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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
[ 백년전쟁과 칼레의 시민들 ]
프랑스 북부의 칼레는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을 마주보고 있는 작은 항구도시입니다.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백년전쟁(1337-1453년) 중에도 영국의 집중공격을 받았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칼레에는 세계적인 조각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칼레 시청 앞에 전시돼 있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란 조각인데, 6명이 목에 밧줄을 감고 칼레시의 열쇠를 들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 조각품이 칼레시민의 명예이며 프랑스의 긍지이기도 하는 이유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백년전쟁 약도
백년전쟁 초기인 1347년, 칼레시는 영국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칼레는 시민군을 조직하여 최후의 항전을 벌였지만 영국군은 칼레를 우회하여 프랑스 본토를 공략했고, 전쟁 막바지에 칼레를 봉쇄했습니다. 굶주림 속에 1년을 저항했지만 결국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들을 괴롭힌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칼레시 항복사절은 최악의 상황만은 면하기 위해 영국 왕에게 자비를 구했습니다. 이윽고 에드워드 3세는 다른 항복조건을 내 놓았습니다. “좋다. 단 시민들 중 6명을 뽑아 와라! 칼레시민 전체를 대신해서 처형하겠다” 모든 시민들은 안도했으나 다른 한편으론 교수대에 오를 대표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칼레에서 제일 부자인 ‘외스타슈드 생 피에르’가 선뜻 죽음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시장인 ‘장데르’가 따라 나섰습니다. 이에 부자 상인인 ‘피에르 드 위쌍’이 나서고 그의 아들마저 아버지를 따르겠다며 나서니, 이에 감격한 시민 3명이 나타나 한 명이 많은 7명이 되었습니다. 외스타슈드는 제비를 뽑으면 인간인 이상 행운을 바라기 때문에 내일 아침 처형장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안했습니다.
* 에드워드 3세
다음날 아침 6명이 처형장에 모였을 때, 외스타슈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시민들이 그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 외스타슈드는 이미 시체로 변해있었습니다. 처형을 자원한 7명 가운데 한사람이라도 살아남으면 순교자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자신이 먼저 죽음을 택한 것이었습니다.나머지 6명은 영국왕의 명령대로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에 홑옷만 걸친 채 교수대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임신 중이던 영국 왕의 아내 필리파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왕을 설득했습니다. 처형은 미뤄졌고 6명의 영웅들은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 로댕이 만든 동상 <칼레의 시민>
몇 백년이 지나서 칼레시는 이 영웅적 인물들을 기념하는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로댕에게 작품 제작을 의뢰했습니다. 10년의 작업 끝에 1889년 가을, 마침내 근대 조각의 거장 로댕의 걸작 ‘칼레의 시민’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로댕이 1889년 완성한 기념상은 사람들이 기대한 애국적 영웅의 늠름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는 6인의 인물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거나 곧 닥칠 죽음에 침통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초인적인 영웅이라기보다는 극히 인간에 가까운 이 모습은 곧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칼레 시청과 동상
그래서 이 기념상은 당초 세워질 예정인 칼레 시청이 아니라, 한적한 리슐리외 공원에 세워졌다가 나중에야 다시 칼레 시청 앞으로 옮겨질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공 기념상들이 높은 받침대 위에 위풍당당하게 설치되는 것과 달리 로댕은 칼레의 시민 상을 최대한 지면에 가깝게 세워 마치 지면 위에 평범한 인간들이 고뇌하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시의회의 반대로 1895년 제작된 기념상 아래에는 1.5m 높이의 받침대를 두어야 했습니다. 1924년 기념상이 시청으로 옮겨지면서 받침대의 높이도 로댕의 원래 바람대로 최대한 낮춰졌습니다.
* 동상 중의 한 사람
[ 현대조각의 아버지, 오귀스트 로댕(1840~1917) ]
오귀스트 로댕은 근대조각의 시조라 일컬어지며 미켈란젤로 이후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18세기 이래로 건축물의 장식이자 회화의 종속물에 불과했던 조각을 같은 수준의 독립적인 예술로 끌어 올렸습니다. 또한 상징주의적,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감정들을 표현하여 근대 조각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파리의 로댕 미술관
로댕은 1840년 11월 12일 파리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장 밥티스트 로댕은 노르망디의 농촌에서 파리로 이주, 경시청의 하급 형사로 지냈으며, 어머니 마리는 프랑스의 전형적인 농촌 여성으로 언제나 조용히 숨어서 친절을 베푸는 형이었습니다.
로댕은 이러한 부모에게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인내와 독립심을 물려받게 되었고 그리고 로댕의 성품은 완고하고 고지식했으며, 불굴의 정열과 뜨거운 야망도 함께 가지고 있었죠. 생활에 있어서는 근검정신이 투철했던 부모의 영향을 받아 철저한 구두쇠정신을 발휘, 다른 사람들로부터 '노랭이'라는 욕을 먹을 정도로 항상 절제된 생활을 영위하였다고 합니다.
