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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34 제69차 文化遺産踏査(8-2); 雲峴宮 특별전(4-2)
(49) 景福宮 重建
*景福宮 重建; 1865~1868년에 興宣大院君이 景福宮을 재건한 일.
景福宮은 조선시대의 本宮으로 太祖가 1395년(太祖 4년)에 創建하였으나
宣祖 25년(1592) 壬辰倭亂으로 燒失된 이후, 歷代 王은 財政이 부족하여 재건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重建된 景福宮(사적 117호)은 조선 말기의 建築∙工藝∙美術의 結晶體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건축 당시에는 王族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怨望의 대상이 되었으며,
국가의 경제적인 타격 또한 막심하여 대원군 몰락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宣祖 25년(1592, 壬辰) 4월 29일 저녁 申砬이 彈琴臺에서 敗했다는 소식을 접한 宣祖는
4월 30일 景福宮과 漢陽을 버리고 義州를 향해 도망가자 분노한 亂民들이 公私奴婢의
文籍이 있는 掌隷院과 刑曹에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애버렸다.
倭軍의 선발대가 5월 3일 漢陽에 도착해 보니 防禦兵力도 없어, 불에 탄 景福宮만
점령하였다.
(50) 수진보작명첩[壽進寶酌銘帖] -1865년경
高宗 2년(1865) 景福宮 重建 당시 石瓊樓에서 ‘壽進寶酌’이라고 써있는 술잔을 기념하여
만든 拓本帖이다. (*瓊: 구슬 경)
수진보작의 발견으로 인해 興宣大院君은 執權力은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壽進寶酌 銘文
華山道士袖中寶 獻壽東方國太公(화산도사수중보 헌수동방국태공)
/화산도사가 소매 속에 간직한 보배를 동방의 국태공에게 바치며 축수하노라.
靑牛十廻白巳節 開封人是玉泉翁(청우십회백사절 개봉인시옥천옹)
/乙丑年이 열 번 돌아 백사절을 맞음에 개봉하는 사람은 옥천옹이라.
(*袖소매 수 *廻: 돌 회
(51) 수진보작명첩[壽進寶酌銘帖] -1865년
景福宮 重建 당시 石瓊樓 아래에서 발견된 ‘壽進寶酌’의 출현을 기념하여 만든 帖이다.
술잔을 담고 있던 구리그릇뚜껑에 “東方의 國太公(興宣大院君)에게 오래 살기를 원하는
祝願하며 술잔[壽進寶酌]을 바친다”는 내용의 글이 쓰여있었다.
이를 본 高宗이 祥瑞롭게 여겨 신하들에게 銘을 지어 바치도록 하여 만들었다.
(52) 경복궁영건 효유문[景福宮營建 曉諭文] -1865년(*曉: 새벽 효 *諭: 타이를 유)
景福宮 營建 過程과 願納錢(寄附金) 募金에 대한 구체적인 시행사항을 공포한 문서이다.
一. 願納錢 納付人員에 대한 單子(目錄) 작성 후 營建都監에 보고할 것.
一. 원납전 납부자는 身分을 가리지 말고 명단을 영전도감에 보고할 것.
一. 일반백성들 중 少額을 낸 경우에는 지역별로 모아 居住地를 써서 영건도감으로 제출할 것.
一. 단자작성 書式: 單子 두 글자를 적되 景福宮 營建 時 원납전 OO(금액), 年月日,
관직이 있는 경우 官職名, 姓名을 표기할 것.
一. 신속하게 거행할 것.
*營建都監: 조선시대 국가적인 건축공사를 관장하던 임시관청.
(53) 경복궁영건자문[景福宮營建尺文] -1865년 9월 25일
主簿公 20代孫 龍燮 등 36명이 景福宮 營建을 위한 기부금인
願納錢 68냥을 납부한 것에 대한 宗親府의 영수증이다.
