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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노전(中爐殿) 구역
불이문을 들어서면 중노전 마당에 튀어나온 듯 관음전이 발길에 걸리는데 그 오른쪽 뒤편으로 용화전과 대광명전이 이어져 있으나 눈앞에 잡힐 듯 바라보이는 대웅전에 빨리 갈 생각으로 조급하게 나아간다면 이 중노전의 불전은 못 볼지도 모른다. 앞으로만 갈 게 아니라 오른쪽으로 숨은 듯 이어진 불전을 찬찬히 둘러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도 상노전 구역에 들어서기 전에 석탑의 오른쪽에 세존비각, 개산조당, 해장보각, 장경각으로 이어지는 부분도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할 곳이다. 흥미로운 건물이다.
불이문을 지나면 중노전 마당이 보이고 멀리 상노전 대웅전이 손에 닿을 듯하다. 오로지 부처님 진신사리를 뵐 마음에 조급하지 말고 중노전을 돌아보자. 마당 왼쪽이 원통방과 감로당, 오른쪽이 황화각과 판도방인데 모두 스님들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왼쪽 원통방에 또 하나의 흥선대원군 친필이 있다는데 일반 방문객이 보기는 쉽지 않다.
중노전의 중심은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으로 이어지는 축인데 관음전이 다소 튀어나와 보인다. 관음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영조 원년(1725)에 초창되었다고 하니 용화전, 대광명전보다 늦다.
앞에는 높이 약 3m의 석등이 하나 서있는데 일견 평범한 듯 보이나 중대석의 중간에 마디가 새겨진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화사창은 사각의 네 면 모두에 내었는데 창이 커서 시원해 보인다. 통상 8각에 네 면은 창을 내고 네 면은 벽으로 사천왕상 등을 새기는 형식에 비하여 특이하다. 사각의 화사석 위에 얹힌 옥개석과 보주는 평범하다. 관음전보다 오래된 석등이다.
관음전 뒤에는 용화전이 있다. 용화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공민왕 18(1369)년에 초창되었다고 하며 안에는 미륵불좌상을 봉안하였는데 미륵불은 석가모니 다음에 오실 미래불이다. 석가모니 이후 56억 7천만 년 후에 오실 분이다.
용화전 앞에는 탑도 아닌 특이한 석조물이 서 있는데 봉발탑이라고 한다. 즉, 석가모니의 발우(鉢盂)를 미래에 오실 부처님인 미륵불에게 드리려고 가섭존자가 가사(袈裟)와 함께 갖고 인도의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기다리고 있다”는 불경의 내용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데 통도사에서는 발우(鉢盂) 모양의 석조봉발(石造奉鉢)이라고 한다. 보물 제471호.
다시 용화전 뒤에는 대광명전이다. 대광명전은 중노전의 중심건물인데 1756년 10월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58년 9월 중건하였다고 하며 내부 불상 뒤편의 삼신불탱은 보물 제1042호로 현존하는 삼신탱화 중 화격(畵格)이 최고로 알려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앞에 있는 관음전이나 용화전보다 크고 긴 모양이며 내부에는 법신불로 불리는 화엄경의 주불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이렇게 중노전의 주요 불전인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을 관심 깊게 보았다면 상노전의 대웅전으로 올라가기 전에 오층석탑이 하나 있고 그 오른쪽에 비각이 세워져 있으며 다시 그 뒤로 절집에 어울리지 않는 솟을대문 형태의 삼문이 보이고 그 안으로 또 몇 개의 건물이 이어지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중노전 영역이다.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자.
5층 석탑 옆, 솟을대문에서 약간 비켜선 자리, 상노전에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 담에 바짝 붙어있는 비각 하나, 안에는 시커먼 비석이 보이는데 바로 세존비각(世尊碑閣)이다. 숙종 32(1706)년에 계파대사(桂坡大師)가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중수(重修)하고 석가여래의 영골사리비(靈骨舍利碑)를 세우면서 건립(建立)한 것으로 비석(碑石)에는 불사리의 행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즉,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가져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이를 왜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두 개의 함에 나누어 담았다가 하나는 태백산 갈반사(現 정암사)에 봉안하고 하나는 다시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셨다는 일들이 전면(前面)에 적혀져 있다. 뒷면에는 석가모니의 행적과 각지의 시주내용을 적었다고 하는데 이로써 적멸보궁들의 사연을 일부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세존비각 옆으로, 오층석탑의 오른쪽 정면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사대부 댁 사당에서나 볼법한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이 있으니 개산조당(開山祖堂) 현판을 달았으며, 그 안에는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 쓰인 아담한 전각이 있다. 해장보각은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이며 개산조당 현판이 달린 솟을삼문은 해장보각의 출입문인 셈이다.
