '-s'라는 어미 하나에 뭉뚱그려져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어미에 여러 개의 문법 의미가 한꺼번에 실린다'는 것이 굴절어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반면 위에서 교착어의 예로 들었던 한국어나 스와힐리어 문장을 보면 보통 하나의 어미에는 하나의 문법 의미만 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어에서는 주어의 인칭수 정보와 시제 정보를 전부 '-s'라는 하나의 어미로 표현하는 반면,
스와힐리어에서는 주어의 인칭수 정보를 'tu-'에, 시제 정보를 'na-'에 각각 나누어 싣는 것이다. ('tu-'에는 '주어인칭'과 '주어수'가 뭉뚱그려져 있긴 하다.)
한편 brought를 보면 교착어하고 더 분명하게 구분되는 굴절어의 특징이 엿보인다.
brought는 실질 의미('가져가다')를 나타내는 어간이 어디이고 문법적 의미('과거')를 나타내는 어미가 어디인지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이건 어간에 붙는 어미가 바꿔 끼워졌다기보다도, 마치 어떤 문법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어간 어미 할 것 없이 단어 전체가 모양을 바꿨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나을 정도이다.
이 또한 굴절어의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고립어(분석어)를 보자.
고립어(분석어)에서는,
실질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실질형태소)에 문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형식형태소)이 붙어서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 따로, 문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 따로, 서로 별도의 단어로 나열된다.
고립어(분석어)의 전형적인 모습
베트남어의 동사구 'đang học 배우고 있다'는 실질 의미 '배우다, 공부하다'와 문법 의미 '하고 있다(진행)'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교착어나 굴절어에서였다면 '배우다' 의미를 나타내는 어간에 '하고 있다(진행)' 의미를 나타내는 어미가 따라붙어서 하나의 단어가 만들어졌겠지만,
고립어(분석어)인 베트남어에서는 진행 의미를 나타내는 문법형태소 đang이 '배우다(học)'와는 별도의 독립 단어로서 '배우다' 앞에 자립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고립어(분석어)는 이러한 점에서 교착어나 굴절어와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고립어(분석어)를 제외하고 교착어와 굴절어를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종합어(synthetic language)'라고 부르기도 한다. ('포합어'라고 불리곤 하는 '다종합어polysynthetic language' 또한 종합어의 일종이다.)
또, 위 그림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별도의 문법형태소를 사용하지 않고 실질형태소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나열하여 그 순서에 의해 문법적 의미를 나타내는 구문이 교착어나 굴절어에는 좀처럼 없는 반면 고립어(분석어)에서는 매우 흔하다.
개가 사과를 먹는다.
狗吃苹果。
교착어인 한국어 문장에서는 ‘가’라는 형식형태소(문법형태소)가 주격을, ‘를’이라는 형식형태소가 목적격을, ‘-는-’이라는 형식형태소가 현재시제를, ‘-다’라는 형식형태소가 직설 서법과 상대높임을 나타내는 반면,
고립어(분석어)인 중국어 문장에서는 주어, 목적어 등의 문법 의미를 나타내는 별도의 형태가 없고 동사 앞이라는 위치(어순)가 주어를, 동사 뒤라는 위치가 목적어를 나타낸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아주 흥미로운 점을 추론할 수 있다. 교착어나 굴절어는 대개 어순에 어느 정도의 변이가 허용되는 반면(‘자유 어순’), 고립어(분석어)는 어순이 훨씬 고정적이라는 것이다.
정확히는 나중에 다시 다루겠지만, 교착, 굴절, 고립을 따지는 대상을 한 언어 전체로 생각하기보다 주어나 목적어 등의 문장 성분(문법 관계)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생각하면 더 낫다.
주어나 목적어를 표시하는 방식이 명사(및 명사에 의존하는 단어들)를 굴절시키는 방식이라면 어순을 좀더 자유롭게 해도 주어나 목적어가 무엇인지 전달하는 데에 무리가 없다. 한국어처럼 명사구에 주어 표지나 목적어 표지를 부착(교착)시키는 방식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베트남어처럼 주어나 목적어를 표시하는 수단으로 어순이 유일하다면, 어순 변이에 제약을 두는 편이 의사소통을 성공시키기에 유리할 것이다.
라틴어는 굴절어이기 때문에(주어, 목적어 등의 문법관계를 명사구 굴절로 나타내기 때문에), 라틴어 문헌을 보면 주어와 목적어가 요리조리 왔다갔다 하는 매우 다양한 어순이 활발히 관찰된다.
반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 라틴어의 후손 언어들은 라틴어에 비해 훨씬 고립어(분석어)에 가깝게 변화되어서 (대명사를 제외하고는 주어, 목적어 등을 나타내는 굴절 어미가 모두 사라져서) 어순 변이에 좀더 제약을 갖게 되었다.
