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보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간행위원회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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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모든 지식인들과 대학가 노동계 그리고 외국에서 5.18광주민중항쟁의 참상과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단박에 깨치게 해준 불멸의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 넘어)가 새단장 채비에 들어갔다.
광주지역 민족민주인사들과 전국적인 재야인사 그리고 당시 <넘어 넘어> 출판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활동가들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증보판 간행위원회(위원장 정상용)'를 지난 8일 발족하고 국민 간행위원과 후원금 모금을 시작했다. (아래 자료 참조 전문)
간행위원으로는 황석영, 박석무, 정상용, 원혜영, 정용화, 전계량, 김상윤, 이 강, 장하성, 이부영, 유인태, 황주홍, 최 협, 이재의, 송선태, 전용호, 조봉훈, 조양훈, 김상집, 김영준, 김원욱, 김창중, 나간채, 문승훈, 안종철, 양철호, 은우근, 이종범, 강기정, 이학영, 임상택, 임영상, 정의행, 임철규, 노영숙, 조일근, 최평지, 유양식, 이영송, 윤만식, 정철웅, 고현석, 김희택, 박재성, 윤태원, 임 형, 김삼용, 조선호, 양강섭, 박동기, 김 성, 이철우, 이윤정, 박형선, 장휘국, 박영상 (진도), 금호타이어노조 광주지회, (서울)문국주, 소준섭, 안길정, 박몽구, 박형중, 한상석, 최양근, 문환구(변리사), (전북)이상호, 이상보, 박영식, (대전)양원식, (부산)이승정, (충북)김창규 등이 참여했다.
또 해외인사로는 (미국)설갑수(영문판 “너머너머” 공동편집/기획자, 저널리스트), Nick Mamatas(닉 마마타스, 영문판 “너머너머” 공동편집/기획자, VIZ Media 편집자), Tim Shorrock (팀 샤록, 저널리스트),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역사 교수), 조지 카피아치카스(교수, 신좌파의 상상력 저자). Doug Henwood (더그 헨우드, 정치경제평론가). Matt Rothschild(매트 로스차일드, The Progressive 편집자). Jane Slaughter (제인 슬로터, Labor Notes 전 편집자). Namhee Lee(이남희, UCLA 동아시아 역사 교수), Marina Sitrin(마리나 시트린), Aaron Brenner (애론 브레너) (호주) Dario Azzellini(다리오 아젤리니, 영화감독) (일본)최동술
씨 등이 동참했다.
넘어넘어 간행위는 8일 오전 광주광역시의회 브리핑룸에서 열린 발족 기자회견에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열흘간 진행되었던 5.18민중항쟁은 한반도 민주화운동의 빛나는 금자탑"이라며 "10일간의 처절한 기록을 온 국민에게 낱낱이 알려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당시의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채록하기 시작했다"고 당시 역사적 기록을 되짚었다.
당시 5.18에 대한 채록은 전두환 군부독재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진행하다가 항쟁 발발 5년 후에야 책으로 세상에 알린 것이 바로 <넘어 넘어>였다.
증보판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985년 5월 20일 드디어 광주민중항쟁 10일간의 상황을 최초로 종합적이자 체계적으로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넘어’로 약칭)가 출간되었다"면서 "책이 출간되자마자 기록자로 이름을 올린 황석영 작가가 연행되고 풀빛출판사 나병식 대표는 구속되었다"고 당시의 엄혹한 시대상황을 증언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증보판 간행위원회를 발족하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열흘간 진행되었던 5.18민중항쟁은 한반도 민주화운동의 빛나는 금자탑이다.
