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39
11월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연중 제3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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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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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NaBCSubC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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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믿고 의지할 영원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십니다!>
저희 수도원이 바닷가 언덕 위에 위치해있는지라, 하루 온 종일 얼마나 거센 강풍이 불어왔는지 모릅니다. 강풍으로 인해 강아지들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비틀 비틀거릴 정도였습니다.
피정객들이 오셔서 야외 식당 화목난로에 불을 지폈더니, 넉살좋은 검은 고양이가 슬며시 들어와 난로 옆에 자리 잡고 드러누워 꼬박꼬박 졸고 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웃겼는지 모릅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인데 무척 추웠던가 봅니다.
밤새도록 계속된 강풍으로 인해 식당 앞에 쳐놓은 천막이 견디지 못하고 폭삭 내려앉았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관계로 철거하면서 제 머릿속에 한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위령 감사송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전, 참으로 위풍당당하고 화려하지만,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래 가지 않아 반드시 금이 가고, 내려앉고, 허물어지기 마련입니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믿고 의지할 영원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십니다.
은혜롭게도 매일, 아니면 매주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몸을 영하는 우리 개별 그리스도인 각자 역시 하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비천하고 나약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지극히 거룩하고 존귀하신 주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니, 우리 역시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성화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명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켜나가시는 것입니다.
동네 생맥주집이나 식당에 들어갔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을 거룩한 성전으로 변화시킬 의무가 있습니다.어떻게요? 생맥주집이나 식당에 둘러앉아 묵주기도를 바쳐야 할까요? 그건 아니겠죠.
고생하는 아르바이트 대학생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것, 서빙하는 자매님에게 수고가 많다고, 감사하다고, 한 마디 해주는 것이 그곳을 성전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계산대에 앉아 계시는 사장님께 잘 먹었다고, 얼마나 힘드냐고, 기도하겠다고 한 마디 해주는 것이 그곳을 성전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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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6LJ-i9Vk0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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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나 병원이 더 성전다운 성전이 될 수 있는 이유>
저는 라떼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이나 성 베드로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낼 때마다 ‘하느님께서 이 큰 성전들을 짓기를 원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성전을 짓기 위해 돈을 걷어야 했고 그것 때문에 개신교가 생겨나는 계기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라떼라노 성전 앞에는 거지로 사는 수도원의 회칙을 승인받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올라온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성전의 크기에 놀라는 모습이 청동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그 모습은 절대 ‘성당 멋지다!’라는 모습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도 커다란 성전을 짓고 빚을 갚고 또 유지보수 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쓰는 것보다는 성전의 더 본질적인 의미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양원역’은 우리나라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기차역이자 가장 작은 기차역입니다. 물론 허구가 가미되긴 하였겠으나 양원역이 세워지게 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기적’(2021)입니다. 천재 준경의 목표는 단 하나, 마을에 기차역을 만드는 것입니다. 마을이 작아 기차가 서지 않기에 마을 주민들이 굴을 지나고 다리를 지나다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준경은 천재인데 일부러 꼴찌를 합니다.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사실 공부 때문에 갖게 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를 좋아하는 국회의원의 딸이 있습니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라희는 그의 능력을 발휘해 볼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준경은 오로지 마을에 기차역을 만들기 위해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물론 라희가 이것도 도와줍니다. 그러나 준경은 라희에게 더 가까이는 다가가지 못합니다.
준경의 누나 보경은 동생과 함께 살면서 동생의 친구가 되어줍니다. 동생은 누나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도시로 나가지 않았고 시골집에 누나와 함께 삽니다. 준경은 누나가 섭섭해 할까봐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도 못 합니다. 아버지 태윤은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인데, 아들을 지나치다 보아도 아는 척도 안 합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둘은 서먹하기만 합니다.
