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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닌의 난부터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15세기 중반~17세기 초반) 도쿠가와 막부 3대 쇼군인 이메미쓰가 전권을 잡기 100년 전에 일어난 '오닌의 난'이 1467년부터 10년간 교토를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오닌의 난은 약화된 천황의 권위와 막부로 인해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 패권을 두고 싸우던 일종의 군사 내전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싸움이 교토를 전장으로 하여 벌어졌다는 것이지요. 천황이 머물고 있던 곳이 교토였으니 교토에서의 싸움에서 승패가 결정난다고 판단한 동군과 서군의 주력부대가 교토에 자리를 잡으며 교토는 10년간 전쟁터가 됩니다.
오닌의 난으로 인해 교토에 성한 사찰이 없다고 할 정도로, 거의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합니다. 당시 동군이 16만명, 서군이 11만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이는 좀 과장된 것 같지만 아무튼 엄청난 숫자가 교토에 머물며 전투를 치렀답니다. 이때 군사들이 주둔하기에는 건물이 상대적으로 크고 머물 곳이 많은 큰 사찰들이었다고 하네요. 당시는 서로 상대방의 주력군이 머무는 사찰을 불태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었으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찰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이때 훼손된 사찰들은 이런 전국시대를 마감시키고 실권을 쥔 도요토미 가문 시절과 그 직후의 도쿠가와 막부 때 많은 부분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오닌의 난 결과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어느 쪽으로 승패가 정해지지 않고 흐지부지 끝나서 각자 자기 영지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런 난세 속에서 전국통일을 눈앞에 둔 것이 오다 노부나가였는데, 오다 노부나가는 자기의 심복에게 배신을 당하는 '혼노지의 변'을 겪으면서 죽게 됩니다. 이때 전장에 있던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장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재빠르게 돌아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배신자를 처단하고 오다 노부나가가 이뤄놓은 전국통일의 과실을 따먹게 됩니다. 그 후로는 아시는 바와 같이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해 팽배해 있던 일본 내의 군사력과 살의를 해외로 돌려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결국 임란 중에 자신도 병사를 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넘어가는 이런 시대를 문화적으로는 매우 화려함을 추구하는 모모야마 시대라는 미칭으로 부릅니다. 아무튼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대하 소설이 바로 '대망'이지요. |
에도시대란? - 1603~1867 에도 시대란 말을 참 많이 듣는데, 정확히 언제인지 알고 가시자구요. 에도시대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금의 도쿄인 에도에 막부를 세운 1603년부터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유신으로 인해 정권을 천황에게 반납한 1867년까지 총 265년간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왜 도쿠가와 막부 시대라고 안부르고 에도 시대라고 부르냐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도쿠가와가 자기의 막부 사령부를 에도 지역에 세웠기 때문에 지역명을 따서 에도 시대라고 부릅니다. --------------------------------------------------------------- 무로마치시대 - 1336~1573년 에도시대 이전인 무로마치 시대 역시 아시카가 가문의 막부가 정권을 잡았던 시기인데요. 무로마치라는 교토 지역에 막부 사령부를 세웠기에 무로마치 막부라는 표현을 합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1대 쇼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천황이 남북에 둘로 나뉘어서 대립하던 남북조시절에 북조의 고묘천황을 옹립하고 자신은 스스로 정이대장군(쇼군)이 되어 막부를 여는 것이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1대 쇼군이 죽고, 뒤를 이은 쇼군들이 등장하며 막부의 권력은 지방의 다이묘(영주)들 세력이 커지면서 조금씩 축소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패권을 놓고, 위에서 이야기한 오닌의 난이 벌어지게 되고, 결정적으로 무로마치 시대도 마무리되게 됩니다. 무로마치 시대의 특징은 막부과 실질적인 권력을 천황으로부터 모두 받아 실권을 쥔 것이라고 하네요. 가마쿠라시대 이야기까지 가려다가 이쯤에서... ^^ (아무튼 에도, 무로마치, 가마쿠라 모두 일본 내 지역이름입니다.) *가마쿠라는 동경 바로 남쪽 해안가에 있어요. ^^ |
위에서 너무 공부를 많이 했으니 여기서는 가볍게 감상만... ^^
일본 발음으로는 고쥬노트가 되는 오중탑을 향해 성큼성큼.