전두환 군부독재세력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결국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 국민 항복 선언과 함께 권좌에서 물러났다. 전두환 정권과 끈질기게 광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투쟁을 이어온 5월 항쟁의 씨앗이 6월 국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6월 항쟁은 대통령직선제를 관철해냄으로써 한반도 민주주의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두환 신군부가 이끄는 계엄군의 총칼에 시민군 본부였던 전남 도청이 함락되면서 10일간의 치열했던 항쟁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끝났다. 5월항쟁이 끝난 후 민주주의 운동가들은 항쟁기간 벌어졌던 학살과 살인적인 폭력의 전모를 온 국민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학살의 가해자인 전두환이 권좌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항쟁의 실상은 어둠에 가려진 채 드러나지 못했다. 항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는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혀야 했다. 군부독재가 장악한 정치권력에 발을 묶이고 통제된 언론에 의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벗어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학가의 청년학도들을 중심으로 5월항쟁 진상규명투쟁이 시작되었다. 인권단체와 양심적 인사들에 의해 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처절한 시도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1981년이 되어 5월항쟁으로 구속되었던 사람들이 석방되기 시작하였다. 10일간의 처절한 기록을 온 국민에게 낱낱이 알려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당시의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채록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비밀리에 해야 했기에 더디고 지난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항쟁이 발발한 지 5년이 지난 1985년 5월 20일 드디어 광주민중항쟁 10일간의 상황을 최초로 종합적이자 체계적으로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넘어’로 약칭)가 출간되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기록자로 이름을 올린 황석영 작가가 연행되고 풀빛출판사 나병식 대표는 구속되었다. 그 책은 제작하던 도중 1만권이 압수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전국의 서점에서 비밀리에 팔리면서 상당기간 지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국민들은 몰래 ‘넘어넘어’를 가슴 조이며 읽고서 통탄하며 울분을 터뜨렸다. 잔혹했던 학살과 처절했던 참상의 전모를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다. 5월항쟁이 발발한 지 5년 만에 ‘넘어넘어’가 출간됨으로써 항쟁의 실상이 처음으로 전 국민 앞에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1985년 5월 ‘넘어넘어’가 국내에서 출간된 후 그해 10월 21일 일본에서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본이 출판됐다. 부제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이름을 달았는데, 번역자는 ‘광주의거추모회’, 발행소는 동경에 위치한 ‘일본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였다.
영문본은 1999년 ‘광주일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라는 제목(번역자: 설갑수, 닉 마마타스)으로 미국 UCLA대학(캘리포니아) 출판부에서 출간됐다. 온갖 난관을 뚫고 이 책은 세계인들에게 5월 항쟁의 진실을 널리 알린 것이다.
이제 1980년 5월 항쟁이 발발한 지 34년이 지났다. 그동안 관련자들의 증언에서부터 학자들의 연구서 등 많은 저서가 출간되었다. ‘넘어넘어’도 출간된 지 29년이 흘렀다. 그동안 5월 항쟁에 대한 시각도 완전히 바뀌었다. 1980년 당시는 ‘내란’으로 규정되었지만, 6월 항쟁 이후 1988년 노태우 정부 때 국회 광주청문회를 거치면서 ‘민주화운동’으로 수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항쟁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추가로 드러났다. 그러나 초판의 내용을 보완하는 증보판이 아직 나오지 못했다. 최근 새롭게 드러난 사실을 추가하여 더욱 완전한 내용으로 증보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에 초판의 자료수집과 집필, 출판 과정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 ‘넘어넘어’ 증보판 간행위원회”를 발족하게 되었다.
그동안 ‘넘어넘어’는 발간주체를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으로 밝혀왔다. 1985년 ‘넘어넘어’가 출간되었을 당시는 5월 항쟁의 가해자인 전두환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필 경위를 소상하게 밝힐 수가 없었다. 자료 수집자와 초고 집필자, 집필 비용 제공자 등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여러 후원자들을 숨기고 비밀에 붙인 채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기록자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오해와 억측이 뒤따랐다. 편찬 주체로 명기된 ‘전남사회운동협의회’는 당시 광주전남지역 민주민중운동단체의 대표적인 협의체였기 때문에 당연했다.
기록자로 알려진 황석영 작가는 이 책 출판 당시 어려웠던 시기 자료수집과 집필 등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이 역할을 자임했었다. 그 동안 그에게 쏟아진 억측과 비난은 대부분 당시 엄중했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우리사회 보수화의 흐름을 등에 업고 일부에서 5월 항쟁의 북한사주설, 항쟁 참여자 비하 등 5.18정신을 훼손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려는 반민주적인 행위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5월 항쟁의 진상을 최초로 밝힌 ‘넘어넘어’에 대하여 악의적이고도 황당하게 조작된 논리로 북한 연계설을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다.
이는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5월 항쟁의 정통성을 흠집 내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우리는 5월 항쟁으로 표출된 광주시민의 민주화 의지와 폭력적인 군부 쿠데타 세력에 맞선 헌신적인 항쟁을 폄하하기 위해 북한 연계설을 지속적으로 유포하고 있는 이들이 이제라도 사실과 진실에 눈을 돌리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이번 “‘넘어넘어’ 증보판 간행위원회”의 발족을 계기로 초판 제작 당시 자료수집과 집필, 출판 과정 등을 국민들 앞에 소상하게 밝히고자 한다. ‘넘어넘어’의 제작경위나 내용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음해함으로써 5월 정신을 훼손하려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나갈 것이다.
이 책의 제작과정 자체가 목숨을 건 5월 진상규명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5월 항쟁의 순수성을 국민 앞에 다시 한 번 상기함으로써 퇴색해가는 시대정신을 가다듬고자 한다.