어느 날 대통령이 그 지역에 역을 만들어도 좋다는 허가를 해 줍니다. 하지만 돈은 지원해주지 않습니다. 준경은 자신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평탄하게 하고 손수 역을 세우려 합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도 도와줍니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첫 민자역인 양원역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태윤은 기차역을 통해 아들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준경의 어머니는 준경을 낳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누나 보경도 사실은 준경이 환시를 보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교 1등을 해서 상을 받아올 때 기차 때문에 다리 난간에서 몸을 피하다 동생의 트로피 때문에 물에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죽었고, 누나도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은 준경을 그 집에 잡아놓고 있었습니다. 준경이 그렇게 만들려고 한 양원역은 어떻게든 그런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의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누나도 죽게 했다고 생각할 줄 알고 아버지께 칭찬받기 위해 만들기로 한 것이 기차역입니다. 그는 기차역만 있었어도 자신을 낳다가 엄마가 죽을 필요가 없었고 누나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는 천재성을 펼칠 수도 없고 결국 자신을 믿어주는 라희에게도 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 태윤은 고등학생 아들이 자신이 기뻐할 것이라 믿어 손수 만든 작은 간이역을 들어가 보며 모든 것을 준경에게 말해줍니다. 사실 태윤이 일만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준경을 낳을 때 집에 늦게 도착해서 준경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나 보경이 죽을 때도 기차를 몰던 기관사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상을 받을 때 자신만 즐기면 아내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이 운전하겠다는 것까지 뿌리치고 누나를 보냈던 것입니다. 준경의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에 아버지도 큰 책임이 있었기에 준경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인데, 준경은 아버지가 자신을 원망하는 줄 알고 괴로워했던 것이고 아버지의 칭찬을 듣기 위해 역을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준경이 다시 꽃필 수 있도록 기차에 태우고 차를 몰아 나라에서 주최하는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게 해 줍니다. 준경은 전국 1등을 하여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준경은 드디어 누나와 엄마의 숨결이 깃든 집을 떠날 수 있게 되었고 꿈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양원역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공간이었고 자신 안에 있는 죄책감을 아버지가 해결해 주어 이전의 자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세워야 하는 성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그런 성전을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모든 죗값은 당신이 다 치러놓았으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실 작은 간이역을 만들지 않는다면 주님은 영원히 우리의 무서운 심판자로 외부에 서서 계십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예수님께서는 이 돈으로 성전을 짓기를 원하실까, 학교를 짓기를 원하실까?’를 생각하셨던 것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떠올려야 우리가 어떤 성전을 지을지 알게 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학교를 세우는 것이 성당을 짓는 것보다 주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행위 안에 주님께서 이태석 신부님의 마음에 자리를 잡으시는 것입니다.
내 죄를 인정하고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 내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를 원할 때 내 안에 성전이 세워지고 주님께서 머무실 공간이 마련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들어오시고 주님께서 “너는 죄 없다.”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또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와 하나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머무실 우리 마음 안의 작은 간이역, 그런 성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큰 성전을 벽돌로 지었다고 주님께서 오지 않으십니다. 성전을 지을 때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의 성전은 벽돌로 된 커다란 건물이 아닌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 학교나 병원, 유치원이나 무료급식소 등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건물이 마치 양원역처럼 우리 내면 성전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미사를 하면 어떻고 병원에서 하면 어떻습니까? 이런 성전이 오히려 진정 내 안에 주님의 공간을 마련하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전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 안에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이웃사랑을 실천하려는 마음으로 지어지는 양원역과 같은 참 성전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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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라떼란 대성당 봉헌 축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라떼라노에 세운 대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다. 라떼란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사도좌 성당이다. 라떼란 성당을 들어가다 보면 라틴어로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로마와 전 세계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라는 글귀가 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 좌의 권위를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성당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성당의 봉헌 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시는 베드로 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이다.
복음: 요한 2,13-22: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과월절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더럽히는 모든 행위를 금하시고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성전의 본 의미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그분의 선물을 받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형식으로 변하고, 성전이 이익집단이 모여 이권 전쟁을 하는 곳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대로하신 것이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이다.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유다인들은 이때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때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객들이 200만 명이 되었고, 제물로 바치는 양의 숫자도 30만 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는 가축들을 성전에서 준비한 것만 바치게 하였고 성전세도 성전에서 만든 돈으로만 바치게 하여 이런 횡포가 있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보다는 자신의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그 모습을 보시고 노하셔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고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유다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8-19절). 이 말씀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성전을 볼 수 있다. l 하나는 46년에 걸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으므로 그분이 성전이시며, 아버지와 성령께서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 몸은 거룩한 성전이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이제 어떤 의미에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자녀들인 우리 자신은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다.