*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그는 초등학교시절부터 그림그리기를 매우 좋아했으나,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여 비싼 미술학교에는 다닐 수가 없었고 수업료가 대체로 싼 소묘와 수학을 가르치는 직업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무렵 로댕은 루브르 미술관이나 국립도서관 판화부 등을 드나들며 고대작품을 모사(模寫)하는데 주력합니다.
17세까지 로댕은 상급미술학교인 <에콜 드 보자르>에 3번이나 응시했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십니다. 이후 생계를 위해 장식적인 작업을 계속했던 로댕은 1864년 <코가 깨진 남자의 얼굴>을 제작, 살롱전에 출품했으나 사실적인 묘사가 그 당시 심사위원들의 비위를 건드려 낙선하게 됩니다.
* 작업장에서의 로댕
이 무렵 그는 로즈 뵈레라는 여성을 만났고, 두 사람 사이에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로댕은 아들에게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성을 붙여주지 않으면서도 그녀와의 인연을 평생 지속합니다. 초기 작품에는 뵈레를 모델로 한 조각이 여러 점 있는데, 로댕은 그녀를 연인이라기 보다는 모델로 여겼고, 뵈레는 그 상황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사랑으로 감내했습니다.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로댕은 국민 방위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얼마 후 근시로 인해 곧바로 퇴역, 휴전후 벨기에 브뤼셀에서 다양한 공공건축의 장식 일을 합니다.
이곳에서 약 7년간 장식 일을 하면서 로댕은 다른 일거리를 찾아 유럽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여행을 합니다. 그 중 1875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로댕에게 있어서 그의 그 후 예술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그는 깊은 감명을 받게 됩니다.
1878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브뤼셀에서 제작한 <청동시대>를 살롱전에 출품하나, 이 작품이 지닌 박진감과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살아있는 사람의 몸(혹은 시체)을 그대로 주조해 만들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습니다.
* 청동시대
이 <청동시대>는 로댕예술의 출발점이며, 사실적 표현의 완성이라고 평가받게 됩니다. 1880년 <청동시대>가 재평가되면서 살롱전에서 3위의 상을 받자 프랑스정부에서 이를 구매하게 됩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40세 되던 해였고 조각가로서의 입지가 굳혀지게 됩니다. 이 때 그는 파리 장식미술관의 청동문 제작을 의뢰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지옥의 문>입니다. 이후 로댕은 명성의 중핵을 이루는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발자크 상> 등과 같이 다채롭고 자유분방한 그 만의 기질이 담겨 있는 작품들을 정력적으로 제작합니다.
1884년, 로댕은 <칼레의 시민> 기념비 제작 공모에 당선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347년 영국의 에드워드 3세의 군대가 칼레를 점령했을 때의 일을 조각하는 일이었죠. 로댕은 이들의 영웅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조국애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을 표현하고자 하였고, 이로 인해 로댕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갔습니다.
* 로댕 미술관의 <생각하는 사람>
로댕의 공방은 날이 갈수록 확장되었고, 이에 따라 조수와 제자도 늘어났는데, 그중에는 카미유 클로델도 있었습니다(로댕과 클로델과의 관계는 아래에서 상술합니다). 로댕은 만년에도 뵈레와 아들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일생동안 로댕에게 보여준 헌신은 로댕자신은 잊지 않았습니다.
50여 년 간 내연의 처였으며 한시도 로댕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외도까지를 인내했던 뵈레. 그녀는 로댕의 무명시절 작업실로 개조한 마구간에서 함께 지내며 삯바느질로 그를 봉양했습니다. 로댕은 그녀에 대해 “나를 향해 동물적인 충성심을 지닌 여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엄청난 여성 편력을 자랑한 그는 ‘취향도 없다’라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각양각색의 여성들과 추문을 뿌렸는데, 그러나 뵈레와의 관계는 평생 지속되었으며, 애인들 역시 뵈레가 그의 아내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1916년 뇌졸중을 일으키고 나서야 그녀와의 결혼을 숙고하게 됩니다.
같은 해 그는 그의 모든 작품과 전시물을 국가에 기증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기 9달 전인 1917년 2월에 뵈레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뵈레는 결혼식을 올린 지 2주 만에 사망했고, 로댕은 그해 11월에 죽었습니다.
<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
* 카미유 클로델
뛰어난 미모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프랑스의 여류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은 그녀 나이 19세에 로댕의 모델이자 연인이자 동료가 되었습니다. 그때 로댕의 나이는 43세. 클로델은 해부학에 정통했기 때문에 로댕 작품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곤 했는데, 그녀는 동료 이상의 감정으로 로댕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망했습니다.
