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리심(菩提心)을 내는 것
보리심(菩提心)은 여러 가지 명칭이 있으나 그것은 오직 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용수조사(龍樹祖師)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끊임없이 생멸(生滅)하는 무상(無常)을 관찰하는 마음이 보리심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장 이 세상의 무상을 관찰하는 마음이 보리심이라는 것인가.
참으로 세상의 무상(無常), 특히 죽음을 관찰할 때에는 나(我)라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명예,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도 없다. 오직 시일이 매우 빠르게 지나감을 두려워 할 뿐이다. 그러므로 불도(佛道)를 수행함에 있어서 두 발에 불이 붙은 것을 털어버리듯이 일각의 여유도 없다. 또한 몸도, 생명도 덧없음을 여러 가지로 반성한다. 그러므로 오직 도를 향하여 수행하기 위해서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 나타났을 때에 불사불(弗沙佛)을 만난 기쁨으로 한쪽 발을 받돋움하여 움직이지 않고 7일간을 한 시구(詩句)로써 찬미한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가령, 하늘의 악신(樂神)인 긴나라의 소리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새라고 불려지는 가릉빈가가 찬미하는 노래 소리를 들어도, 저녁 바람이 솔솔 불어 귓전을 스치는 것과 같고, 또 옛 중국의 으뜸가는 미녀라고 불려졌던 모장, 서시와 같은 절묘한 용모도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것이다. 눈과 귀가 감각의 대상에 이끌려도 자유를 잃지 않으면 자연히 보리심의 이치와 합치되는 것이다.
옛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진실한 교훈을 듣지 못한 사람과 진실한 사람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의 구덩이에 빠져서 영원히 불도의 생명을 상실하고 있다. 가련하고 슬픈 일이다.
가령 권교(權敎:그릇된 가르침)와 실교(實敎:참된 가르침)와 많은 분류의 대승교전(大乘敎典)을 읽었다 하더라도, 또 현교(顯敎)와 밀교(密敎)가 분류되는 도리의 서적을 전수(傳受)하였다고 하더라도 명예,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발심(發心)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보리심은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며,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보리심은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관해(觀解) - 천태(天台)에서 말하는 소위 우주를 보는 견해와 생각. 한 순간의 생각 속에 삼천의 성상(性相)<본체와 양상(樣相)>이 갖추어진다는 것 - 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자는 '보리심은 일념불생(一念不生) - 한 순간도 진실 아닌 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 이라고 하는 가르침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자는 '입불계(入佛界)의 마음 -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선 마음-이 보리심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 사람들은 보리심을 이해 못한 것이며 함부로 보리심을 모독한 것이다. 불도는 멀고도 먼 것이다.
시험삼아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마음,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지금의 마음을 반성해 보자. 일념에 삼천의 성상(性相)을 갖추어 융통무애(融通無碍)가 되었는지. 일념불생(一念不生) 가르침을 실증할 수 있겠는가. 다만 있다고 한다면 명성을 탐내고, 이익을 추구하는 허황된 망상뿐이며, 전혀 보리심이나 도심의 어느 한 구석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옛부터 도를 얻고, 법을 얻은 성인(聖人)이 중생을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생과 같이 한 예는 있어도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사념(邪念)은 없었다. 성인에게는 법(法)에 대한 집착조차도 없고, 속세에 대한 집착은 더더욱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리심은 앞서 언급한 무상(無常)을 관찰하는 마음이다. 앞에 거론된 미치광이들의 가르침에는 이러한 마음이 전혀 없다. 예의 '불생념(不生念)'이라든지 '삼천의 성상'이라 하는 설은 보리심을 발심한 후의 불교자로서의 훌륭한 삶의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분명히 하여야 한다. 당장 자아(自我)를 떠나서 몰래 수행하는 것이 곧 보리심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외도(外道)에는 62종의 그릇된 사상이 있다고 한다. 그 근본 원인은 '자아(自我)'라는 실체(實體)를 인정하는데 있다. 만약 자아라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조용히 좌세(坐勢)를 취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지금 자기 몸의 내외에 존재하는 사물 중에서 무엇을 근본으로 할 것인가를. 자기의 육체는 부모로부터 얻어진 것이며, 붉은 피와 흰 임파액이 자기의 몸 속을 순환하고 있으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신이 아니다. 마음과 그 작용에 의해서 수명을 지속하며, 호흡으로 내가 지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그것이 결국 어떻다는 것인가. 이런 까닭으로 이것은 곧 자신이 아닌 것이다.