*主簿公: 全北 井邑地方 출신으로 壬辰倭亂 때 義兵을
일으킨 柳春苾 (*苾: 향기로울 필)
(54) 당백전[當百錢] -1866년
右議政 金炳學의 提議로 興宣大院君이 주도하여 禁衛營에서 高宗 3년(1866) 11월 6일
鑄造∙發行한 貨幣로 掌令 崔益鉉의 上疏를 계기로 1867년 6월 17일 발행이 중지될 때까지
鑄造總額은 약 1천 6백만 냥이었다
당시 국가 財政難을 해결하고 景福宮 重建費用과 列强의 침략으로 인한 軍事費를 조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當百錢의 발행은 財政難을 타개하지 못하고 오히려 物價 仰騰과 體制危機를
가져왔다.
(55) 경복궁도[景福宮圖] -1860년 이후
중앙 4각형 안에 景福宮의 各 殿閣의 위치와 경복궁의 전체둘레를
표시하고, 우측 하단에 각 殿閣의 完工時期를 기록한 지도이다.
壬辰倭亂 이후 불타버린 景福宮 復元을 위해 기록과 考證을 통해
推定해서 그린 지도이다. 주변 山岳은 墓圖의 산악 표현과 類似하게
그렸다.
(56) 書院撤廢와 民生 安定
(57)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1866년
조선 후기의 학자 朴齊炯이 1886년 憲宗 이후부터 甲申政變 직전의 상황에 대해 쓴
歷史書이다. (*炯: 빛날 형)
주로 興宣大院君이 집권했을 때의 정치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朴齊炯은 開化派임에도 불구하고 大院君을 豪傑로 묘사하면서 景福宮 重建, 書院撤廢 등
興宣大院君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大君이 크게 怒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百姓에게 害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孔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치 않겠다. 하물며 書院은 우리나라 先儒를 祭祀하는 곳인데
지금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버렸으니 말할 것도 없다.” -朴齊炯 <近世朝鮮政監> -
(58) 최익현 외 상소 필사본[崔益鉉 外 上疏 筆寫本] -조선 말기
崔益鉉의 ‘同副承旨 辭職을 청하는 최익현의 上疏’ 筆寫本이다.
興宣大院君이 萬東廟 등 많은 書院을 철폐하자 복구할 것을 건의하고, 중국 화폐 유통의
革罷를 주장한 내용이다.
(59) 속대전[續大典] -英祖 22년(1746)
書院의 토지인 書院田에 대하여 3結까지 免稅하도록 續大典에 규정하였다.
書院은 免稅特權 外에도 軍役이 면제되었으나 軍役免除의 폐단이 발생하자
肅宗 33년(1707) 賜額書院은 20인, 非賜額書院은 15인으로 축소시켰으며, 書院의 奴婢도
賜額書院은 7인, 非賜額書院은 5인으로 제한하였다.
*賜額書院: 조선시대 國王으로부터 扁額·書籍·土地·奴婢 등을 下賜 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書院.
(60) 通商修交 拒否政策과 洋擾 (*擾: 시끄러울 요)
斥和碑文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61) 벽위신편[闢衛新編] -1848년 –한국교회사연구소 (*闢: 열 벽)
조선후기의 文臣 尹宗儀(1805~1886)가 1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西洋列强의
朝鮮 浸透를 우려하여 그에 대비하는 闢邪衛正의 방편을 제시한 책이다.
儒敎 知識人으로서 天主敎를 西洋의 侵略勢力과 同一視하고, 이를 배척하는 理論的 根據를
제시하고 있다.
*闢邪衛正: 邪道를 물리치고 正道 또는 正學을 守護함.
(62) 이기호 간찰[李基鎬 簡札] -1866년
1866년 11월 초3일 李基鎬(1799~?)가 보낸 간찰이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洋醜(丙寅洋擾를 일으킨 프랑스軍)가 두려움에 떨며 멀리 바다로
물러난 것은 中外가 모두 같은 마음으로 축하할 일이라고 하였다. (*醜: 추할 추)
나라에 큰 慶事가 있어 즉시 雲峴으로 가 축하해야 하지만 지금 抽身할 餘暇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라고 기록하였다. (*抽: 뽑을 추)
*中外: 朝廷과 민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안과 밖을 아울러 이르는 말
*抽身: 바쁘거나 어려운 처지에서 몸을 빼다.