본 위원회는 ‘넘어넘어’ 출간 30주년을 맞는 2015년 5월까지 증보판을 간행할 계획이다. 이 작업이 관심 있는 국민들의 참여 속에서 함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울러 5월 항쟁의 정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영어본 등 외국어 번역본을 출간해나갈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5월 정신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뜻있는 개인들의 헌신과 희생에 의해 일어판과 영어판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최근 출판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영어판 2쇄 출간이 정지돼 있는 안타까운 상태다. 본 위원회는 ‘넘어넘어’ 영어본 재출간도 동시에 추진해나갈 것임을 밝힌다.
2014년 7월 8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증보판 간행위원회
위원장 정상용
황석영, 박석무, 정상용, 원혜영, 정용화, 전계량, 김상윤, 이 강, 장하성, 이부영, 유인태, 황주홍, 최 협, 이재의, 송선태, 전용호, 조봉훈, 조양훈, 김상집, 김영준, 김원욱, 김창중, 나간채, 문승훈, 안종철, 양철호, 은우근, 이종범, 강기정, 이학영, 임상택, 임영상, 정의행, 임철규, 노영숙, 조일근, 최평지, 유양식, 이영송, 윤만식,
정철웅, 고현석, 김희택, 박재성, 윤태원, 임 형, 김삼용, 조선호, 양강섭, 박동기, 김 성, 이철우, 이윤정, 박형선, 장휘국, 박영상 (진도), 금호타이어노조 광주지회, (서울)문국주, 소준섭, 안길정, 박몽구, 박형중, 한상석, 최양근, 문환구(변리사), (전북)이상호, 이상보, 박영식, (대전)양원식, (부산)이승정, (충북)김창규,
(미국)설갑수(영문판 “너머너머” 공동편집/기획자, 저널리스트), Nick Mamatas(닉 마마타스, 영문판 “너머너머” 공동편집/기획자, VIZ Media 편집자), Tim Shorrock (팀 샤록, 저널리스트),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역사 교수), 조지 카피아치카스(교수, 신좌파의 상상력 저자). Doug Henwood (더그 헨우드, 정치경제평론가). Matt Rothschild(매트 로스차일드, The Progressive 편집자). Jane Slaughter (제인 슬로터, Labor Notes 전 편집자). Namhee Lee(이남희, UCLA 동아시아 역사 교수), Marina Sitrin(마리나 시트린), Aaron Brenner (애론 브레너) (호주) Dario Azzellini(다리오 아젤리니, 영화감독) (일본)최동술
(순서 없음)* 간행위원 모집은 계속됩니다.
※ 문의 : 간행위원장 정상용 010-9304-6290
간사 전용호 010-3459-1951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처장 박시영 010-9579-1115
* 미국의 참여 인사 설명
Tim Shorrock (팀 샤록). 미국 독립 저널리스트, 광주항쟁 당시 미국무성 내의 태스크포스와 주미대사관 사이의 통신문건인 체로키파일을 1994년에 입수, 공개. http://timshorrock.com/ 최근 미정보기관의 민간외주 상황을 추적한 Spies for Hire로 주목받음. 영어판 “넘어넘어”의 기고문. 팀 샤록의 연대 메시지:
“As one of the contributors to Kwangju Diary, I would love to see an expanded version of the book published. It tells the important story of the Kwangju Insurrection of 1980 from the point of view of those directly involved. This story -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60 year-old US-South Korean military alliance and South Korea's democratic revolution - has largely been hidden from public view. But it stands out as one of the seminal events in modern Korean history and the Cold War in Asia. I heartily endorse the campaign to get the book in print and before the global public.”
Nick Mamatas (닉 마마타스) VIZ Media, 편집자 영문판 “너머너머” 공동편집/기획자. 그의 메세지:
“About 15 years ago I was thrilled and honored to be part in bringing Kwangju Diary to the English-speaking world. I hope we can bring the book back to the world soon to remember the sacrifices of the people of Kwangju for democracy and freedom.”
Doug Henwood (더그 헨우드) 미국의 유명 정치경제 평론가. Walll Street (Verso: 1999 한국판 “월스트리트는 누구를 위해 어떻게 움직이나” 사계절)의 저자. 헨우드의 연대메시지.
"I applaud the efforts of activists to raise the money to reprint 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 the story of a crucial moment in South Korea's democratization struggle that is now the subject of right-wing slurs."
Matt Rothschild (매트 로츠차일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발행부수 높은 진보월간지 The Progressive의 총편집자. http://www.progressive.org/ 그의 연대 메시지:
“The Kwangju Diary is a crucial historical document, and a vital snapshot of people rising up to resist oppression.”
