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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는 무엇이 다른가요(고전11장 1-16)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1: 1-16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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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에 들어서 인류에게 혁명적인 몇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인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흑백차별의 문제,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들이 혁명적으로 변해왔습니다. 차별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름’에 대한 독특성 같은 것 말입니다. 이 다름의 문제는 차별의 문제를 극복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차별이고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차별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준의 문제로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상황에서 아주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하나님의 진리가 어떤 문화의 틀에서 전달되는지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 역시 사도 바울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고린도라는 문화적 환경 속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남녀 간의 차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요?
사도 바울의 마음 -본받는다는 것
오늘 본문의 1절과 2절에서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참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 속에서 그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자녀들이 나의 모습을 닮을까 봐 두려운 부분이 많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에게도 그런 단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완전함’을 닮으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온전히 삶을 드린 풀타임 사역자가 된 것, 그가 혼자 살면서 사역을 한 것 그런 것을 닮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모양이 아닌 그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그의 마음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소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려는 소원 말입니다. 누군가를 닮아가려는 마음은 그 대상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C. 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 보면 ‘가장(假裝)합시다’라는 장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못생긴 남자의 예를 듭니다.
어떻게 못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잘생긴 사람의 얼굴을 본떠 가면을 만들어서 쓰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수년을 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그를 멋있게 생긴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어느 날 그 가면을 벗었더니 자기 얼굴이 진짜 그 가면의 잘생긴 얼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도 가면을 오래 쓰다 보니 그렇게 얼굴이 변해 버린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 비유를 통해 위장하고 가장한다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칭의’ 우리가 의롭게 인정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의롭게 살려고 하다 보니 의롭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복음의 진리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복음의 가면을 쓰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단지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변해 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변에서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하고 친한 척 하다가 친해지는 경우,기쁘지도 않은데 웃다 보니까 기뻐지는 경우,상황이 힘든데도 감사하다 보니 감사할 일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난 후 뜨겁게 사랑했던 그 마음을 닮기를 소원했던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성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화의 과정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는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씀을 행하려고 무던히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6월 초하루에서 팔복 말씀 중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복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의’는 우리 신앙인들이 바라는 최대의 덕목일 텐데.
만일 마태복음에서 ‘의로운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다면 결코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누구도 의롭다 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축복일 수 있는 이유는 ‘의로운’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의 완성’이 아니라 ‘의에 대한 열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열망을 가진 사도 바울에게 오늘 본문 2절의 말씀은 ‘기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이것이 바로 사역자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사역자인 저에게 가장 힘든 것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역자인 저에게 가장 기쁜 것이 있다면, 말씀을 기억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들른 어떤 식당에서였습니다. 주인이 저를 보고서 하는 말이 “목사님,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할 때, 제 마음이 참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저를 알아보아서가 아니라 말씀을 경청한다는 것 때문이었죠.
제가 늘 가던 식당이 있습니다. 제가 갈 때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교회를 나오라고 하는데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식당에 갔더니 저를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는 조금 다릅니다. 더 친절하고 더 서비스가 좋습니다.
이유인즉슨 집에서 TV를 보다가 우리 교회 예배실황과 설교를 듣게 되었고, 그 말씀 때문에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사역자에게 누군가 자신이 전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요?
사도 바울의 기쁨이 바로 자신을 기억하며 전하여 준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음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전통’이라는 말입니다.
‘전통’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따라 살다 보니 몸에 배고 사는 방식이 돼버린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다 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는구나!”라는 규범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을 듣고, 세례도 받고,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크리스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Christian life style’이 만들어질 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다녀온 Southern Africa 지역 선교사들과 세미나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가장 고민스러워 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신학용어로 ‘Form’과 ‘Meaning’ 즉, ‘문화’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복음은 문화라는 형식을 통해 전달됩니다. 그런데 그 문화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문화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진정한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지요.
일부다처제의 사회체제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정령숭배 사상과 무당이 난무하는 세상 문화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무엇이냐의 문제이지요.
필연적으로 복음이 들어가면 문화와 충돌이 일어납니다.