일본에 와서 목탑을 처음 봤으면 아주 놀랐을텐데. 이미 호류지(법륭사)와 나라의 흥복사(고후쿠지)에서
봤던 터라 탑 안에 들어가는 것에 더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대나무발을 통해 단풍나무를 조경해 놓은 것이 이채로웠습니다.
내부는 엄격하게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데요. 고야산에서 보았던 입체만다라를 형상화해 놓았습니다.
탑 내부는 1년 중에 며칠만 공개된다는데, 운 좋게도 볼 수 있었습니다.
자, 이제 동사(도지)에 대해 공부하시자구요. ^^;;
동사는 간무천황이 나라에서 이곳 교토(헤이안)으로 천도를 한 794년부터 기획됩니다.
교토는 중국의 장안과 낙양을 모델로 하여 동서 4.5km, 남북 5.3km 정도의 크기로 바둑판 같은 도로망을
갖추는 계획신도시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때 교토에 자리를 잡고 있던 신라 도래인들인 하타씨가 자신들의 땅을 헌납하고,
교토 천도를 물심양면으로 돕게 됩니다.
교토로 천도를 한 이유는 기존의 수도인 나라 지역에 만연한 지역 토호세력들인 귀족, 그리고 사찰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천황이 벗어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새롭게 천도하는 교토 내에는 일제 사찰의 건립을 불허하고, 한양도성으로 치면
남대문에 해당하는 나성문의 동서로만 동사와 서사 딱 2개의 국립사찰만 짓도록 합니다.
서사는 교토의 서쪽지역이 하천범람 등으로 나성문과 함께 폐가 될 때 같이 허물어져서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동사는 지금까지 건재하게 내려오게 됩니다.
동사의 건립은 고야산에서 이미 우리가 뵙고 왔던 홍법대사에게 임무가 주어집니다.
819년 홍법대사에게 고야산을 하사하며 산중 불교도시를 만들게 한 사가천황이
823년 홍법대사에게 동사까지 주지를 맡기면서 동사 건립의 총 책임을 맡긴 것이지요.
동사는 796년 처음 착공되어 무려 100년간 지어집니다.
홍법대사이 고야산에서 입적한 835년에서도 50년 후에 건립이 완공된 것이지요.
동사는 지금도 진언종의 총본산입니다.
(고야산에 있는 금강봉사(곤고부지) 진언종을 고야산진언종,
동사의 진언종은 동사진언종이라고 하여 똑같이 홍법대사가 개창하였으나 각각 본산을
따로 두고 구별합니다.)
동사는 동서 250m 남북 500m부지에 지어지게 됩니다. 약 6만4천평에 달하는 넓이이죠.
금당의 내부입니다. 금당 보다는 강당의 불상들 작품이 뛰어난데, 사진이... ^^:;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동사를 너무 설렁설렁 보고 온 것 같아 너무 찜찜했습니다.
보물관도 들어가지 못하고 말이지요. 사실 일정이 빡빡하여 청수사 입장을 위해 좀 서두른 감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에 저는 다시 왼쪽 정원의 동쪽 루트를 다녀왔습니다. ^^
*사진 속의 공터는 주차장에서 동사로 들어가는 입구로 홍법대사가 돌아가신 2월21일을 기리기 위해
매달 21일에 고보장이라는 벼룩시장을 여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연못을 보는 순간 어느 지점엔가 반드시 오중탑 반영이 비쳐지는 곳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요.
그래서 찾아해메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화장실도 다녀오고요. ^^;;
요렇게 찾았습니다. 오중탑 반영 포인트. ^^
왼족에 오시는 분 상반신 가린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답답해보여요. T.T
동사 마지막 사진입니다.
다음에는 징검다리도 폴짝폴짝 건너볼랍니다.