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성전으로 항상 가꾸고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이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 성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성전임을 알았다면,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복음일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성전이 거룩할 때 우리 교회 공동체가 모두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삶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항상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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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을 정화하시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즈카르야서의 예언이 이루어진 일로 해석됩니다. “그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즈카 14,21) (메시아의 날이 되면, 하느님을 참되게 섬기는 사람들만 성전에 모일 것이고, 성전에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들은 없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모두 쫓아내신 일은 ‘그날’, 즉 ‘메시아의 날’이 시작되었다는 선포이고, 동시에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제자들의 머리에 떠오른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 말씀은 시편 69장 10절인데, 시편 69장은 의인이 겪는 고난에 대한 시편이고, 예수님의 수난에 자주 적용되는 시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보고 제자들이 시편 69장을 생각했다는 것은, 성전 정화 때문에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게 될 것을 예감했다는 뜻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서 봉헌할 때 이런 기도를 바쳤습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1열왕 8,27)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1열왕 8,30)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고, 인간은 어디에서나 하느님께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게 해 주는, 또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어떤 특별한 집을 원해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장사를 해서 사리사욕이나 채우려고 성전을 지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지만, 사실은 ‘인간들을 위해서 지은 하느님의 집’입니다. 그러니 더욱더 정성을 다 하여 성전을 ‘거룩한 집’으로 지켜야 합니다.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축복의 말씀을(1열왕 9,3-5) 하신 다음에 다음과 같은 경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은 폐허가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몹시 놀라고 휘파람을 불어 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찌하여 주님이 이 땅과 이 집을 이렇게 만들었을까?’"(1열왕 9,6-8)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돈’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꾸짖으신 일이고, 그리고 하느님의 경고를 깨우쳐 주어서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일입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8-22)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라는 말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라는 뜻입니다.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는, ‘성전 정화’를 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보라는 요구입니다.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적을 일으켜 보라는 요구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는 말씀은, 율법주의와 이기심과 탐욕에 빠져 있는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제사는(또는 종교는) 폐지하라는 ‘메시아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일종의 종교개혁 선언과도 같습니다. 성전이라는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은 중요한 일도 아니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새로운 종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서 하느님 뜻에 합당한 종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종교를 세우시겠다는 예고 말씀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는 성전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그날이 되면 사람들이 하느님, 예수님을 직접 뵙고,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기 때문에 성전이 필요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성전들은 모두 그날이 올 때까지만 사용하는 ‘임시 건물’인 셈입니다.>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다는 유대인들의 말은, 솔로몬 왕의 성전 건축 기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헤로데의 재건축 기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한 것은 하느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업적으로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성전은 대단히 아름답고 장엄한 건물이었다고 전해지는데(마르 13,1),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셨고(마르 13,2), 그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빠진 인간들이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으니(마르 11,17) 그런 건물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강도들의 소굴’도 없애야 하고, ‘강도들의 집단’도 없애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없애지 않는다면,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 직접 없애실 것이고, 그것을 없애지 않은 인간들도 함께 처벌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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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최재천 교수의 ‘생명의 기원’을 들었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솔직하게 생명의 기원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작된 생명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지금 우리가 있다고 합니다. 다윈은 진화의 과정에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4가지 이야기했습니다. ‘변이, 유전, 경쟁, 차등번식’입니다. 이 4가지 조건이 갖추어지면 진화는 이루어지고, 4가지 조건에서는 필연적으로 진화가 생긴다고 합니다. 사람이 품종개량을 통해서 진화의 과정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모든 생명은 자연이라는 터전에서 진화에 필요한 4가지 요소가 생기면 진화하였다고 합니다. 다윈의 업적 중에 2가지가 의미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우리는 모두 한 생명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든 생명은 한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아껴주고,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 역시 특별한, 선택 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 역시 모든 생명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다른 생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다음 진화의 단계까지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고, 지혜롭다는 교만과 자만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다른 생명들이 그랬던 것처럼 진화의 과정에서 더 오래 지구에 머물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는 저서 ‘황금가지’에서 종교 역시 신화와 역사의 틀에서 발전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햇빛에 물들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하듯이 인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상상력은 신뢰와 희망이 되었고, 신뢰와 희망에서 사랑이 꽃 피었습니다. 농경과 도시를 건설하면서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신화’가 생겼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자연을 동경하였고 ‘바위, 나무, 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새, 곰,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풍요, 다산, 곡식, 전쟁, 바다, 치유’의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겼습니다. 그리고 ‘현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기원전 5세기에 무렵에 동양과 서양에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지는 ‘깨달음, 자비, 사랑’의 종교가 등장했습니다. 힌두교, 불교, 유대교, 유교는 거의 같은 시기에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빛을 드러냈습니다. 생명이 ‘변이, 유전, 경쟁, 차등번식’의 필요 중분 조건에 따라서 진화하였듯이, 종교도 인류의 역사에서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입니다. 이탈리아 로마에는 4개의 대성전이 있습니다. ‘성 마리아 대성전, 바오로 대성전, 베드로 대성전, 오늘 축일을 지내는 라테라노 대성전’입니다. 저는 이탈리아 로마로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술적인 가치와 교회사적인 의미가 있는 4곳의 대성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새로 세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이란 건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로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를 의미 할 것입니다. 성전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주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구원의 방주인 성전은 기본적으로 4가지의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성당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당은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성당은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곳,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이 감사의 기도를 하는 곳이 바로 성당입니다.
