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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1. 배우기 위해 배워라
들뢰즈는 자신의 언어가 하나의 ‘도구’로 쓰일 수 있기를 원했다.
배움(apprenticeship)은 그가 고안해낸 여러 개념 중에서도 가장 쓸 만한 것 중 하나이다.
1) 당신의 패스워드
오늘날, ‘나’임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은행에서도, 포털 사이트에서도 그리고 내가 사는 집에 들어갈 때조차도 이런저런
패스워드들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전 우리의 삶은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군대로, 군대에서 공장으로 그리고 때로 병원으로 잠시 들락날락 거리는
식이었다.
각각의 장소에는 각각의 논리가 있었고, 우리는 거기에 걸맞은 신분증명서 – 학생, 군인, 노동자 - 를 발급받았다.
마치 축구장에서 수영장으로 장소를 바꾸듯이 말이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미셸 푸코의 말을 따라 훈육사회라고 불렀다.
특정한 담론의 장소에서 특정한 권리를 누리는 대신, 반드시 거기에서 요구하는 복종의 체계 또한 몸에 익힐 것.
여기서는 복종의 언어인 동시에 저항의 언어이기도 한 암구호(暗口號, watchwords)가 지배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런 구분들을 모두 덮어버리는 새로운 체계, 곧 일방향적인 패스워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
간다.
우리는 패스워드를 만든 주체의 기획 의도를 모른 채 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학교와 공장 그리고 군대라는 분절된 체계보다 훨씬 더 미시적인 수준에서 작동한다.
예컨대, 사병과 대위 그리고 장군이 갖는 패스워드의 권한 수준은 다르다.
환자와 간호사 그리고 의사가 갖는 패스워드의 개수가 같을 리 없다.
당연히 같은 장군과 의사 사이에도 다른 수의 패스워드가 주어진다.
이제 한 개인이 자신임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열 개 이상의 패스워드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교복이나 군복이라는 겉모습으로 자신을 확인하던 사회가 기호(패스워드)를 동반한 가운데, 보다 정교하고 비가시적인
형태의 섬세한 지배로 진화한 것이다.
마치 서핑을 하듯 사회는 사람들의 패스워드를 관리해준다.
개인이 파산하면 구제해주고, 직장을 잃으면 다른 직장을 부지런히 알아본다는 조건을 붙여 실업급여를 준다.
들뢰즈의 말을 따라, 우리는 이런 사회를 관리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새로운 교육의 목적
신경제 현상은 훈육사회에서 관리사회로의 이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이는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도 각광을 받은 바 있으며, 요즘에는 창조경제라는 말로 바뀌어 유통되고 있다.
그렇다면 신경제 현상은 이전의 경제현상과 무엇이 다른 걸까.
이 현상은 재화(財貨)를 이해하던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았다.
그 특징을 살펴보자.
영화나 음악의 경우 ‘반드시’ 각자가 체험해야만 그 쓸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재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백만 명이 체험해도 천만 명이 체험해도 처음 한 사람이 체험할 때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한다.
보통 물건이라는 것이 한 번 쓰고 나면 닳게 마련이지만 여기서는 감가상각이라는 고전경제학의 원칙이 폐기된다.
둘째, 특정한 문화상품은 음원, 캐릭터 상품, 여행 상품 등 갖가지 상품 군을 쏟아낸다.
이는 이전 경제학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현상이다.
이렇듯 완전히 새로운 경제 현상의 도래는 기업가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국가가 기업에게 끌려다닌다는 사실을 이제 더 말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교육 분야 또한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지식기반 사회는 사람이 중심이 되고, 교육이 중심이 되며, 평생학습이 보편화되는 사회입니다.
지식과 창의력이 가치창출의 원천이 되고, 국가경쟁력의 원동력이 되는 사회입니다.
이 사회는 평생 동안 새로운 지식을 학습하고, 공유하고, 전파하고, 가공하고, 더 높은 차원의 지식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 즉 ‘신지식인’이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 활동의 핵심을 이루는 사회입니다.
1999년 당시 교육부는 새로운 세기를 앞둔 미래 국가 전략으로 신지식인의 육성을 언급한 바 있다.
얼핏 듣기에 평생 배운다는 말은 아름답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취업’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나 신지식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박찬욱처럼 영화를 만들어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며, 김연아처럼 이미지를 만들어 팔 수 있는 사람은 김연아
본인뿐이다.
평범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노동력과 지식을 팔아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이 창출하는 부가가치를 위해 대학의 전통적인 교양교육(文, 史, 哲)이 기여한 바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체계론의 주창자 니콜라스 루만(1927~1998)에 따르면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보편적 앎이 폐기된 사회에 살고 있다.
