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성탄 대축일’이라고도 한다.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간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이 사건을 통하여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해마다 1월 2일에서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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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마태오 2,1-12)
And behold,
the star that they had seen at its rising preceded them, until it came and stopped over the place where the child was. They were overjoyed at seeing the star, and on entering the house they saw the child with Mary his mother. They prostrated themselves and did him homage. Then they opened their treasures and offered him gifts of gold, frankincense, and myrrh.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예루살렘을 축복하신다.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알아보는 영광의 도시가 된다. 예루살렘 바로 옆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이 있다(제1독서).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공동 상속자가 된다. 이것이 곧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이다(제2독서). 구세주의 탄생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임은 구약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동방 박사 세 사람의 방문은 이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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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영원할 것이다. 모든 민족들은 예루살렘을 찬양하며, 이방인의 임금들도 그 앞에서는 몸을 숙일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모든 일은 전능하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제1독서). 인류는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형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누구나 하늘 나라의 유산을 이어받게 된다. 이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은총이다(제2독서). 동방 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다. 별의 인도로 미지의 세계에서 찾아온 것이다. 그들의 용기는 믿는 이들에게 모범이 된다. 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쳤다. 가장 값진 것을 바친 것이다. 그런데 헤로데는 호기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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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늘의 별빛이 구세주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 별이 온 누리를 비추었음에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표징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구원의 별빛에 대한 네 종류의 반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시민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구세주의 별이 뜬 것조차 모릅니다. 아예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에만 골몰할 뿐 생사의 문제인 신앙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의 반응은 헤로데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하늘의 별빛은 구원의 표징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별을 보면서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세 번째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별빛의 의미를, 또한 그 별이 어디에 멈추게 될지도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삼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경배하러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 별빛이 무의미하거나 위협적이거나 머리로만 되새기는 것일 뿐 기쁨의 초대장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 마지막으로 살펴볼 동방 박사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구세주의 별빛을 찾았고 따라갑니다. 제2독서에서 선포된 것처럼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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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러 먼 곳에서 왔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다만 그들은 별의 인도로 왔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별’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인도하는 별입니다. 사건이든 만남이든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이 ‘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다.’, 이렇게 느꼈다면 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만남에는 분명 주님의 힘이 관여하고 계신다.’, 이런 느낌이 들었다면 ‘별의 기운’이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동방 박사들처럼 용감해야 합니다. 물러나지 말고 이끄심을 따라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박사들처럼 예물도 바쳐야 합니다. 살면서 만나는 ‘인연의 아픔’입니다. 살면서 부딪히는 ‘고통스러운 사건들’입니다. 그것을 예물로 만들어 바쳐야 합니다. 바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인정하며 받아들일 때 ‘봉헌’이 됩니다. 아픔이 ‘진할수록’ 황금이 되고, 유향이 되고, 몰약이 됩니다. 올해에도 주님께서는 ‘숱한’ 별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그 별을 붙잡고 따라간다면, 우리 역시 복음의 동방 박사가 됩니다.
☆☆☆ 『천문학자의 관점에서 본 베들레헴의 별』의 작가인 마크 키저는 예수님 탄생 시기에 유일하고 드문 현상으로서 동쪽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별한 천체 현상이 일어났음을 보고합니다. 첫째는 기원전 7년 5월과 12월 사이에 물고기자리에서 목성과 토성이 정확히 세 번 일치한 사건입니다. 둘째는 기원전 6년 2월, 물고기자리에서 일어난 화성, 목성, 토성의 결집 사건과 더불어, 같은 해 2월 20일에 화성과 토성이 결집한 위치보다 약간 동쪽에서 달이 목성을 가린 엄폐(천체의 빛이 다른 천체에 의하여 가려지는 일) 사건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5년 봄에 독수리자리와 염소자리에서 나타난,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관측된 새로운 혜성의 탄생이라고 합니다. 마크 키저에 따르면, 당시 고대 근동 지방의 점성가들은 목성을 왕의 행성이며 동시에 자비로운 행성으로 이해했지만, 반대로 토성은 사악함을 상징하는 행성으로, 그리고 화성은 전쟁을 상징하는 행성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방의 박사들은 목성과 토성이 결합하는 것을 위대한 지도자가 태어나서 사악한 지도자를 물리치는 것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또한 달이 목성을 엄폐한 것은 분명 유다에서 한 왕이 태어날 것임을 알리는 현상으로 이해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천문학에서는 사자자리는 왕, 물고기자리는 유다인과 관련된 별자리이며, 신성이나 초신성은 왕의 탄생과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의 별에 대한 신비를 현대 과학으로 다 밝혀낼 수는 없겠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을 애타게 찾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최고 선물은?"
-홍승모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은 주님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 날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 황금과 유향은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말씀대로 임금에게 드리는 봉헌물입니다. "그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이사 60,6). 이 세 가지 봉헌물은 이방인들이 태양신에게 바치는 예물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참된 빛이 떠오른 것입니다. 황금은 위대한 임금을, 유향은 위대한 신, 곧 하느님을 상징하며, 몰약은 죽은 이에게 바르는 약초로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 공현은 성탄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드러냈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응답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어떤 것을 봉헌해야 합니까? 우리가 드려야 할 황금은 무엇입니까? 황금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움켜쥐고 싶어 하고 그래서 얻기를 갈망하는 최고 가치입니다. 그래서 황금은 세상의 힘을 상징하고 세상을 통치하는 임금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임금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세상에서 임금처럼 사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죽이셨습니다.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기에 아버지께서 뜻하신 모든 것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를 임금처럼 드높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우리는 황금이 아니라 이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사랑이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사람이 되신 순간부터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인간 손에 의탁하고 그 처분에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사랑의 가장 본질인 자기 자신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최고의 응답은 마음을 열고 같은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존재 자체가 우리 내적 양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유향은 무엇입니까? 유향 연기가 주님을 향해 피어오르듯, 간절한 우리 희망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의 욕구가 기도를 자극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성과와 결과를 내놓고 자신의 신앙 정도를 판단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품고 있는 갈망과 희망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의지를 보시는 것이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경직되고 어두운 우리 모습까지 모두 받아 주십니다. 그분은 이런 모든 사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주님은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 빛과 생명과 자유에로 이끌어 내시는 가장 소중한 우리 희망인 것입니다. 나 자신의 됨됨이를 모두 품고 받아 주시고 사랑하시는 분과 깊은 내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희망인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몰약은 무엇입니까? 몰약은 우리 삶에 따라오는 상처와 고통을 가리키지만 또한 상처를 치유하는 약초입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함께 계시는 주님께 우리 상처와 고통을 내어드림으로써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았고 고통 받으셨기에 그 처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 부르짖어 보기도 합니다. 극심한 고통과 고독과 버림받은 상황 속에서 탄원해 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확신과 믿음 안에서, 상처와 고통으로 우리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아기 예수님께 동방 박사들이 무릎을 꿇고 경배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나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시는지, 나는 내 삶 속에서 어떤 선물을 주님께 봉헌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점차 변화되는 자신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인간 본래 모습을 찾고 그렇게 돼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다면, 우리도 삶의 증거를 통해 주님을 나타내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최고 선물일 것입니다.
유다인의 메시아에서 세상의 그리스도로
-최승정신부-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Sollemnitas Epiphaniae Domini)에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는 동방박사들의 아기 예수 경배사건을 기념합니다. 이 경배를 통해 아기 예수가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음을 교회공동체는 기억하기에
우리는 그 사건을 공현(Epiphania)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전례력에 의하면 이 대축일은 1월 2일부터 8일 사이의 주일에 거행되어야 하는데, 보다 전통적인 지역교회에서는 그 날짜를 1월 6일로 고정하여 의무대축일로 지
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동방박사의 방문은 마태오복음 2장에 등장합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아기 예수를 방문하는 최초의 사람들이 목자들인 반면 마태오복음은 동방박사들이 처음으로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루카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가난’이라는 신학적 주제가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들, 즉 아기 예수가 구유에 뉘어지는 장면부터 목자들의 방문, 그리고 그 후로 전개되는 루카복음서만의 독특한 내용들은 ‘가난’에 대해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은유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태오복음은 예수의 신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가 메시아, 즉 ‘왕’의 위상을 지니고 있음을 복음서 전체를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천체의 징표를 읽은 이웃나라의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을 찾아 헤로데에게 왔다는 보도를 통해 마태오는 복음의 서두에서부터 예수가 누구인지를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은 본래 그리스어로 쓰여진 문헌입니다.