Jane Slaughter (제인 슬로터) 미국 평노조원 잡지 Labor Notes의 전 편집자 (금년 6월 은퇴) 그녀의 메시지:
“Best wishes to Kwangju activists as they rescue this important piece of Korean history. We learn from our history and must now allow anyone to bury it.”
Namhee Lee (이남희) UCLA 동아시아 역사교수. 연대 메시지:
“I strongly support the publication of expanded English and Korean versions of 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
Dario Azzellini (다리오 아젤리니) Research Associate, Department of Political and Development Studies at the Institute of Sociology at the Johannes Kepler University of Linz (Austria), author and documentary filmmaker. http://www.azzellini.net/english 아젤리니의 다큐멘터리<5개 공장>(5-Factories : Workers Control in Venezuela) 2006년서울국제노동영화제에서 상영.
Marina Sitrin (마리나 시트린) http://marinasitrin.com/ Visiting Scholar at the Center for Place Culture and Politics at the CUNY Graduate Center, New York. Occupy Wall Street운동의 리더. “점령하라” (북돋음 2012)의 기고자.
Aaron Brenner (애론 브레너) co-editor, Rebel Rank & File:Labor Militancy and Revolt from Below During the Long 1970s and The Encyclopedia of Strikes in American History
<참고자료 - 기자회견용>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제작 경위를 밝힌다
1. 제작경위를 밝히는 배경
1985년 5월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넘어’)는 5.18광주항쟁을 기록한 여러 책자 가운데 ‘최초’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고전’으로 꼽힌다. 하지만 ‘넘어넘어’의 제작과정은 지금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어 사람들 사이에 꾸준히 관심사가 되어왔다. 이 책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 그리고 험난한 우여곡절을 거쳐야 했다.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5.18정신을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도를 넘으면서 ‘넘어넘어’의 제작과정까지 문제 삼고 있다. 이 책의 ‘제작과정’에 마치 무슨 음모가 있었던 것처럼 왜곡하면서 억측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의도가 궁극적으로는 ‘넘어넘어’ 책에 담겨있는 5.18의 진실을 폄훼하려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런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이에 당시 ‘넘어넘어’ 제작 및 출판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모여 불필요한 억측을 해소하가 위하여 자료수집, 집필, 기록자 선정 과정 등을 밝히기로 하였다.
2. 자료수집과 ‘광주백서’의 탄생
1985년 5월 ‘넘어넘어’가 완성돼 책자 형태로 세상에 선보일 때까지는 몇 차례 중단될 위기를 겪고서야 가능했다. 기록을 위한 노력은 항쟁의 여진이 아직 채 가시기 전인 1980년 말부터 시작됐다. 초기 자료수집 작업은 조봉훈(전 광주시의회 의원)과 정용화(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대표) 등에 의해 본격화됐다. 이들은 진실규명을 위해 반드시 책자를 발간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다.
조봉훈은 ‘전남대교육지표사건’(1978) 등 시국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다가 1980년 11월 석방 직후 고향 광주로 돌아오자 곧바로 5.18 자료수집에 착수했다. 그해 12월 조봉훈은 1979년 성동구치소 복역 중 친하게 지냈던 후배 소준섭(국회도서관 조사관, 외국어대 78학번)을 만나 이 작업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다. 소준섭은 당시 ‘서울의 봄’(1980) 학생시위 관련 혐의로 수배 중이었다.
정용화 역시 5.18관련 혐의로 구속됐다가 조봉훈과 비슷한 시기인 1980년 10월 29일 석방되었고, 광주에 돌아오자 5.18 자료수집에 착수하였다. 정용화는 5.18 이전 故 윤한봉이 설립한 ‘현대문화연구소’에서 연구소장 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현대문화연구소는 그 무렵 김상윤이 운영하던 ‘녹두서점’과 더불어 사실상 광주지역 청년 학생 노동 재야운동 등을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5.18직후 살얼음판 같았던 광주 분위기에서 이 작업은 광주시내 신안동 조봉훈의 자취방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1980년 11월부터 1981년 7월 초까지 약 7개월간 집중적으로 자료수집이 진행됐다. 이들은 광주시내 교회나 성당의 목사, 신부는 물론 신도들, 그리고 구속자 가족들을 통해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자료수집에 협력했던 주요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계에서는 강신석(목사), 정등룡(목사), 나상기(기독교농민운동), 최철(기독청년회) 등이 도왔다. 부상자나 사망자에 대한 자료는 전홍준(내과의사), 윤장현(안과의사) 등 의료계 인사들이 가져다 주었다. 김양래(광주정의평화위원회)는 천주교쪽 자료 수집을 맡았고, 이승용(당시 전남대 총학생회 부회장)은 학생관련 자료를, 황일봉(전 광주 남구청장)은 ‘양서조합’ 독서클럽 회원들을 중심으로 자료를 모았다.