다음에는 꼭 말이지요. 동사를 들려서 찬찬히 보물관과 강당의 보물 불상들도 눈에 차곡차곡 담아올랍니다.
아, 지나고 보면 너무 아쉬워요. 서둘렀던게... 동사여 기다려라...
다음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안된 것이 이상한 삼십삼간당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삼십삼간당에 대해 들어본 분들은 기대가 무척 컸던 곳이지요.
삼십삼간당의 1천 보살님들을 수호하는 풍신과 뇌신상이 입장권에 표현되어 있네요.
풍신이나 뇌신은 불교보다는 일본의 신도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집니다.
신도와 불교가 접목한 신불습합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요.
사진촬영 금지된 곳이라 급하게 찍어 좀 구도가.. 안습 T.T
가끔 일본의 불교미술은 보는 사람 기를 질리게 만드는 게 좀 있습니다.
등신대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1천분을 이렇게 모셔놓은 곳이 삼십삼간당입니다.
삼십삼간당이 말들어지던 시기는 794년 헤이안(교토)천도로부터 400년간 지속된
헤이안시대가 끝나고 무인정권 즉, 막부시대가 열리던 변화무쌍한 시기입니다.
삼십삼간당의 정식명칭은 연화왕원(렌게오인)입니다. 천수천음관세음보살의 별칭이
연화왕이기에 붙은 이름이지요.
1165년 낙성식을 가진 삼십삼간당은 고시라카와 천황이 상황 시절에 발원하여 지은 절입니다.
고시라카와천황은 매우 권력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여 황권을 물려주고 상황이 되어
실질적인 권력행위인 원정을 30년간 벌입니다. 자신이 상황이 되어 원정을 하는 과정에서
천황과의 권력 다툼이 일어나 두번이나 유폐를 당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고시라카와 천황이 유폐된 것도 무사들에 의한 쿠데타였고, 다시 복귀한 것도 다른 무사들의
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권력을 되찾았지만 무력으로 권력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무인들에게 깨닫게
해주는 계기를 준 셈이 되었습니다. 고시라카와 상황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된 후에도 법황으로서
여전히 권력을 유지했으나 결국 다시 유폐를 당했다가 다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다시
구출됩니다.
결국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2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고리사카와법황이 죽자
에도(지금 동경) 남쪽에 있는 가마쿠라 지역에 막부를 열고 헤이안시대를 마감하게 하고
카마쿠라시대를 열게 됩니다.
118m나 되는 건물을 쭉 걸어나오나 마지막에 촬영한 한컷입니다.
삼십삼간당이 낙성식을 연지 80년 만에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관음상들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데,
불상 1천구 중 156구를 구하고, 중앙의 장육존상 머리와 팔, 그리고 28부중상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251년 곧바로 원래 규모대로 복원공사에 들어가서 15년 뒤인 1266년 다시
낙성 공양법회를 베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불상들은 요세기 쯔쿠리 방식이라는 일본 특유의 독특한 방식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즉, 불상의 각 부위를 별도로 만들어서 끼워 맞추는 조립식이라는 것이지요.
그때문에 매우 정밀하게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1천분의 불상이 다 천편일률적인 것은 아니고,
자세히 보면 표정들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1200년대 복원 시 가마쿠라시대 최고의 불상 장인인
경파 조각가들이 투입되었다고 하는데, 28부중상의 모양이 경파 조각가들의 역동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기록에보면 28부중상은 헤이안시대 처음 것이라고 하여
어느것이 진실인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십삼간당 건물입니다. 118m나 되기 때문에 여기서 활쏘기 대회도 연다고 합니다.
이 건물을 지을 때는 기초 바닥공사를 판축공법으로 했다고 밝혀졌습니다.
