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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編 梁芳秀 李蘗 聖祖님 遷墓式記錄映畵製作하다●
한국 천주교회는 역사에 길이 남는 창립 200주년을 맞아 1984년 이땅에 교황님이 오시어 103위 성인을 시성하면서 성대히 치루었고, 300년대를 달려가는 시점에 와서 돌이켜 보면, 1970년 초기까지 한국 천주교회가 언제 어디서 어디로 전파되어 왔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사계(斯界)에서도 뚜렷이 밝히지 못하였던 것은 자타(自他)가 다 共認(공인)하는 사실이다.
창립 200년대를 장식한 수 많은 공로자(功勞者) 가운데 빼놓을수 없는 인재(人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 경기도 신장 본당 주임이신 변 기영 신부님의 희생적인 노력과 연구로 그 동안 베일(Veil)에 가리어졌던 한국 천주교회 기원사에 대한 이야기가 뜨겁게 달아 올랐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에 대한 교황님의 말씀
한국 천주교 신앙이 시작된 것은 세계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서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되었으니 진리 탐구로 향하는 人間理性의 本性的인 熱望이 영원한 구원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케하며,- 중국인 사제 2명이 잠시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
한국천주교회 창립에 대한 국내 여론도 중요하지만 먼저 교황청의 여론도 살펴보아야 한다. 지난 1984년 10월 14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국의 순교자 103위 시성 경축 미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강론 말씀중에도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선교사 없이 자신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린 이 한국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한다고," 교황님께서도 인정하시고, 세계 교회에 闡明하신 만큼 우리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도 스스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변기영 신부님께서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이하여 2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 총무 겸 시성시복 추진부장 실무책임자로 지난 1983년 2월 26일, 103위 시성추진 실무 교섭차 교황청을 방문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를 알현하며, 103위 시성을 간청하셨다.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시는 변 기영 신부님
수없이 훼방하는 이들의 무리들을 꾸준히 견제하면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치루며 만천하(滿天下)에 천명(闡明)하게된 그 동기(動機)는 1779년 기해(己亥)년 (달레의 교회사는 1777년 丁酉年) 천진암(天眞菴) 주어사에서 유불선(儒彿仙) 강학회(講學會)에서 이벽(李檗) 성조(聖祖)께서 천학(天學)을 논증(論證)한 것이 시발점이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주역들의 연령 대조표
● 1779년 천진암 강학회, 당시 각자 나이
● 1785년은 명레방 집회, 을해박해, 당시 나이
● 1801년은 신유박해, 당시 나이
● 나이는 만으로 계산됨.
● 양 처해 선조님(필자의 8대조)은 천진암강학회를 참석하시지 않았지만 후손들을 위해 참고로 밝혀둔다.●
이름 | 탄생일 | 1779년 나이 | 1785년 나이 | 1801년 나이 | 사망년도 | 사망시 나이 |
권 철신 | 1736년 | 43세 | 49세 | 65세 | 1801년 | 65세 |
권 일신 | 1742년 | 37세 | 43세 |
| 1791년 | 49세 |
홍 유한 | 1726년 | 53세 | 59세 |
| 1785년 | 59세 |
김 범우 | 1751년 | 28세 | 34세 |
| 1787년 | 36세 |
李 檗 | 1754년 | 25세 | 31세 |
| 1785년 | 31세 |
권 상문 | 1755년 | 24세 | 30세 | 46세 | 1801년 | 46세 |
이 승훈 | 1756년 | 23세 | 29세 | 45세 | 1801년 | 45세 |
전 약전 | 1758년 | 21세 | 27세 | 43세 | 1816년 | 58세 |
권 상학 | 1760년 | 19세 | 25세 | 41세 | 1819년 | 59세 |
정 약종 | 1760년 | 19세 | 25세 | 41세 | 1801년 | 41세 |
정 약용 | 1762년 | 17세 | 23세 | 39세 | 1836년 | 74세 |
이 총억 | 1764년 | 15세 | 21세 | 37세 | 1822년 | 58세 |
황 사영 | 1775년 | 4세 | 9세 | 26세 | 1801년 | 26세 |
정 하상 | 1795년 | 0세 | 0세 | 6세 | 1839년 | 44세 |
김 대건 | 1822년 | 0세 | 0세 | 0세 | 1846년 | 24세 |
梁處海양처해 | 1733년 | 46세 | 52세 | 69세 | 1820년? | 87세 ? |
梁聖龜양성구 | 1754년 | 25세 | 31세 | 4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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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7대조 양성구(梁聖龜)조상님은 서기1754년 甲戌年(갑술년:영조30년)에 태어 나셨다.고로 이벽 성조님과 나이가 같으신데, 거제도에 오셔서 武官職(무관직)으로 正兵(정병)을 하셨고, 기일은 후손들이 기록하여 남기지 않았다.