항쟁 당시 투사회보를 제작했던 들불야학 팀들은 김성섭(당시 노동자)이 중심이 돼 윤순호, 전소연, 오경민 등이 나서서 자료를 수집했다. 구속자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여성모임 송백회 회원들도 협력하였다. 복사비 등 자료수집에 필요한 돈은 조봉훈이 개인적으로 지인과 종교계를 통해 조달했다. 조봉훈은 자신의 친구이자 서울에서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간사로 일하고 있던 광주출신 문국주에게 부탁하여 복사에 필요한 돈의 일부를 충당할 수 있었다.
자료수집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1981년 3월과 4월초 5.18관련자들 상당수가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들의 참여로 수집된 자료의 정리 작업이 탄력을 받게 됐다. 항쟁 당시 투쟁의 일선에 직접 참여했던 이 사람들의 구술 증언이 큰 도움이 됐다.
故 신영일, 故 노준현, 김상집, 박몽구, 이현철, 전용호 등 10여명은 자신이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실을 조봉훈의 주선 아래 정리를 맡은 소준섭에게 증언하였다. 기록을 맡은 소준섭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 항쟁 당시 현장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한편 김상집은 5.18 기간 동안 ‘녹두서점’에서 매일 상황일지를 작성하였고, 스스로 시민군의 일원으로 YWCA 등에서도 활동을 펼쳤다. 이를 바탕으로 그 자신이 직접 5.18자료집 발간을 추진할 생각이었지만 석방 후 조봉훈․정용화 등이 이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여기에 합류하여 증언과 자료수집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때 수집된 자료는 항쟁 당시 개인들이 써놓은 목격담, 일기, 수기를 비롯해, 성명서, 병원 진료기록, 판결문, 공소장 등 재판기록, 사진까지 포함돼 있었다. 수집된 전체 자료의 분량은 대략 사과상자 6박스 정도였다. 일부 사망자나 구속자 명단도 있었고, ‘전두환 살륙작전’(김현장 집필), ‘찢어진 깃폭’(김건남 집필) 등도 포함돼 있었다.
소준섭은 수집된 자료와 증언 가운데 너무 과장됐다고 생각되거나 사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들은 배제하였다. 가급적 확인된 사실만을 기록한다는 방침이었다. 마침내 5월에 들어 소준섭은 ‘광주백서’ 정리를 완성하였다.
‘광주백서’ 초고는 200자 원고지 약 500매 분량인데 A4 복사지에다 타이핑하자 42쪽 짜리가 됐다. 주요 내용은 1. 발단(학생시위: 5월 18일), 2. 민중봉기로 발전(시민합세: 5월 19일), 3. 무장봉기로 전환(5월 21일), 4. 전남 민중봉기로(시외로 확산: 5월 21일), 5. 시내장악 및 자체 조직과정(5월 22일-26일), 6. 계엄군 무력진입(5월 27일), 그리고 맨 마지막에 부록으로 ‘찢어진 깃폭’을 발췌하여 실었다.
소준섭은 당시 입수된 자료 가운데 ‘찢어진 깃폭’은 일부가 다소 과장됐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현장 분위기를 비교적 실감나게 묘사했다고 판단해서 백서의 본문 내용과 구분되도록 별도의 부록형태로 발췌 처리하여 덧붙였다.
‘광주백서’를 정리하던 중 복막염으로 쓰러진 바 있었던 소준섭은 ‘광주백서’ 작성을 마치자 치료를 위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그간 정리해 온 광주항쟁 일지와 중요한 자료 일부를 복사해서 가지고 갔다.
1981년 7월초, 자료수집 작업은 뜻밖의 사건이 터지면서 갑작스럽게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조봉훈, 정철 등이 연루된 ‘모임 아들’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모임 아들’ 회장 정철(정의행)은 항쟁 직후인 1980년 10월부터 5.18진상규명과 민주화투쟁을 촉구하는 ‘자유언론’ 등 유인물을 계속 만들어 배포하던 중, 1980년 11월 무등교회에서 조봉훈을 만나 5월 항쟁 진상을 노트에 정리했고, 1981년 5월 10일에는 ‘광주시민의거의 진상’을 수천 매 제작하여 ‘모임 아들’ 회원들과 함께 광주시내 주택가에 몇 차례 배포했다.