(63)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왼쪽)-은자(隱者)의 나라 朝鮮[Corea the Hermit Nation]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 -1871년 이후
美國에서 발간된 週刊新聞 Harper’s Weekly 1841년 9월 9일자에 실린 辛未洋擾 당시
상황을 그린 화보이다.
江華島를 침범하기 전 艦上에서 作戰 會議하는 모습과 신미양요의 피해상황을 그렸다.
*辛未洋擾: 高宗 8년(1871) 美國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號 사건을 빌미로 朝鮮을
開港시키려고 江華島에 武力으로 침략한 사건.
=은자(隱者)의 나라 朝鮮[Corea the Hermit Nation] -1882년
美國人 W. E.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가 英文으로 쓴 역사책으로,
高宗 19년(1882) 初版이 간행되었다.
朝鮮의 中世史부터 近世史까지 記述하였다.
3부 近世 및 最近世史에 丙寅洋擾와 辛未洋擾를 다루고 있으며 신미양요 당시 美 海軍의
作戰地圖가 첨부되어있다.
*丙寅洋擾: 高宗 3년(1866) 興宣大院君의 天主敎徒 학살∙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艦隊가 江華島에 침범한 사건.
(64) 一次 隱居와 衛正斥邪
*衛正斥邪: 1860년대 이후 保守的인 儒學者를 중심으로 형성된 反侵略∙反外勢의
정치사상으로, 性理學的 世界觀과 지배체제를 강화하여 日本과 西歐 列强의
침략에 대응하려 했다.
(65) 화서집[華西集] -1899년
衛正斥邪 思想을 내세웠던 華西 李恒老(1792~1868)의 詩文集이다.
이항로는 “천하의 커다란 是非∙分別이 세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華와 夷의 구분이며,
둘째는 王과 覇의 구분이며, 셋째는 正學과 異端의 구분”이라고 했다.
이러한 衛正斥邪 思想은 外勢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시켰다.
(66) 면암선생 문집[勉庵先生 文集] -조선 말기
興宣大院君 失脚의 결정적인 契機로 작용했던 勉庵 崔益鉉의 ‘戶曹參判 辭職’ 上疏이다.
(*疏: 소통할 소)
최익현은 同副承旨로 기용되면서 書院撤廢 등 大院君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戶曹參判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失政을 列擧하면서 王이 親政을 주장하고
대원군의 退出을 다시 주장하였다.
(67) 백낙관 상소문[白樂寬 上疏文] -1882년
高宗 13년(1876)에 맺은 韓∙日修好條約(江華島條約)으로 興宣大院君이 취한 鎖國政策이
무너지고, 開化派와 守舊派가 尖銳하게 대립하던 시기인 1882년 儒生 白樂寬이 올린
상소이다.
한∙일수호조약 이후 日本과의 交易에 대한 반대와 黃遵憲의 <朝鮮策略>에 대한 비판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遵: 좇을 준)
*朝鮮策略: 淸國의 駐日公使館 參贊官 黃遵憲이 러시아의 南下政策에 대비하기 위해 朝鮮,
日本, 淸國 등 동양 3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조선의 外交政策이 핵심 내용으로 朝鮮은 親中國, 結日本,
聯美國하여 自强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在野 保守儒生들을 중심으로 擧國的인 衛正斥邪 運動이 일어났으나 1880년대
이후 정부가 開放政策을 추진하고 西歐文物을 수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68) 흥선대원군 이하응초상-흑건청포본[興宣大院君 李昰應肖像-
黑巾靑袍本] -1880년
石坡 李昰應이 還甲이 되던 해인 1880년 希園 李漢喆과 李昌鈺의
공동작품이다.
靑色 袍를 입고 方巾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무표정하여 조금 딱딱한
인상을 풍긴다.
얼굴에는 살색의 가늘고 짧은 線을 반복하여 屈曲을 표현하고,
耳目口鼻는 짙은 색으로 그려 立體感을 더하였다.
(69) 거북 흉배[龜文繡 胸背] -19세기 (*繡: 수놓을 수 *胸: 가슴 흉)
興宣大院君이 사용한 금실로 수놓은 거북 胸背로, 1882년 大院君尊奉儀節 制定이후
기린흉배 대신 거북흉배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거북 문양은 長壽를 상징하는 것이다.