정병(正兵)
조선시대 군사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던 일반 양인농민 출신의 병종.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재경 유력자가 지방의 농민들을 초출(抄出)하여 번상시위(番上侍衛)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시위패(侍衛牌)로써 정병의 기원을 이룬다. 시위패는 유력자의 사병 성격이 강하였으나, 1400년(정종 2) 사병혁파가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면서 시위패의 중요성이 상실되었다.
<< 내용>>
조선시대 군사제도의 根幹(근간)을 이루었던 일반 양인농민 출신의 병종.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재경 유력자가 지방의 농민들을 초출(抄出)하여 번상시위(番上侍衛)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시위패(侍衛牌)로써 정병의 기원을 이룬다. 시위패는 유력자의 사병 성격이 강하였으나, 1400년(정종 2) 사병혁파가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면서 시위패의 중요성이 상실되었다. 그 결과 소속 군사들은 병종을 이속(移屬)하여 선군(船軍)이나 영진군(營鎭軍)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1459년(세조 5) 시위패는 정병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북방의 군익도체제(軍翼道體制)가 남방으로 확산되고 진관체제가 전국적으로 균제성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64년 영진군의 정병 합속으로 정규군이 일원화되었으나 시위패 계통의 번상정병(番上正兵)과 영진군 계통의 유방정병(留防正兵)으로 구분하여 파악되는 것이 상례였다.
72년(성종3) 기록에 의하면 정병의 규모는 번상정병이 4만 2500명으로, 8교대 2개월씩 번상시위하여 실제 근무인원은 5310명이었으나, 거리가 멀다거나 흉년 등의 이유로 면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정병의 비중이 낮아졌으나, 대열(大閱)을 거행할 때는 도별로 파악, 오위진에 편성시킬 만큼 정병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내재되어 있었다. 정병은 급보규정(給保規定)에 따라, 기정병(騎正兵)인 마병은 1보(保) 3정(丁), 보정병(步正兵)인 보병은 12정을 받았다. 또한 정병은 급보의 혜택과 더불어 거관(去官)의 규정이 있어 신분적 혜택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大典會通(대전회통)에 의하면 正兵(정병)은 이조때의 正規軍(정규군)으로 各(각) 軍兵(군병)에는 실제로 軍務(군무)만을 담당하는 者(자)와 이를 보호하는 保人(보인)또는 補助(보조)하는 率丁(솔정)등이 있어 이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前者(전자)를 正兵(정병) 또는 正軍(정군)이라 하였다고 기록 하고 있다.
●양 처해 선조님은 1819년 호적에는 생존하고 계시다는 문헌이 있으나●
●그 후의 문헌을 발견치 못하고 있다.●
소문을 듣고 주어사를 거쳐서 자정넘어 뒤늦게 도착한
이벽 성조님께서 유불선 강학회에서 천학을 논증하는 장면
그 동안 변 기영 신부님께서 체험한 생생한 기록이 수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뒷 바침할 기록 영화는 후대 사람들에게 역사 자료로 적지않는 참고가 될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간의 숨은 野史 몇가지만 이라도 담아 본다. 오늘의 천진암이 저절로 이루진 것이 아니라 無血의 殉敎的 삶. 그 자체가 이루어낸 기적 같은 현실을 두고, 뒷짐지고, 담 넘어 불구경하는 것 까지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파하는 사람들이 보아야할 대목이다.