그 원문에서 ‘마고스(MAGOS)’라는 어휘가 사용됩니다.
오늘날에는 이 단어가 마치 눈속임을 하는 마술(magic)과 같은 다소 폄하된 의미로 사용됩니다만, 이 단어는
천체를 보면서 세상의 이치를 밝히는 고대세계의 가장 지혜로운 석학들을 이를 때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따
라서 이 단어를 ‘점성가’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말 성경의 ‘박사’라는 번역 역시 적절한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태오복음은 그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그들이 몇 명이었는지, 이름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복음은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복음은 그들이 동방에서 왔으며, 그들이 보물상자를 열고 아기 예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주었다고 전할 뿐입니다. 복음이 언급하는 동방은 아마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또는 더 나아가 페르시아 지역을 의미할 수 있겠으며, 이 두지역은 모두 점성학이 많이 발달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아마도 5~6세기경부터 몇몇 지역교회에서 이들을 동방에서 온 삼왕으로 보면서 그 세 임금의 이름을 카스퍼(Casper), 멜키오르(Melchior), 발타사르(Balthasar)라고 부른 전통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예물은 각기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황금은 임금의 권위를, 유향은 사제적 지위를, 몰약은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각각 함유하고 있다고 주석가들은 설명합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은 자신의 복음 전개를 통해 예수가 단지 ‘유다인의 임금’이라는 제한적 지위에 머무르지 않음을 분명히 합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로 시작한 마태오복음은 결국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 세상의 경배를 받아야 할 메시아임로 드러남을 고백합니다.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임숙희-
시작 기도 하느님, 오늘 제 마음을 열어주시어 태어난 당신의 아들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고, 그분 앞에서 경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독서 오늘 복음 말씀은 메시아를 찾아 동방에서 베들레헴까지 "별"과 "성경"(미카 5, 1)의 인도를 받아 여행하는 동방박사들의 여정에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들의 움직임의 시작과 끝은 '경배하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2, 2. 11). 동방박사(별을 보고 점을 치는 점성가)들은 마태오복음서의 맥락에서 종말의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하느님 백성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종말에 이방 민족과 임금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공을 바치러 예루살렘에 모여 오리라는 기대를 묘사하는 이사 60, 1
‐6은 복음서 말씀과 조화를 이룹니다.
루카나 마르코에 비해 마태오는 '땅에 엎드려 경배하다(프로스퀴네오 )'를 자주 사용하는데(마태 2, 2. 8. 11; 9, 18; 14, 33; 15, 25; 20, 20; 28, 9. 17)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동사는 칠십인역에서는 대부분 하느님이나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마르코복음서나 루카복음서에서는 주로 인간적인 존경을 의미하지만, 마태오는 주로 예수님 숭배에 관련된 행위를 가리킵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단지 어떤 대상 앞에서 '절을 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경배 대상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진지하게 알고, 그분 앞에서 우리 마음이 무릎을 꿇고, 그분이 지배하는 영역 안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로 신앙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통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동기에서 그분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그 어머니에게(마태 20, 20), 당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 때문에 당신을 경배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 28).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많았던 마태오 공동체에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은 복음서 마무리 단락에 잘 드러납니다. "열한 제자는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28, 16‐17)
메시아를 찾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들은 헤로데도 메시아로 태어난 아기에게 경배하겠다고 말하지만(2, 8), 그의 의도는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났다는 아기를 없애려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잔인한 행위를 통해 드러납니다(2, 13‐23). 사실 헤로데의 이 같은 부정적인 자세는 마태오복음서 전체에 전개되는 유다인들의 예수님 거부의 서막이기도 합니다. 루카 1, 5에서 헤로데를 '유다 임금'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유다 임금'의 호칭 대조는 흥미롭습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머리 위에 로마 군사들이 적어 붙인 그분의 죄목은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마태 27, 37)였습니다. 마태오가 예수님을 탄생 이야기에서 '유다의 임금'이라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온(1, 21) 이 아기가 '고통 받는 메시아'임을 생애 초기부터 암시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유다의 임금'을 경배하러 먼 여정을 시작했는데, 그들은 베들레헴에서 경배한 대상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2, 11)입니다. '아기와 그 어머니'에 대한 관심은 뒷 단락에서 계속됩니다(2, 13. 14. 20. 21). 이 표현을 통해 마태오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처녀한테서 탄생하였고, 이것은 구약에서 하느님이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이사 7, 14 참조)고 하신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소개합니다. 마태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에서 예고된 메시아이며 구약의 약속을 성취한 분으로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이 본문이 속한 1,2장은 그런 성취도식에 따라 예수님을 고통 받는 메시아로 설정하고, 그 뒷장부터는 고통 받는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성찰 오늘 복음 말씀은 모든 인간의 궁극적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세상 모든 백성이 복음을 믿어 하느님께 경배드리도록 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가 받은 소명의 핵심이기도 합니다(에페 3, 2‐3. 5‐6).
기도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 2)
어제 어디를 갔다가 매우 불쾌한 기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너무나 불친절했고, 귀찮다는 듯이 저를 무시했습니다. 저 역시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항의를 해봐야 저만 손해일 것 같아서 그 자리를 나왔지요. 하지만 불쾌한 감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한바탕 쏘아 붙이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도 했고, 다시 돌아가서 한 번 붙어볼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나쁜 감정을 품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계단 위쪽에서 “아~~”하는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를 보는 순간, 어떤 형제님이 계단에서 넘어져서 제가 있는 쪽으로 구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그 형제님을 잡았지요. 이 형제님은 계단 위에서 발을 헛디뎌 계단을 구른 것이었고, 다행히 그렇게 많이 구르지 않은 상태에서 밑에 있었던 제가 형제님을 잡은 것이지요.
그 형제님께서는 제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도 제가 아니었으면 큰 일 날 뻔 했다면서 저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아졌습니다. 분명히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에는 불쾌한 감정이 가득했었는데, 계단에서 행한 무의식적으로 행한 저의 행동 하나로 기분이 너무나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제가 큰일을 했다고 칭찬을 하지만, 사실 더 큰 도움은 제가 얻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형제님께서 계단을 구르지 않았다면, 저는 계속해서 이 불쾌한 감정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쾌한 감정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에게 표현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을 통해서 제 안에 있었던 불쾌한 감정은 완전히 지웠고 기분도 좋아졌으니, 누가 더 이득이겠습니까?
그 형제님은 제게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즉, 미움의 감정을 버리고 사랑의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우리 주변에는 나를 예수님께로 이끄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온갖 물건들도 저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끄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를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별’이 아닐까요? 동방박사는 막연하게 별만을 바라보고 먼 여행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별을 통해 구세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이 별은 동방박사에게 했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의 별만이 아닌, 수많은 별들이 내 곁에서 예수님 계신 곳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접하는 자연을 통해서, 또한 내가 행하는 모든 사랑을 통해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별을 보지 않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조그만 머리에서 나오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이 옳다고 하고,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주님을 가리키는 별을 바라보는 눈이 나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리키는 별을 제대로 그리고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봉헌하기 위해 저 먼 동방에서부터 여행을 떠난 동방박사처럼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계신 곳을 가르쳐주는 별을 발견할 수 있고, 주님과 함께 참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복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좋은 지휘관이 될 수 없다(아리스토텔레스).