셋째는 성당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기도 하지만, 미사는 형제들이 함께 모여 빵을 나누는 축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단체들이 성당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친교를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넷째 성당은 섬기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당에 오는 사람들은 늘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전, 기도하는 성전, 친교를 나누는 성전, 서로 섬기는 성전은 어느 곳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성전도 바로 그런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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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배광하 치리아코 신부님]
<사랑·기도로 지은 하느님의 집>
(육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에 대한 수식어는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 ‘로마의 4대 성전의 하나’, ‘모든 교황님들의 착좌식이 있었던 성전’ 등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300년의 긴 세월 동안 계속 되었던 로마 제국의 박해가 끝나고 세워진 성전이라는 의미는 감격 그 자체입니다. 끔찍하고도 잔인했던 로마 제국의 박해는 서기 313년 밀라노 관용령에 의해 끝나게 됩니다.
종교의 자유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것도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280?~337)가 교황 ‘성 멜키아데스’(310~314년 재임)에게 자신의 라테라노 궁전을 선물로 주며 함께 성전까지 지어 주었다고 생각하면 감개무량합니다.
이 같은 성전이 324년 ‘실베스테르 1세’(314~335년 재임) 교황에 의해 봉헌되었을 때, 그 현장에 있던 수많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313년 밀라노 관용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찾아온 지 불과 11년 만의 환희였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역사가 우리 한국 땅에도 있었습니다. 1784년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이래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년의 세월 동안 길고 모진 박해 끝에 한국천주교회 첫 신앙의 모태인 명동(당시 명례방)에 명동 대성전이 봉헌된 것입니다. 1898년 명동 대성전이 봉헌되었으니, 신앙의 자유를 찾고 12년 만의 환희였던 것입니다. 전국의 모든 신자들이 힘을 모아 건립한 대성전이 봉헌되었을 때, 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까 생각해 봅니다.
따지고 보면 라테라노 대성전이나, 명동 대성전만 그러한 감격을 누렸겠습니까. 전 세계의 무수히 많은 성전들이 모두 그 같은 기쁨과 감격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통하여 옛날 에제키엘 예언자의 예언대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뀔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허물라 하십니다. 그것은 성전이 처음 세워졌을 때의 마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처음 건립할 때에는 마음가짐이 분명 달랐습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성전 건립 기도> 중에는 이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온갖 욕심과 오만으로 가득 차 주님의 뜻을 소홀히 했나이다.”
처음 성전을 건립할 때엔 욕심과 오만이 없었습니다. 이는 영의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건립 후에는 다툼과 오만, 분열과 욕망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육의 성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허물라 하신 것입니다.
(영의 성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꾼들을 보시며 불같이 역정을 내시고 성전을 허물라 하셨을 당시 유다인과 제자들은 그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아가 허물어진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 하셨을 때는 더더욱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 하셨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예수님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자주 우리에게 육의 성전이 아닌 영의 성전, 마음의 성전을 강조합니다. 이를 사도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 16)
우리말에 ‘더럽다’라는 말은 ‘덜없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비워진 상태로 있어야 하는데, 무엇인가가 남아 있을 때, 그 상태가 더럽다는 뜻이 됩니다. 깨끗이 설거지를 하였는데 설거지통에 오물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우리는 더럽다고 느낍니다.
내 마음 안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미련과 욕망의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그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마음 역시 더러운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마음 안에 영의 성전, 하느님의 성전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시 성전 건립 기도 안에서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칩니다.
“저희가 힘을 모아 주님을 예배할 새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주님의 뜻을 이룩하여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고자 하오니 저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소서.”
라테라노 대성전은 분명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이며, 그리스도교의 으뜸 성전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전은 소중하고 귀한 하느님의 집입니다.
성전 건립 때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 같은 성전이 건립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나눔과 눈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그 고귀한 성전에 걸맞는 영의 성전을 세워야 합니다. 탐욕과 착취의 장사꾼집이 아닌, 하느님 사랑과 그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생명의 영혼들이 모이는 거룩한 집이 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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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별지기 신부의 복음 묵상#
예수님은 화가나신 모습으로 성전 앞을 차지하고 있던 모든 것을 쓸어버리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곧 성전의 주인이시니 당신의 말씀이 틀릴리 없지만 이런 성전의 모습에 사람들의 생각이 꼭 같을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장사’라고 표현된 것들은 모두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에 필요한 것들이었으니 말입니다. 먼거리를 걸어와야 하는 이들은 아무리 정성을 다 쏟아도 온전한 제물을 바치기 어려웠을테고 훌륭한 것을 사서 제단에 드리는 것이 훨씬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는 것은 지극히 지혜로운 판단이었을 겁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성전에 모여 있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서 성전앞에 있었던 이 사건은 유다인들에게도 큰 일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당장 성전에 드릴 제물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그로인해 생긴 불충을 어떻게 기워갚아야 할지 막막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성전 앞의 장사로 인해 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은 성전 밖에도, 또 성전에 일하는 이들에게도 같은 영향을 끼쳤을테니 예수님의 ‘열정’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큰 사고를 치신 셈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이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불만을 넘는 불안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성전은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 이스라엘 전체가 정성을 기울인 건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머무신다는 것을 아는 그들이었기에 해마다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이미 하느님이 멀리 계심을 알게 합니다. 그들은 성전을 찾고 정해진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올렸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고, 하느님은 오히려 그들의 제물에서 고개를 돌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부활은 그런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좋은 제물이 아닌 당신을 알고 당신 뜻을 살아가는 사랑의 삶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이 참 성전의 의미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참된 성전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성전에 가장 좋은 제물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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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 성전으로 교회에서 가장 역사 깊은 성전이다. 이 성전은 320년경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건립하여 교회에 기증하였으며, 324년에 그리스도께 봉헌되어 그리스도교의 으뜸 성전이 되었다.
