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번 | 제왕명 | 생존기간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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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해모수 | ? | ? | 전설상의 부여(夫餘)의 시조로서 해모수에 관한 기록은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권1 '북부여조'에 나와 있다. 또한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로서 동명왕 개국설화에 나오는 인물이며, 직접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大遼의 醫州地方)에 도읍을 정한 뒤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자칭, 해부루(解夫婁)를 가섭원(迦葉原)으로 쫓고 왕이 되어 국호를 북부여라고 하였다.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정을 통해 주몽(朱蒙:고구려 시조인 東明王)을 낳았다 한다. 해(解)는 해(태양)와 통하여 태양숭배 종족의 유풍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 건국신화를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인 광개토대왕비나 《위서(魏書)》에는 해모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원래 북부여의 시조로 전승되어 오던 것을, 5세기경에 고구려가 부여(夫餘)를 병합한 뒤 부여인을 무마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결합,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
2 | 해부루 | ? | ? | 동명왕 개국설화에 나오는 인물로, 해모수(解慕漱:북부여의 시조)의 아들이라는 설(三國遺事)과, 단군과 하백녀(河伯女)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란 설(世宗實錄檀君古記)이 있다.
한편,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 건국설화에 따르면, 늙도록 아들이 없어 근심하다가 곤연(鯤淵)에서 큰 돌 밑에 있는 아이를 얻어 이름을 금와(金蛙)라 짓고, 그가 성장하자 태자로 삼았다. 그뒤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권고에 따라 해모수(解慕漱)를 피하여 도읍을 동해에 가까운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 죽은 후 금와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
3 | 금와왕 | ? | ? | 부여(夫餘)의 왕으로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 건국설화에 따르면,늙도록 자식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며 정성을 들이던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어느날 곤연(鯤淵) 못가의 큰 돌 밑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발견하여 이렇게 이름지었다. 자라서 태자(太子)가 되고, 해부루(解夫婁)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다.
금와왕에게는 전비(前妃) 소생의 왕자 7명이 있었는데, 그 중 맏이인 대소(帶素)는 금와왕의 뒤를 이어 동부여의 왕이 되었다. 뒤에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 궁중으로 데려와 깊숙한 방에 가두었더니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주몽(朱蒙)이 나왔다고 한다. |
4 | 대소 | ?~22 | ?~22 | 동부여의 마지막 왕으로서 금와왕(金蛙王)의 맏아들로서 6명의 동생들과 함께 하백의 아들인 주몽(朱蒙)의 재주를 시기하여 몰아내고 아버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BC 7년(고구려 유리왕 13) 고구려에 볼모를 요구, 거절당하자 5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폭설로 실패하였다. AD 9년에 고구려에 항복하라고 권유하였다. 20년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재위 18-44년)에게 머리 하나에 몸통 2개인 붉은 까마귀을 보내었다. 그러나 대무신왕(大武神王;재위 18-44년)이 오히려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할 징표라 하자 후회했다고 한다. 22년(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재위 18-44년) 5) 고구려의 공격으로 장군 괴유(怪由)에게 피살되고 동부여는 멸망하였고, 아우는 도망하여 갈사수(葛思水) 근처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고, 그의 종제(從弟)는 백성 1만여 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했다. |
5 | 위구태 | ? | ? | 부여(夫餘)의 왕으로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120년 왕자로서 한(漢)나라에 조공사(朝貢使)로 갔다. 121년 고구려 태조왕(재위 53∼146년)이 현도(玄)를 공격하자 2만 군사로 한나라를 도와 고구려군을 격파, 500여 명을 참수하였다.
또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내속하였다. 후한 말에 현도태수 공손탁(公孫?)이 해동(요동) 땅을 넓히니 바깥의 오랑캐들이 무서워하며 복속하였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내속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는 고구려와 선비가 강하였는데, 공손탁은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있는 부여에 종녀를 (부여왕 위구태의) 처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 아들 간위거(簡位居)가 왕위를 이었다. |
6 | 간위거 | ? | ? |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간위거는 아버지 위구태(尉仇台)가 죽자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버지가 위구태인 듯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동이전에 나와 있는 간위거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는 240∼248년에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使) 관구검(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고구려에 군량을 제공하였고, 또 막내 삼촌인 우가(牛加)가 딴마음을 품자 그 부자를 죽이고 재물을 몰수했다.
당시 부여는 세습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었고, 적자(嫡子)가 없을 경우에는 서자(庶子)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간위거왕에게는 적자가 없었다. 적자를 두지 못한 채 간위거가 사망하자,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하는 여러 가(加) 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의 서자인 마여(麻余)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