우리나라에서 복음이 전파된 다음 제사 문화와 가장 큰 갈등을 겪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문화와 전통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갔기 때문에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기쁘고 칭찬할 만한 일이 무엇이냐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전통, 즉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 드러나는 외적인 삶의 방식이 생긴 것이 기뻤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도전하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를 믿기 때문에 만들어진, 삶에서 지켜야만 하는 Life style이 무엇입니까? 즉, 구별된 삶의 방식이 무엇입니까?
‘머리’라는 말은…“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본문 3절에는 ‘머리’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여자의 머리는 남자,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
여기에서 ‘머리’라는 말은 ‘주관자’라는 뜻입니다. 얼핏 보면 남자가 여자의 우위에 있어 남녀 차별적인 말인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부분을 차별이 아닌 ‘질서’라고 보는 게 옳을 듯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인 것보다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남자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남자라면 그 가정의 머리가 되어도, 가정을 주관해도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에게 ‘주관’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로 들리시나요?
제가 언젠가 가정의 날 설교를 하기 위해 주일 새벽에 아침을 해서 먹고 나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여자들에게는 환호를 그리고 남자들에게는 원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협박까지 들었습니다.
제가 자꾸 그런 설교를 하면 교회에서 남자들이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이죠.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남자들이라면, 가정에서 여자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알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처럼 사랑과 희생으로 가정을 주관하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주관하시는 방법은 세상의 방법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해야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본질적인 다름의 의미가 아니라, 남자가 여자보다 영적인 특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위치와 역할이 있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당시 교회에서 여자들은 머리에 쓴 것은 자신의 머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이유입니다. 머리에 수건을 씀으로 자신의 머리가 남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다음 7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여자들에게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자신이 남자의 권위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교양 있는 여인들은 머리에 베일을 쓰고 외출을 했습니다.
반면에 노예나 창녀와 같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은 베일을 벗고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문화로서는 머리를 풀고 사람 앞에 선다는 것이 상당히 천박한 차림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고린도 사회는 성적으로 문란했고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음행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터라. 바울은 상황을 고려하여 교회를 섬기는 여성들의 머리 모양 문제에 대처하고 있습니다. 조금 쉽게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이해해 보면 좋겠습니다.
…부부 관계에서 남편의 권위는 그리스도에게서 오고, 아내의 권위는 남편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거나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자입니다.
여자들이 예배 중에 머리 덮개를 쓰는 관습은 기본적으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너무 확대해서 해석하지는 마십시오.
남자나 여자나 누구든지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누가 먼저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남자가 하나님의 아름답고 빛나는 형상을 반영하여 먼저 지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 때 이후로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나왔습니다. 사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누가 먼저냐?"를 따지는 일은 이제 그만둡시다.
다른 것이다! 틀린 것이다!
오늘 말씀이 남녀 차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남녀 차이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디어 11절과 12절에서 드러납니다.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남자와 여자 사이에 기능적인 차이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능적 차이가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 차별적이라기보다는 ‘상호 의존적 관계’라는 것이죠.
아담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출생했습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우리가 모두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13~16절의 말씀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여자는 머리가 긴 것이, 남자는 머리가 짧은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 아주 흥미롭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기도하는 천사를 생각나게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모자를 벗은 남자의 머리는 순종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모습을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나는 여러분이 이 문제로 논쟁을 벌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복음과 문화 사이에서 잘 정립되지 못한 사고방식에 대하여 지적합니다.
오늘 우리가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됩니다.
복음은 늘 문화의 옷을 입고 전파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문화의 옷을 입느냐에 따라 복음이 잘 전파될 수도 있고, 때로는 복음에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의 전통에 따라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여자들이 미사를 드릴 때 머리에 하얀 천을 덮습니다.
보세요.
5절에,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3절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당시 근동지방의 풍습에는 여자들이 다닐 때 눈만 내놓고 다 가리는 차도르 혹은 히잡이라는 것을 썼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고 다녔지요.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여자들을 보면 정숙하다, 순결하다, 얌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얼굴은 남편과 가족 외에 어떤 남자에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편에게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남자가 자신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알몸으로 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여자들이 있다면 몸을 파는 창녀로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4절에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당시에 여자처럼 머리에 무엇을 쓰고 다니는 남자는 동성연애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창조의 질서, 성경의 원칙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를 욕 먹이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문제가 무엇인가요?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아니 교회를 올 때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오는 경우들이 생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세상의 문화, 세상의 전통에서 자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있지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죽음의 법에서,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입니다.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지요.