반성해야 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지적할 것은 지적해서 발전에 보탬이 되어 진다면 참으로 다행한일이기에 기록을 남긴다. 우리말 속담데로 동냥은 못주나마 쪽박은 깨지 말랬다. 호박씨를 까는지 수박씨를 까는지 모르면 가만히 있으면 중간에 가는데 ......그러나 民心은 天心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역사는 하늘이 도와 꼭 이루어 진다는 진리를 받아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1779년 강학회 이후 200년이란 세월속에, 1801년 辛酉敎難, 1839년 己亥敎難, 1846년 丙午敎難, 1866년 丙寅敎難, 일제 36년, 1950년 民族相殘의 비극. 1960년 4.19 혁명, 1961년 5.16 박 정희 군사 혁명등등 상상하기 조차 힘든 역사속에 자연히 페허로 남아 그 자취마저 잊혀져 가지 않을수 없는 현실속에, 오늘이 있기까지는 성령의 도움이 없이 인간의 힘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곳이 바로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이야기다.
평풍처럼 펼쳐진 앵자산 앵자봉 아래 천진암 계곡,1980년경 성지로 개발하는 천진암에서 촬영하는 필자 : 양 방수 홍보부장.
5,000자 비문 제막식에서 사회 보시는 변 기영(베드로) 신부님.기록 영화를 촬영하는 양방수(바오로)홍보 부장.
5,000자 비문 제막식에서 사회 보시는 변 기영(베드로) 신부님.기록 영화를 촬영하는 양방수(바오로)홍보부장. 1980년 6월 24일.
天眞菴(천진암) 기념비 제막문.
신앙의 움이 트고, 진리의 등불이 밝혀진 이 溪谷(계곡)에,
거룩하고 우람하게 세워지는 기념비,
천년세월이 흘러도,
모진 풍상이 휘몰아쳐도,
이벽 성조의 창업을 밝히고, 천진암 역사를 증언하며,
변함없이 서 있거라, 소리 없이 말하여라.
해와 달과 함께 목숨을 같이 하며,
역사를 지키어라.
1980년 6월 24일
대주교 노 기남.
이 벽 성조님의 천묘식 축성식을 촬영하는 홍보부장 양방수 필자.
좌측이 주한 교황 대사님. 노기남 대주교님. 김 남수 주교님. 공동 주례로 거행되는 이벽성조 묘 이장 1주년 기념 묘 방문석축성미사가 1980년 6월 24일 거행.
深深산골 자동차가 갈수 없는 천진암. 변 기영 신부님께서 문헌에 따라 1975년부터 천진암 터(址) 답사를 한후, 천진암터 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매입을 추진하여, 이듬해 1975년부터 1977년 까지 천진암 터(址) 5회를 답사한후, 1978년 월보 "천진암"을 발행하면서 홍보에 주력하는 한편 천진암 터 3,000여평을 매입하여, 느티나무 250주를 식목한후 부터 훼방하는 이들의 꾸준한 반대에도 불구 하고 ...
2011년 현재 1,950,000여평의 聖地를 확보하면서 세계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수없는 특히한 전교 방법과 같이 역사가 이루어 지고 있는 현실은 하느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부정할수가 없다. 이유는 民心이 天心(백성들의 생각이 곧 하늘의 뜻이란 말로 통치자들은 백성의 뜻에 맞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속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承服해야 할 몇몇 斯界의 지식인들이다. 民衆을 잃으면 나라도 잃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복시성때의 김 대건 신부님의 영정을 두고, 論하면, 김 대건 신부님의 유골를 파서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제작한 영정을 이것도 아니라고 해서 1984년 200주년 성인시성때는 또다시 바꾸었다. 3번이나 바꾸어진 영정을 모신 영정도, 따지자면 김 대건 신부님의 영정이 아닌 상상화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이유를 따지는 자가 없다. 그래서 이 승훈 성현의 영정은 故 오 기선 신부님의 아이디어로 6세손 이 병규씨의 사진에 갓을 올린 영정이 현재의 이 승훈 성현의 영정이다.
그런데 天眞庵이다. 주어사다. 따지는 斯界의 史學家들도 나름대로 이유를 댄다. 그러나 하느님을 본 인간이 없지만 하느님을 형체없이 모신다. 천진암이든 주어사든 한민족의 복음화를 심어준 求心點이 오늘날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이라는 확고한 자리를 잡은 이 마당에 斯界의 지식인들이 공공연히 “함께하는 사목잡지” 제 41호(2008.1.1.)에 이대로 좋은가 “천진암에 대한 우려“란 글을 보고 提言한다. 이것은 平信徒(평신도)가 보아도 도아 주지 못할 망정 毁謗(훼방)놓고, 醋(초)치는 꼴이라고 생각 되어진다.