즉, 종교적 지식은 신앙이라는 보다 상위의 가치에 봉사하는 정도로만 기능하면 된다.
예술적 지식 또한 그 감각에 대해 설명하는 정도로만 활용되면 된다.
이전 시대까지 우리는 암묵적으로 앎에는 위계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플라톤은 정당화를 거친 지식이야말로 보다 참되다고 설파하였으며, 이런 원리에 따라 학문과 학문 아닌 것을 구별해
왔다.
이는 그 자체로 폭력적인 면이 있긴 했지만, 문화를 전수하는 데에 있어서는 더 없이 안정적인 정신적 기반이기도 했다.
아무튼, 루만 이래로 종교계, 예술계, 과학계는 자신의 분야에 적절한 지식체계를 가지고 스스로를 인정받게 되었다.
때문에 플라톤이 말하던 지식의 위계는 이제 그저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불행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다원화된 지식사회에 대한 그의 논의는 철저하게 왜곡되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식만이 쓸모 있는 것이라는 기업가
들의 주장에 활용되었다.
누구보다 발 빠르게 자신의 모습을 바꿀 줄 아는 기업은 플라톤 이래로 전승되어 오던 배움의 의미 또한 자신들의 논리에
맞게 바꿔 놓았다.
“부가가치를 창출하려면 배워라!”
기업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학습조직으로 각광받게 되고, 학교가 이를 따라하는 역전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배움에 관한 논의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알기 위해 배우지 마라, 배우기 위해 배워라!”
그의 이런 메시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관리사회로서 볼 때라야, 비로소 실감 나게 다가온다.
2. 배우는 존재들, 아동과 청소년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교육의 목적 또한 취업에 가두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런 논리를 지탱해주고 있는 담론은 무엇일까?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론을 지목한다.
여기서는 정신분석의 눈으로 배우는 존재들, 특히 아동과 청소년을 바라볼 때의 문제를 문학과 관련지어 생각해보자.
1) 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가볼까
오늘날 우리는 아동·청소년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것은 결핍의 시기일 뿐인가, 아니면 오히려 특권을 간직한 시기인가.
이 시기가 어떻게 이해되건 그 바탕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론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아동이라는 관념은 18세기에, 청소년이라는 관념은 19세기에 생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관념이 언제 생겼느냐가 아니라 ‘유아-아동-청소년-청년’에 이르는 일련의 연속선이 형성되었
다는 점이다.
의학에서의 소아청소년과, 교육학에서의 초등교육과와 같은 구분들은 이때 이후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아동학이나 청소년학과 같이 어느 분과에 두어야할지 막연한 간(間)학문적 성격을 띤 분야 또한 출현하고 있다.
그만큼 아동과 청소년을 바라보는 문제는 여러 개의 렌즈가 협력해야 하는 복잡한 사안임이 틀림없다.
정신분석학으로 유명한 프로이트(1856~1931)의 논의는 오늘날의 이러한 구분을 떠받치는 거대한 이론적 저수지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보다 앞선 시대인 빅토리아기를 혐오했다.
이때는 아동의 누드화가 성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그들에 대한 체벌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던 때였기 때문
이다.
프로이트는 아동기 때 겪은 성적 수치심이 한 사람의 정신건강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이런 입장을 이어받은 현대 연구자들은 공부에 집착하는 사람 또한 아동기 때 겪은 성적 트라우마(외상)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우리의 『흥부, 놀부』 이야기만큼이나 어린아이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는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 또한 이런 시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잠시 내용을 살펴보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맥스는 그날도 어김없이 방을 난장판으로 바꿔 놓았다.
엄마는 맥스를 방에 가두고 먹을 것도 주지 않는다.
맥스는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 괴물 나라로 마음속 여행을 떠난다.
괴물 나라에서 그는 신기한 능력으로 그들의 왕이 되지만 이내 심심해진 나머지 배를 타고 현실의 나라로 돌아온다.
이 줄거리는 전형적인 애정결핍에 따른 현실도피라는 도식으로 이해된다.
즉, ‘아빠-엄마-나’라는 삼각관계, 곧 가족 로맨스가 매끄럽게 작동하지 않을 때 아이는 ‘고통을 피하려’(쾌락원칙)
든다는 것이다.
이 동화는 다음의 말로 마무리된다. “저녁밥은 아직도 따뜻했다.”
아이는 잠시 마음속 여행을 통해 가족을 떠났지만, 다행히도 저녁밥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들뢰즈 그리고 그와 함께 작업했던 가타리가 비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 공고한 가족 삼각형이다.