정철이 기록한 ‘영원한 민주장정’이라는 제목의 노트 2권과 관련 자료들은 7월초 정철과 조봉훈 등이 정보기관에 체포되면서 압수당했다. 항쟁 1주년 궐기를 목표로 투쟁해 온 이들이 수사망에 걸려 조봉훈을 포함한 10명이 구속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자료는 미리 복사하여 감춰두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후속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김상집과 김성섭은 조봉훈이 ‘모임 아들’에 관련된 점이 우려되어 조봉훈이 체포되기 직전인 6월말 조봉훈의 자취방에 들러 자료를 복사한 다음 복사본은 다시 자취방에 두고 원본 일체를 정용화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1982년 초 ‘모임 아들’ 사건의 여진이 가라앉자 소준섭은 서울에서 지인들과 함께 항쟁기록을 알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인천 구월동 아파트단지에서 방 한 칸을 얻어 함께 기거하던 박우섭(인천 남구청장), 민종덕(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 故 이범영(전 전국민주주의연맹 의장) 등 수배자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광주백서’를 타이핑하고, 서울 중구에 있는 한 지물포에서 재단해온 종이에 등사기로 일일이 한 장씩 42쪽 팸플릿을 약 120부 인쇄했다.
이 자료가 광주에서 제작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 현지 우체국에서 원주의 이창복(재야인사) 등 20여명 앞으로 익명을 써서 등기로 발송하였다. 뒤이어 기독교인권위원회(NCC) 등 서울의 여러 민주화운동단체, 서울대 인문대 학회실 등 들키지 않으면서도 용이하게 배포될 수 있는 장소에다 한두 부 씩 놓아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손으로 쓴 ‘광주백서’ 원본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불태워버렸다. 당시 이 ‘광주백서’ 유인물은 제한된 범위였지만 비밀리에 널리 읽혔다. 항쟁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자료였기 때문이다.
3.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발간하다
1982년 12월 말 정용화가 석방되면서 중단됐던 항쟁 정리작업이 다시 점화됐다. 정용화는 1981년 7월 초 ‘모임 아들’ 사건이 발각되자, 그동안 수집했던 사과상자 6박스 분량의 자료를 고교 선배 박영규(당시 광주지방 국세청 근무)의 집에 맡겨 두었다. 위험한 일인 줄 뻔히 알았지만 박영규는 군말 없이 후배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 후 정용화는 ‘윤한봉 밀항’(1981)과 ‘모임 아들’ 사건 연루혐의로 1년반 정도 수배망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던 끝에 1982년 12월말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정용화는 출소하자 곧 박영규가 보관하고 있던 자료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출판을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82년 12월 25일까지 정상용(전 국회의원) 등 5.18항쟁 관련자들도 모두 석방된 상태였다.
1984년 11월 18일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이하 ‘전청협’)가 출범했다. 초대 의장에 정상용, 부의장은 정용화가 맡는다. 정상용과 정용화는 ‘5.18진상규명’을 전청협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삼았다. 보관해 온 5.18자료를 바탕으로 새롭게 정리하여 극비리에 출판 작업을 추진키로 했다. 1984년 10월 초 정상용은 이재의를 만나 이 비밀작업을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 전남대 경제학과 3학년 복적생이었던 이재의가 이 작업을 하는데 적임자로 꼽힌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5.18직후 ‘김대중최후진술 유인물배포사건’으로 구속 수감돼 10개월 간 옥고를 치른 뒤 다른 사건에 더 이상 연루되지 않았다는 점, 둘째, 5.18기간 중 광주시내에 머물면서 계엄군의 학살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점이다.
특히 5월 21일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하자 곧바로 도청 상황실에 들어가 5월 23일까지 활동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폭 넓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
셋째, 5.18관련자들과 수감생활을 함께 했기 때문에 취재가 용이하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한번 실패를 경험했던 터라 처음부터 정상용, 정용화, 이재의 3인이 중심이 돼 극비리에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집필에 따른 전반적인 사항은 일체를 이재의가 책임지고 수행하기로 하였다. 작업할 실무팀 및 내용 구성, 집필 방향 등을 모두 일임했다. 다만 복사비나 취재에 소요되는 비용 등 작업에 필요한 돈은 정용화가 지원키로 했고, 집필이 완료됐을 때 책을 출판하는 문제는 3명이 함께 방안을 찾기로 했다.
항쟁 5주년을 맞는 1985년 5월 이전까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책을 출판하기로 목표를 정했다. 늦어도 3월말까지는 원고가 완성돼야 했기 때문에 일정이 빠듯했다.
이재의는 곧바로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광주고교 동창 조양훈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조양훈은 이재의와 동일한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서로 호흡이 잘 맞았고 둘 다 1984년 말 결혼하여 신혼생활 초였다.