한국 천주교회 미래를 위해서라면, 하고 싶은 말도 自肅(자숙)할줄 아는 司祭(사제)로서의 美德(미덕)도 갖추어야 할것이라고 생각 되어진다.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신앙의 求心點(구심점)으로 삼고, 신자들의 믿음을 일깨우는 좋은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제언하고 싶다. 강학이 이루진 곳이 천진암이 아니고, 주어사라고 한들 지금에 와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수가 없고, 해답을 찾을 길이 없다. 그렇다고 달라진다는 보장도 없다. 남이하면 불륜이고 내가하면 로맨스라는 생각이 든다.
장하다 순교자여~주님의 용사여~높으신 영광에 불타는 넋이여,칼 아래 쓰러져~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입장 성가가 울려 퍼지고,
1995년 8월 25일~신장 성당 어린이 성가 대원들도 참석
갯털같은 꼬리로 훼방하는 자들이여 ~ 민심이 천심인데, 감히 그 누가 천심을 거역할 소냐 ~
너도 나도 앞 다투어 헌금 대열에 줄을 서고 있다.
~천진암 계곡에 모여온 차량들의 행렬과 경향각지에서 모여오신 열심한 교우들의 모습~1996년~
1995년 8월 25일 경축 행사장을 공중에서 내려다 본 전경
그러면서,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벽 성조의 실체를 알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여 오다가 1978년 11월 경기도 광주군 광주면 목리 나무골 이준희씨의 집에서 경주이씨 족보를 발견하게되고, 1979년 1월 19일 이벽 선생과 그 아버지 이 부만공과, 형과 동생의 묘와 이 부 만공의 집터가 있던 마을 화현리를 확인.
1979년 2월 15일.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 3리 541번지에서 이벽의 가족들(父,兄,동생등) 묘와 집터(동 543번지)를 발견하였고, 화현 3리의 송 언배, 유 흥수, 노인들이 노쇄하여 돌아가시기 얼마전에 극적으로 만나 그 분들의 증언을 토대로 답사...
1979년 2월 23일 오기선 신부님, 박희봉, 신부님과 유 홍렬 박사, 이 원호 교수, 안 정심씨, 백 마리아씨와 재 답사를 하였고. 1979년 2월 25일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공근리와 횡성면 가담리에서 이벽 성조의 직께 7대와 8대 종손과 후손들을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아래 화살표를 가르치는 곳이 이 벽 성조님의 묘소 위치이다.
1979년 2월 27일 강원도 횡성에서 이벽 성조의 직계 7대 후손, 대표 이 상국씨와 8대 종손 이 완형씨, 그 동생 이 기형씨와 포천 묘소에서 참배.
1979년 4월 10일 포천군 화현 3리 산 289번지에서 이 벽 성조의 묘소를 후손 이 상만, 이 기형등이 참석한 가운데 발굴하여, 지석까지 확인하고, 다시 덮었다.
사진설명: 가운데 通德郎 慶州李檗之墓(통덕낭 경주이벽지묘). 좌측은 둘째부인 恭人海州鄭氏之墓(공인해주정씨지묘). 오른쪽은 첫째부인 恭人安東權氏之墓(공인안동권씨지묘)라는 지석이 뚜렸이 남아 현재 천진암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3함장된 묘지석들의 필체와 크기와 조선회의 융합 강도(밀도)가 상이한 것으로 보아 각각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른 시대에 지석이 제작 매몰된 듯 하였다. 사망년도는 이 벽 성조께서는 1785년 봄이고, 첫째 부인 안동권씨는 적어도 1782년 이전이라야 하고, 두 번째 부인 해주정씨는 적어도 1860년 이후라야 힌다고 사료된다.
1979년 4월 20일 김 남수 주교님, 오 기선 신부님, 박 희봉 신부님, 유 홍렬 박사, 이 상만씨 이 기형씨, 이 원호 교수등과 이 벽 성조님의 묘지석 재 발굴 확인하여 斯界에 알려지기 시작 하여졌다.