그들이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는 이런 전형화된 가족의 논리가 확대된 거대한 복합체나 다름없다.
우리는 그 국가 속의 어린아이들로서 늘 상상력을 거세당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2) 삶의 치료제인 문학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 보자.
그에게 욕망은 억압되어야만 하는 대상이다.
한 사람이 발가벗고 돌아다닌다면 곤란하다.
친절한 말을 쓸 줄 모르고 중얼중얼 대고 다니는 사람은 환자이다.
정신분석론에서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먹고 산다.
따라서 ‘미친 말’과도 같은 욕망은 당연히 옳고 그름을 판단해 주는 상징의 세계 앞에서 멈추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게 되면 그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특히 아동·청소년기는 어릴 때의 충격으로 인해 균형을 잃기가 매우 쉬운 시기, 곧 치료의 대상이
되는 시기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욕망 = 욕구 – 요구.’ 예컨대, “배고프니까 밥 줘”라는 말에서 배가 고프다는 욕구와 밥을 달라는 요구 간의 차이가
욕망으로 정의된다.
즉, 우리의 욕구와 그것에 대한 요구는 늘 뺄셈, 결핍의 관계라는 것이다. 꿈틀대는 욕망은 상징의 세계가 허용하는
만큼만 허락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정상인으로, 보다 정확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정상적인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편집증자, 이 말이 지나치다면 신경증자들에 불과하다.
늘 상징의 체계에 예민하게 반응하느라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도시에서 촘촘하게 짜여진 동선과 시간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군중의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는 이런 삶의 흐름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을 문학에서 발견했다.
거기에서는 신경증자와는 대립되는 분열증자가 주인공이 된다.
예를 들어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는 바퀴벌레가 된다.
그렇다면 앞서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는 작품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맥스는 가족 삼각형과는 관계가 없다.
그는 고통스러워서 그리고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갔을 뿐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3. 배움의 사회성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론은 한 개인의 내밀함에 주목하는 동시에 그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은 원자화된 개인 혹은 가족의 단순한 합이 사회라는 생각에 씨를 뿌렸다.
오늘날 인간발달, 특히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연구는 이 패러다임에 얽매여 있다.
1) 고전적 실험심리학
다람쥐가 수상스키를 타고, 돼지가 빨래를 집어 빨래통에 넣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훈련 덕분이다.
고기를 보여주면 침을 흘린다는 파블로프(1849~1936)의 고전적 실험에서 출발한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는 점차 발전
하여 복잡해져 간다.
먹이를 누르면 나오는 장치와 뜨거운 그릴을 동시에 설치하면, 생쥐는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환경에 따라 동물들은 자신이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알고 있는 것이다.
주인이 원하는 행동을 할 때 먹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일종의 구조화된 의식 상태를 강제한다.
“이렇게 해야만 칭찬을 받는구나” 하고 말이다. 여기까지가 개별 행동에 대해 연구하는 행동주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과에 따라 행동한다는, 즉 좋은 결과를 얻을 때에만 행동한다는 식의 생각은 너무 단순한 것이 아닐까.
쾰러(1887~1967)와 같은 인지주의 학자들은 이 점을 의심했고 침팬지와 비둘기를 다시 실험실로 보냈다.
박스가 어지럽게 놓인 가운데, 천장에는 맛있는 바나나가 매달려 있다.
신기하게도 침팬지는 몇 차례의 실패 끝에 이를 쌓아 바나나를 얻는 데에 성공한다.
다른 사례도 있다.
긴 호리병 속에 맛있는 과일이 들어있지만 꺼내 먹을 수 없다.
그러자 침팬지는 우리 주변의 물을 입에 담아와 호리병 속에 부었고, 이렇게 하니 과일이 떠오른다.
이런 실험 결과를 보면 동물 또한 단순히 결과에만 반응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인지구조, 즉 계산능력을
갖춘 뇌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언어를 가진 인간이 이렇게 행한 실험과 같은 논리로 이해될 수 있느냐에 있다.
2) 배움의 사회성에 대한 통찰
잠시 심리학자 피아제(1896~1980)에 관해 살펴보자.
그는 ‘감각 운동기-전조작기-구체적 조작기-형식적 조작기’라는 발달 도식을 제창한 이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아이들은 4살에서 7살쯤에 해당하는 구체적 조작기에서 보존 개념을 획득한다.
그릇 모양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물의 양이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게 끝나고 나면 언어를 통해, 곧 상징체계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형식적 조작기가 도래한다.
대략 7살 이후부터다. 피아제는 이전 단계가 나타나야만 다음 단계가 온다고 말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발달이 우선하고 학습은 다음에 위치하게 된다.