金絲를 주재료로 사용하고 밝은 부분에는 銀絲를 썼으며, 입에서 내뿜는 불꽃은 붉은
색실을 사용하는 등 刺繡의 對比效果를 극대화한 작품이다.
*大院君尊奉儀節: 1895년에 정부는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대원군존봉의절을
제정해 대소 臣民과의 접촉을 제한하고 外國使臣들과도 政府官憲 立會 하에만
만나도록 조치하였다.
(70) 2차(1882년)∙3차(1894년) 執權期
(71) 2차 執權期-1882년 6월
(72) 壬午軍亂
*壬午軍亂: 高宗 19년(1882) 6월 9일 舊式軍隊가 일으킨 兵亂.
高宗 13년(1876) 韓∙日修好條約(江華島條約) 이후 開化派와 守舊派가 대립하는 가운데
왕의 親政으로 閔氏 一派가 執權하고 있었다.
新式軍隊를 양성하는 別技軍이 給料와 補給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반면 舊式軍隊인 武衛營∙
壯禦營의 軍卒들은 13개월 동안 俸給米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던 차에 겨우 한 달치의
給料를 받게 되었으나, 數量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어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軍兵들은 戚臣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파괴하고, 日本公使館을 습격하자 公使 등
公館員들은 仁川으로 도피하였다.
군병들이 昌德宮으로 난입하자 明成皇后는 宮女의 옷으로 변장하고 궁궐을 탈출, 長湖院의
忠州牧使 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했으며 사태가 위급해지자 高宗은 반란을 수습하기 위해
大院君을 불러들여 全權을 맡겼다.
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軍制를 개편하는 등 軍亂의 뒷수습에 나섰으나 閔氏 一派의
請願으로 淸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하여 그의 再執權은 短命에 그치고 天津으로
납치되었다.
日本은 主謀者 처벌과 손해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濟物浦條約을 맺게 했다.
軍變으로 시작된 이 亂은 對外的으로는 淸나라와 日本의 朝鮮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
주었으며, 對內的으로는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노출시켜 甲申政變의 바탕이
되었다.
(73) 임오군란 사실[壬午軍亂 事實] -1882년
壬午軍亂의 상황을 기록한 文書로, 특히 임오군란 이후 興宣大院君이 淸으로 납치된
7월 13일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大院君의 납치는 사실상 興宣大院君 政權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74) 명치∙대정∙소화 대회권[明治∙大正∙昭和 大繪卷] -1931년
日本 講談社가 발행한 잡지 <킹> 1931년 新年號의 부록으로 메이지[明治]에서 쇼와[昭和]
年間까지의 주요사건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책이다.
壬午軍亂에서부터 甲申政變까지의 상황을 그렸다.
(75) 3차 執權期-1894년
*乙未事變: 高宗 32년(1892) 日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明成皇后를
弑害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이다.
이를 계기로 朝鮮國民의 對日感情이 극도로 나빠졌으며, 신변에 위협을 느낀 高宗이
러시아公使館으로 피신하는 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었으며, 親日內閣은 失脚하고 金弘集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親日派로 몰려 군중들에게 피살되었다.
조선은 러시아의 보호 속에서 自主權이 훼손되고 內政干涉을 받게 되었으며, 內閣은
친러파가 장악하면서 日本은 植民地化 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76) 李埈鏞 謀反 事件 (*鏞: 쇠북 용)
(77) 이준용 공초[李埈鏞 供草] -1895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李埈鏞, 朴準陽 등 모반사건과 관련된 피의자들의 供草를 기록한 책이다.
被疑者 別로 심문일자에 따라 심문내용과 피의자의 답변내용을 순차적으로 적었다.
이준용 역모사건은 興宣大院君을 중심의 정치세력과 개화파의 정치적 갈등에 의해 빚어진
사건이었다.
*供草: 조선시대 형사사건에서 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草綠해 놓은 기록문서.
(78) 오토리공사 한정참내지도[大鳥公使 韓廷參內之圖] -1894년
景福宮 점령사건(1894년 7월 23일) 후 駐韓 日本 오토리[大鳥奎介]公使가 高宗을
參內(*入闕)하는 장면을 담은 版畵이다.