1843년 이후 교회 예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교황성하께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이 성전에서 집전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시는 듯하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예수님께서 폭력을 휘두르실 정도이므로 예수님의 진노가 어느 정도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복음 안에 예수님께서 폭력을 행사하시는 대목은 이 대목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진노하신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그만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성전은 곧 하느님을 보여주는 하느님의 집이다. 성전을 순례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하며,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장사꾼들이나 환전상은 순례자들을 부당하게 속이거나 폭리를 취함으로써 하느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도둑과 강도, 사기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순례자들에게 하느님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켰다. 그래서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소중하게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토록 진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성전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성전을 가꾸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이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성체가 모셔진 성전이 사람들에게 주님을 만나는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 말씀하셨다(21절).
사도 바오로도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3,16-17)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임을 분명히 했다.
더욱이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1코린 6,19-20)라고 말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서 주님의 값진 피로 사신 것이다. 당신의 성전으로 쓰시기 위해 사신 것이다. 하느님의 성전에는 하느님만이 어울리며, 하느님만을 모셔야 한다.
하느님의 성전에 그 어떤 우상도 모실 수 없고 모셔서도 안 된다. “하느님의 성전에 우상이 어떻게 어울리겠는가!”(2코린 6,16)
오늘 성전은 하느님을 보여주고 만나는 하느님의 집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성전이 하느님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줌으로써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성전이 되도록 하자.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서 사신 하느님의 성전임을 생각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자. 재물, 지식, 힘 이외에 그 어떤 우상도 내 안에 둘 수 없음을 생각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모시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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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윤지종 미카엘 신부님]
<우리 자신이 거룩한 집이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인 로마에 있는 4대 대성당중의 하나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세워 봉헌한 것으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2년이나 먼저 세워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입니다.
이렇게 의미깊은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맞아 오늘 복음 말씀은 그 유명한 성전 정화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매년 과월절이 되면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과월절 축제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든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비둘기나 양, 황소나 암소와 같은 동물들과 이들을 파는 상인들도 함께 성전에 몰려들었습니다.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성전에 희생제물을 바쳐야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주위는 이러한 희생동물들을 파는 장사꾼들로 북적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제물용 동물을 사려면 돈을 바꾸어야 했기 때문에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까지도 들끓었습니다. 언젠가부터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기 위한 성전이 완전히 시장터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을 돈벌이 하는 장터로 전락시킨 데에는 성전을 관리하는 종교지도자들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 안에서 여러 가지 상거래를 묵인하거나 허용함으로써, 많은 이익들을 챙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광경을 보시고 굉장히 분노하십니다. 상인들을 내쫓으시며,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울화통을 터뜨리십니다.
예수님은 그토록 성전을 사랑하셨고 아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 머무시는 자리이자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끼고 사랑하셨던 성전은 단순히 하느님께 기도하고 예배드리라고 만들어 놓은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건물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들어가는 성당 건물만이 성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더 소중히 여기시고 더 사랑하신 성전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그 어떤 아름다운 성전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들 안에 머무르시고, 하느님과의 만남 역시 그 어떤 장소보다도 먼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우리들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는 거룩한 집, 곧 성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집이고, 성전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성전, 당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주시면서 지켜내신 성전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거룩한 집답게 단장을 하고 기도하는 집인 성전답게 지켜나가고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인 여러분 안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혹 장사꾼 같은 모습이나 강도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입을 함부로 놀려 남을 험담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도 서슴없이 해대고, 자기 욕심 채우기에 급급해 하고 있는 장사꾼 같은 모습이 여러분 안에서 설쳐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그만 일에도 쉽게 화내고 불평해대며, 폭언을 일삼고, 남을 못살게 구는 강도 같은 모습이 하느님의 성전인 여러분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설쳐대고 있는 장사꾼들을 있는 힘을 다해 몰아내십시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머무르는 성전인 여러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강도들을 채찍을 들어서라도 내쫓아버리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죽을 각오를 하고, 여러분 안에서 설쳐대는 온갖 잡상인들과 싸우십시오.