즉, 무언가를 배우려면 그것에 걸맞은 인지구조가 획득된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행동에 대한 관찰결과와 말에 대한 관찰결과를 서로 관계없는 것으로 이해해 버렸다.
그가 보기에 아동의 언어발달 또한 혼자 말하는 자폐적 수준에서 사회적 수준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가정이 담겨 있는데, 행동에 대한 실험이 가정하는 바를 언어발달에 대한 이해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해, 한 사람의 아이로부터 출발하여 그들이 합해진 것이 사회라는 생각을 언어발달의 순서에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이런 가정에는 어떤 문제가 있어 보인다.
언어란 일차적으로 타인과의 의사소통 구조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행위에 대한 성찰의 도구도 된다.
한 아이의 언어능력이 향상되면 될수록 특정한 행위능력을 뛰어넘는 다른 무언가를 상상해내고 연결 지을 수 있다.
이를 통해 하나의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정말 동물이나 인간 모두 주변 환경이나 타인에 대한 인식 없이 기계적으로 행동을 배우고 말을 배우는 걸까? 오히려
그 반대의 방향, 곧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것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성립하는- 에서 출발하여 개체 혹은 개인의
내면화에 이른다고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이를 동물에서 관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소리를 지르는 등의 몇 가지 행동만을 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반면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에 대해 묻게 될 경우 사정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비고츠키(1896~1934)라는 러시아의 심리학자는 이런 의문을 품었었다.
이 지적은 들뢰즈의 배움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만하다.
그가 “이렇게 해 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해보자”라는 식으로 배움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 간의 상호 교섭을 말하는 것이다.
이 상호 교섭에서 중요한 것은 신체적 차원의 감응(affect)이다.
예를 들어, 수영을 배우는 학생이 접영에 관한 설명을 아무리 정확히 이해했다고 해도 그것을 바로 실행할 수는 없다.
그는 처음에 언어로 들은 설명을 내면으로 곱씹으며 그것이 무의식적 차원의 습관이 되게 하기 위해 연습을 반복할 것
이다.
그 가운데서 강사는 틀린 점을 지적하거나, 함께 실행해 봄으로써 가르치는 기술 또한 향상되어 간다는 것을 배운다.
그들은 수영장 및 수영지식이라는 환경과 더불어, 서로가 서로의 환경이 되어 변용을 경험한다.
들뢰즈가 이런 간단한 사례를 통해 배움에 대해 설명할 때에도, 이렇듯 거기에는 늘 ‘집단적 주체화’라는 인식이 자리
하고 있다.
이는 앞서 경험적 사실에만 바탕을 둔 피아제의 설명과는 대조된다.
들뢰즈는 배움이란 늘 “과격한 도야”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배운다는 것은 늘 “앎과 모름 사이”에서 진동하는 활동이다.
이는 앎과 모름을 날카롭게 구별했던 플라톤에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앎의 상대성이라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 전략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최승현(고려대학교 교육학과 박사과정)
시간, 시각, 아인슈타인, [인터스텔라], 증강현실, 들뢰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세공한 시간 개념을, '과학의 대중화' 혹은 '호기심 과학'이라는 관점에서 단순화하여 말하
자면, '시간은 환상'이다.
그러한 도식화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는 인간의 한정된 이해력이 구축한 픽션에 불과하다.
오히려 시간은 그 모든 차원이 동시에, 다만 일반적으로는 경험되지 않는 방식으로 숨겨진 채, 존재한다.
언뜻 비상식적으로 경험되는 이야기이나 그러한 것을 '비상식'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경험'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오늘날 동시대 과학은 상식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기 상식과 비상식의 구분선 위에는 한 가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실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의 동시성, 즉, 네번째 차원으로서 공간적으로 펼쳐진 시간이라는 개념이 시각에 의지하고 있다는 게
그것이다.
첫째로 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일방적 시간의 흐름이 '빛,' 혹은, 빛에 반응하여 형성되는
인간 정신, 즉, '계몽'이 가져다주는 결과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일방적 흐름으로서의 시간을 뛰어넘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복수의 시간을 공간화
하여 보고자하는 아인슈타인적 관점 또한 여전히 빛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곤란하다.
'빛이 있을 때에만'이라는 말의 요점은 '빛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점을 보는 데 있다.
즉, 우리가 보는 빛은 일차적으로 태양이 형성한 것이며 태양은 수명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는 태양계 밖의 다른 항성이 미약하게 전달하는 빛 뿐이며 그 또한 수명이 있다.
혹은 어떤 광원이 영원하다고 해도 한번 만들어진 빛의 이미지가 운동하는 중간에 소멸되거나 변형될 가능성 또한 있다.