작지만 큰 것
-정찬호-
유다 땅의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일에, 가장 ‘큰’ 고을 예루살렘이 술렁입니다. 그 보잘것없는 고을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나오리라(미카 5,1 참조)는 예언이 성취되려 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유스티노 성인은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동굴’에서 태어나셨다”고 전해줍니다. 이 동굴은 다름 아닌, 가축들의 축사畜舍용 외양간입니다. 오늘날까지 베들레헴의 ‘예수탄생성당’ 지하에 이 동굴이 보존되어 있는데,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이 참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 주목을 끄는 사실은, 이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 작은 문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문의 높이가 1.2m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누구든지 머리를 숙여야 하고, 그래서 이 문은 ‘겸손의 문’ 혹은 ‘좁은 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당신 스스로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오셨기에,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도 이처럼 낮아지기를 원하셨나 봅니다. 이 ‘작음’은 결코 ‘작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가장 작ㅁ은 고을이 아니다” 하신 주님께서, 또한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루카 12,32)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작은’ 이들, 그리고 스스로 작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주님의 공현 대축일
-김찬선신부-
어제 제 손녀가 또 태어났습니다. 12명의 조카에게서 12번째 손자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놈이 태어나기 전에 제 조카딸을 많이 힘들게 했답니다. 첫 째 때는 애를 가지고도 직장 생활을 다했는데 이번에는 몇 개월 휴직을 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어제 그 조카딸이 힘겨운 중에도 전화로 새해인사를 했는데 속으로 이렇게 애를 먹이는 놈이 어떤 놈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런 놈이 드디어 밖으로 나온 것이고 그 정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계집아이고 3,4Kg 나가는 건강한 아이입니다.
공현주일이어서인지 이 아이가 태어난 것과 주님 공현의 의미가 즉시 연결되었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는 볼 수 없었고 어떤 놈인지 몰랐는데 이렇게 태어남으로 모두가 볼 수 있게 되었고 어떤 놈인지 모두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당신을 보이지 않으시면 찾을 길 없고 우리는 도무지 그분을 만나 뵐 길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검은 장막 안에 당신을 숨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자어에 黑이 있고 玄이 있지요. 둘 다 검다, 어둡다는 뜻인데 자기 폐쇄, 빛의 차단과 단절인 黑과는 달리 玄은 자신을 폐쇄하지 않고 감추지 않고 내보여도 우리의 바라봄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기에 우리 눈에 어두운 것입니다. 물로 치면 黑이 구정물, 흙탕물이라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玄은 깨끗하지만 그 물이 너무 깊어 속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비의 구름에 가려있는 존재이지요.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권고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아버지는 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신다.” 빛이시지만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는 곳에 계시기에 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둠입니다. 빛이 내게 없는 것이 우리의 어둠이고 빛에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어둠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다가갈 수 없다면 그분이 다가오셔야만 만나고 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볼 수 있습니까? 저는 청와대를 딱 한 번 들어가 봤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초청 때 저도 남자 수도자 대표로 초청을 받아 청와대를 들어가 대통령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청와대를 열거나 대통령이 청와대를 열고 나와야만 우리가 대통령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듯이 하느님도 신비의 구름을 당신이 열고 당신이 우리에게 친히 다가오셔야만 볼 수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신 빛이십니다. 그 빛을 보기 전에 우리는 캄캄한 어둠이었고 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빛으로 빛이신 하느님을 뵙고야 우리는 모든 것을 대낮같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본 사람들이고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빛을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들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아주셨고 당신 아들이라고 독점하지 않으시고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낳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그분을 모시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그분을 낳음으로써”
눈을 돌려 주님만을 바라봄
-전삼용신부-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호화로운 생활에 대해 한창 뜨거운 논란이 있을 때, 한 유명하신 대형교회 목사님께서 설교를 통하여 이렇게 반박하셨습니다.
“재물도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다윗 왕도 주님의 은총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왜 예수님이 아닌, 다윗을 예로 들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다윗은 구약의 인물이고 구약엔 천국과 지옥의 심판 개념이 없어서 이 세상에서 그 심판이 이루어지는데 세상의 재물도 그 판결 조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즉, 건강하고 부자이고 자손이 많으면 주님께 좋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예수님은 가장 저주 받은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또한 그렇게 말한다면 예수님의 모범보다도 다윗의 모범을 따르라고 하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그들은 아직, 신약이 아닌 구약에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아니 물질적으로까지 가난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가난한 구유 위에 놓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다른 것이 놓여있으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한없는 외로움을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이란 ‘공적으로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 분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가난한 목동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던 것은 춥고 냄새나는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아닌 세상의 호화로움이었습니다.
아일랜드란 나라는 수백 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으며 종교로 인해서도 오랜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영국은 헨리 8세의 재혼으로 분열된 성공회를 믿고 있었고 아일랜드는 성 패트릭의 전교로 오래전부터 가톨릭을 믿어오던 나라였습니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오랜 지배와 박해에서 비록 말은 영어를 쓰게 되었을지라도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가톨릭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요 몇 년 사이에 거의 잃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잘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EU에서 못사는 나라들 중 하나였지만 한 10여 년 전부터 급격히 발전하여 지금은 연 개인 소득이 60,000불이 넘습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수백 년 동안의 모진 박해를 이겨내면서 지켜왔던 신앙을 갑자기 잘 살게 된 요 몇 년 사이에 많이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느 유럽 가톨릭 국가와 마찬가지로 성소는 급격히 감소했고 성당에는 노인분들만의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할 일이 많고 즐길 일도 많아서 성당을 찾을 시간이 없어졌고 사실 이 세상에서 잘 살면 되지 성당을 나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계 전역에서 현대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고 그것과 발맞추어 신앙의 위기도 함께 찾아오고 있습니다. 믿음을 잃게 만드는 것은 박해가 아닌 ‘세상의 유혹’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배경도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영원한 진리를 찾기보다는 돈과 권력과 현세의 즐거움만을 찾았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그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를 알아보았던 사람들은 목자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하셨고(참조; 루카 4,18. 6,20), 돈과 주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고(마태 6,24),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고(루카 18,25), 완전해 지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셨고(마르 10,21), 결정적으로 예수님도 돈과 세상과는 무관한 삶을 사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을 멀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십계명판을 섬기기보다는 금송아지를 섬겨서 그 십계명판이 부셔져야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대신 금을 섬겼고 그래서 버림받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산산이 부서져야 했습니다.
오늘 동방 박사들도 이스라엘 사람들도 보지 못했던 별들을 따라 오랜 시간 여행 후 메시아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메시아를 보기 위해 버려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먼 나라에서 오기 위해 시간과 돈이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또 먼 여행을 위해서 궁궐 같은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고생과 거친 음식을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도 왕이며 박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이 사라지자 헤로데 왕에게 메시아가 나실 곳을 물을 수 있는 겸손함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들이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버렸던 것은, 삼구 (三仇: 세 가지 죄의 뿌리), 즉, 교만, 육욕, 소유욕이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느님나라에서 하느님만을 바라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교만해진 인간은 뱀의 화려함을 바라보는 대신 하느님께 대한 시선을 잃게 되었습니다. 마치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앞에 자신을 걷게 해 주시는 예수님이 아닌 거센 풍랑을 바라보다가 물에 빠지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시선은 이렇게 교만으로 시작하여 성욕, 소유욕에 이르는 죄의 경향 때문에 바로 앞에 계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까지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실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긴 하느님의 백성은 그 빛을 따라가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 ‘빛’이 바로 오늘 동방박사들을 이끈 ‘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 자신과 세상에만 눈을 고정시키는 사람은 눈을 들어 그 별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
오늘 동방에서 온 세 명의 박사들은 돈이 없었던 것도, 권력이 없었던 것도, 즐거움 거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그런 것들보다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땅만 바라보던 현세주의자들이었던 유다인들과는 다르게 부자로 살고 있었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영원한 것들을 찾는 의인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빛을 보내시어 그 빛의 인도로 예루살렘까지 오도록 만듭니다. 이는 이미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나타내 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이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던 이 별의 정체가 궁금해집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있는 별이 사람들 마음에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별이 사라졌을 때 그 별의 역할을 대신 하였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해석했던 사람들’입니다.
