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 친구 亨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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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오늘, 2003년 12월 20일도 토요일이었습니다. 아침 10시경 저는 일산 라끄빌 스포츠센터의 러닝 머신 위에 있었습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중,고교,대학 동창인 홍문종의원이었습니다. “성주야, 형근이가 세상을 떠났다.” “야, 그게 무슨 말이야?” “ 부부가 함께 떠났다. 아파트 화재사고야”
심장이 "쿵!"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앉았습니다. 한동안 멍했습니다. 무슨 이런 일이…. 정신없이 짐을 챙기면서 시청 앞 미용실에 가 있던 집사람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집사람이 저를 진정시켰습니다. “여보, 침착해야 해. 그러다 사고 나”
YTN TV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 동부이촌동 LG 자이 아파트에서 사법연수원 교수 부부가 화재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 그날 새벽, 저의 절친 辛亨根 군 부부는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전날은 바로 형근이의 22번째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지방에 MT 가 있던 장남을 뺀 세 식구가 기념일 외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자던 중,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시작된 불로 두 부부가 질식사했고, 작은 아들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형근이는 33년 전인 1981년 12월 19일 홍릉 세종대왕 기념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 사회는 당연히 저의 몫이었습니다. 두 달 전의 약혼식 사회자 역시 저였습니다. 신형근과 이성주는 고교 시절부터 유명한 “바늘과 실”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형근이는 부동의 전교 1등, 경원의 대상이었습니다. 고교 1학년 때 저와 형근이는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형근이는 저를 “영어 잘하는 경찰서장 아들 반장”으로서, 저는 그를 “탁월한 수재”로 서로를 인정하였습니다. 건물 모퉁이의 50명 미니반이었던 1학년 3반의 1, 2등인 신형근과 이성주는 전교 3, 4등으로 박성호 담임 선생님의 자랑이었습니다. 점차 서로를 알아가면서 시시콜콜한 가정사까지 서로 공유했고, 양쪽 집 형제들 역시 이제는 서로 남들이 아니었습니다.
형근이와 한편이 된 길거리 농구는 막강했습니다 눈이 사방에 달린 듯 했습니다. 고2 중간고사 기간 중에 다음 날 수학시험을 앞두고 탁구장에서 밤 늦게 기진맥진할 때까지 땀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고2 가을 저희 집이 부동산사기를 당해 이 집 저 집 전전하다가 급기야 당시 철거민촌이었던 상계동까지 흘러 들어갔습니다. 왕복 3시간의 짐짝 버스 등하교에 지쳐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형근이는 근심어린 눈으로 저에게 제안했습니다. “우리 같이 안암동 독서실에서 숙식하면서 공부하자.”
대학 입시에서 서울법대에 2명이 합격했다는 소식에 동기들은 신형근과 이성주일 것이라고 모두 의견의 일치를 봤다고 합니다. “이성주가 아니고 김某라던데? “ 사법시험에 2명이 합격했다는 소식에도 신형근과 이성주일 것이라고 했답니다. 급기야 진위 여부에 내기까지 벌어졌다는 사실을, 23년 후 홍콩을 방문했던 고교 동기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형근이의 입주 과외 집은 제 집이기도 했고, 과외학생들은 제 학생이기도 했습니다. 시간만 나면 바둑판을 앞에 두고 둘이 누가 센지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형근이의 서소문 사법연수원 원생 시절., 고시를 중도 포기한 저는 한국투자신탁에 입사해서 명동지점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점심 시간에 하도 오가다 보니, 사법연수원생들은 제가 외부인인줄도 몰랐습니다. 형근이가 결혼 초기 한 때 처가에서 살 때, 형근이 처가는 제 집이기도 했습니다.
형근이가 판사로 임용된 이후에는 이전같이 자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지방법원 근무 등의 여건변화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법조계와 금융계의 행동반경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형근이가 소개한 그의 대학 절친과의 3가족 만남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형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집안의 기둥이 된 형근이는, 막내 동생이 간경화로 간이식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최후 선고를 받았을 즈음, 법원을 떠나 변호사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작은 아들이 기증한 간으로 막내 동생을 살려내고 막대한 모든 비용을 부담한 형근이, 박봉의 지방대학 교수로 있던 다른 동생의 모자라는 집값을 부인 몰래 도와주던 형근이. 집사람은 “형근씨가, 이제는 조금 편히 쉬고 싶었던 것”일 것이라고 저를 애써 위로했습니다
장례식장인 아산병원 14호실에서 3일 동안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만취상태로 있었습니다. 동기들은 성주가 평생 마실 술을 다 마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형근이의 사후 그의 두 아들을 돌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두 아들 역시 저를 많이 따르면서 저에게 아버지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회사 가족 동반 회식에 형근이 큰 아들과 여자 친구를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2008년 제가 前 직장을 퇴사하면서 연락이 뜸해졌습니다. 일본 유학 중인 제 아이들 건사하느라 경황이 없어서 저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재작년 가을 형근이의 두 아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작은 아들의 결혼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형근이가 남긴 재산으로 궁핍하게 살지는 않는 것 같지만, 어딘지 생활의 구심점이 없는 모습이 저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다행히도 둘째 아들은 야무진 배필을 만나서 잘 살 것이라는 믿음이 갑니다. 아직 방황하고 있는 서른이 넘은 큰아들에게 조심스럽게 멘토링을 제의했습니다. 큰 아들이 감사의 뜻을 표하며 기꺼이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아무려면 부모만큼이야 결코 못하겠지만, 인생의 방향타를 제대로 잡을 수 있게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제 형근이 큰 아들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집안 사정 상 오늘 기일 추모를 1주일 앞당겨 지난 주에 산소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저도 오래간만에 형근이가 묻혀있는 경춘공원 묘원을 다녀오려고 합니다. “친구여, 이제는 편히 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