즉 빛의 정체성은 결코 일정하지 않다.
예컨대, 내 몸에 닿은 후 반사된 태양광의 이미지가 어딘가 다른 관점에서는 내 모습일 것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변형
되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이로부터 한 가지 알게 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사라지지 않고 동시적으로 펼쳐져 있다는 진술이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과거 어느 순간 혹은 미래 어느 순간으로 이동해가며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상식적 생각의 비상식적 바람과는 특별히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시간은 환상이다'라고 말을 해버리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 '시간이 환상이라면, 즉, 시간이란 것이 거짓이고 존재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시간의 흐름도 없는 영원한 세상이 있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더 나아가, 마치 '그럼, 시간 여행을 해서 시간을 극복할 수 있겠네'라고 믿도록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빛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은 '시간이 환상-거짓인 반면 시간의 뒤에 진실된 영원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의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
즉, 시간의 뒤에는 영원한 빛이 아니라 어둠만이 있다. 시간 자체가 빛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가 우리의 삶이 결국 '끝'날 것임을 아는 것은 빛이 있기 때문이지, 즉, 빛이 있어 우리 눈 앞의 빛이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것이 '영원한 빛'을 핵심적 개념으로 추구하는 종교적 사고만이 '악'이라는 이름으로 '끝' 혹은 '종말'에 관한 개념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되는 역설적 이유다.
물론, 이 지점에서, 예컨대, 기독교적 사고는 다만 '악'을 몰아내고자 한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시간 개념이 그것이다.
요컨대 기독교에서 '악'은 이미 그 자체 '시간'으로 현상한다.
그리고 물론 시간은 세속적 인간의 세계 경험을 의미한다.
즉, '시간'이란 사탄의 사주를 받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오로지 '선'으로만 이루어졌던
천상의 공간 내부에 악'을 도입함으로써 해당 공간을 세속적 인간 세계로 변환-타락시킨 결과로서 주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세속 내부의 악 혹은 시간을 제거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하나 더 도입되어야 하는 것이 '최후의 심판'이
라는 새로운 시간 개념, 즉, 구원의 시간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 즉, 악이 제거된 순수한 빛의 시간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시간 개념의 전부일 것인가? 빛과 어둠의
문제에 있어 아인슈타인적 시간 개념은 오늘날 어떻게 응용될 수 있을 것인가?
먼저 아인슈타인적 시간의 동시성과 물리적 변환의 과정--흔히 사계절의 순환적 과정으로 묘사되는 크로노스적 시간--
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만약 아인슈타인을 따라 과거, 현재, 미래 등으로 표현되는 직선적 시간이 실은 동시적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즉, 빛이 물체에 반사되어 우리 눈에 도달하는 시간이 중력의 크기에 따라 달라져 지구의 시간으로 50살인 내가 어떤
다른 우주의 특정 공간에서는 아직도 10살 때의 이미지만을 아주 천천히 전달하고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 자연히 우리는
'과거 혹은 미래에 인위적으로 접근한다'는 개념을 수립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과거나 미래를, 즉, 동일한 물체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시각적 관점의 차이를 통해 달리 '볼' 수 있
다는 것이지 그것을 바라보는 내 육체의 존재가 다시 젊어지거나 늙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갑작스럽게 중력장의 값이 변화하여 10살 때의 이미지가 지금 50살의 내가 바라보는 거울 앞에 비추어지는 일이
벌어지고 그러한 일이 그 이후로 계속해서 지속된다면, 즉, 다시 50살이라는 시간 설정으로 되돌아가 나의 늙은 얼굴과
몸을 확인할 수 있는 방도가 사라진다면, 실제로는 50살 만큼의 신체 능력 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거울에 비추어진
이미지가 10살의 젊고 어린 모습이기에 내가 젊고 싱싱하다고 착각을 하게 될 수 있다.
혹은, 모습은 주름살 하나 없는 10살이지만 그 몸을 조금 사용을 해보고 난 후 해당 육체의 실제 신체 능력이 50살 먹은
사람의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결과적으로 '조심히 살아야 한다'고 완전히 새로운 건강 기준을 수립하게 될 가능
성이 크다.