만약 동방 박사들이 성경이나 그 성경을 해석해주는 이들의 말을 믿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어느 순간에 그리스도를 완전한 모습으로 만나 뵙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성경과 교회’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고 교회도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해석하는 결정적인 권한은 교회가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이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세례와 성사들을 통해 성령님을 받고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을 통해 성령님께서 그 사람과 직접적으로 동행하기 이전에도 성령님께서는 의인들의 마음 안에서 그 사람도 모르게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일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기 전에 성령님께서 먼저 성모님 안에 오셔서 성자의 자리를 준비하셨던 것과 같고,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보다 먼저 천사를 백인대장 고르넬리오에게 보내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교회보다 먼저 선교하십니다.
독일 쾰른에 가면 거대한 쾰른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성당 안에는 오늘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세 분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성인들의 시신을 찾아 모아서 그리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 그 일을 숨기지 않고 증언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후대에 어떻게 그 시신들을 모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람은 이렇게 한 번이라도 온전히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면 그 체험이 온 삶에 에너지를 주고, 나 또한 세상에 하느님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체험한 모든 신앙인은 ‘작은 주님 공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다인들이나 동방박사들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지상주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분한 성당과 지루한 성경을 읽기에는 너무 할 일이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습니다. 어린이들이야 부모의 강요로 어린이미사에 나오기는 하지만 청소년이 되면서 성당은 가장 재미없는 곳 중의 하나로 전락해 버립니다. 세상은 우리 일상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침투하여 자신들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컴퓨터, TV, 핸드폰 등 이젠 모든 사람의 눈이 번쩍거리는 황금송아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영원한 것을 찾으라고 소리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보입니다. 세상이란 것이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아일랜드의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한 순간에 허물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힘겨운 이 싸움을 이기고 동방박사들처럼 영원한 것을 찾아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수 있을까요?
동방박사들처럼 세상 것들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한 어떤 누구도 하늘을 바라 볼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이고 성령의 빛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세상과 멀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성경에서는 많은 위안의 말씀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로 오늘의 결론을 대신하려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 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1요한 5,4-5)
<향기와 흔적>
-양승국신부-
제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토요일과 저녁 8시부터 1시간 동안 KBS1에서 하는 KBS 스페셜입니다.
오늘은 취업난으로 전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는 이 시대,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서 참으로 좋았습니다.
회사 운영이 어려울 때 경영자들은 가장 먼저 머릿속에 감원을 통한 구조조정을 떠올리는데, 이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고 강조하면서 의식전환을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노사간의 대타협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상을 통해 함께 위기를 극복해나가자고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좋은 예로 주식회사 "유한 킴벌리" 를 예로 들었습니다. 위기가 닥치자 이 회사는 감원 대신 보다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찾았답니다. 회사를 24시간 풀로 가동시키면서 근무조를 늘리는 방안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변화의 초기 근무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급여가 약간 줄어들기는 했지만, 근로자들의 양보를 바탕으로 여가활용을 위한 회사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이 제도가 정착되면서 생산력은 점점 증대되어갔고 임금 수준은 오히려 더 높아졌답니다.
공장장실에 붙어있는 기구조직도를 카메라맨이 잡았었는데, 아주 특별한 기구조직도여서 참으로 신선했습니다.
보통 회사나 조직의 기구조직도는 최고책임자나 경영자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는 것이 보통인데, 이 회사 기구조직도는 정 반대의 형태인 역삼각형이었습니다.
가장 밑에 공장장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있었고, 위로 올라가면서 중간 관리자, 그리고 평사원순으로 사진과 이름이 붙어있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기구조직도에 대해서 공장장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관리자는 사원들 위에 군림하고 명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원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고, 또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양의 조직도가 나온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최초이자 공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이 세상에 드러내심을 경축하는 축일입니다.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꼭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분,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와 똑같은 조건을 취하신 분이 우리 눈앞에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와 계십니다.
아무것도 아쉬울 것 없는 전지전능한 하느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몸에 지니시고 겸손하게 우리 앞에 와계십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과 슬픔, 한계와 나약함을 스스로 선택하신 연민의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서 미소 짓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자신의 온 몸을 통해 구세주 하느님의 겸손과 자비를 이 세상에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감사의 축일에 우리가 취할 태도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온 몸으로, 우리의 생활로 구세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경영자나 간부들이 직원들의 방패막이, 섬기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 회사 경영자의 모습에서 겸손하신 아기 예수님의 흔적을 느낍니다.
아랫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 각별한 사랑을 지닌 그 회사 경영자들의 인간미 넘치는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겸손하신 마음을 느낍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자신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 그 자체로, 매일의 생활 그 자체로 아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세상 앞에 확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일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겸손과 자비를 이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통해 주님 공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매일의 삶을 통해 주님 공현에 기여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 충실함을 통해서, 복음정신에로 돌아감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종함을 통해서 우리 역시 주님 공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 존재 자체를 보고 하느님을 보게 되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불평불만하지 않고 그 고통마저 주님께 봉헌하는 우리의 노력은 십자가상 예수님을 세상에 널리 드러내는 일이자 주님 공현에 가장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남들이 보건 말건, 우리를 인정해주건 말건, 이러쿵저러쿵 뒤에서 말이 많아도 상관하지 않고, 꾸준히 주님의 뜻을 찾고, 복음이 제시한 길을 묵묵히 걸어갈 때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주님 공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스스로를 교회로 여기는 일, 각자를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이자 감실로 여기는 일은 가장 충실하게 주님공현에 참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또 다른 이 한해, 우리가 또 다른 예수님으로 이 세상 앞에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향기와 흔적을 발견하고 기쁘게 예수님을 향한 신앙여정을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자신의 첫 모습을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 동방박사들에게 드러내 보인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육화사건은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동방, 더 나아가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할 보편적인 일이란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가 되고, 하느님 구원의 대상이 된 것에만 기뻐하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육화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이웃들에게 전하는 이번 한주간이 되길 빕니다.
"주 하느님, 오늘 별의 인도로 성자를 이방인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으니 믿음으로 주님을 알게 된 저희도 자비로이 이끌어주시어 지존하신 주님을 직접 뵙게 하소서."
새벽을 열며
제 방에는 참으로 많은 열쇠가 있습니다. 성당의 모든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열쇠들이 있으니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 열쇠 모양만 보고서 ‘이 열쇠가 어디 열쇠구나.’라고 알 수 있을까요? 하도 많다보니, 또한 비슷비슷한 열쇠가 많기 때문에 어디 열쇠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을 여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 열쇠에는 어디 열쇠인지가 적혀 있거든요. 따라서 그 열쇠 모양을 보고서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열쇠에 적혀 있는 글씨를 보고서 문을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밤이었습니다. 모임을 마치고는 성당 현관 유리문을 열기 위해 열쇠 꾸러미를 꺼냈습니다. 열쇠에 적힌 글씨를 보고는 성당 현관 유리문의 위쪽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려는 순간, 아래쪽도 닫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주로 위쪽 키만 닫고 다니는데, 마지막으로 나가는 분이 아래쪽 키도 닫고 나갔나 봅니다. 열쇠 꾸러미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현관’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열쇠를 찾았습니다. 열쇠구멍에 넣으니 잘 들어갑니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쪽으로 돌리고, 또 반대쪽으로 돌리고... 꿈쩍도 하지 않는 문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갈등이 생기더군요. 수녀원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아니면 사무장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또 아니면 밖에서 자야 하나....
다시 열쇠꾸러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열쇠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열쇠를 집어서 돌리는 순간, 너무나 쉽게 열렸습니다. 성당 현관 유리문의 아래쪽 열쇠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현관’이라고 적혀 있으니, 당연히 이 열쇠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꼭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고 했을까요? 그래서 외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이 지닌 공적인 의미를 확인하고, 구세주 예수님이 곧 만민의 주님이란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와 있듯이 동방박사 세 사람은 만민의 주님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실 분을 경배하러 옵니다.