영어의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이상으로 형태론의 언어유형론에 대해 가장 기초적인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더 자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는 Whaley(1997)나 Velupillai(2012) 등 여러 언어유형론 개론서에서 형태론 유형론 부분을 읽어 보시기 바란다. 영어 위키백과의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분석어) 문서 또한 참고가 된다.
+ 이 글에서는 형태론의 유형을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분석어) 셋으로 대별하였으나, 100% 교착어인 언어, 100% 굴절어인 언어, 100% 고립어(분석어)인 언어는 세상에 사실상 없다. 위에서 교착어로 소개한 우리말도 잘 뜯어 보면 굴절어적인 성격과 고립어(분석어)적인 성격이 조금씩 있다. 위에서 굴절어로 소개한 영어는 현대로 오면서 거의 고립어(분석어)처럼 바뀌어 왔다.
글을 마치기 전에, 독자가 꼭 알아 두었으면 하는 '주의점'이 두 가지 있다.
주의점 1: 두 사람의 MBTI가 같거나 비슷하다고 해서 그 두 사람이 혈통상 더 가깝거나 비슷한 것이 아니듯이,
언어 유형의 유사함 또한 계통상의 연관성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독립적인 개념이다.
부모의 MBTI와 자식의 MBTI가 서로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듯이,
같은 조상언어에서 유래한 언어들의 유형은 서로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새로운 언어의 탄생은 보통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므로 MBTI보다는 언어의 유형이 여러 세대 동안 바뀌지 않고 유지되기가 쉽긴 하겠지만, 언어의 유형이 바뀌는 일도 전혀 드물지 않다.
따라서 '한국어, 일본어, 터키어는 교착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어, 일본어, 터키어가 서로 같은 조상 언어로부터 유래하였다'라는 뜻이 전혀 아니며, '중국어, 베트남어, 태국어는 고립어(분석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중국어, 베트남어, 태국어의 조상은 서로 같다'라고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이다.
(이 문장들을 언어학자들이 본다면 '한 일 터는 교착어이다', '중 베 태는 고립어(분석어)이다'에는 보통 동의하겠지만, '한/일/터, 중/베/태는 각각 조상이 같다'에는 대부분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주의점 2: '고립어'
한국어로 언어학 이야기를 할 때 '고립어'라는 용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어떤 언어가 다른 아무 언어와도 계통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 즉 친척 언어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건 여러분이 지금 읽으신 이 글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별개의 개념이다.
'X어는 고립어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X어와 같은 조상 언어로부터 유래한 언어가 아직 하나도 발견되지 못했다'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X어가 아무 '어족(language family)'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립어'의 예로 주로 바스크어 등을 들곤 한다.
이러한 의미의 '고립어'를 영어로는 language isolate(ˈaɪsələt)이라고 말한다. '계통(론)적 고립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머지 하나의 의미가 바로 이 글에서 다룬 형태론의 유형을 일컫는 의미이다.
중국어, 베트남어, 태국어가 고립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언어들이 단어를 다루는 방식이 서로 동일하거나 비슷하다는 뜻, 즉 서로 같은 유형(MBTI처럼)에 속한다는 것이다. 중국어, 베트남어, 태국어 각각에 친척 언어가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의미의 '고립어'를 영어로는 isolating language라고 한다. 이 '고립어'를 '유형(론)적 고립어'라고 불러서 구분할 수도 있다.
이 글에서 다룬 두 번째 의미, 즉 '유형론적 고립어'는 '분석어(analytic language)'라는 개념과도 매우 비슷하다. '분석어' 쪽이 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하고 더 유관하기도 하고 '고립어'라는 말이 저렇게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수 있으니, '유형론적 고립어'를 일컬을 때는 가급적 '고립어(분석어)'와 같이 나타내었다.
+ 사실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의 세 가지 유형은 실제로 세계 여러 언어에서 나타나는 형태론의 다양성을 매우 단순화시킨 것이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렇게 단순한 삼분 유형론이 어떤 디테일을 놓치고 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형태론 유형론이 궁금한 독자는 우선 Velupillai(2012)의 언어유형론 개론 교재에서 95쪽부터 110쪽까지를 읽어 보시길. Whaley(1997)의 교재 127쪽부터 읽어 보는 것도 좋고, 이상적으로는 둘 다를 잘 읽어 보기를 추천할 만하다.
+ 이 글에서는 파생 형태론보다는 문법의 핵심에 좀더 가까운 굴절 형태론에 집중했다는 점을 밝혀 둔다. 개인적으로 파생 형태론에서보다 굴절 형태론에서 유형마다의 차이가 두드러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형태론이 없다고들 하는 '고립어(분석어)'에도 파생 형태론은 있으므로 종합어와 분석어를 구분짓는 기준으로는 굴절 형태론이 더 유용하며, '교착어'와 '굴절어'의 구분은 내가 보기에 파생 형태론과는 거의 상관이 없고 오로지 굴절 형태론에 대한 것인 듯하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부분을 가르쳐 주시면 감사히 배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