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J 31 : 늘, 혹은
아쉬웠던 신혼생활 (신혼일기)
1978 년 8월호 여성동아 주부수필 추천
1972, 3월 3일,6일,11일,15일,18일,19일
1972, 4월 1일,2일,10일,11일,18일,22일
1972, 5월 7일,12일,15일,21일,27일,
아파트 위층에 신혼부부가 이사 왔다.
싱글 벙글 웃음 띤 얼굴로 계단을 콩콩 뛰어 다니는 귀여운 신부를 볼 때,
퇴근시간에 딱 맞추어 과일봉지를 가슴에 안고 서둘러 계단을 뛰어 오르는 신랑을 보며,
나는 부러운 미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新婚 시절을 남편과 함께 지내지 못했던 나는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되살아나서 그 때의 일기장을 뒤척이곤 한다.
1972년 3월 3일 금요일
우리 둘은 1972년 2월 27일 일요일 서울 을지로 세운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동백꽃 붉게 망울져서 움트던 겨울 바닷가, 해풍에 밀려오는 그리움 같은 아련함과 함께
약속의 밀어가 함께 하던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다. 우리는 신혼부부, 그러나 헤어져야 한다.
그이는 서울에 남고 나는 시골 학교로 떠나야 한다.
1972 년 3월 6일 월요일
새 학기를 맞아 서울 가깝게 학교를 옮겼다.
혼자 사는 신혼의 새댁. 용감 하자고 몇 번이나 다짐하건만 그리움과 비애가
피어 날 때마다 눈물이 난다.
당신의 등불과 내가 드는 등불이 언제나 서로에게 빛이 되게 하소서.
1972 년 3월 11일 토요일
서울에 오다. 電話에 나오는 그이의 음성조차 나는 그립다.
빨리 만나고 싶은 오직 단순한 욕망 -어린아이 같은 응석인 것을- 다방에서 만나다.
내 친구들과 함께 내일 관악산 캠핑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이와 함께 내일 갈 캠핑을 위해서 쇼핑을 하다.
1972 년 3월 15일 수요일
세월을 씻는 가랑비가 가슴을 적신다.
남편의 곁을 떠나와 그의 不在(부재)를 내 마음 안에 확인하는 어두운 밤이다.
우리들 미래의 계획 속에서 만남의 갈증은 어쩔 수 없다.
참고 견디면서 혼자 사는 것이 感傷(감상)만으로 채워지지 않기를 애써야 할 것 같다.
1972 년 3월 18일 토요일
오늘 저녁 내려온다는 그이의 시외전화를 받다.
연애할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난 여전히 떨리고 緊張된다.
우리는 아직도 연인처럼 주말에 한번씩 만나 서로의 그리움을 나누는 신선함으로,
함께 살지 못하는 비애를 달래야 한다.
1972 년 3월 19일 일요일
유리창 밖으로 햇살이 눈부시다.
그이의 아침상을 준비하며 신부노릇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함께 있는 시간과 감정의 密着이 소중하다.
저녁 때 그를 배웅하며 바보처럼 눈물을 쏟다.
1972 년 4월 1일 토요일
개교기념일 - 임시 휴일. 서울에 가지 않기로 연락을 하고 종일 누워서 책을 읽다.
흑인문학 제임스 볼드윈의 또 하나의 세계, 피부색을 초월한 인간적 結合을 통하여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사회를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이다.
저녁 때 예기치 않았던 그이의 방문에 마음 설레고 반가웠다.
1972 년 4월 2일 일요일
봄이 머무는 신작로에서 콧노래를 부르다.
그이랑 같이 기차를 타고 세 정거장 거리인 온양에 오다.
온양에서의 감미로운 시간, 조금이라도 더 서로의 實在를 확인하고 싶다.
연인 같은 수줍음으로 조심스런 기분을 느끼면서도
安樂한 평화로움이 가득 밀려옴을 어쩌랴.
밤늦게 천안 오빠 댁에 들려 저녁을 먹고
8시 50분 서울 행 막차로 그이를 배웅하다.
1972 년 4월 10일 일요일
서울에 오다. 交通費가 부담이 되면서도 아니 올 수 없음은
아직도 감각적인 행복으로 자신을 미화시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실질적인 것을 원하는 그에게 환상적이고 감상적인 철부지 아내로만 비춰지면 어쩌지 ?
주말에만 서로 만날 수 있다는 신혼생활의 슬픔을 짙게 느끼면서도
내일을 위하여 산다는 意味에 깊은 위로와 즐거움을 가지려 한다.
1972 년 4월 11일 월요일
월요일, 그이의 아침밥을 짓고 출근하는 모습을 배웅할 수 있는 유일한 하루이다.
오늘은 休暇 날이다. 부엌일에 익숙하지 못한 아내 노릇이 어설프지만
행복한 신부로 변신할 수 있다는 充足感은 진정 값있는 일이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되어지는 것이다.
1972 년 4월 18일 화요일
아침에 학교에서 그이의 편지를 받다.