즉, 이 경우 우리는 10살의 모습이 되었을 때 온갖 건강 보조제를 먹는 등 건강 관리를 이미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사회적 상식을 새롭게 수립하여 보급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신체 나이 50년의 시간이 이미지 나이 10년의 시간과 등가로 처리되어 새로운 시간 개념을 만들어내는
일이지 50살의 신체가 10살의 신체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여기서 변하지 않고 남는 사실은 한번 지구상에 태어난 우리의 몸은 계속해서 늙어가며 이 신체 시계 자체는 결코 돌이
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적 상대적 시간 개념에 의거하여 과거나 미래를 보는 일이 과연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첫번째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게 마련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기도 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인간은 같은 나이의 신체를 가지고도 각각 다른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각자 다른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컨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누군가는 스티브 잡스와 같이 젊은이의 마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이상을 추구하며 사는
반면 누군가는 직업도 없이 그리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폐인처럼 이미 죽은 시체와 같이 살아간다.
이는 상대적 시간의 문제가 결국 '어떻게 살 것이냐?'라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의 문제임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 '삶을 대하는 의미론적 태도에 있어서의 차이는 다만 거짓 해결에 불과하다'고 믿는, 기계적 유물론자
혹은 생물학자-생리의학자라면, 물리학적 시간 개념 논의에서 벗어나, 차라리 신체 시계의 흐름을 늦출 방법에 대해
연구를 하고자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인간은 죽을 것이고 그러면 더 이상 상대적 시간 개념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한번 주어진 육신의 존재를 계속 지속시키는 것이 상대적 시간에 대해 철학적 고찰을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느낀다.
(물론 그들이 고려하지 않는 것은 '유령의 시간'이다. 죽은 자는 의외로 육신 없이도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
그것이 인간 정신 특유의, 흔히 죄의식의 모습으로 표출되는, 사회적 채무감 혹은 윤리의 문제다.
기계적 유물론자 혹은 '과학 덕후'라면 이를 다만 근거 없는 거짓 현상으로 치부할 것이다.
즉, 그들에게 물리적 육신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학의 세계다. 바로 그 햄릿의 시간 말이다.)
그들이 고안해낸 해결책 중 하나인 냉동 인간을 생각해보라.
이는 육체적 시간의 흐름을 최대한 늦추어 시간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이지 않은가?
혹은, 소식이 몸에 좋은 이유는 그것이 에너지 사용을 줄여 육체의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늦추어주기 때문이지 않은가?
혹은, 기계 신체를 만들어 새로운 몸을 얻는다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도 가능하다.
요점은 이러한 일이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시간 개념과는 아무 상관 없이 벌어지는 물질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관건은 물질과 시간을 구분하는 것이다.
물질은 암흑의 세계다. 그곳에는 빛이 존재하지 않으며 시각이 작동하지 않는다.
빛이 없는 질료 혹은 형상 없는 질료 안에는 기본적으로 아인슈타인적 시간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아인슈타인적 시간은 훨씬 더 철학적-문학적이다.
그것은 물질의 시간이 아니라 '외양'의 시간이며 물질로부터 의미가 발생하도록 만드는 시각적 세계의 시간이다.
사실 오늘날 성형 수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이 시각적 시간을 통해 삶의 태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즉, 수술을 통해 50살인 내가 20대의 얼굴을 다시 한번 거울 속에서 보게 된다면 마치 다시 20살이 된 듯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삶의 의지를 다질 때 그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적 시간이 동일한 중력값을 지닌
지구에서 작동하게 되는 기이한 순간이지 않은가?
물론, 여기서 요점은 성형 수술을 한다고 해서 신체 나이 혹은 신체 능력 자체가 젊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오인을 달성하기 위해서 성형 수술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젊게 살기 위해서'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다.
사실은 이 일견 천박해보이는 시각적 오인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의미론적 바탕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오직 인간만이 암흑과 같은 혹은 죽음과 같은 물질 속에서 소멸되지 않는 빛, 즉, 로고스를
보고자 하기 때문이지 않던가?
그리하여 성형 수술은, 예컨대, 50살의 내가 20살의 나에게 시간을 초월하여 보내는 메세지와 같다.
나이가 들어서 깨닫게 된 어떤 후회를 만회하고자 할 때 우리는, 과학을 통해 시간 여행을 꿈꾸기도 하지만, 성형 수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젊었을 때 하지 못했던 것을 뒤늦게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이미 말했듯, 얼굴이라도 젊어진다면, 그렇게 착시 효과 속에서 30년 전 이미지가 내 눈 앞에 마치 중력장이 뒤틀린 듯
뒤늦게 시간 여행을 통해 도달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때 못했던 것을 다시 한번 용기를 가지고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적 시간 개념을 이해하게 될 때 인간이 하고자 할 일은 기본적으로 성형 수술을 하고자 할 때 우리가 노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그것은 50살의 내가 10살의 내 이미지에게 특정 메세지를 보내서 지금의 나를 바꿀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2014년작 [인터스텔라] (Interstellar)의 기본 설정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쿠퍼는 4차원 혹은 5차원 공간에서 과거를 보며 과거의 자신에게 그의 딸을 떠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작 5차원 공간에서 자신의 과거 이미지를 눈 앞에 두고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한 마디로, 그는 과거에 직접 개입하지 못한다.