1979년 4월 20일. 마을 이장이 참관하는 가운데, 김 남수 주교님, 오 기선 신부님, 박 희봉 신부님, 유 홍렬 박사, 이 원호 교수님, 후손 이 상만씨 이 기형씨,등과 이 벽 성조님의 묘지석 재 발굴 확인..
1979년 5월 31일에 경주이씨 종친회 족보 편찬위원회 사무총장(대전시 갈마동 380-155)의 書庫에서, 1813년 계유보를 발견하여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벽 성조님의 행적이 斯界에 알려지기 까지는 변 기영 신부님의 희생과 열정으로 윤곽이 만 천하에 드러 날 무렵 변 기영 신부님은 더 이상 말하면 안된다는 의사의 진단이 나올 정도로 목이 쉬어 있었다. 소위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는 이야기다.
사진 설명 좌측 : 이벽 성조님의 새 무덤을 구축하는 자리에서 나온 자기류
사진설명 우측 : 1981년 9월 23일 천진암 터에서 5점의 유물이 발견 되었다. 그중 부처님께 매일같이 봉양하는 밥그릇(天眞寺 日用 摩指器:천진사 일용 마지기) 밑면에 天眞寺라고, 쓰여진 金石文(금석문)이 나왔다. 다산 정 양용의 여유당 전집내 [천진소요집]에 천진암에 관한 21편의 詩중 天眞庵(첨진암)과 天眞寺(천진사)가 구분 없이 21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이장의 이유와 배경.
이 벽 성조님 묘소는 한경남도 신창읍민회 40여명의 공동 명의로 된 공동묘지 갓등산 중앙에 있었는데, 1978년도에 이미 3차례 이장공고가 나가고, 묘지 이장 공고 시효가 지난 고총으로, 아무 때나 아무나 발굴하여 화장하고, 새묘를 쓸수 있는 상태에서, 이미 그곳 공동 묘지는 그렇게 되고 있었으며, 2,3백년전의 고총들은 파 혜치고, 새묘를 한 두자 비켜서 같은 자리에 써 나가고 있었고. 토지 소유주 신창읍민회가 이미 몇 차례 발굴 이장하여, 가도록 독촉 하였고, 이벽 성조님의 묘소 바로 곁에 까지 새로운 묘를 써 들어 왔기 때문에 불가피하고, 시급하게 이장을 해야만 했다.
조금만 늦어서도 이벽 성조님의 묘소는 자취를 없애 버릴 찰나에 확인하게 된 것 또한 奇異한 일로 하늘이 도우지 않고는 있을수 없는 慶事였다.
이장 위원회 발기와 구성.
변 기영 신부님은 이장 위원회를 구성하고 발기와 구성 및 회의를 토대로 이장 이유와 배경을 파악하고, 이장의 불가피성과 시급성을 인정하고, 이 벽 성조님의 지석 발굴 재확인에 참여한 관계 인사들로 우선 이장 준비 위원회 구성을 발기하게 되었다.
1979년 4월 20일 혜화동 성당 사제관에서 최초로 이장 준비 위원회를 갖고, 위원장에 김 남수 주교님, 부위원장에 후손 이 상국씨와 박 희봉 신부님, 총무에 변 기영 신부님, 위원에 후손 이 완형씨, 이 상만씨, 이 원호 교수님과 자문위원회에 오 기선 신부님과 유 홍렬 박사님이 각각 맡았다.
사진설명: 가운데 通德郎 慶州李檗之墓(통덕낭 경주이벽지묘). 좌측은 둘째부인 恭人海州鄭氏之墓(공인해주정씨지묘). 오른쪽은 첫째부인恭人安東權氏之墓(공인안동권씨지묘)라는 지석이 뚜렸이 남아 현재 천진암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3합장된 묘지석들의 필체와 크기와 조선회의 융합강도(밀도)가 상이한 것으로 보아 각각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른 시대에 지석이 제작 매몰된 듯 하였다. 사망년도는 이 벽 성조께서는 1785년 봄이고, 첫째 부인 안동권씨는 적어도 1782년 이전이라야 하고, 두 번째 부인 해주정씨는 적어도 1860년 이후라야 한다고 사료된다.