大院君은 오토리 公使의 건의를 받아들여 內政을 정리하지 않으면 朝鮮의 獨立을 보장받기
어렵다고 상소하여 全權을 위임 받아 3차 執權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79) 조∙청∙일 내정개혁회담[朝∙淸∙日 內政改革會談] 접시 -1894년
1894년 6월(음력) 南山 閔泳駿의 별장 老人亭에서 개최된 老人亭會談(朝∙淸∙日
內政改革會談) 채색접시이다.
全州和約 이후 淸나라와 朝廷은 日本의 撤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조선의 內政改革을 주장하면서 이 회담을 제안했다,
*全州和約: 1894년 東學農民運動 중 農民軍이 全州를 점령하고 정부와 맺은 화약으로
농민군은 弊政改革案을 제시하고 정부가 받아들여 1894년 5월 7일 전주화약이
맺어졌다.
폐정개혁안에는 身分制의 폐지와 三政(田政∙軍政∙還政)의 개혁 등이 들어 있었는데
토지 개혁의 요구는 所有權의 均分에서 耕作權의 균분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으며, 日帝의 침입과 함께 淸日戰爭이 발발하였다.
(80) 흥선대원군 입성도[興宣大院君 入城圖] -1895년
1895년(明治 28) 老人亭會談 決裂 이후 景福宮 점령사건(1894.07.23)을
그린 木版畵[니시키에/錦繪]이다.
오토리[大鳥奎介]公使가 興宣大院君을 호위하며 景福宮에 들어가는
모습으로 그려 宮闕 침공사건을 마치 궁궐을 수호하는 것처럼 歪曲하고 있다.
(81) 흥선대원군 효유문[興宣大院君 曉諭文] -1894년 –한국교회사연구소
東學農民革命 加擔者들에게 解散을 권고하는 내용으로 1894년 8월~9월 전국 각지에
공포하였다.
興宣大院君은 東學農民軍이 北上하면 그의 손자 李埈鎔이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出陣命令을 얻은 후 권력을 잡으려고 했으나 日本公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에게
발각되어 政界 隱退의 빌미가 되었다.
(82) 민비 시해기[閔妃 弑害記] -1965년 서울특별시 교육청 남산도서관
漢城新報 編輯長이었던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 秀雄]가 쓴 <閔后凋落事件>을 1965년
범문사에서 ‘閔妃弑害記’라는 제목으로 번역∙간행한 책이다. (*凋: 시들 조)
乙未事變 당시 日本軍은 興宣大院君을 앞세워 이 사건을 朝鮮人이 행한 殺害事件으로
조작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당시 사건 관계자나 日本 右翼團體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을미사변과 관계가
있는 것같이 歪曲되게 敍述하였다.
(83) 홍재전서[弘齋全書] -서울유형문화재 제316호- -1787년 (*齋: 재계할 재)
正祖의 御製(임금이 직접 지은 글)를 모아 만든 문집인 <弘齋全書>의 初刊本으로,
正祖 11년(1787) 8월 奎章閣에서 편찬하였다.
世孫 시절부터 임금 在位期間까지 正祖가 지은 여러 종류의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弘齋’는 正祖의 雅號이다.
60권 60책으로 구성된 筆寫本으로, 각 10권씩 6개의 冊匣(책의 크기에 맞추어 만든 작은
상자)에 싸여 보관되어 왔다
<弘齋全書>는 최종적으로 총 184권 100책으로 편집되어 純祖 14년(1814) 3월
金屬活字本으로 간행될 때까지 여러 차례의 편찬 과정을 거쳤다.
이 所藏本은 1787년 正祖임금에게 進獻한 1차 편찬본으로 판단된다.
(84) 흥선대원군 화로[興宣大院君 火爐] -19세기 –개인소장
興宣大院君이 사용하던 것이라고 전하는 火爐로, 놋쇠로 두껍게 만들어 重厚한 重量感이
느껴진다.
간결하면서도 威嚴 있는 형태와 過하지 않으면서 洗鍊된 장식, 重厚한 美感 등에서
朝鮮 王室의 氣品을 느낄 수 있는 遺物이다.