판축공법이란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서 쌓는 방법인데요. 백제에서 예로부터 많이 사용하던
방법으로 부여 정림사지나 익산 미륵사지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초공사를 판축공법으로 할 때는 건물 올릴 땅을 일정부분 파내어 판축공법으로 흙덩이를
켜켜이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 외에서 백제에서는 성을 쌓을 때도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고 하는데요. 풍납토성과
공주의 공산성에서도 이런 방식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판축공법은 특히 지진에 강한 내진공법으로 알려져 있어 일본에는 특히 필요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7세기 중엽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기술이전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삼십삼간당 바로 옆에 자리한 교토국립박물관입니다. 아쉽지만 월요일은 휴관이라 패쓰...
이곳은 임진왜란 때 희생당한 분들의 귀무덤인 이총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전공의 표식으로 조선군인들의 코와 귀를 베어서 소금에 절여서 갖고 오게했고,
그렇게 바쳐진 코와 귀를 묻고 공양탑을 위에 세운 것입니다. 정말 가슴아픈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왠지 모르게 타향에 이렇게 신체 일부가 묻혀 있는 것이 가슴 먹먹하게 다가왔습니다.
당시 왜군의 전공품이 된 조선 군민의 수가 12만6천명에 달했다고 하고,
임란 때 일본군에 학살되거나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조선인이 100만~150만 정도라고
합니다. 이정도 숫자는 당시 인구의 5분의1 또는 4분의 1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알수 있겠습니다.
그때는 코 없이 살아서 걸어다니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고 하니
그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이총에는 약 4만개의 귀와 코가 묻혀 있다고 하는데요.
1597년 9월 2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귀와 코를 묻고 위에는
공양탑을 세우고 교토5산의 승려 4백명에게 공양하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총을 세우고 승려들로 하여금 법회를 열어 공양하도록 한 이유는
이들의 원한 석인 영혼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일본에 저주를 내리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신앙적인 측면에서 조금 다른면이 있는데요.
우리나라는 복을 달라고 기원을 하는 반면에, 일본은 원령으로 인해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비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 역시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나는
일본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본래는 코무덤이라고 하다가 에도시대 초기의 어느 학자가 그 명칭이 지나치게 야만적이라며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한 후에 귀무덤 즉, 이총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옆 100m 떨어진 곳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토요쿠니 신사가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의 전리품처럼 자리한 이총이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 왔으면 좋겠습니다.
먼 타국에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계신 분들에게 묵념을 하고 다음 발걸음을 옮기려 합니다.
바로 옆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도요쿠니 신사입니다.
흘깃 쳐다만 보고 그냥 모른척 지나갑니다.
방금 이총을 다녀온 터라 뭐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다음은 청수사(기요미즈데라)가는 길입니다.
일부러 교토 시민들의 생활사를 느껴볼겸 좁은 골목길을 통해 가보기로 했습니다.
대신 일행들에게 다른 이들의 생활공간이므로 대화는 삼가고 하더라도 낮게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조용히 걸었습니다.
번화한 도시에 살면서도 나름 전통을 지켜가려는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
이곳은 청수사(기요미즈데라)의 영험함에 기대어 잠든 이지역 최대의 공동묘지 관할 사찰인 오타니혼뵤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쪽을 통해서 청수가 입구까지 갈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박석이 참 고급스럽게 깔려 있습니다.
교토 최대의 공동묘지 답게 참배하는 분들이 계셨어요.
공원묘지를 지나 청수사로 가려 했는데, 안타깝게도 출입을 금하는 모양이더군요.
입구에서 안내하는 분이 일본에서는 드물게도 꽤 거칠게 들어가지 말라네요.
할 수 없이 다른 길로 내려와 청수사 본래 길로 잡아갑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멀리 삼중탑이 보이는 저 청수사까지 갈 수 있습니다.
곳곳에서 기모노 입은 처자들이 보입니다.
이 부근에 기모노를 유료로 대여해주는 곳이 아주 많아서 이용하는 여성들이 많거든요.
우리나라 전주 한옥마을에서도 이를 벤치마킹 해서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지요.
기모노 대여해서 관광하는 친구들에게 부탁하면 어렵지 않게 기념촬영 같이 해준답니다. ^^
사람들이 꽤 많아 보이지만 이건 별로 없는 편이예요.