먼저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헤로데를 찾아간 것을 볼 때, 만민의 주님은 분명 화려한 궁전에 태어날 것으로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궁전 안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지요. 왕이라는 분은 그 화려한 궁전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또한 그 왕을 섬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닌, 초라한 목동들이 자리를 하고 있는 곳에서 만민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고서 과연 주님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 같으면 확인을 위한 어떤 노력을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리고서, 만민의 주님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바치지요.
이들이 겉모습만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만민의 주님을 봤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겉모습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을 제대로 보고 있을까요? 우리 곁에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누워 계신 힘없어 보이는 예수님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지를 반성해봅시다.
겉만 봐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겉보다는 안쪽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만 드러나는 주님이 아니라, 숨어 계신 주님을 찾아봅시다.
주님을 찾는 여정
-빠다킹신부-
주님을 찾는 여정
-이중섭 신부-
동방박사들은 하느님을 찾는 선의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마태 7,7)라는 말씀을 미리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주님을 만나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버리고 떠나는 단계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애초부터 그 먼 길을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과정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길을 가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께서 나신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셋째, 주님을 발견하는 단계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찾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뜨거운 갈망이 필요합니다. 넷째,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단계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들 생각에 가장 귀한 것을 아기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주님을 온 세상에 전하는 단계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뵈온 기쁨에 넘쳐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거쳐간 다섯 단계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 여정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나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을까요?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오늘은 아기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신 날입니다. 동방박사의 방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리고 이 일이 일어난 때와 장소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내 삶의 자리를 바라보려고 합니다. 주인공인 예수 아기와 그 가족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별을 중심으로 한 박사들의 여정이 돋보이고, 헤로데를 중심으로 한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은 매우 분주합니다.
헤로데. 그는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나신 분’이란 말을 듣고 위협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기를 찾으면 자신도 경배할 것이니 알려 달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에게는 메시아보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위와 자리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행동에서 탈출기에 나오는 이집트 왕 파라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무섭게 불어나자 두려워, 히브리 여인들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죽이라고 산파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집트의 공주가 모세를 물에서 건져 파라오의 궁에서 길렀고 후에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켰습니다. 헤로데는 동방박사들이 다른 길로 떠났다는 것을 알고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 어린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여 무죄한 아기들이 순교합니다. 예수의 부모는 박해를 피해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장차 율법의 노예가 되어 있는 백성을 해방시키고, 모든 인류에게 하느님의 새 백성이 되는 구원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 다음은 학자들과 대사제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신랑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누가 신랑인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지식은 있었지만 지혜는 없었던 어리석은 처녀들과 같습니다.
한편 동방박사들을 봅니다. 그들은 율법이나 예언서를 몰랐습니다. 단지 ‘별을 보고’ 온 것입니다. 그들이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다고 합니다만, 그 별은 꼭 하늘에 떠 있는 별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별은 하느님께서 궁극이요 절대를 향해 살아야 할 모든 사람 마음속에 심어주신 별로,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별입니다.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진리’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학자인 그들은 진리에 이르고 싶은 소망과 열망을 가졌기에 진리로 인도하는 별을 인식하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별이 언제나 찬란히 빛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가 뜨면 별은 보이지 않듯, 우리의 별도 때로는 다른 많은 장애물로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박사들도 그랬습니다. 왕이라고 하면 당연히 왕궁에서 살 것이란 선입견을 가지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무지로 인해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원의를 놓지 않으면 다시 별은 떠오릅니다. 박사들은 오히려 헤로데에게 더 정확한 정보를 얻고 떠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진리를 보았습니다. 그 아기는 ‘나는 진리다’고 하게 될 아기였으니까요. 참으로 무능한 이 아기를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알아보고 경배할 줄 알았던 이들의 안목을 나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장소를 살펴볼까요. 예루살렘은 대성전이 있고 학자들과 대사제들이 있고 헤로데가 사는 화려한 도시입니다. 아기가 나신 곳 베들레헴은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작고 초라한 고을로 인식되던 곳이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헤로데와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은 그들이 안주해 살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춘 화려한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동방박사들은 마치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고향과 친척을 떠났던 것처럼 목표를 향해 어디든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이 가장 보잘것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집착은 별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때는? 물론 예수께서 나신 때요, 별이 나타난 때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별을 보고 기회를 포착한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마치 부르심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은 것처럼 말입니다. 별은 언제나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일 때 행동으로 따라가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박사들은 아기를 뵙고 그들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다른 길입니다. 꿈에 헤로데한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만난 사람의 길은 만나기 전과는 다릅니다. 아기를 만나기 전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로데를 만나는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 아기’를 발견한 그들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그리고 하느님이 지시해 주신 길을 따라가면서 그들 삶의 현장에서 그 아기를 임금으로 고백하며 황금을, 그 아기가 하늘과 땅을 잇는 영원한 사제임을 고백하는 유향을, 그분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임을 고백하는 몰약을 바치는 증언과 선포의 삶을 살 것입니다.
자, 이제 구원의 보편성은 모든 이방 민족을 대표하는 동방박사들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에페 3,6)는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 내 안에서 성취되도록 마음의 별을 따라 나설 준비가 되었는지요? 그 별의 인도를 따라 매일매일을 채우면서 아기가 있는 곳에 도달하는 새해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분께 드릴 최고의 선물
- 이기양 신부-
베들레헴 성 마구간의 성가정에 손님들이 오셨네요. 저 멀리, 산 넘고 물 건너서 동방박사 세 분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지요. 고요한 밤에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멀리에서 찾아온 박사들에 의해 온 세상에 드러나는 주일입니다.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사랑의 극치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준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날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목동들에게는 천사를 통해, 동방박사들에게는 별을 통해, 그리고 헤로데 임금과 유다인들에게는 율법학자들을 통해 구원자가 태어나실 곳이 유다의 땅 베들레헴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의 기쁜 소식에 초대를 받았지만 모두가 축복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천사의 지시를 즉시 따랐던 베들레헴 성 주변의 목동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구원자를 제일 처음 만나는 은총을 누렸고, 별의 인도를 받은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온 인류의 구원자를 만난 기쁨을 가슴에 안고 헤로데가 요구하는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떠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헤로데 임금은 두 살 이하 아기를 학살하는 참극을 저지르고 말지요. 또 누구보다도 구원자를 기다렸으며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려 주었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30여년이 지난 후 인간 예수는 만날 수 있었지만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맙니다.
오늘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 믿음입니다. 박사들은 구원자가 태어나실 곳에서 대단히 멀리 있었지만 정성된 예물을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것은 어느 날 나타난 '별'이 아닙니다. 별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별을 찾아낸 것이지요. 그들의 믿음이 구원자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가득 안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마태2,12) 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들은 메시아 탄생을 온 세상에 알렸을 것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이 아침에 인간을 참으로 사랑하셨기에 인간이 되어 오신 자비의 하느님께 드릴 나의 선물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삶이 그분 앞에 드릴 최고 선물이 아닐까요? 아기 예수님을 만난 후 헤로데의 길이 아닌 하느님의 인도를 따라 미래를 출발한 동방박사들이 주님을 따르고 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조용히 말해줍니다.
세상을 비관한 젊은이가 혼자서 자살하기 억울하다며 훔친 차를 몰고 인파 속으로 돌진해 어린이 2명이 숨지고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몇년이 지나 이 사건으로 손자를 잃은 한 할머니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그 청년을 양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몇년 동안 청년을 뒷바라지 하면서 그의 방면을 위해 물심양면 애를 쓰셨습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그 청년을 미워하고 저주할 수 있는 입장이셨지만, 그분은 신앙 안에서 청년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청년을 돌보았던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얼굴에서도 성품이 나타날 정도로 아주 착해 보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안경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눈이 나빴습니다. 그런 그가 가는 일터마다 쫓겨난 것은 이 메마른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었지요. 계속되는 고통 속에 청년은 있는 이들에 대한 복수의 마음을 키워 갔고, 술을 마시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 잘못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 청년은 '제가 교도소에 오고 나서 사람 대접을 받았습니다'고 말했습니다".(「함께하는 여정」 70쪽)
그렇습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사랑과 용서를 베풀 때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이웃 사람들이 체험하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삶이 주님께 드리는 가장 큰 선물이요, 동방 박사들처럼 온 세상에 주님을 알리는 일임을 잊지 맙시다.