하느님의 성전인 여러분을 강도들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경계를 단단히 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이 보시고 분노하시고 울화통을 터뜨리는 그런 성전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사랑스럽고 흡족한 아름다운 성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은 성전다워야 합니다. 시장터나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안에 남아있는 잡상인들과 강도들을 하루빨리 몰아내십시오. 그리하여,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이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성전의 모습을 되찾으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진정으로 주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사랑스러운 성전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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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성령의 성전인 나의 몸!>
오늘은 서기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사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전이 봉헌(1626년)되기 이전,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정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기도의 집인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더럽혀진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대단히 분노하십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요한2,15)
그러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요한2,18)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두고 하신 이 말씀, 당신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을 두고 하신 이 말씀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십니다. 단순한 건축물만이 성전이 아니라, 우리의 몸도 성전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음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신 것을 다시금 확인시킵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6,19)
하느님의 성전인 나의 몸, 더럽혀진 나의 몸을 정화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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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전에서>
요한 2,13-22 (성전을 정화하시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성전에서>
모든 곳에 계시기에
아무 데에도 계시지 않는 듯
느낄 수 있는 무딘 사람들이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느끼고
당신과 함께 하도록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몸소 지으신 집
성전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과 함께 한다네
하느님의 힘과 이끄심으로
믿는 사람들이 정성껏 지어
하느님께 봉헌한 집
성전에서만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하느님만이 전부라는
하느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겸손하고 진솔한 신앙고백이
어찌 참일 수 있겠는가
온 마음과 온 몸 다해
성전 안에 머물면서도
온 마음과 온 몸 다해
성전 밖으로 향하여
특별한 때와 곳만이 아니라
모든 때와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과 함께 해야 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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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는 신부가 되고 나서 수영을 배웠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배우는 수영이기에 쑥스러움이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실력이 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발차기를 해도 앞으로 가지 않고, 또 왜 이렇게 물을 많이 먹게 되는지…. 그럼에도 수영 강사에게 묻지 못했습니다.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저 열심히만 하면 잘할 줄 알았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새로 왔습니다. 저 못지않은 초보였습니다. 그런데 강사에게 계속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강사는 아주 친절하게 또 쉽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저와 몇몇은 강사가 여자 수강생만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요.
계속 강사에게 물어보던 이 자매님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늘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 만에 중급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중급반에 가서도 그곳 강사에게 계속해서 수영에 관해 물어보는 것입니다. 실력의 차이는 ‘혼자’와 ‘함께’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늘 주변과 소통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실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혼자서 높은 경지의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특히 주님과 또 이웃과 함께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세속을 내쫓는 성전정화의 행동과 유대인 지도층과의 논쟁을 볼 수 있습니다. 파스카 축제에 맞춰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듭니다.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치니, 사람의 수만큼 동물이 성전 주위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동물시장처럼 북적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성전은 완전히 시장터로 변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제물용 동물을 사려면 돈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환전상들 또한 들끓었습니다. 종교적인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에 성전은 재건 중이었기에, 공사판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모습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탁자를 엎어 버리는 폭력 행위를 하십니다.
이 모습이 유다인들과의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잘못된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또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또 자기의 편함을 위해 올바른 것을 잘못된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며 올바르게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주님의 뜻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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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은 성격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자기 성격이 이렇게 되었다면서 과거 사건을 일으킨 대상에 대한 적의를 표현하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 사건의 트라우마로 좋은 성격을 세상에 보이지 못하고 그래서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격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것일까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자신의 성격으로 이런 업적을 세운 것일까요? 자신의 성격에 근거해 판단해서 결정했고, 이를 위해 노력해서 위대함을 드러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은 분명히 성격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확고한 목적 의식이 없다면 어떤 성취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성격으로 성취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연연하며 성격 탓을 하기보다 나의 목적으로 다시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어렵고 힘든 일로 지금의 어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목적을 바라보면서 지금 어떻게 살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미래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를 향한 내 삶의 목적은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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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23) 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으로 속됨을 정화해야 하고 우리의 거룩함이 세상의 속됨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된 곳이 있다면 놀랄 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을 정돈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 하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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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명의 강, 은총의 강>
-성전 정화; 마지막 보루인 교회-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시편84,2-3)“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 교회(Deus Pater, Mater Ecclesia)”, 제대로 된 아버지가, 어머니가 없는 작금의 세상에 참 따뜻하게 느껴지는 인상적인 말마디입니다. 바로 지난 10월28일 오후 7시(로마 현지시각 낮 12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의 사목 표어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참으로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와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어머니 교회를 모시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은 천복天福의 사람들입니다. 만추晩秋의 요즘 역시 이런 하느님 아버지와 어머니 교회를 느끼는 수도원 분위기입니다. 마침 어제 써놨던 짧은 ‘노년의 향기’란 시도 생각납니다.