(85) 石坡 李昰應 印章
1. 石坡(석파) -1886년경 2. 李昰應印(이하응인) -19세기
3. 大院君章(대원군장) -1886년경
4. 石坡吟詩處(석파 음시처) -19세기 –‘석파가 시를 읊는 곳’
5. 喜氣寫蘭(희기사란) -19세기 –‘즐거운 마음으로 난을 그린다’
(86) 타구[唾具]-거북연[龜形硯]-먹[墨]-붓[筆] (*唾: 침 타 *硯: 벼루 연)
1. 唾具 -1886년경 –가래나 침을 뱉는 그릇 2. 거북연[龜形硯] -20세기
3. 먹[墨] -20세기 4. 붓[筆] -연출품
(87) 수조[水槽] -19세기말~20세기초 (*槽: 구유 조)
물을 담아 보관할 수 있는 水槽로 大理石으로 제작하였다.
外部 4면에 石坡 李昰應의 친필 隸書와 行書, 蘭草와 대나무를 1점씩 새겼다.
藝人 興宣大院君의 詩∙書∙畵 一致의 境地를 보여주는 이 水槽는 老安堂 앞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8) 老安堂의 藝人, 興宣大院君
(89) 군란도[群蘭圖] -石坡 李昰應 作 -1878년(59세)경
興宣大院君은 楊州 곧은골[直谷]에서 隱居하던 시기(1874~75년)를 전후하여 난초포기를
2단, 3단으로 배치하는 여러 群蘭圖 병풍을 남겼다.
이 군란도는 3단형식으로 상단과 중단에 뿌리가 드러난 露根蘭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땅에서 자라나는 포기를 배치한 예이다.
현재 6폭만 전하고 있으나 포기배치로 보아 서로 짝이 맞지 않아 원래는 8폭 내지
10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 폭의 중단이나 하단에 찍은 印章 [二梧詩境], [石壽萬年], [石坡山房], [梅花境],
[喜氣寫蘭]과 畵題에 ‘酬酌樓(수작루)’라는 雲峴宮의 건물이름이 보여 제작시기는
直谷에서 돌아온 후 운현궁에서 지내던 59세경으로 추정된다.
畵題
酬酌樓 秋日 石道人書(수작루추일석도인서) [石坡] [大院君章]
/수작루에서 가을날에 석도인이 쓰다.
(90) 난석도 대련[蘭石圖 對聯] -石坡 李昰應 作 -1891년(72세)경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石蘭畵는 石坡 李昰應이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며 一生 동안 一貫되게
제작했던 형식이다.
이 <蘭石圖>에는 紀年 表記가 없으나 두 폭의 화면에 각각 68세와
72세에 사용했던 ‘修身齊家(수신제가)’와 ‘爲對讀書人谿亭自聞香
(위대독서인계정자문향)’ 印章이 찍혀있어 72세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蘭葉은 老年의 技倆을 보여주듯 流麗하게 뻗어있고, 怪石의 표현에는
夢人 丁學敎의 怪石畵風의 영향을 수용한 변화가 눈에 띈다.
오직 蘭과 怪石을 중심으로 다양한 변화를 추구한 것은 石坡蘭의 특징이다.
(91) 난석도[蘭石圖] -石坡 李昰應 作 -1892년(73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한 畵面에 地面에서 솟은 怪石과 절벽의 한쪽 斷面을 묘사한 懸崖石,
그리고 화면 중앙을 향해 구성된 3포기의 蘭을 표현하였다.
화면 왼쪽에 적은 ‘壬辰春 石坡 七十三叟作[임진년 봄 석파 73수작]이라는
畵題를 통해 1892년(73세)에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叟: 늙은이 수)
길고 예리하게 뻗은 蘭葉과 강한 濃淡의 대비로 표현한 怪石은 石坡의
70代 작품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왼쪽 하단에 石坡 李昰應이 69세부터 70代末까지 즐겨 사용하던
‘一室之內有以自誤(일실지내유이자오)의 詞句印을 찍었다.
(92) 책가도 병풍[冊架圖 屛風] -19세기말
宮中에서 사용하던 장식 병풍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冊架圖이다.