자존심을 견디고 있는 아픔이 쓰여 있는 글이지만 앞날을 밝게 보려는 뚜렷한 의지가 있고
제인을 걱정해 주는 배려가 있다. 자꾸만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는 그이,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타인의 입장에서 말들이 많은 게 우리를 疲困하게 만든다.
긍정적으로 살자고 애기 해 주어야겠다. 토요일 서울에 가겠다고 답장을 써야지
1972 년 4월 22일 토요일
우린 너무나 닮은 점이 많고 서로에게 갈구하는 마음의 심층이 깊다보니 미묘한 언어의
差異로 인하여 상처를 준다.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했다. 첫 번째 부부싸움, 둘의 조화를
꿈꾸던 나의 바람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우리의 사랑은 어느 사람들보다 견고하고 아름답다고 자부해 왔던
나의 충족감이 제발 虛象이 아니었기를.....
저녁 때 화해와 함께 그의 판도라 영문 번역을 들으며 잠을 자다.
1972 년 5월 7일 일요일
시할머니 회갑이다.
신록의 계절이어서 축하연을 베풀어 드리기에 알맞다.
시댁 어른들 앞에서 새 며느리 노릇이 어설프기만 하다.
두 숙모님의 배려로 덜 어려웠다. 그이의 익살과 家族들의 웃음,
경제적인 부보다 앞서는 한 가족의 단란함이 보기 좋다.
저녁 때 친구 경이가 방문했다.
재담과 깊이 있는 마음쓰임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부탁했던 서울 전출 건은 역시 힘이 드는 모양이다.
지방교사의 서울 전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2 년 5월 12일 금요일
로맹 가리의 “하늘의 뿌리”를 읽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주인공 모렐의 理想主義와 바이타리의 현실주의가 소설의 주제 이다.
로맹 가리에 의해 모렐 편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상주의의 승리. 현대인에게 많은 자각을 일깨워주고 있는 소설이다.
1972 년 5월 15일 월요일
스승의 날이다.
아이들의 정겨운 선물이 전해져 온다.
고사리 손으로 만든 음식과 꽃 등등
시골 교사로서의 보람이 아이들의 정성과 천진한 웃음 속에서 피어나는 것일까 ?
月給 오 월분 수령,
일금 삼만 여원이라. 언제나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샐러리맨의 비애.
家長 노릇을 해야 하는 남자 선생님들에게는 더욱 비애가 느껴지리라.
1972 년 5월 21 일 일요일
3명의 친구가 아침 10시에 온양에 도착한다는 連絡을 받고
어제 내려온 그이와 함께 온양 유신고속 터미날에 나갔으나 約束時間 30분을 지각했다.
터미날과 현충사를 돌며 친구들을 찾았으나 적중하지 못하고 바람만 맞았다.
친구들은 저희들끼리 바람맞았다고 투덜대겠지.
서로 길이 어긋나버린 것이다. 미안했다.
6월 3일 상경하면 벌을 받겠다고 편지를 쓰다.
1972 년 5월 27일 토요일
시골의 5월은 도시보다 감각적인 향훈을 안고 온다.
하늬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 아카시아 香氣가 교정에 번져 싱그럽게 느껴지는 주말이다.
오늘은 종일 마음이 가득하고 기쁘다.
아침에는 경이의 편지를 받았고 오후에는 엄마가 오셨기 때문이다.
약병아리와 굴비 딸기 등 딸의 섭생을 위하여 먼 길을 달려오신 주름살 깊은 어머니.
나의 하루가 천상의 기쁨으로 祝福처럼 느껴진다.
어머니는 결혼을 했으면서도 떨어져 살고 있는 딸의 현실에 속상해 하신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우리는 지금 실컷 행복하니까요.
끝없이 이어지던 자신에의 연민, 격려, 격정과 사색들. 일기장을 덮는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인가 ? 그 추억들이,
일년 후에 우리는 서울에 집을 샀고 전출을 포기하고 사표를 냈다.
지금은 어려웠던 시절을 보상이라도 해 주듯 그이는 늘 내 곁에 있다.
2006년 12월 24일 일요일 남산 n서울타워에서
늘, 혹은
조 병화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 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노을인가. 끝
첫댓글 우리시대 최후의 로맨티스트! 거울속에서 문득 좌화상을 만난듯--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시소서!
선생님 ...살아 있다는 확인을 위하여 ... 건강 건강..하아소오서어.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진다고요?! 한 때 그런 논리가 있었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힘들겠다는 생각과 함께 동시대인이라는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남산 타워에서 보냈음을 알게 하는 사진을 보면서 부러워 죽겠네요. 그런데 '끝'이라니요? 'The End'라는 말입니까? 아쉬워서 어쩌지요. 그동안 참 잘 읽고 느꼈습니다. 책으로 한 번 엮으면 어떨는지요?
어제 긴 대화 나누지 못함이 아쉽네요. 항상 감사할 뿐 ...
사모님 뵙고 싶어라~
그 사람은 늘, 혹은 가까이, 멀리, 때로는 ... 밉다가 이쁘다가 그런 사람이랍니다.
아름다운 커플 *^^* 선생님 늘 행복하세요.*^^*...!!
네네 네넷네... 선생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