주님 공현의 의미를 사는 것
- 조욱현 신부-
주의 공현 대축일은 제2의 성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님의 탄생 신비에 대한 몰이해를 더 강조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탄생을 세상에 선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유다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도록 불림을 받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공현은 성탄의 신학적 내용을 확대시켜주고 깊게 해준다.
제1독서: 이사 60,1-6: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제1독서는 귀양살이에서 돌아오는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이끌어줄 미래의 예루살렘의 광채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바다의 보물들은 서쪽으로부터 페니키아나 그리스 배로 온다. 그리고 동방과 이집트의 재화들은 대상들에 의해 시리아와 시나이 사막을 통해 온다. 여기서 동방은 아라비아 반도의 민족들을 말한다. 전례는 이 성서말씀을 주님의 공현의 신비에 적용하고 있다. 오늘 박사들에게 나타난 별은 그들의 대화에 있어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 그 별은 그들 여행의 안내자 역할 외에 더 나아가 그들을 꼼짝 못하게 이끄는 자석과 같아 보인다.
오늘의 전례는 이 예루살렘 대신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인다. 이제 이렇게 예수를 중심으로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땅 극변에까지 쏟아 부어야 할 새로운 예루살렘은 교회이다(교회 1항). 교회의 기본적 사명은 복음 선포와 교회 각 지체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의 공현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제2독서: 에페 3,2-3a.5-6: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심오한 계획을 알리는 사절이 되게 하셨다고 하면서 자신에 의해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된 복음의 조명을 통해 주님의 공현은 더욱 확대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방인의 세계를 대표했던 동방박사들은 완전한 자격으로 교회에 들어왔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불행히도 교회 밖에 머물러 있다.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탄생지라는 것은 가르쳐 줄 줄은 알았지만 그 메시아께 경배를 드리러 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복음: 마태 2,1-12: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복음에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찾고 있다. 이 때에 헤로데가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고 한다. 여기서 헤로데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그리스도가 탄생할 곳이 어딘가를 알아본 뒤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박사들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만나 경배한다(마태 2,4-12 참조).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놀라운 역사적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누구이며, 몇 명이고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가 아니다. 복음은 가까이 있다고 하는 이들, 즉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헤로데처럼 그를 해칠 계략을 짜는 반면 멀리 있는 이들, 즉 이방인들은 신앙의 빛의 자극을 받아 예수께서 비록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찾고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리고 보물 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11-12절).
복음에서 별은 동방박사들을 예루살렘에까지 인도한 후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서 “아기가 있는 곳 위에”(9절) 머물게 된다. 이 별에 대해서는 하나의 혜성으로도 생각했고, 현대 과학자들은 기원전 7년에 발생한 물고기 성좌에서의 목성과 토성의 접함을 연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별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 별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내적 빛일 뿐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요한 6,44 참조)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수도 만날 수도 없다. 둘째로는 마태오는 별의 표징 아래 나타날 메시아를 예언했던 발람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솟는구나. 이스라엘에게서 한 왕권이 일어나는구나”(민수 24,17). 이제 구약의 계약이 나자렛 예수를 통해 실현되고, 그분의 빛은 이미 온 세상에 빛난다. 왜냐하면 이교도들도 신앙을 통해 그분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들이 길을 떠났을 때, 동방에서 본 별이 다시 나타나 아기가 있는 집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고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였다(9-10절)고 한다.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그것이 대단한 수고를 치르고 얻은 기쁨이고, 오랜 싸움 끝에 얻은 기쁨이며, 때로는 실망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얻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갖는 여러 가지 체험들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쉽게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계시하신 뒤 감추심으로써 당신을 다시 찾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공현축일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빛’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빛나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을 찾기 위해 동방박사들처럼 오랫동안의 고달픈 때로는 실망을 가져다주기까지 하는 여정을 끝내 달릴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만 밝게 빛나시는 분이시다.
“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12절).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빛을 받아 널리 퍼져나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헤로데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폭군에게 그리스도를 살해할 구실을 마련해줄 뿐만 아니라 다시 어두움 속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예루살렘에서는 그 별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헤로데와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스며들 수가 없다. 만일 빛이 스며든다면 모든 것이 붕괴된다. 왜냐하면 ‘숨은 생각들을’(루가 2,35) 드러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사들의 나라 ‘동방’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빛이 스며들어 그 빛을 보다 더 널리 확산시켜나갈 수 있다. 예루살렘보다도 동방에서 그 빛이 더 강하게 퍼져나간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빛에서 빛으로’(2고린 3,18) 옮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밝은 빛처럼 변화시켜 더욱더 깊게 그리스도의 빛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또한 영원한 영광 중에 결정적으로 드러내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뵙기를 갈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주님을 직접 뵙게 되는 그곳에서 주님의 공현은 영원히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항상 찾아 만나 뵙게 되는 것은 주의 공현의 의미를 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가능함을 잊지 않고 순간의 삶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 서공석 신부-
성탄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태어난 아기는 자라서 하느님에 대해 또 우리의 구원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공현 축일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그 생명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합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오늘의 이야기는 일어난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오늘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예수님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하였고, 이교도들이 먼 이역에서 찾아 와 그분을 영접하고 경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실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활동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분의 죽음 후 그분의 가르침은 이방인들에게 실제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해 뜨는 동방에서 왔다는 박사라는 사람들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몇 명이며 무엇 하는 사람들인지, 베들레헴을 다녀서 어디로 갔는지, 후에 신앙인이 되었는지, 어느 것 하나도 복음서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잠시 무대에 나타났다가 그들의 배역이 끝나자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세 명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물이 셋으로 되어 있어서, 기원 후 500 년경부터 전래된 전설입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헤로데 왕이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놀라고 그분에 대해 적의를 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헤로데 왕은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는 음흉한 주문을 하면서 그 박사들을 베틀레헴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나 결국 아기를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말씀을 찾아 자기 길을 꾸준히 가는 사람은 말씀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태어나고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환상을 쫓기도 하면서 갑니다. 돈을 좇아, 권력을 좇아, 때로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잘났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이웃을 미워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고 마는 한 송이의 꽃과 같이 길지도 않은 인생길을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의 모상을 빚어놓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삶은 하느님의 숨결, 곧 하느님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그 숨결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허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흙으로 돌아간다...먼지로 돌아간다.”(3,19)는 말로 그 허무를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 없이 우리 삶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제 멋대로, 자기중심적으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을 자기 안에 살려서 살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오늘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떠난 박사들의 이야기는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행보를 말해 줍니다. 그들은 구원의 말씀을 찾아 별을 보고 떠났습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별 하나입니다. 흔하디흔한 별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든 자기들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아브람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났듯이 그들도 떠났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립기도 하였고, 회의에 빠져 마음이 어둡기만 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가서 길을 묻기도 하고, 그의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간교함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 그들의 정성을 바치고 우리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 다시는 말하지 않고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알아볼 길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끝내고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찾는 마음이 있고, 길을 떠나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안주하였던 온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재물이 제공하는 온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위대하고 화려한 것만 찾는 시선에 말씀의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초라한 구유에 사람이 되어 누워 계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복음서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찾는 우리가 시선과 마음을 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말입니다. 초라한 현실과 고통당하는 약자들의 모습을 외면하면, 말씀에로 인도하는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현실과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겠다는 우리의 마음이 있을 때, 별은 보이고 말씀은 들립니다. 그런 마음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계십니다.