조선 후기에 유행하던 書畵骨董品 蒐集文化를 보여주듯 各 段마다
각종 骨董器物과 표갑에 싸인 책을 그렸다.
특히 하단 오른쪽 칸에 그린 ‘壽進寶酌’ 銘文이 있는 소라모양의 술잔을
그린 것이 흥미롭다. 壽進寶酌은 1865년 景福宮 重建工事 중 石瓊樓에서
발견된 것으로 王室의 長壽를 기원하는 詩가 함께 적혀있어 이를 매우
祥瑞롭게 여긴 高宗이 興宣大院君에게 바쳤다고 한다.
수준 높은 畵格과 다른 책가도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器物인 壽進寶酌을
그린 것으로 보아 1865년 수진보작의 발견을 기념하여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93) 事我天君[사아천군] -石坡 李昰應 작 -19세기
興宣大院君의 隸書體 글씨는 秋史 金正喜(1786~1856)의 書風을 본받아 거침이 강하지
않은 古隸 書風을 구사하였다.
短篇이기는 하나 興宣大院君의 隸書로는 秀作이다.
南宋 眞德秀(1178~1253)의 <心經贊>의 마지막 句節인 <事我天君>을 隸書 筆蹟으로 쓰고
印章을 찍어 마무리하였다.
畵題
事我天君 [石坡] [大院君章] / 나의 天君(마음)을 섬기라. 석파 대원군장
(94) 흥선대원군 간찰[興宣大院君 簡札] -19세기
興宣大院君의 簡札로 4점이 褙接되어 있으며, 年度와 受信者는 未詳이다. (*褙: 속적삼 배)
상대의 安否를 물으면서, 헤어진 지 반년이 되었고, 자신은 별일 없이 老年의 맛을 즐기고
있으며, 孫子의 재롱으로 晩年의 기쁨을 삼는다는 내용, 또한 자신에게 부채, 書簡用 종이와
봉투 등을 보내주면 요긴하게 쓸 것이라는 내용 등을 적었다.
*褙接(배접): 종이, 헝겊 또는 얇은 널조각 따위를 여러 겹 포개어 붙임.
(95) 흥선대원군 간찰[興宣大院君 簡札] -19세기
興宣大院君이 淸風(*충북 堤川의 옛 地名)府使에게 보내는 편지로 年度는 알 수 없다.
客地에서 생활하면서 國喪을 듣고 望哭하고, 禮를 극진하게 차리며 슬픔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썼다.
官職生活은 어떤지 안부를 묻고, 本人은 긴 여름날에 별일 없이 지냈으며 손자 아이가
잘 자라서 기쁘고 태평하다고 적었다.
(96) 興宣大院君 印章
雲峴宮에서 기증한 印章 가운데 興宣大院君을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인장은 30개 정도이다.
私印은 ‘李昰應’의 姓名印과 ‘石坡’ 老石’ 등의 號印, ‘大院君’의 君號印이 대부분이며,
‘玉帶’, ‘庚辰 己丑 癸卯 壬戌’과 같은 특이한 것도 전한다.
興宣大院君이 좋아하는 名句나 직접 지은 글귀를 새겨 사용했던 詞句印은 ‘左琴右書’,
‘喜氣寫蘭’, 修身齊家’, ‘石坡吟詩處’ 등이 있다.
墨蘭畵에 뛰어났던 石坡 李昰應이 그림에 落款으로 사용하거나 圖書에 所藏印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97) 興宣大院君 印章(2-1), 사구인[詞句印] -19세기
1. 日服杞菊地黃 閒寫墨蘭數朶(일복기국지황 한사묵란수타) / 날마다 기국과 지황을
복용하고 한가롭게 묵란 몇 가지를 그린다.
2. 左琴右書(좌금우서)/ 왼손으로 거문고를 타고 오른손으로 책을 들고 공부하는 선비의
즐거움을 말한다. –중국 晉 皇甫謐 <高士傳> [陳仲子條]-
3. 樂在其中(낙재기중) / 거친 밥 먹고 물 마시며 팔을 굽혀 베더라도 즐거움 또한 그 중에
있으니, 義롭지 못하면 富裕함이나 貴함은 나에게 뜬 구름과 같다. -<論語> [術而篇]-
4. 綠水靑山夜 春風明月詩 與君相別後 无日不懷思(녹수청산야 춘풍명월시 여군상별후
무일불회사) / 푸른 물 푸른 산 밤, 봄바람에 달 밝은 때, 그대와 서로 헤어진 뒤,
그대 생각 나지 않는 날 없네.
