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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 29 가득한 자
롬 1: 29 가득한 자 -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
1]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불의'는 헬라어로 '아디키아'니 그 아랫말에 기록된 모든 부도덕한 일들을 개괄적으로 지명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명사는 하나의 죄명(罪名)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법적으로 취하는 이기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보아진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겠지만, 실상은 그것이 자기를 유익하게 못하고 도리어 해롭게 한다.
잠 21: 7에 말하기를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공의 행하기를 싫어함이니라.'고 하였고, 잠 10: 2엔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고 하였다.
'추악'은 '포네리아'인데, 도덕적 부패의 해독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부적 패역성을 의미하는 '악의'란 말과 달라서 악한 결과와 해독을 가리킨다.
어떤 사본에는 이 말 다음에 '포르네이나'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정당한 결혼 생활 아닌 모든 불결한 남녀 교제를 말한다.
어떤 중요한 사본들에는 이 말이 없으므로 마이어(Meyer)는 이 말을 제외하였다.
'탐욕'이란 말은 '플레온'이란 말(더한다는 뜻)과 '에코'란 말(취한다는 뜻)과의 합성어(合成語)로 더 가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탐심은 다른 것이 아니고 불의한 일을 해서라도 물욕을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심사를 가리킨다.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에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심사를 가리킨다.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에 매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에 착심할 수 없게 하므로(), 우상 숭배와 같은 죄이다.
* 시 119: 36 -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 골 3: 5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심을 품는 자는 성공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간다.
잠 10: 2에 말하기를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다.'고 하였고, 잠 21: 6엔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고 하였다.
잠 20: 21엔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못하느니라.'하였고, 잠 23: 5에는 '내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하였다.
'악의'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키아'인데, 이것은 마음이 구부러진 패역성을 가리키는 바, 선한 권면이나 교훈에 대하여도 까닭 없이 반역하며, 남의 자선 행위까지도 방해하는(자기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잔인성 같은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선(善)에 대한 까닭 없는 반역이라 할 수 있다. 이 반역은 실로 극악한 심사인데, 그것을 고집하는 자는 더욱 현저하게 벌을 받는다.
그 이유는 이런 악한 마음은 무식, 혹은 연약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고의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시기'는 헬라 원어로 '프도노스'인데, 남의 잘 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통감(痛感)을 가지고 해할 수만 있으면 해하려는 악한 마음이다.
잠 14: 30에 말하기를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하였고, 잠 27: 4에는 '투기 앞에서 누가 서리요.'라고 하였다.
클락(Clarke)은 이 잠언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화를 소개했다. 곧,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탐심 있는 자요, 다른 한 사람은 시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 누가 말하기를, 너희는 무엇이든지 내게 청구하여라.
그런데 먼저 청구하는 자에게 그 청구한 것을 주고, 다음에 청구하는 자에게는 그 갑절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 때에 그 탐심 있는 자는 많이 받을 야심으로 먼저 청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 있는 자는 그 탐심 있는 자의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을 싫어하여 역시 잠잠하고 있다가 하는 말이, '내 눈을 하나 뽑아 주시오.'라고 하였다.
'시기'는 이와 같이 남과 나를 해하는 악독한 마음이니,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는 것이다.
시기를 없애는 방법은 상대편을 시기하는 대신에 그를 모본 또는 사표(師表)로 알고 그를 기뻐함이다. 그 이유는
(1) 나보다 우수한 자는 나의 선생이니 그를 나의 선생으로 알 때에 기쁘지 않으랴.
선생이 없는 사람은 인도자 없는 소경이다.
(2) 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도 많다.
그것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보다 우수한 선생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시기'의 죄가 교회에 큰 손해를 끼친 사실이 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교권자 데오빌로 감독의 시기로 말미암아 마침내 억울하게 파면을 당했으며, 사막에 망명하여 거기서 종신하였고, 사무엘 루더포드(Samule Rutherford)도 교권자 사이드센프의 시기로 인하여 투옥되어 수난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잡혀서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살인'은 헬라 원어로 '포노스'인데 아주 무서운 범죄이므로, 그것에 대하여는 모든 자연까지 노할 정도이다.
* 창 4: 10, 23-24 -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살인이 그렇게 극악시(極惡視)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범하기 때문이다.
* 창 9: 6 -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요일 3: 15에 의하면, 남을 미워함이 벌써 살인이라고 하였다.
증오는 살인과 같은 고로, 증오가 있는 곳에는 생(生)의 의의(意義)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잠 15: 17에 말하기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다.
'분쟁'은 헬라 원어로 '에리도스'인데 이것은 단체 생활의 생명을 끊어 버리는 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잠 17: 1에 말하기를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신에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미연에 방지함이 지혜롭다. 그 이유는 그것은 확대될 위험성이 있고, 확대되면 수습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 25: 8에는 말하기를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고 하였고, 잠 17: 14에는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하였고, 잠 18: 19에는,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툼이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
(1) 서로 시비를 지혜 없이 말하다가 일어난다.