그녀의 자전적 작품 ‘성숙한 시대’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비극적인 관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나체로 무릎을 꿇은 채 로댕에게 애원하고 있고 그는 뵈레의 팔에 안겨 끌려가고 있습니다. 클로델은 로댕에게 결혼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끝내 거절당하였습니다.
또한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했던 로댕은 그의 모델들과 노골적으로 관계를 가졌으며, 이로 인해 카미유와 로댕은 불화로 인해 자주 격렬히 다투었습니다. 그러한 폭풍같은 사랑을 15년 동안 지속한 후, 클로델은 어느날 로댕을 떠납니다. 로댕은 그녀에 대해 "나는 황금을 찾으려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녀가 바로 그 황금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 카미유의 <성숙한 시대>
그러나 그녀는 로댕이 인정했던 그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한 채 생애 나머지 40년을 요양소에서 비참하고 쓸쓸하게 보냈습니다. 결국 정신착란으로 병원에서 생을 마치게 되는 클로델.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로댕을 저주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영감을 제공해야 했다.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 나는 양육(養育)되었다. 그것은 한 여성에 대한 철저한 착취였다. 나는 예술가로서 재능을 도둑맞았다."
[ 작품 감상 ]
* 지옥의 문
로댕은 1880년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장식미술관에 세워질 장식 박물관을 장식하는 일을 위촉 받았습니다. 단테를 좋아했던 로댕은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장식 박물관 입구를 지옥의 문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으로 되어 있는데 로댕은 인간의 고통을 다룬 지옥을 작품의 소재로 택합니다.
로댕은 단테의 지옥을 표현하기 위해 데생에만 1년을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인물들이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로댕은 작업을 진행하면서 단테의 신곡을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수정하고 끊임없이 인물을 끼워 넣었습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의 규모가 결정되자 거대한 목조로 틀을 짠 후 그 위에 점토로 씌우고 다시 석고로 덧바르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지옥의 문> 꼭대기 중앙에 서서 악령 <세 그림자>가 가리키는 곳은 지옥의 고통에 짓눌려 있는 인간들입니다. <세 그림자>를 중심으로 로댕은 <신곡>에 나오는 개별적인 인물과 장면을 풍부히 살려 <지옥의 문>을 3차원적 공간으로 표현했습니다. 로댕의 <지옥의 문>에서 보여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상들은 조각가로서의 그의 삶을 기록한 일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옥의 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벌거벗은 채 오른손을 턱에 괴고 벼랑 끝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남자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에게 명성을 안겨주었습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제작하는 도중 1883년 말 젊은 여성들을 위한 강연을 하면서 카미유 클로델을 만납니다.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카미유 클로델과 사랑에 빠지면서 로댕의 작품에 여자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은 예술가로서의 삶이 같았기에 서로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기도 했지만 경쟁자로 또 창의력에 대한 의심 때문에 서로에게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 발자크 상
로댕의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가장 거센 비난을 받은 작품은 프랑스 작가 발자크를 조각한 3m가 넘는 조각상입니다. 그는 이 작품에 착수하면서 "나는 무언가 범상치 않은 것을 만들려 한다." 고 말했습니다. 1898년 완성작이 발표되자 대중들은 이 작품을 "너무나 범상치 않아 상식을 벗어난 것" 으로 간주하였고 비평가나 후원자들은 반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 작품은 발자크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호감이 가지않게 생긴 견고한 조형물이었습니다. 몸뚱이는 온통 천으로 감싸여 갈기같은 머리와 튀어나온 외양을 사진 같이 움푹 패인 눈만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발자크의 외양을 사진 같이 조각할 마음이 없다. 나의 원칙은 형태뿐만 아니라 생명력까지 표현하는 것이다."
그의 디자인에서 혁신적인 면은 위대한 작가의 실제의 외모를 그대로 조각하지 않은 데에 있었습니다. 육중한 몸체로부터 돌출되도록 조각한 두상에서 보여지는 과감한 단순화와 왜곡을 통해 로댕은 그만의 독창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작가 라마르틴은 "이것은 자연의 얼굴이다."라고 말했고 로댕은 이 작품을 "나의 전 생애의 결산"이라 불렀습니다.
후원자들은 이 작품을 '예술적인 완성도가 부족' 하며 '거대한 태아' 같다고 비난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발자크 상을 애벌레에 견주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한 신문기자는 '식인괴물, 악마, 기형이 합쳐진 괴물 덩어리'라고 쓰고 있습니다.
로댕은 이들에게 맞서 이 작품을 옹호하며 "정열로 들끓는 진짜 영웅적인 발자크 상이다. 나는 일찌기 이렇게 만족스런 작품을 만든 적이 없다. 이것은 나의 정력과 나의 예술의 비밀을 심오하게 드러낸 내 예술의 총체 그 자체이다."라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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