이제는 자유롭게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교회를 나오는 여자들이 너울을 안 쓰고 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데 너울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이 그런 여자들을 보면서 욕합니다.
교회에 나가는 그 여자가 몸을 파는 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당시의 문화를 무시함으로 오히려 복음의 장애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흔히 보입니다.
“나는 구원 받았어! 나는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살 거야!”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전통을 쉽게 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고전 10:23)
“네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 제사 음식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삼가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내 속에 복음이 들어와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것, 그리고 서로를 위하여 종노릇하도록 자유를 사용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에서 경계해야 하는 두 가지가 늘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된 복음의 자유가 방종으로 흐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복음 안에서 내가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너무나 규범적인 신앙이 율법이라는 틀 속에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의 전통과 다르기 때문에 정죄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정죄함 속에서 우리는 복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남녀의 차별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 문화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다룬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이 들어간 사회 속에서 어떻게 교회가 덕을 세울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사회와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보편적 사회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아름다운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아주 근본주의적인 선교사들이 처음 한국에 들어 왔을 때, 한국 사람들이 서로 인사하며 절하는 것, 명절에 자녀들이 어른들에게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금했던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본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본 것이 아니지요.
이 당시에는 남자들도 여자들의 얼굴을 마음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예쁜지 비교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대에 여자들이 교회에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은 광신적인 모습으로 비치며 덕스럽지 못한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이러합니다. 11~12절의 말씀입니다.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여자만 머리에 무엇을 쓰라는 것이 여자를 차별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하는 것 역시 어떤 권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13절에서 말하듯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원어의 뜻에 의하며 ‘이성적 판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굳이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 즉 상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있다는 것은 ‘비상식적이거나 몰상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때로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것하고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올 때, 본성이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을 신고 와야 하는지.
문제는 본성이 우리를 가르치고, 이성이 말하고 있는데도, 우리의 육신적인 욕망이 그것을 따르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신앙 때문이 아니라, 편의 때문에 신앙을 가장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가치가 무엇입니까?
남자는 머리를 짧게 하고 여자는 머리를 길게 합니다.
전통과 유전을 지킨다는 것은 그 사회의 보편적인 규범을 따르는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이유는 한 남자의 여자로서의 정숙함과 순결인데, 신앙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편의주의 때문에 이런 질서가 깨어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잘못된 태도에 대하여 지적하신 일이 있지요. ‘고르반(Corban)’ 즉 “하나님께 드린 바 되었다”고 하면서 마땅히 부모를 공경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고, 또 부모님을 공경할 몫이 따로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행해야 하는 보편적인 규범을 따르지 않아 욕을 먹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세상의 가치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결단의 순간과 가치에 관한 일이 아니라면 이성적인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모든 여자가 자신들의 얼굴을 내놓고 다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여자들이 기도할 때 머리에 무엇을 쓴다든지 하는 것은 올바른 복음의 이해가 아니죠.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것은 복음의 진리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 속에서 기독교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무엇을 쓰고 안 쓰고 하는 것은 진리의 차원에서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14절에,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기도하고 생각하고 깊어지는 신앙입니다.
신앙의 깊이가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고민할 때 깊어집니다.
우리는 자꾸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혹에 시달립니다. 내 마음대로, 내 편의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며 쉽게 살려고 하는 마음과 예수님 때문에 내가 힘들어도 헌신하며 섬기며 배려하려는 마음입니다.
어떤 말을 조련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든지 자신이 기르는 말 중에 어떤 말이 이길 줄을 100% 알아맞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흰말과 검은 말 중에서 이기는 말을 그렇게 정확하게 맞출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너무나 쉽게 말을 합니다.
“예, 흰말을 이기게 하려면 1주일 전부터 검은 말에게는 먹이를 잘 주지 않고, 검은 말을 이기게 하려면 1주일 전부터 흰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서 어떤 마음이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복음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부지런히 선한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 복음과 은혜의 마음을 품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늘 이야기합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거룩한 마음을 위해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중보하는 사람.그런 사람이 승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