둘은 전남대 독서토론클럽 RUSA에서 함께 활동했던 터라 수시로 믿을 만한 후배들을 불러서 작업에 참여시킬 수도 있었다. 정용화는 박영규 집에 감춰뒀던 자료 뭉치 전부를 가져다가 이재의에게 건네주었다.
이재의와 조양훈은 며칠에 걸쳐 자료를 분류한 다음, 곧바로 취재에 착수하였다. 소준섭이 정리한 ‘광주백서’(1982)는 여러 자료 가운데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리돼 있었기 때문에 취재에 큰 도움이 됐다.
이 작업이 본격화된 1984년 말은 이미 수집된 자료가 충분히 있었고, 1981년에 비해 5.18관련자들이 모두 석방된 상태라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확인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이재의․조양훈은 항쟁당시 주요 사건별로 관련된 핵심 인물 40여명과 목포 등 지역별로 주요 인사들을 골라 취재를 진행하였다.
그때 취재한 주요 인물들은 분야별로 다음과 같다. 투쟁위원회와 도청 최후 상황은 시민군 지도부였던 투쟁위원회 위원장 김종배(조선대생), 외무담당 부위원장 정상용(회사원)과 故 허규정(조선대생), 기획위원 이양현(노동운동)과 윤강옥(전남대생), 민원실장 정해직(교사), 안길정(전남대생) 등에게 들었다. 도청앞 분수대 궐기대회 상황은 홍보부장 故 박효선(교사)을 비롯해 전남대생으로 함께 문화패 활동을 하던 김태종, 김선출 등이 증언했다.
투사회보는 전용호(전남대생), 김성섭(노동자)이, 그리고 조직적인 무장을 통해 전투에 참여한 시민군 분야는 투쟁위원회 상황실장 박남선(운전사), 윤석루(기동타격대장), 김태찬(기동타격대), 김원갑(차량편성, 재수생), 위성삼(조선대생), 나명관(노동자), 김상집(전남대생) 등이 증언하였다.
전투지역별로는 화정동, 산수동, 교도소부근, 지원동, 운암동, 백운동 등 광주에서 함평, 담양, 화순, 장성, 나주 방향으로 이어지는 외곽지역 계엄군과 대치지역 전투상황을 주로 취재했다. 초기 계엄군의 진압과 도청 상황은 이재의 자신이 직접 목격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객관적인 상황이 ‘광주백서’에 비교적 잘 정리돼 있었기에 관계자들을 만나 주로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취재가 이뤄졌다.
목포(故 안철, 최문, 양지문, 명재용), 여수와 순천(김영우, 김추광), 나주(양천택, 김규식, 최광렬), 화순(장두석, 정규철, 이선, 신만식), 보성(양해수), 무안(윤금석, 이범남), 영암(김준태, 유지광), 해남(김덕수, 민충기, 김성종, 박행삼, 조계석), 완도(박충렬, 김운기), 전주(이상호, 노동길, 김종훈), 서울(김영모, 김판금, 김홍명), 조선대(김수남, 권광식, 임영천) 등 주요지역도 취재팀을 나눠서 돌아다녔다.
감시가 심하던 때라 취재원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보안이 지켜질지 우려됐지만 끝까지 취재원으로부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열망이 취재원과 공유되지 않았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2달가량 취재를 마치고 집필 작업은 1985년 1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작업은 주로 조양훈과 이재의 두 사람의 신혼집을 번갈아 옮겨가면서 진행됐다.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창문에 담요를 쳐서 불빛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가면서 밤새워 일하고 낮에는 잠을 자는 식이었다.
항쟁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이재의가 서문과 본문을 연필로 노트에다 썼다. 조양훈은 날짜별로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상황을 여러 장의 지도로 그려내고, 항쟁 이후 5.18단체들 움직임을 마지막 장의 원고로 작성했다. 군 행정병 출신 최동술은 곁에서 원고를 곧바로 타이핑했다. 자료 속에 흩어져 있던 사망자와 부상자 명단을 정리하여 별도 부록으로 실었다.
최동술, 임철규, 조익문, 고선아 등 RUSA후배 10여명이 수시로 불려 와서 작성된 원고를 타이핑한다든지 필요한 일들을 도왔다. 자료와 취재내용이 다를 경우 확인 작업을 거쳤는데, ‘광주백서’의 부록 ‘찢어진 깃폭’에 실린 과장된 부분 등은 확인 후 아예 집필 내용에서 제외시켰다. 3월말 초고가 거의 완성될 무렵 정상용, 정용화, 이양현, 정해직, 윤강옥 등 항쟁 당시 지도부에 참여했던 인사 10여명이 비밀리에 여관방에 모여 집필한 초고의 주요 내용을 확인 수정하는 검토가 이뤄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원고는 4월 초순에야 겨우 끝낼 수 있었다.