이벽 성조님의 무덤 좌우로 안동권씨와 해주정씨 부인의 壙中안에 서로 혼이 內通할수 있도록 구명을 만들어둔 흔적이 뚜렸했다. 이것을 보면서 하느님을 믿지 않았던, 우리 조상님들께서도 분명히 魂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죽어 魂靈이라도 만나 보시도록 배려를 한것 같다는 사실로 인정 하지 않을수 없다.
이벽 성조님의 유해 광중(무덤속의 밑 부분에 깔린 흙을 손 수건에 싸가지고 가는 참관자도 있었는데 특효가 있다고했다?)
이벽 성조님의 유해
둘째 부인 해주 정씨의 유해를 변 기영 신부님과 후손 이 상만씨가 마무리 염을 하는 장면 ......
이장지 결정 : 이장지 후보로 절두산 천주교 순교자 기념관과 혜화동 교회 묘지가 거론 되었으나, 새 이장지는 이벽 성조님의 연고가 있는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과 관계된 강학회 사건이 관련이 있는 이곳 천진암으로 결정 난 이유도 개발의 불안요소가 없는 곳으로, 천진암 성역화에 크나큰 버팀목을 해 온것도 하늘이 도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진촬영 :양방수 홍보부장
이벽 성조님의 유해 발굴을 지켜 보는 참관자들의 표정들
(앞에 앉으신 김 남수 주교님과 바로 뒤에 길 홍균 신부님)
묘지 선정 : 조경 미술의 권위자인 이 순석 교수가 맡았고, 특히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터 성역화 사업에 있어서 이 벽 성조님의 묘역을 가장 중요한 시설물로, 전제하고, 원대한 계획하에 위치 선정을 하기로 하였다.
이장일 선택
이장일은 이장이 시급한 상태에서의 제약이 있었으나 이 벽 성조님의 생일, 사망일, 강학회 참여일, 영세일,등이 일체 전해지지 않아서 이 벽 성조님의 영세 본명 축일인 6월 24일인 세자 요한 축이로 정하게 되었다.
이장 집행기관과 과정 : 1979년 6월 21일 오전 10시 발굴일로 부터 1979년 6월 24일 오후 3시 까지 이렇게 여러날을 잡게 된 것은 묘 발굴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예상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유있게 한 것이 것이며, 또 그 분의 활동과 연고가 있는 곳을 경유하면서, 이장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라는 변 기영 신부님의 설명이 있었다.
이장 업무와 분야별 부서 담당자
01.기획 조정부(변 기영신부):계획수립,집행조정,재정관리,지석과 유물 수거관리,하관 전례 개획.
02.현장 지휘부(포천 묘지반) :후손 이 상만씨, 포천 묘지발굴, 유적비 건립.
(천진암 묘반) :이 원호 교수) 천진암 새묘지 구축 하관안장.
03.전례 행사부(박희봉 신부) :포천 발굴시 유해 수거 안치.헤화동 안치. 전례 명동전례계획.
04.명동 대미사 집행준비총책:백 은기 신부님.
05.천진암 하관전례집행 준비총책: 김 정원 신부님.
06.기록부(이 정운 신부님) :이장 전체에 관한 시간별, 장소별, 사건별 기록책임.
07.녹음부(송 병수 신부님) :이장 전체에 관한 발굴, 미사와 하관의 녹음.
★08.기록영화제작:양 방수(바오로) :발굴 미사 하관의 중요부분과 천진암 호송 및 하관예절 전체
09.사진부(명동 성모사진관, 신 봉림): 이장 전체에 관한 발굴, 미사 하관의 중요부분 사진촬영.
10.유해 호송부(이 경재 신부님) :포천 묘소에서 혜화동 성당(21일), 혜화동에서 명동성당(23일). 명동성당에서 천진암(24일),
11.찬관 증언부(지문 위원단) :김 구정 선생. 오기선 신부님. 유 홍렬 박사님.
증언 자문위원으로 위촉 받으신 최 석우 신부님은 불참.
12.선전 홍보부(이 종흥 신부님) :이장 전후 교회 내외에 선전 홍보 담당.