해장보각 현판이 걸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아담하다. 해장보각이란 불경의 보관처를 용궁(龍宮)에 두기도 하고 또 대장경(大藏經) 진리의 내용이 바닷속의 수많은 보배에 비유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즉 용궁보각(龍宮寶閣)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유사에 일러 자장율사가 진신사리와 금란가사, 그리고 불경 400상자를 갖고 왔다는데 그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해장보각에는 자장율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그 좌, 우로 고려대장경 1,234권을 현대식 유리장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아놓았다.
해장보각 뒤로는 통도사에서 전해오거나 외부에서 유입된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각(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전) 등이 있다. 이렇게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 축과 개산조당, 해장보각, 장경각 축을 모두 둘러보면 이제 상로전으로 가게 된다.
상노전(上爐殿) 구역
상로전은 중노전이 불이문을 들어서면서부터인 것처럼 별도의 문은 없다. 바로 눈앞에 정(丁)자 형태의 대웅전이 보이는데 상노전이다.
ㅇ통도사 대웅전(국보 제290호)
대웅전은 상노전의 주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인데 지금 들어서면서 보이는 방향은 정면이 아니라 측면이다. 즉, 대웅전은 금강 계단 쪽(북쪽)을 뒤쪽으로 하여 남쪽을 정면으로 하고, 들어가면서 보이는 측면은 동쪽이 된다. 그러나 들어오는 쪽이 측면이 되는 점을 고려하여 동, 서, 남쪽 어디나 모두 정면처럼 보이게 하였으며 심지어 북쪽을 포함 네 곳 모두에다 현판을 걸어놓았는데 들어오는 방향인 동쪽에는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등 각기 다른 현판을 걸었다. 적멸보궁(구하 스님 글씨) 외에는 모두 흥선대원군 글씨이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22(1644)년에 중건하였는데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뒤편(북쪽) 금강계단을 향하여 길게 불단만을 설치하였으며 유리벽으로 대웅전 안에서도 금강계단이 보이도록 하였다. 원래 3칸x3칸 건물에 측면 2칸을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사
실 대웅전은 그 모양의 특이함과 현판의 다양함 외에도 근본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위에서 설명한 丁자형 구조와 지붕에조차 찰간대를 설치하고 막새 위에 도자기 연봉이 있는 등의 뛰어남 외에도 건물이 올라선 기단부의 면석과 계단 소맷돌의 조각이 매우 화려한 꽃장식이다.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 바퀴 돌아보며 음미하는 까닭이다.
그밖에도 대웅전 문짝의 꽃창살이나 내부로 들어가서 볼 때 전면(북쪽)을 향한 대형 수미단의 규모와 정교한 아름다움, 비록 불상을 모시지는 않았지만 비어 있음에도 매우 권위적이고 경건하며 신성해 보이는 느낌은 유리 창문 너머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천장과 사방을 둘러보면 시원하게 조성한 내부 공간과 높이 솟은 천장과 이를 지탱하는 기둥들, 내부에서도 노출되어 보이는 공포의 아름다움과 복잡해 보이지만 제각각 기능과 역할이 있는 부재들 모두에도 아름다운 채색과 무늬, 벽화들로 채워진 대웅전이다. 과연 국보로서 손색이 없는 통도사 대웅전이다. (금강계단과 대웅전을 묶어서 국보 제290호임)
대웅전 서쪽으로 돌아가면 좁은 마당 형태의 공간에 돌다리가 걸쳐진 작은 연못이 있다. 구룡지(九龍池)다. 자장율사가 이곳에 아홉 마리 못된 용이 산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와 법력으로 모두 쫓아내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통도사를 수호하며 계속 있겠다고 하여 이를 허락한 후 연못을 다 메우지 않고 한 귀퉁이에 살게 한 곳이라고 한다.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통도사 금강계단(국보 제290호)