-“참/편안하고/넉넉한/초연하고 담백한
가을/낙엽의 향기/노년의 향기”-
참 편안하고 넉넉한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 교회 같은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삶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같은 장엄한 아름다움의 불암산을 배경한 어머니 교회같은 수도원입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마음을 다잡아 온 이 말마디 또한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간절한 소망은 예수님처럼 이런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애와 어머니 교회의 모성애를 닮았으면 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수도원의 청원자 형제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수사님은 휴가 가지 않습니까?”
“갈데가 없습니다. 휴가 다녀온지 수십년은 된 듯합니다.”
“수사님은 수도원이 집이 되었네요.”
“그렇습니다. 주님 계신 주님의 집 수도원 여기가 바로 제 고향집입니다.”
새삼 33년 동안 정주한, 늘 편안하고 따뜻하고 넉넉한 여기 수도원 성전이 제 참 고향집임을 깨닫습니다. 사찰寺刹의 두 빛나는 보물같은 자산은 노승과 노목이란 말을 잊지 못합니다. 제가 절이나 수도원에 가면 우선 확인하는 것이 셋이니 절이나 수도원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노승老僧과 노목老木과 오래된 건물입니다. 노승老僧이자 고승高僧이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참으로 이런 셋을 갖춘 절이나 수도원이라면 저절로 경배敬拜, 감복感服하는 마음이 됩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대성전입니다. 바로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무려 1700년 역사의 건물입니다. 이런 건물은 그대로 역사 교과서요 보고 배우는 바도 참으로 클 것입니다.
이 라테라노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년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널리 알리고자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미사를 드립니다.
노목과 노승이 절이나 수도원 역사를 반영하듯 이런 건물 역시 장구한 역사를 반영하며 최고의 역사 교과서가 되어 줍니다. 계속 부수고 짓는 짧은 역사의 신축 건물들뿐이라, 전통의 깊이와 뿌리를 상실한 현대인들의 날로 천박淺薄해지는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도대체 보고 배울 노목이나 노승, 오래된 건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노인들은 많아도 대부분 요양원에서 치매로 무거운 짐이 된 분들이 대부분이고 참으로 존경과 신뢰의 어른들은 절대 부족한 현실입니다.
요셉 수도원은 설립후 34년이 지난 젊은 수도원이지만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서서히 벌써 노령화 되는 느낌이 듭니다. 33년 동안 정주해 오면서 불암산과 수도원은 그대로 인데 주변 가까이에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는지 모릅니다. 오늘이 특히 감회가 깊은 것은 코로나로 인해 1년 훨씬 지난후 처음으로 코이노니아 자매회가 피정 모임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6년 역사의 자매회이지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병고로 많이 노쇠해진 여러 자매들의 모습도 목격합니다.
요즘 많이 생각나는 것이 불교의 폐사지廢寺址들이나 시골의 빈집들, 그리고 옛 초등학교 빈 건물들입니다. 혹자는 ‘폐허의 미학’을 이야기 하지만 저는 참 비애감과 쓸쓸함에 가슴 시림을 느낍니다. 자꾸 눈길이 가는 예전 스님들이 많았을 폐사지들과 사람들이 정답게 살았던 시골집들, 학생들로 붐볐던 열기를 뿜던 초등학교 건물들 분위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한창 때는 80여명 미국 수도자들이 살았던, 그러나 지금은 한국 왜관 수도자들이 파견되어 살고 있는 미국 뉴저지주의 뉴튼수도원의 옛 건물과 거기 머물 때 매일 찾았던 숱한 수도자들이 묻힌 수도원 묘지를 보면서 마음 아릿했던 슬픔과 아픔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람이 보물이자 희망입니다. 희망의 보물인 사람입니다. 때론 낡은 빈집이나 수도원, 절간 같은 곳에서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는 얼마나 반갑고 고맙고, 기쁘고 신기하게 생각되던지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건물도 급속히 무너져 죽어갑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 살아 있는 집들입니다. 아무리 자연환경이 좋고 건물이 좋고 전통이 좋아도 그 안에 살아 있는 보물, 수행승 수도자들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여기에 요셉 수도원에 수도자들이 없다 생각해 보시면 금방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세상의 마지막 보루인 교회가, 세상을 끊임없이 성화시켜야 할 교회가 세상에 속화된다면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열화와 같은 의노가 이해가 됩니다.