이 거리가 사람이 비교적 없는 접근로이고, 게다가 월요일이예요.
청수사 입구에서 조금 늦어지는 분들을 기다리며 찰칵!
9번째 세계문화유산 - 청수사(기요미즈데라)
인산인해라고 하는 청수사에서 개별관광을 하기 위해 전체적인 전달사항을 하기 위해 의도된 단체사진.
요렇게 촬영하고 나서 공지사항을 전달하며 확실하거든요. ^^
자, 다음 후기는 본격적으로 청수사(기요미즈데라)의 가을을 만끽하시게 될 겁니다. ^^
첫댓글 동사 오중탑에 사싦어 놓은 단풍나무들이 없는게
오중탑이 오롯이 주인공이 될듯 하다는
제 개인적 생각 ㅎ
삼빕삼간당에서 맘에 드는 관세음보살님 찾기도 했죠^^
청수사 가면서 걸었던 골목길들.
역시 걷기는 골목길이 좋죠~~~
청수사가 보이는 길로 접어 드니
엄청난 인파들.
기모노를 입은 관광객들이 많아
그또한 볼거리~~~
여러가지로 볼거리가 참 많았던 듯 싶습니다. 동사에서 몇몇 빼놓고 지나간 곳들이 맘에 걸리네요.
이 역시 홍법대사께서 다시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겠지요. ^^
이년전 유홍준교수의 책에서 석양의 청수사가 근사하다고해서,일부러 일정을 조정해 오전엔 아라시야마,저녁무렵 청수사를 갔는데
기요미즈자까를 떠밀리듯 올라간 기억이 떠올라 그때의 사진 올립니다
발견이님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생생한 해설 곁들인 후기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고맙습니다
기요미즈자카 인파가 사진 속이 더 많으시네요. 저희는 그래도 월요일 저녁이라 좀 덜했나봐요. 일부러 월요일로 잡았는데, 그바람에 교토박물관은 휴관이라 못가기도 했지요.
암튼 여러가지로 재방문을 하게 될 이유를 스스로 만들고 있답니다. ^^
돼지고기 샤브샤브..기대하지 않았던 참 괜찮은 맛이었어요~
푸짐하게 가져다 준 기무치 덕분에..
교토 박물관은 많이 아쉬웠어요..못들어 가서 더 그랬겠죠~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 느꼈던 그 무엇을 느꼈을지도 모를테지만..."많이도 뺏어 가져다 놓았네"..그런 마음..ㅎ
ㅎㅎㅎ
삼십삼간당에서
우리는 서로를 닮은
이 다음다음다음 생에라도
성불하면
저런 모습일 것이라며ㅎㅎㅎ
관세음보살님을 가리기도 하였었어요ㅎㅎ
운좋게도
함께 한 친구들이
저와 닮은 부처님을
찾아주었습니다^^
이제 성불하는 일만 남은 셈입니다ㅋㅋ
청수사!!!
에 마침내 방점을 찍고!!!!
기모노의 아리따운 여인네들 속에는 가끔 우리나라 아가씨들도 있었답니다 ㅋㅋㅋ
어설픈 영어,일본어로
같이 사진찍을래?
물었더니
홍홍홍
저희도 한국에서 왔어요ㅋㅋㅋㅋ
라고 해서 깜놀
그날밤
그 넘치던 사람들의 물결이
아주 한적했다니....
ㅎㅎㅎㅎㅎ
다음에
교토만 따로 와서
천천히 사람들에
밀려다니면서
군것질도 하고
이것저것 살 것처럼
시식도 하고
예쁜물건 실컷 아이쇼핑도 하고
그러고싶어요^^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사진도 찍을수 있네요!
물에 비친 동사의 오중탑 열심히 찾아헤매서 찍으셨읍니다요~~~
118m나 되는 우람한 삼십삼간당 건물!
그안에 모셔진 천편일률적이 아닌 각기 다른표정의 1천분의 불상!
청수사 가는길...벌써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