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입니다. 초라한 현실들과 고통스런 약자의 모습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별은 빛을 발할 것입니다. 헤로데와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과 같이, 오늘의 통치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엉뚱하고 때때로 간교한 생각도, 말씀을 찾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 말씀의 별을 보고 그것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말씀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서 사는 이기심의 따뜻한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버리고 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가지고 우리와 시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줄 때, 하느님은 우리의 별이 되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런 실천들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그런 삶 안에 ‘흙과 먼지’의 허무를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숨결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며 함께 계십니다.
길을 떠나자
- 강길웅 신부-
주의 공현 대축일'을 전에는 '삼왕내조첨례'라고 했습니다. 즉 3명의 왕이 아침에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뵈러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왕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박사라 고 부르며 또한 그들이 주님을 찾아가 경배드렸다는 사실보다는 아기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는 의미를 더 강조합니다. '공현'이란 공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는 사실 전인류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꼭 유대인만을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을 통해서 오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도 먼저 유다의 목동들이 찾아가 경배드렸으며 이어서 이방인인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목동은 당시에 천한 수준이었으며 박사는 고상하고 품위있는 위치였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합니다.
1독서에 보면 폐허된 예루살렘이 장차 하느님의 은혜로 얻게 될 미래의 영광에 대한 노래가 나옵니다. 그때는 강대국들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혀져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고 예루살렘을 일으키시어 만백성들이 보물들과 선물들을 가져오는 위대한 중심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수백 년 뒤에 그대로 적중이 되어 하느님 의 아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태어나시고 이방인의 박사들이 전인류를 대표해서 보물을 들고 그분을 찾아가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 때문에 그 이름이 빛나게 되었으며 또한 수백 년 동안의 치욕적인 사건들을 다 보상받았습니다. 드디어 믿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하느님께서 직접 머무르시고 가르치셨던 선택받은 도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실패하고 잘못된 사람이라 해도 예수님 때문에 용서받고 사랑받게 되며, 또한 오랫동안 고통받아 온 모든 아픔들을 다 보상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박사들의 그 용기와 희망과 끈기를 배워야 합니다.
복음에 보면 도대체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뵙고 경배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다만 황금과 몰약과 유황이라는 선물을 통해 세 명이라고 추측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런 귀한 물건들이 주로 궁궐에서 사용하던 것들이기 때문에 왕들이 온 것이 아니냐 하고 짐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라기 보다는 박사나 현인, 혹은 학자라는 말 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전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할 때 그들이 여행한 거리는 우리나라 남북의 삼천리 보다 더 먼 거리였으며 당시의 사정으론 굉장히 힘들고 위험 한 도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확신할 수도 없는 어떤 만 남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생애를 투신합니다. 그리 고 가장 좋은 보물을 품에 간직하고 그분을 뵙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용기와 믿음과 인내 때문에 드디어 주님을 만났습니다. 소원 성취를 한 것입니다.
믿음이 사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기나긴 나그네 길입니다. 아니, 주님을 만나기 위해 정처없이 떠나는 여행길입니다. 그 길에서는 긴 장마 때문에 태양을 못 보는 경우 도 있으며 찬바람 때문에 잠 못이루는 아픔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참고 걷게 되면 결국은 우리도 만나게 됩니다. 그리 고 우리가 무엇을 얻으려는 소망보다 우리의 것을 다 드리려는 열린 마음을 가질 때 그 감격과 기쁨이 큰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박사들의 행위를 보면 답답하고 어리석습니다. 도대체 바쁜 사람들이 고생스런 먼 길을 걸어서 어떤 아기를 잠깐 보고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봤다 면 세상을 다 얻어 가지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차롑니다.
우리도 '신앙'이라는 먼 길을 용기있게 걸어가야 합니다. 무엇을 얻으려는 소망보다 오히려 우리의 최고의 것을 바치려는 갸륵한 마음으로 올 한 해를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이 날을 성탄 축일로 지냅니다. 따라서 우리도 박사들처럼 용기있게 걸어가는 지혜를 배웁시다. 아무리 고달파도 희망을 가지고 참고 견뎌내는 믿음을 가집시다. 그러면 우리의 소망도 결국 채워질 것입니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구원의 역사는 바로 공현의 역사이다
-유영봉 신부-
초 점: 공현(公顯,Epiphania)이란 '표현', '드러내 보임'을 뜻한다. 동방박사의 방문, 주님 세례, 가나의 첫 기적 등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 정체를 드러내 보이는 사건들이다. 구원의 역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땅 끝까지 전하므로 그분을 알고 그분의 구원을 체험하도록 하는 공현의 역사이다.
1.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낸 사건
오늘은 동방의 이방인 현자(박사)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고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께 예물을 드린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그러기에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의미가 큰 축일이다. 공현(公顯,Epiphania)란 '공적으로 들러남', '나타내 보임'을 뜻한다. 동방박사들의 방문, 요르단 강에서의 예수님 세례, '가나'에서의 첫 기적 등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가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오래 전부터 예언하였던 그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사건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엔 야훼 하느님이 자기들만의 하느님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차츰 후대로 내려오면서 야훼 하느님이 자기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배생활을 통해 이러한 자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오늘 제1독서의 제3 이사야는 유배 후에 올 구원과 해방을 이야기 한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로 온다."(이사60,3-4) 이 말씀엔 벌써 보편주의(普遍主義) 사상이 깃들어 있다.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들의 빛이 될 것이며 이방인들이 야훼 하느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될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제2독서의 말씀은 더욱 분명하다.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3,6)
2. 구원의 역사는 바로 공현의 역사이다
오늘의 복음은 이방인 현자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그분께 예물을 드리며 조배함으로써 예수님이 만민의 주님으로 드러나는 제1독서의 말씀이 실현되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동방의 현자들은 '별을 보고 점을 치는' 그들 나름의 점성술이라는 지혜의 빛을 따라 예루살렘에까지 당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열어 보이시며 만나도록 해 주신다. 우리 한민족도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진리를 목말라 하던 중에 스스로 구원의 진리를 찾았고 하느님의 교회를 알게 되었다.
2천여 년 전에 멀리 이스라엘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구원의 기쁜 소식은 "그 소리 온 땅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를 확장해 가고 있다. 오늘 동방의 현자들이 예수를 메시아 왕으로 조배하며 예물을 드림으로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 처음으로 구세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바로 주님 공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3. 복음 전파로 공현의 완성해 참여해야 한다
세상의 복음화로 모든 이가 예수를 구세주로 받들게 하는 것, 그리하여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워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근본 사명이다. '복음전파'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唯一)한 이유이다.
나는 어떻게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교회에 인도되었는가? 먼저 하느님을 만난 사람이 나를 그분께 인도해 주었던 것이다. 복음은 '먼저 깨달은 사람이 그것을 다시 전해주는 과정'을 통해 2천년 동안 전해져 우리에게까지 온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이웃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별빛이 되어야 한다. 이웃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빛이 되는 길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을 살고 예수의 겸손과 희생을 사는 데 있다. 말하자면 '예수 살이'를 해야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십자가 따르는 일이다. 우리 주변의 뜻 있는 분들은 "교회와 성당은 수없이 많은데 예수는 보이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우리가 또 다른 예수, 작은 예수가 되지 못한 탓이다.
내가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지금의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를 주님께 인도해 준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나 자신도 이웃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선교를 통해 주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며 공현을 완성하는데 앞장서도록 하자.