-“이것들을 치워라. 네 아버지의 집을 장사라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말씀을 생각했다.-
성전정화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입니다. 성전정화는 3차원에 걸쳐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교회 성전 건물 분위기의 정화와 더불어 교회 공동체 성전, 그리고 각자 몸의 성전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 성전의 정화입니다.
보십시오. 믿음의 한 몸 공동체가 빠지면 껍데기 교회 건물은 참 무의미한 죽은 건물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형제들이 끊임없이 날마다 찬미와 감사의 시편기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기에 비로소 동시에 정화되고 성화되어 살아나는 건물 성전, 공동체 성전, 개인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사흘만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바로 진짜 성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그리스도의 한 몸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미사를 봉헌하고 미사가 교회 공동체를 만듭니다. 성체성사 미사를 통해 양육 성장 성숙되는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 성전입니다. 미사중 아름다운 감사송이 참 은혜롭게 이 진리를 요약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집에 자비로이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나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이 집으로 교회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가 나날이 거룩해져, 무수한 자녀들과 함께 기뻐하며,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나이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 말씀은 그대로 성전 미사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성전 미사의 강물같은 은총이 세상 바다에 끊임없이 흘러가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보루같은 성전에서 끊임없이 샘솟아 세상으로 흘러가는 강물같은 은총입니다.
“주님의 집에서 샘솟는 이 물은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말그대로 생명의 강, 은총의 강을 상징하는 미사은총입니다. 다음 장면 역시 미사은총으로 인한 낙원의 현실을 환상적으로 눈에 보이듯 표현합니다.
“이 생명의 강, 은총의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성전인 우리를 정화, 성화시켜 주시며, 말씀의 양식과 성체의 약으로 우리를 건강케 하시어, 우리 모두 당신 생명의 강, 은총의 강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여, 당신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
실로 당신의 궐내라며느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들의 장막 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이니이다.”(시편84,5.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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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 주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고파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쫓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제물로 바칠 짐승이나 돈을 성전 안에서 고르고 또 바꾸다 보니 장사치들의 존재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신 겁니다.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집은 외적으로 성전 건물을 가리키지만, 내적으로는 아버지께서 머무르시며 당신 백성과 통교를 나누시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외적인 예식과 제물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과 인간이 나누는 사랑의 침묵과 머무름도 간과할 수 없는 본질이지요. 아버지께 제물을 들이대기 전에 먼저 고요히 존재 대 존재로 마주하는 것이 우선일 겁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성전이라 일컬으십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실 당신의 앞날을 이 말씀으로 계시하신 겁니다. 아버지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환시로 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에제 47,9.12)
예언자는 천사에게 외적으로 이끌려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흐르는 장면을 봅니다. 그 물이 강으로 흘러가면서 온갖 생물을 살리고, 바다로 흘러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납니다. 이 물이 지닌 힘은 그 원천인 성전의 생명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물과 피를 쏟으신 장면이 떠오릅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교회에 생명을 주는 성사입니다. 이 은총은 흘러가 닿는 곳마다 살리고 되살리며 거듭 생명을 줍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와 세상에 보내어진 물이 아닐까 관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사랑을 가득 채워 우리를 세상으로 흘려보내시니까요. 주님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아직도 죽음의 그늘 밑을 걷고 있는 이 세상에 은총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세상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물을 흘려보내는 또 다른 성전이기도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성전 중의 성전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며 또다른 성전인 우리 존재가 예수님의 바람과 기대에 맞게 잘 정돈되고 질서와 조화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으로 세상 안에서 조용히 주님의 생명을 퍼뜨리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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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ML103uE4k5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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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 21)
현실과
사실 사이에
성전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의
중심이시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이 있다.
물질이 아니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중심이다.
인생을 바치는
봉헌이 있다.
물질의 세속화를
아프게
반성한다.
세속이 신앙을
이길 수 없다.
신앙은 삶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한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우리
신앙공동체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몸이신 성전은
비뚤어진 가치를
바로잡아 준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된다.
가난한
이웃들의
피와 땀을
짜서 얻어낸
성전이 아니다.
우리의 성전은
사람들의
불안을
대가로 하여
지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희생으로 세워진
성전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극한 사랑의
몸이 바로
성전이다.
희생과 기도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를
나누는 참된
성전이길
기도한다.
탄생과 생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인격이 성전이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어떠한지를
보게 된다.
사랑과 헌신의
삶이 빠져버린
성전은 박제화된
기념관처럼
을씨년스럽다.
예수님의 삶이
예수님의
성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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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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