자료정리와 취재를 위해 필요한 돈은 정용화가 조달하여 이재의와 조양훈에게 전달했다. 정용화는 광주 무진교회 강신석 목사를 통해 기독교계에서 5.18 자료수집 활동과 관련 일정 금액을 지원받았다.
또한 운동권 선배 몇 사람들도 자진해서 돈을 내놓았다. 이 가운데 당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근무하던 임상택(서울대 상대, 광주)은 자신이 쓴 책 ‘알기쉬운 한국경제’ 인세 중 절반인 100만원을 집필자의 생활비로 사용토록 매월 25만원씩 4개월 동안 정상용을 통해 집필 팀에게 지원했다.
원고가 완성되자 정상용이 나서서 집필책임자와 출판사를 물색하였다. 전청협과 필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든든한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책이 나오게 되면 집필자는 물론이고 출판사 대표도 모두 구속될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몇 명의 원로급 인사를 만나 부탁했지만 모두 난색을 표명했다.
여기저기 의사를 타진하던 중 전남사회운동협의회(이하 ‘전사협’) 전계량 대표가 책임을 지겠다고 동의했다. 전계량 대표는 5.18유족회 회장도 맡고 있었다. 전사협 대표자회의에서는 전계량 대표의 제안을 별다른 이견 없이 추인했다.
전사협은 전청협을 비롯해, 5.18유족회, 5.18부상자회,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기장청년회 전남연합회, 기독청년협의회(EYC광주), 광주기독노동자연맹, 민중문화연구회 등 전남지역의 다양한 사회운동조직 10여개 단체가 모여 만든 협의체였다. 출판은 ‘풀빛출판사’가 맡기로 하였다. 풀빛의 나병식 사장은 광주 출신으로 1974년 서울대 재학 중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던 인물이다.
이제 어떤 인물을 집필자로 할 것인가만 남았다. 그 문제를 둘러싸고 서울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가들이 몇 차례 회의를 하였다. 서울에서는 정상용, 문국주, 나병식, 광주에서는 정용화, 이재의, 전용호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황석영 소설가가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황석영 소설가가 집필 책임을 졌을 때 몇 가지 효과가 기대됐기 때문이다. 첫째, 유명한 작가이기 때문에 출판했을 때 대중적 파급 효과가 클 것이고 5·18항쟁의 진상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둘째,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작가이기 때문에 수사당국에서 쉽사리 그를 연행하거나 구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 셋째, 감수자의 입장에서 책의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1985년 4월 중순 서울에서 열린 최종 회의에 故 김근태(당시 민청련 의장, 전 보건복지부장관), 신동수(민문연, 풀무원 창립위원), 故 채광석(민통련, 문학평론가, 작고), 나병식(풀빛출판사 대표), 정상용(전청협 의장), 황석영(소설가) 등이 참석했다. 황석영은 이 자리에서 집필 책임을 맡겠다고 수락했다.
나병식과 황석영이 출판과 집필의 책임을 전적으로 감당한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조직 사건이 될 수도 있으니 출판사와 집필자 두 사람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피해가 확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참석자들의 생각이었다.
4월 중순 어느 날 저녁, 정용화, 전용호, 이재의, 조양훈이 광주시내 운암동에 살고 있던 황석영 소설가 자택을 찾아가 타이핑된 복사본 초고를 그에게 넘겼다. 이재의와 조양훈은 초고의 본문 내용, 특히 항쟁 진행과정은 많은 참여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면밀하게 검증된 내용만 수록하였으니 가급적 고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또한 초고를 황 작가가 자신의 손으로 전부 원고지에 다시 옮겨 쓰기로 약속했다. 출판과 동시에 들이닥칠 사찰당국의 탄압에 대비해서 작가가 책임지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후 황 작가는 서울 풀빛출판사 옆에 자그마한 여관에다 자리를 잡고 책이 출판될 때까지 한 달 반 이상 두문불출하며 원고를 완성시켰다.
본문과 부록은 그대로 인 채, 머리말과 서문에 해당하는 ‘역량의 성숙’ 부분을 황 작가가 직접 썼다. 독자들이 읽기 수월하게 수많은 소제목도 황 작가가 달았다. 제목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문병란 시인의 ‘부활의 노래’라는 시에서 따왔다. 이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넘어넘어’는 최초의 완성된 책자 형태로 1985년 5월 20일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이라는 명찰을 달고 세상에 얼굴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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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6. 3. 1. 만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