변화와 진보를 두려워 마라
-배광하 신부-
동방 박사들의 방문
구원의 별빛을 찾아서
동방 박사들
주님 공현 대축일에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되는 성경의 인물은 세 명의 동방 박사들입니다. 이 동방 박사들은 바빌론에서 별을 관찰하며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던 점성가들일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기원전 597~538년 바빌론 유배를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여러 이유로 바빌론에 정착하게 된 유다인들의 입을 통하여 동방 박사들은 그들이 장차 오시게 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의 계시를 듣지 못한 이방인이었지만 창조의 자연 안에 울려 나온 하느님 구원의 뜻을 별을 통해 감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1, 19~20) 이제 하느님의 뜻과 그 부르심의 상징인 별을 보고 동방의 박사들은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인생의 가장 숭고한 길을 발견하였을 때, 안주하던 삶을 버리고 순례의 길을 떠난 희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크나큰 가치를 위하여 세상 것을 버렸을 때 만날 수 있는 분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님인 것입니다. 그분은 세상의 참된 왕(황금)이시며, 거룩하신 하느님(신성=몰약)이시며, 인간의 죽음(유향)까지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것이 아닌 천상 것을 추구하며 우리에게 비추는 빛을 따라 걸어야 우리는 끝내 그 영광을 볼 수 있음을 오늘 동방 박사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빛은 세상 만민에게 열려 있음을 알리는 것이 주님 공현 대축일의 가르침입니다.
그 옛날, 그 아름다운 밤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으로 보았던 소외되고 미천한 처지의 목동들부터 오늘 이방인 동방박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열려진 구원의 보편성을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 6)
우리 인생의 별빛
오늘 동방 박사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끊임없이 가져야할 교훈은 머물러 주저앉은 삶이 아니라 변화와 떠남의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대교구장이셨던 마르티니 추기경님은 모세의 생애를 묵상하시며 그를 ‘파스카 인간’으로 이렇게 규정하십니다.
“파스카 인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건너가는’ 인간을 말한다. 자신의 삶 속에서, 한 체험에서 다음 체험으로 건너가는 사람이다. 크고 고통스럽고 참으로 인생을 뒤집어엎는 사건들 속에 끼어서 하나에서 다른 경험으로 옮아가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이, 또 자기겨레가 한 실존에서 다른 실존으로 옮아가고 옮아가게 만드는 사람이다. 모세는 구원의 역사를 산 사람이요, 자기 스스로 하나의 여정을 걸었고 자기 백성에게도 걷게 한 인물이다.”
가끔 신앙의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안타까움은 변화와 진보에 대한 두려움과 용기가 없음입니다. 현재의 기도 생활에, 현재의 신앙생활에,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을 느끼며 그곳에서 더 이상 진전을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더 큰 인생의 별빛이 비추어도 일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장엄한 주님의 목소리가 울려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신앙은 퇴보하며, 믿음은 폐쇄적인 편협함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자기 신앙, 자기 가족, 자기 단체, 자기 본당에 발목이 잡혀 더 큰 것을 돌아볼 여지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 같은 눌러앉은 신앙, 움직이지 않으려는 신앙, 폐쇄적이고 편협된 신앙에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또다시 준엄한 목소리를 높입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이사 60, 1~2)
우리는 분명 우리 인생을 밝혀줄 은총의 별빛을 보고 축복의 길을 걷는 복된 이들입니다. 그러나 주님 공현은 우리가 그 별빛을 독점하거나, 다 차지하였다는 자만에 빠지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며, 세상이 여러 암흑과 고통의 어둠 속에 있음을 깨달아 내게 비추인 별빛을 세상 어둠을 향하여 다시 반사 시켜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 같은 실천이 있을 때, 주님의 현존을 뵙게 되며, 그분의 영광이 우리 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유의 마지막 등장인물
-박상대신부-
오늘은 주님이신 아기 예수님의 공현 대축일이다. 공현(公顯)이란 "공식적으로 나타내 보이다"는 뜻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로 드러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주님 공현 대축일은 3명의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까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와 예물을 드린 일(마태 2,1-12)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오늘의 주님 공현 대축일을 "거룩한 삼왕의 축일", 또는 "삼왕 내조(來朝) 축일" 등으로도 불렀다. 이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160-220경)가 동방박사들을 왕들로 추정한 데서 유래하며, 6세기경에는 이들 삼왕의 이름을 거론하여 "타다이다, 멜키올, 발뤼토라" 라고 불렀다가, 8세기경에는 "카스팔, 멜키올, 발타살"로 고쳐 불렀다. 중요한 것은 이들 박사들, 또는 삼왕의 방문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구유의 아기를 통하여 이들에게 공현(公顯)한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주님 성탄 대축일보다 공현 대축일이 먼저 제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3세기초까지의 초대교회가 일년 중 최대의 축일로 기념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절이며, 그 다음으로 모든 주일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거행한 것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300년경에 와서 동방교회에 의해 먼저 제정되었다. 원래 1월 6일로 지정된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공현"의 뜻을 살려 예수성탄, 예수세례,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요한 2,1-11), 거룩한 변모사건(마태 17,1-13)을 한꺼번에 기념하였다. 그후 동·서방의 지역교회는 이들 사건들을 따로 떼어 고유의 축일로 기념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313년 이후 서방교회가 "불멸의 태양신 탄일"이었던 12월 25일을 예수 성탄 대축일로 제정하여 지냄으로써 주님성탄과 주님공현을 분리시켰다. 오늘날 동방교회는 1월 6일을 주님 성탄 대축일로 그 다음에 오는 주님 세례 축일을 공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월 2일과 8일 사이에 오는 주일에 오늘 대축일을 지낸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로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유 세트에 등장해야 할 인물들이 완성되었다. 마구간 한 가운데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 그 곁에 양친이신 마리아와 요셉, 주위에 소, 양 등의 가축들과 그들이 먹을 짚더미, 천장에 매달려 있는 천사들, 막 나가려는 목동들, 그리고 오늘 화려한 왕의 복장으로 각기 황금, 유황, 몰약의 선물을 손에 들고 정중히 등장한 세 명의 동방박사들과 그들이 타고 온 말들... 세 명의 박사들 중 한 명은 때때로 흑색 피부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혹시 여기에 빠진 사람은 없는가? 물론 있다. 바로 나다.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고 맞이하면서 이 놀라운 사건을 처음부터 함께 하여 온 나 자신도 그들 속에 끼여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오늘 이 구유의 한편에서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를 보다 깊이 묵상하고 이를 종합하여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온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한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놀라운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방문사건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또한 루가복음에서와 같이 마태오복음의 전사(前史)에 속하는 대목으로써 신화적 요소를 상당히 담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성서학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역사적 사실로 증명할만한 자료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난 1,500년 동안 이 전사(前史)를 토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물론이고 비신자들까지 크리스마스 구유를 장식하여 동방박사들의 방문사건을 예수성탄 사건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신앙적 고무(鼓舞)와 제고(提高)의 기회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말씀은 "야훼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자처하던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던 예언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무관심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멀리 있는 이방인들을 불러 유다인의 왕을 찾아보게 하신 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예언자들의 말을 생전에 들어보지도 못한 이방인들이 오히려 유다인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자기들의 전통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엉뚱한 곳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보다는 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고 왕을 찾아 경배하겠다는 순박한 마음으로 신앙의 긴 여행을 시작했던 3명의 동방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오묘한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왕을 찾아 경배하겠다는 일념으로 신앙의 긴 여행을 시작했던 동방 박사들의 순수하고 착한 마음은 충분히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표본이 된다.
오늘과 같이 지도가 없던 그 당시, 먼 여행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밤에만, 그것도 맑은 밤 날씨에만 뜨는 별을 보고 그 별빛을 따라 각기 선물을 들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왕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났다는 것, 결코 쉬운 여행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여행은 필시 몹시 지루하고 피곤했을 것이며 온갖 어려움을 만나서 겪어야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 빨리 왕을 찾아 뵙겠다는 일념에 급박하고 들 떤 마음의 기쁨이 넘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대목에서 "알타반"이라는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그들은 모두 한 가닥 별빛과 그 별이 의미하는 미지의 왕에게 대한 희망과 꿈으로 부풀어 있었으니, 사실상 박사들은 자기들의 남은 인생을, 자기들의 모든 것을 미지의 왕에게 내어 걸었던 것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바로 이런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도 구유의 아기 예수께 우리의 남은 인생과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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