이미 말했듯 우리는 과거의 시간을 착시 현상과 같이 '볼' 수 있을 뿐이지 물리적으로 과거 시간에 개입하여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영화적 장치가 모스 신호라는 암호 체계, 즉 직접적이 아니라, 매개된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다.
그리고 쿠퍼가 보내는 모스 신호의 수신자는 그 자신 또한 아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적 4차원의 시간 세계 속에 있다고 해서 물리적 신체의 나이를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그는 그저 그 자신의 예전 이미지를 '볼' 뿐이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 그의 딸 머피를 매체로 택한다.
즉, 모스 신호의 수신자는 그의 딸이다.
그리고 그의 딸 머피 입장에 모스 신호를 해독하는 일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아버지의 딸 사랑'이라 불려온 몹시도 흔해
빠진 가족주의 정서를 해독하여 이해하는 과정으로 경험된다.
여기서 은밀하게 전제되는 것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라는 되돌릴 수 없는 신체적-물리적 시간의 흐름이다.
예컨대, 만약 정말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쿠퍼는 아버지가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죽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씨앗을 자식의 형태로 남길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4차원의 세계 속에서 신과 같이 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영화의 설정이 아니다.
[인터스텔라]는 여전히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 전제 위에서 '어떻게 하면 죽음을 의미론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는 그에 대해 전통적 답변, 즉, '아버지와 딸 사이의 사랑을 통해서'라는 무척이나 전통적인 답변을 한다.
말하자면, 그가 젊어서 하고자 했지만 못한 것을 그의 딸 머피가 시간을 초월하여 젊은 몸을 가지고서 이루어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이른바 물리적 과학의 세계가, '과학 덕후' 어린이들이 그렇게 여기듯, 생각
보다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인터스텔라]는 과학 기술에 관한 영화이기 이전에 그저 가족 영화다.
그리고 이 전통적 감수성이 전달되는 것은 기존에 흔히 알려진 이른바 문학적 방식을 통해서다.
그러나 이는 우리 인간이 아인슈타인적 시간 개념을 아인슈타인 이전부터 항상 사용해오고 있었으며 그것을 가장 효과
적으로 담아내온 사고 형태가 문학이라는 뜻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즉, [인터스텔라]가 문학적인 것은 단순히 해당 영화가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과학적 이슈를 구실로 삼지만 결국에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과학'이라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 바탕하고 있는 문학적 요소다.
이것이 뉴튼적 기계적 물리학의 세계가 아인슈타인을 통해 다시 문학적이 되는 방식이다.
상대적 시간이란 시각성에 기초한 시간 개념이며, 바로 그 시각성이 물리성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초월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 과학, 예컨대, 현대 물리학이 다루는 것은 '초월성'이지 기계적 물리성이 아니다. (
이는 의학으로 치자면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생명'이라는 의미의 본령이 나타나는 방식으로서 설명할 것이지
아니면 다만 기계적 인과성에 따른 복잡한 절차의 문제로서 이해할 것인지의 차이와 같다.
물론, 다소 도식화하여 말하자면, 일반적으로는 이것이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 초월성이 아인슈타인 이전까지는 전통적으로 문학이 다루어왔던 요소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적 시간이 오늘날 실제로 우리 삶 속에서 과학 기술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첫째는, 이미 말했듯, 물리적으로 시각적 오인-오해의 소지를, 예컨대, 성형 수술을 통해 창출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물리적 신체를 고기 썰듯 썰어야한다는 점에서 몹시 미개하며 아인슈타인적 시간 개념에 본질적으로
부합하지 못한다.
둘째는 오늘날의 발전된 영상 기술과 관련이 있다. 혹은 더 나아가 증강현실이라 불리는 기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셀카를 찍고 우리의 삶을 동영상으로 남길 때 그것이 하는 일은 10년 뒤 혹은 20년 뒤의 현재라 불리는 시간 속에 10년 전 혹은 20년 전 시간이라는 아인슈타인적 상대적 시간의 흐름을 다수로 창출해내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만약 시간이 시각이 일으키는 효과에 불과하다면 얼마든 20대의 내 모습을 영상으로 남긴 뒤 50대가 되어 마치 30년 전의
시간-이미지가 이제야 50대의 시간에 뒤늦게 도달한 듯 그것을 '바라보며'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혹은 거꾸로 지금 내가 유지하는 삶의 양태를 계속해서 따를 때 미래의 특정 시점에 내 육신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는 것 또한 가증하지 않은가? 아
니면, 오늘날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통해 70대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 이미지를 합성하여 만드는 일은 어떠한가?
