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고양이의 저녁
박원희 지음|푸른사상 시선 195|128×205×8mm|152쪽|12,000원
ISBN 979-11-308-2171-9 03810 | 2024.9.10
■ 시집 소개
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산처럼 고요하고 넉넉한 노래
박원희 시인의 시집 『고양이의 저녁』이 푸른사상 시선 195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이순의 나이에 이르러 살아온 길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며 삶의 가치를 견고하게 다지고 있다. 이 세계의 존재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시인의 노래는 많은 생명을 품은 산처럼 고요하고 넉넉하기만 하다.
■ 시인 소개
박원희
맑은 고을 청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1995년 『한민족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작가회의 충북지회 회원, 민족문학연구회 회원, 엽서시동인, 충북민예총 부이사장이다. 시집으로 『나를 떠나면 그대가 보인다』 『아버지의 귀』 『몸짓』 『방아쇠증후군』 『아내』 등이 있다.
■ 목차
제1부
테트라포드 / 산길 / 떠나는 길 / 장마 / 꿈 / 늙은 애인 / 맹꽁이 / 존재 / 문장 / 구름의 두께 / 닭 / 방황 / 곡우의 우암산 / 봄날 / 붉은 달
제2부
비단길 / 돼지는 간다 / 개미 / 금천 / 목포에서 / 죽음 / 변 / 서벽 / 물야에서 / 물의 노래 / 고양이의 저녁 / 친구 / 아주까리 / 미친 사랑을 위한 노래 / 보살사 가는 길
제3부
어머니 생신에 / 무덤에서 / 아버지 1 / 허산 / 장승백이 골목길 / 이사의 시간 / 분서(焚書) / 바닥 / 약 / 꼭지 / 별을 세다 / 아버지 2 / 똥 싼 길 / 어머님 전상서 / 월훈, 마른장마
제4부
특방어 / 시끄러운 노래 / 주상절리 / 머리를 깎다 / 흔적 / 저녁에 / 마스크 / 그날의 기억 / 살의(殺意) / 노랑 지붕 / 민주를 찾습니다 / 풀꽃 / 작업일지 1 / 작업일지 2 / 노동의 시간
작품 해설 : 이순(耳順)의 길- 맹문재
■ '시인의 말' 중에서
시들이 잠들러 간다
나의 부모처럼 영원히,
시들의 무덤을 쳐다본다.
그리고
사랑한다 시여!
풀어놓지 못한 말들은
구천을 맴돌고,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조용한 밤이다.
얼른 새벽이 오기를
■ 작품 세계
박원희 시인이 제시한 길 중에서 이순(耳順)을 나타낸 작품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주지하다시피 이순은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로 사람의 나이 예순 살을 이른다.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인격의 형성과정을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이라고 술회했다. 예순 살이 되어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해 다른 사람의 말을 순순히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박원희 시인의 시 세계에는 공자가 술회한 이순의 삶이 여실하다. 모든 해를 살아왔지만 그 경험들에 함몰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간다. 걸어가는 길의 끝이 있지만, 퇴로가 없다고 여기고 포기하지 않는다. 주체성을 견지하면서 별을 따라 길을 간다. 원망을 잊은 지 오래고, 불효를 반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모님의 길을 따른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길과 옳은 길을 걷는다. 삶은 언젠가는 막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곡예 같은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많은 생명체를 품고 있는 산처럼 시인의 발걸음은 고요하고 넉넉하다. 그러면서도 시끄러운 세상이야말로 무언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일어나는 터전이라고 여기고 들어선다. (중략)
화자는 떠난 길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겠다는 자세로 나아간다. 삶의 가치를 견고하게 가지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시간에 함몰되지 않고 창공에서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방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외로워하거나 불행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 부모님의 길을 새기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려고 한다. 자기를 긍정하는 현재진행형의 사회적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테트라포드
산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죽는다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일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지
버려야 할지를
산다는 것을 생각하며
길을 바라본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방파제 끝
테트라포드가 서 있는 저녁
고양이의 저녁
드럼통 위
고양이 새끼가 젖을 먹고 있습니다
젖을 먹이는 고양이는 서 있습니다
새끼 두 마리는 정신없이 먹고 있습니다
에미 고양이 눈을 부라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봅니다
비는 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산을 들고 쳐다보았습니다
신기하고
불쌍하고
측은하다는 듯
어미 고양이 앞발을 들어
나에게 저리 가
저리 가
하며
발을 들썩이고
불쌍한 시대를 벼르며 가는
고양이
철길 옆 드럼통 위
기차는 생각 없이 지나가고
나도 지나가고
저녁은 언제나 비를 맞고
고양이는 소리 없이 젖을 먹이고
시끄러운 노래
나는 이 시끄러운 나라에 사는 것이 행복하다
매일 무언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일어서는 나라가 행복하다
부끄러운 보따리를 풀어헤치며 하나씩 해결해가는 것이 행복하다
감출 것이 없어진 나라가 행복하다
80년 100년 전의 암울했던 현실
깜깜한 밤길을 승냥이가 난무하는 길을 가던 선조들
70년 전 분단의 비극을 겪으며 반목의 세월을 견딘 아버지의 아버지의 또 아버지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다 벗고 마음까지도 잃어버린 역사 앞에서 우리는 빚진 자
나는 나라가 시끄러운 게 행복하다
조용하면 나라인가
수천만 일억이 모여 살며 더 시끄러운 나라
행복은 크게 올 것인데
아침 해는 동해를 일으켜 세우며 붉은색으로 온다
세상을 태우며 가슴을 태우며
온다
휴전선 깊이 물든 단풍도 타고
가슴도 활활 타오르는
11월에 앉아
언젠가 시끄러운 더 시끄러운 날을 기다린다
장마당에 보따리를 풀고
온 민족이 한풀이하는 날 시끄럽지 않고
행복할 수 있으랴
그날이 오면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 부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