(2) 범죄를 좋아하는 자들 측에서 일어난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라고 하였다(잠 17: 19).
(3) 과격한 말로 인하여 일어난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하였다(잠 15: 1).
(4) 미련함으로 인하여 일어난다.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고 하였다(잠 20: 3).
(5) 교만함으로 인하여 일어난다.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고 하였다(잠 22: 10).
(6) 말장이로 인하여 일어난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고 하였다(잠 26: 20).
(7) 탐심으로 인하여 일어난다.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라고 하였다(잠 28: 25).
'사기'란 말은 헬라 원어로 '돌로스'인데, 거짓은 모든 죄악의 인도자요, 또 엄호자(掩護者)의 역할을 한다.
마귀가 아담 하와를 죄로 인도할 적에도 '거짓'을 사용했다.
* 창 3: 1-7 -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죄는 거짓을 쓰고야 활동할 수 있다. 누가 악을 행하면서 그것을 악이라고 광고하면서 행하는 자 있으랴?
언필칭 선을 행하노라고 하면서 악을 행한다.
* 잠 12: 20 -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사기'는 우리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많이 속인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남을 속여 가면서 죄를 범하게 하고, 또 자신을 속여 자멸의 길을 밟게 한다. 그러므로 렘 17: 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니'라고 하였다.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거짓되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기 제 마음을 잘 지켜서 남을 속이지 말고 또 자기 스스로도 속지 말아야 한다.
남을 속이는 그것도 벌써 자기를 속임이니 그 이유는 남을 속여 유익을 도모함은 결국 자기를 해함이 되기 때문이다.
'악독'은 헬라 원어로 '카코에데이아'인데 그 뜻은 “간악”을 가리킨다. 퀴일(Kuhl)은 해석하기를, 이는 간책(奸策)과 궤계를 가지고 남을 해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은 구밀복검식(口密腹劒式)으로 외모로는 최선을 다하여 남을 도와주는 체 하지만, 이면과 실제에 있어서는 남을 해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노골적으로 직접 남을 해하는 자 이상의 중벌을 받을 것이다.
3] 수군수군하는 자요.
이런 자들은 공중이 모르게 은밀히 남을 훼방하는 자니, 이는 독사보다 악독한 자이다.
독사는 접근하는 사람만을 물어서 해할 수 있지만, 이런 사람(수군수군하는 자)은 몇 만 리 밖에 있는 자들을 해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모든 불의가 가득하다. '모든'이라는 말은 뒤에 나오는 '가득한 자요'라는 말과 더불어 여기에 대표적으로 열거된 죄악들의 다양한 종류들을 포함한다.
'불의(不義)'는 모든 죄악들의 대표적 명칭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일치하는 생각과 행위요, 불의는 그의 명령과 뜻에 어긋나는 생각과 행위이다. 하나님은 온갖 종류의 불의를 정죄하시고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원하신다.
사람들은 온갖 음란이 가득하다. 전통 사본에는 '불의'라는 말 다음에 '음란'이라는 말이 나온다. 앞 절들에서도 지적했지만, 음란은 인간관계의 죄들 중에 가장 크고 심각한 죄이다.
하나님은 모든 음란과 불결을 미워하시고 우리에게 거룩하고 단정한 삶을 원하신다.
사람들은 또한 '추악'이 가득하고, 탐욕이 가득하다. 탐욕은 이 세상의 것들을 더 많이 원하는 마음이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였다.
* 골 3: 5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심은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사모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영원한 천국을 참으로 믿고 소망하고 사모한다면 지나가는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탐심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보화와 우리의 기업은 하나님이요 장차 올 천국이다.
사람들은 또한 '악의(惡意)'가 가득하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위들이 나온다.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한다.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사람들은 또한 '시기, 살인, 분쟁'이 가득하다. 인류 역사의 초기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이나, 야곱의 아들들이 어린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판 것이나,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다 시기심에서 나왔다.
시기는 교만과 함께 싹트고 미움과 더불어 자라서 남과 다투며 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교만과 시기를 버리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이 나보다 잘되면 축하하고 기뻐하자.
또 꼭 필요한 진리의 싸움이 아닌 모든 다툼과 분쟁을 버리자. 천국은 의와 진리 안에서 화평한 세계이다.
사람들은 또한 ‘사기(詐欺)와 악독’이 가득하다. 사람이 남을 속이는 것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이런 이기심에서 온갖 악한 행위들이 나온다.
그러나 성도는 자기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선한 마음과 행위를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은 또한 '수군수군한다.' 이것은 은밀히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남에게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는 것이 사랑이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은 악한 일이다. 우리는 수군거리는 일을 그쳐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각자의 일에 충실하고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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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