자장 스님이 못된 용들을 쫓아내고 메꾼 자리가 지금의 금강계단 자리다. 계단(戒壇)이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 당시부터 전래된 것인데,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장소에서 계를 받는다면 부처님으로부터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할 것이다. 현재 계단의 모습은 2중 사각기단 위에 종 모양의 부도가 놓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계단의 사방에는 불좌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수 과정에서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이후 부처님 진시사리를 참배하려는 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반면에 이를 탈취하려거나 직위와 권력을 앞세워 친견한다는 명목으로 사리를 끄집어내는 경우도 있었던 듯하다. 진신사리의 수난이라 할 밖에. 삼국유사에 보면 고려 고종 22(1235)년에 왕명으로 이쪽 지방을 순회하던 상장군 일행이 석종을 들어내고 사리를 친견하다가 유리통 하나를 깨뜨려 마침 갖고 있던 수정통으로 교환하였다고 하는데 기록에 나오는 첫 훼손사례가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왜구 등 외부 침략군들이 진신사리를 약탈하려는 탓에 사리를 보호하려는 당시 승려들의 노력이 있었으며, 앞서 설명한 중노전에 있는 세존비에는 이런 과정이 적혀있으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보관하고 유지하며 경배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일반인들의 직접 참배를 금지하였으나, 지금은 누구나 금강계단으로 들어가 가까이에서 참배하고 예경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다만 개방 시간과 제한사항이 있으니 확인함이 좋을 듯하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즉 다이아몬드로 이해된다. 즉, 존재하는 금속 중 가장 단단하니 그만큼 완벽하고 불변하여 영원토록 지켜진다는 의미일 것인데 필자는 갑자기 석가모니 시대에 다이아몬드가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역사상 다이아몬드가 처음 나온 것이 언제인지? 금은보화야 그때도 있었을 테지만…. 金中最剛(금중최강), 즉 강하고 안 변한다는 모든 철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뜻이지 다이아몬드를 말하는 건 아니라는 학자도 있었던 듯한데 어쨌거나 자장율사가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는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셔져서 년년세세 경배를 받고 계신다.
그밖에 대웅전 남쪽 면은 상노전 마당인데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쪽은 응진전, 오른쪽은 명부전이며 맞은편은 일로향각(一爐香閣)인데 상노전을 관리하는 건물이다. 또한 응진전 뒤편 안쪽으로는 보광전이 있고 상노전의 가장 서쪽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선원구역이다. 발길을 돌려야 한다.
이렇듯 큰 법당과 주요 건물들 위주로 돌아보아도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다. 과연 국지대찰 통도사답다. 아쉽기는 그밖에도 통도사에는 추사 김정희의 친필도 많다고 하는데 대부분 주지실 등 스님들 공간의 실내에 있거나 성보박물관에 있어 일반 방문객들이 찾아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답사를 목적으로 가까이 가기 어려운 실정이다.
통도사 측에서는 본 답사기보다 더 상세하고 수준 높은 설명과 화상도 높은 사진을 첨부한 안내문을 비치하면 좋겠다. 통도사를 여러 번 간 필자 역시도 못 가본 구역이 제법 많다. 산 내 부속 암자까지 포함한다면 그야말로 대충 돌아본 답사기가 부끄러울 뿐이다. 이렇게나마 적멸보궁 답사 연재 1편, 통도사 편을 마치고 2편 봉정암으로 가려 한다.
첫댓글 부처님의 眞身인 사리를 모시고 있으니 불전에는 따로
부처님 형상을 만든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으며,
예불은 진신사리가 모셔진 탑을 직접 향하여 올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많은 세월 속에서 眞身舍利의 수난도 많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안내 책자도 없이 몇 년 전에 한 번 갔으나 어딘지 무엇인지 몰랐으나
이제는 여유가 있으면 이 유익한 정보를 가지고 가서
참고로 할 예정입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5대적멸보궁 답사_1-영축산통도사-<하>
중노전과 상노전의 배치와 해박하신 역사와 문화 가람의 안내
자상하신 설명과 사진을 올려주셔서 잘 보고 공부 하였습니다
홍매화만 보고 왔는데 다시 답사를 가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설악산 봉정암>으로 여행을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