육체와 정신, 그리고 호흡 작용도 어느 하나 '이것이 나다'하고 집착할 것이 없는 것이다. 방황하는 자는 이 자아에 집착하여 헤매고, 깨달은 자는 완전히 자아와 손을 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본래 무아(無我)인 나를 내세우며 본래 불생(不生)인 생에 집착한다. 세속적인 분별 판단은 끊어야 함에도 끊지 않고, 진실의 법을 멀리하며 진실이 아닌 법을 추구한다.
2. 정법을 보고 들었으면 반드시
수행하여 몸에 익혀라.
충신이 한 마디 바른 말을 진상하면 천자(天子)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천하의 정치를 일변시키는 힘이 있다. 불조(佛祖)가 진실한 말 한 마디를 중생들을 위해 설하시면 참된 길에 마음이 쏠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천자가 어질지 못하면 모처럼 한 충신의 진언도 듣지 않는다. 불조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이 군중을 이탈하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는 불의 참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진실한 길로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생사는 되풀이되고 미혹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천자가 충신의 충언을 받아들여 생각을 고치지 않는다면 덕으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는 할 수 없다.
3. 불도는 반드시 행함으로써
진실의 실증(實證)을 얻는다.
속세의 서적에서는 '위정자'의 길을 배우면 그 곳에는 관(官)의 봉록(俸祿)이 있다'고 한다. 부처님은 '수행하면 진실의 실증(實證)은 바로 그 곳에 있다'고 하였다. 위정자가 학문을 하지 않고 관의 봉록을 받는 사람, 수행하지 않고 진실의 실증을 얻은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수행에 있어서 우선 믿고 도를 닦는 사람, 제법(諸法)의 진실을 이해하는 즉시 도를 닦는 사람, 문득 깨닫는 사람, 서서히 깨닫는 사람 등의 차이는 있으나 반드시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미혹의 세계를 초월하여 진실의 실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위정자가 되는 길도 이와 같다. 학문에 깊고 얕음이 있고, 타고날 때부터 영리하고 둔한 등급은 있으나 많은 학문을 쌓아서 관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국왕이 훌륭하냐, 아니냐 하는 것만으로 배움을 쌓은 사람이 등용되느냐 안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또 천운이 있다 없다 하는 것만으로 관의 봉록을 받고 못 받는 것이 아니다. 만약 위정자가 학문을 하지 않고 봉록을 받는다면 '천자의 근행이 바르면 천하가 다스려지고, 천자의 근행이 바르지 못하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는 선왕의 가르침을 누가 전할 것인가. 만약 수행하지 않고 진실의 실증이 얻어진다면 미혹과 깨달음의 정체를 밝힌 여래의 가르침을 누가 몸에 익힐 수가 있겠는가.
미혹 속에서 수행을 시작하여 부처님의 견성(見性)에 이르기 전에 진실의 실증을 얻을 때 비로소 부처님의 가르침도 저 쪽 연안으로 건너기 위한 배나 뗏목과 같은 것이다. 또 생사 열반을 지난밤의 꿈과 같은 것임을 알고 뱀이 등나무 덩굴처럼 서로 얽힌 경론(經論)에서 익힌 낡은 생각을 영원히 떨쳐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수행하는 사람의 작용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수행의 목적은 진실의 실증(實證)이다. 자기 집의 보고(寶庫-자기의 진실)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진실의 실증은 수행생활을 하지 않고는 얻지 못한다. 본래 마음의 자취는 없기 때문에 어떻게 돌릴 수도 없다.
만약 진실의 실증을 얻었다 하더라도 눈으로 수행의 자취를 뒤 돌아보면 보이는 대상물은 그림자 하나 없다. 그래도 보려고 하면 거기에는 백운(白雲)이 만리(萬里)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만약 수행을 쌓아 진실의 실증의 계단을 올라가려고 한다면 발에 밟히는 것은 티끌하나 없다. 그러나 첫발을 내디디려고 하면 하늘과 땅 사이의 격차가 생긴다. 여기에 이르러 저쪽을 향해 발을 내디딜 생각을 중지하고 자기의 진실에 눈을 돌리는 좌선을 하면 곧 불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4. 얻겠다는 마음으로
불법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불법의 수행은 반드시 그 길의 선배인 지도자로부터 참된 비결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해야 하며 자기 임의대로 해서는 안 된다.
또한 불법은 유심(有心)으로 - 사려, 분별이 있으므로 행하여도 손에 넣을 수 없고, 또한 무심(無心)이기 때문에 행하여도 손에 넣을 수 없다. 오직 끝까지 수행을 계속하겠다는 마음과 도(道)가 일치되지 않으면 신심이 평온하지 못하다. 심신이 평온하지 못하면 진실을 실증하는 길이 고난의 길이 될 것이다.