5. 太白後身(태백후신) / 檀君의 후손
6. 餘事作詩(여사작시) / 독서는 글을 짓기 위함이니 그 나머지에 詩를 지으라.
-宋 蘇籀 <欒城遺言>- (*籀: 주문 주 *欒: 둥글 난)
7. 風弄竹聲(풍롱죽성) / 바람이 대나무 소리 일으키네.
8. 德音不瑕(덕음불하) / 도리에 맞는 말[德音]은 흠이 나지 않는다.
9. 未O方閒(미O방한)
10. 溪山作伴 雲月爲儔(계산작반 운월위주) / 시내와 산, 구름과 달을 반려로 삼는다. (
*儔: 무리 주)
11. 前世應仙佛 此生有子孫(전세응선불 차생유자손) / 前世에는 神仙과 부처에게 응했고,
此世에는 자손을 가졌네.
12. 修身齊家(수신제가) /자신의 몸을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려라 -大學章句-
13. 修成淑德 施及子孫(수성숙덕 시급자손) / 맑은 덕을 닦아 자손에게 베풀라.
-<後漢書> [竇融傳]- (*竇: 구멍 두)
14. 行我須眉男子 身生於禮義國 又能讀書(행아수미남자 신생어예의국 우능독서)
/ 다행히 내가 수염과 눈썹이 있는 남자로 禮義國에 태어나고 또 독사할 수 있었네.
(98) 興宣大院君 印章(2-2), 사인[私印] -19세기
1. 李昰應印(이하응인) 2. 李昰應印(이하응인) 3. 李昰應/石坡(이하응/석파)
4. 昰應印/石坡居士(하응인/석파거사) 5. 石坡(석파) 6. 石坡(석파)
7. 石坡(석파) 8. 老石(노석) 9. 大院君章(대원군장) 10. 玉臺(옥대)
11. 庚辰 己丑 癸卯 壬戌(경진 기축 계묘 임술) -1862년 이후
-庚辰(1820년): 李昰應 출생 -己丑(1829년): 未詳 -癸卯(1843년): 興宣君 皮封
-壬戌(1862년); 미상
- 景福34 제69차 文化遺産踏査(8-3); 雲峴宮 특별전(4-3)에 계속 –
첫댓글 내가 못 보고 지나친 것 도 많네요 나는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일복놈들이 불태운걸로 알았는데저만 살 갰다고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선조에 대한 군주의 분노로 불탔다고하는 걸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으니 자라는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데 새 역사책엔 이정부에 눈에 거슬리는 건 모두삭제했다고 신문에 났던데 참 걱 정이네요 또
경복궁 중건 이야기가 나오니 사도세자가 영조하고 창덕궁에서 불 탄 경복궁을 보면서 영조기 탄식을 하니 사도세자가 곁에 있다가 불탄 경복궁도 재건 못하는 왕은 성군이 아니라고 했다고가 미운 털이 백혔다는 이야기가 생각 납니다잘 보고갑니다
여담 한마디
운현 궁 노락당 水曹를 보니 예전 관광차 들른 북경 자금성내 궁궐 모서리에 화루같인 생간 水曹가 있던데 모두 쇠로 끍은 흠짐이 나있고 군데 군데 남은 금 도금 흔적이 남아있는데 예전엔 금으로 도금 되어있었는데유명한 의화단 사건때 영군 군이 자금성에 침입 해서 보니 금빛 항아리가 있어 도금 된 금을 긁어가지려고 정신없는 사이 목표물인 유명한 서태후가 백여리나 떨어진 만리장성 까지 도망칠수있었다고 하는데 만리장성 八達嶺 성문앞엔 서태후가 도망치다 쉰 곳이라고 안내판도 있던데 예전에 관광시 들은 이야기가 생각이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