유전자 분석을 통해 미래에 발생 가능한 질병을 예측하는 최첨단 기술은 여기서 다만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질병이 미래에 발병하면 결국 육체에 상처를 남기며 이미지에 변화-왜곡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통 사회에서 과거와 미래를 내다본다고 여겨져온 '무당'이 특정한 '통찰'을 통해 사람들에게 닥칠 미래를 보게
될 때 일어났던 일 또한 이로부터 멀지 않다.
미래에 닥쳐올 그 자신의 어떤 끔찍한 모습에 압도되어 정상적 삶을 현재의 시간 속에서 살지 못하게 될 때 사람들이
겪게 되는 두려움을 생각해보라. 요즘 식으로 말해보자.
IT 스타트업 사업가로서 잘 나가던 30대 중반의 어떤 사람이 갑작스럽게 치명적 암세포를 발견하여 1년 후 죽게 될 자신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게 될 때 그가 겪을 거대한 정신적 충격을 생각해보라.
아마 그는 그 순간 지금까지 그가 유지해온 직선적-안정적 시간 체험이 왜곡되고 붕괴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이는 중력장의 왜곡이 일어날 때 얻어질 일과 같지 않은가?
거꾸로 말하자면, 특정 사회의 틀 내부에서 기능적으로 조직되는 우리 현대인의 삶은, 구조적 측면에서, 대부분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이 가능하기도 하다.
손쉬운 예로, 왜 한국인들은 그토록 명문대에 진학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한 사회 내에 공식화되어 정해진 직선적 시간 경험이 왜곡되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즉, 만약 그러한 행위가 미래를 얼마간 '결정'짓지 못한다면 과연 그들이 그러한 일을 하고자 하겠는가?
바로 그렇게 우리는 정해진 시나리오를 따라, 그 어떤 모험이나 위협적 요소의 개입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고 싶어서
이른바 '노력'이라는 행위를 하는 것이지 않은가?
여기서 아인슈타인적 상대적 시간이란 그 현재 시간 속 '결정의 행위'가, 실질적 시간의 흐름이 있기 이전에, 이미 변화
된 미래로서 현재의 시간을 당장 침식하며, 즉, 현재 시간의 중력장을 왜곡하며, 되돌아오는 현상을 말하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항상 이미 존재해왔던 암세포의 물리적 존재와는 무관하게, 뒤늦게 알게 된 '내 몸 안에 암세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한 '자기 의식' 혹은 '응시된 암세포의 공포스러운 이미지'가 행하는 일이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과거 '무당'이 '불길한 미래'를 볼 때 겪었던 시간 왜곡이지 않은가?
그리고 바로 이러한 역설적 과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려내어온 것이 '문학'이고 그 이전에 '신화'라 불리는 것들이지
않은가?
이러한 현재적 시간을 뒤트는 시간-이미지의 창출은, 그것이 영상 기술을 통한 것이든 문학적 상상력을 통한 것이든,
이미 그 자체로 아인슈타인이 말한 중력의 차이에 따른 상대적 시간들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현재의 시간 속에 재구성하는 일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적 시간이 애당초 물리적 신체의 소멸을 극복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도래한 영상의 시대는 그 자체로 아인슈타인적이다.
즉, 어떤 면에서 오늘날 우리는 이미 복수의 시간을 살고 있다.
이는 트위터의 시간, 페이스북의 시간, 기타등등의 시간이 각기 다른 이미지에 기반한 각기 다른 시간인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AR이라 불리는 증강현실 기술이다.
이는 물리적 세계 위에 인위적 시각성의 세계를 덧입히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보다 충실히 아인슈타인적 시간의 상대적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이 점에 있어 증강현실 기술은 앞으로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꿀 기술 중 하나다.
즉,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단계를 거쳐 10여 년 전 물리적 세계로부터 페이스북으로 이주했다면 이제 다시 우리는
물리적 세계 자체를 페이스북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 물리성의 시각화 혹은 가상화가 앞으로 우리가 서로 다른 여러 시간의 흐름을, 실제 현실 속에서, '보게' 될 방식이다.
이것이 들뢰즈가 '시간-이미지'라는 개념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이지 않은가?
일방적 시간이 복수의 방향성을 지닌 시간이 될 때 그것은, 거짓-환상이 아니라, '가상적인 것들의 현실,' 즉, 현실보다
더한 현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