수행과 도가 일치되려면 어떻게 일상생활을 하면 좋을 것인가. 마음에 들면 취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린다는 차별의식, 또한 명예,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불법수행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요즘 사람들은 불법수행을 하는 사람도 그 마음이 도(道)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된다면 비록 도가 아님을 알고서도 이를 수행한다. 만약 세인들이 우러러보고 칭찬하지 않으면 이것이 정도(正道)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행하지 않는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마음을 진정하고 관찰해 보라.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불법(佛法)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닌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부처님의 눈은 똑똑히 보고 있다.
무릇 불법의 수행은 자기 자신을 위한 수행이 아니다. 하물며 명예,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행이라면 더욱 아니다. 오직 불법(佛法)을 위한 불법을 수행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자비는 중생을 가엾게 여길 뿐 자신을 위해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며, 또한 타인의 칭찬을 받기 위한 자비가 아니다. 오직 평상의 불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벌레나 동물이 그들의 자식을 갖은 고생을 다하여 양육하지만 결국 부모들에게는 아무 이익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자식을 생각하는 자비가 넘쳐흐르고 있다. 그 심정은 모든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모든 부처님의 묘법(妙法)은 그저 이러한 자비 하나만은 아니다. 그 자비는 널리 미치고 모든 곳에서 실현된다. 그 근원은 모두가 부처님의 자비인 것이다. 이미 우리들은 불자이므로 부처님의 가풍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불법수행, 명예나 이익을 위한 불법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앞서 언급하였고 또한 과보(果報)와 영험(靈驗)을 얻기 위한 불법수행을 해서도 안 된다. 오직 불법을 수행하는 것만이 진실의 길이다.
5. 참선을 배우는 길은
바른 스승을 구하는 것이다.
고인(古人)은 '발심(發心)이 바르지 않으면 모든 행위가 헛되고 만다'고 하였다. 이 말은 지도하는 스승이 바르게 지도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제자는 좋은 재목과 같은 것이며, 스승은 이것을 취급하는 목공과도 같다. 아무리 좋은 재목일지라도 훌륭한 목공이 아니면 좋은 제품을 말들 수 없다. 가령 굽은 나무일지라도 만약 명인의 손에 닿으면 이상하리 만치 마듦새가 훌륭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바른 스승이냐 아니냐에 따라 깨달음에도 진짜와 가짜가 나타난다.
애석하게도 일본은 옛부터 바른 스승이 없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고인들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치 흐르는 물을 퍼서 그 원천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본은 옛부터 지금까지 사승(師僧)들이 정리한 서적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나아가서 인간계, 천상계를 위해 설법한 것을 볼 때, 그 말들은 미숙하고 불충분한 것이었다. 불도를 닦는 사람의 최고의 경지에도 못미치고 있다. 하물며 진실을 실증하는 단계에 이를 수 있겠는가. 오직 경전(經典)의 문구(文句)를 전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는 것 뿐, 밤낮 타인의 돈주머니나 셈하고 자기에게는 반전(半錢)의 몫도 없다. 고인들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자는 자기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 이외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요구하며, 또 어떤 자는 사람들에게 서방정토의 왕생을 원하게 한다. 미혹과 어지러움은 여기에서 발생하며, 사념(邪念)도 이것을 원인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설사 양약을 주어도 해독(부작용)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여병(余病)을 불러일으키며 독을 마시는 것보다 더 나쁘다. 일본에서는 옛부터 양약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해독해 주는 스승도 없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를 깨닫게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면서도 생에 관한 편견을 없애지 못하고, 노사(老死)의 사실을 알면서도 해탈을 못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스승의 잘못이며, 제자의 잘못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계의 스승이 된 사람이 가르침에 있어서 그 근본을 버리고 그릇된 문제만을 뒤쫓게 하였기 때문이다. 자기의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자기 한 개인의 생각으로 까닭없이 남을 사악의 구덩이로 몰고 간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스승된 자가 이것이 사악인 것을 모르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옳고 그름을 명확히 자각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태어나신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미개지 작은 나라 일본에 불법이 널리 미치지 못하고 바른 스승(正師)도 없다. 만약 무상(無常)의 불도를 닦을 생각이 있다면 멀리 대 송나라의 지도자를 찾아라. 인간의 마음을 초월하는 곳에 진실하게 사는 길이 있음을 반성하고, 바른 스승을 얻지 못하면 불도를 닦지 않는 것만 못하다.
무릇 바른 스승이라 함은 연령이 많거나 경력이 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법(正法)을 밝히며 바른 스승의 인증(印證)을 받는 것이다.
문자(文字)를 아는 것이 제일이 아니며, 이해와 납득이 제일이 아니며, 규격에서 벗어날 역량이 있고, 무한한 의지와 자기 한 개인의 생각과 인정에 의한 분별판단에 사로잡히지 않고, 행함과 견해가 일치된 사람, 이것만이 바른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