3분의 시신 운구 준비를 완료한후 예절을 하고 있는 모습
준비물과 용도 및 준비 책임자
혜화동 본당 신부님이신 박희봉 신부님은 유해 수거 안치 전문가 1인, 해부학 전공 의사. 1인, 안내 정리 부원 7명, 발굴과 유해 경호부원 10명, 확성기 한 대, 대형 메카폰 2개등과 묘 발굴에 필요한 고무장갑 3벌(유해, 유물 수거용) 흰 장갑, 30벌(관 3개 운반용), 창호지 30장(유해 수거 포장용), 명주 3폭(매폭 길이 58자), 비단 3폭(매폭 7자에 10자, 관 포장용), 삼배 3폭(유해 수거 포장용), 화환 3개(대1, 소2, 운구 장식용), 예절서, 향과 향료, 성수, 참관인단 식사 50명분, 약간의 술과 음료수, 마른 안주, 일체등과, 이 외에 포천 발굴과 혜화도 안치에 따른 준비물 일체, 단 관과 유물함은 제외, 그 외 포천 묘 발굴 유적비, 건립 재정 확보, 포천 모조 지석과 유적비 제작, 건립 및 성역화 준비.
후손 이 상만씨는 포천 묘 발굴 인부 15명, 인부 식사 준비, 발굴 도구(가래 2벌, 삽 5자루, 괭이 3개, 곡갱이 2개, 망치와 정, 삼태미 2개, 천막이나 채알 1개(우천시 묘와 작업 보호용),
변기영 신부님은 이장 공문 발송 및 관계 인사 연락, 관 3개 제작, 유물함 제작, 천진암 모조지석 제작, 천진암 새묘 구축과 이에 따른 재정 확보등.유해 봉송 차량은 라자로 마을 이 경재 신부님께서 각각 분담했다.
이장 순서 : 6월 20일 오후 유족 대표 선발대 포천 현장 도착, 제반 준비 점검 완료 후 대기.
6월 21일 오전 8시 혜화동 집결 출발, 10시 포천 현장 도착. 간단한 기도와 인사 말씀과 성가와 주의 사항, 선언 변 기영 신부. 1시 간단한 현장에서 식사. 1시 30분에 발굴 계속, 완료 후 감사 기도와 성가로 행렬.
차량 순서 : 박 희봉 신부님 차량 선두로 김 남수 주교님, 다음 유해 호송 차량, 다음에 유물 호송 차량, 그 뒤로 일반 신자 차량이 뒤 따른다. 혜화동 성당 제단에 안치된 후 부터는 혜화동 성당 전례 계획에 의거하여 진행 한다.
묘지를 떠나 혜화동 성당으로 가는 행렬
1979년 6월 23일 오후 4시 혜화동에서 명동으로 선두 차량 박 희봉 신부 차량, 유해 호송 차량,변 기영 신부 차량, 명동 성당에 도착 후에는 명동 명동 성당 전례 계획에 위임 한다.
1979년 6월 21일 오후 7시 혜화동 성당 도착
1979년 6월 24일 낮 12시 명동성당 대 미사는 전례부장겸 부위원장 박 희봉 신부님과 명동 본당 주임 신부님과 상의하여서 집행하였고, 주례와 강론은 김 수환 추기경님으로 확정되었고, 다른 주교님들과 되도록 많은 성직자들이 공동 미사를 거행하는 방향으로 지향했으며, 예절 시간은 1시간 내에 마치게 한 이유는 천진암 도착과 하관예절등을 고려해서 시간을 잘 맞추어 천진암으로 운송하는 도중에서 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촬영에 어려움이 따랐다.
천진암에 도착하여 운구하는 과정에서 제법 많은 비가 내려 순교 성인들의 감회의 눈물로 받아 드리며, 우중에서도 우리 모두는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1779년 기해년 강학회에 참석하신 후 꼭 200년만인 1979년 6월 24일에 이벽성조님께서 천진암으로 돌아 오시는 감격의 순간이다. 시신 운구 행렬을 따라 교우들이 천진암 계곡을 엄숙히 뛰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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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 ~ 월 2020-08-24 오전 3:55
양선생님 참으로 귀한 자료 잘 봤습니다.양선생님은 그때 촬영기를 가지고 다녔으니 참으로 대단 하십니다. 양 선생님 참 좋은 자료 입니다.좋은 가문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