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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도 그렇지만 가짜 언론으로 인해 정치가가 모함을 받거나, 청문회 자리에 별의별 카더라 통신을 근거로 상대방 흠집내는데 열을 내는 것을 볼 수 있죠. 그리고 정치가나 고위 관료의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도 없이 뜬소문으로 해당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볼 수 있고요.
근데 사실 이런 것은 지금에 와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왕이 고위 대신이나 무관을 발탁할때는 사헌부를 비롯한 감찰기관은 물론, 대간 등의 언관들부터해서 그 해당인물들에 대한 집중 조사 및 비판이 쏟아 집니다(선조가 그 이순신 발탁할때도 집중공격을 받았으나 끝끝내 이겨냄. 까방권을 줄 수는 없지만 선조의 안목이 확인되는 일)
이번에 소개할 사건도 그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사건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안타까운 전투로 기억 되는 전투는 뭐니뭐니 해도 탄금대 전투일 겁니다.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도 있고, 당대의 명장이라고 평가받아 기대를 한몸에 받던 신립이 처참하게 패하여 끝내 자살하게된다는 비극적인 서사의 줄거리는 조선시대는 물론 현재 한국사람들에게도 안타까움과 비참함을 느끼게 하기 충분하기때문이죠.
여기서 그 탄금대 전투를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근데 이 탄금대 전투에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분들은 한번쯤은 김여물(金汝物)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원래 의주목사로 있다가 폐단을 개혁하고 군비를 증강하였는데 이에 반대하는 사람의 모함으로 파직되고 심문을 받고 있다가 임진왜란이 터지자 신립의 막하에서 종군하였고, 조령을 지켜야한다고 조언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으며, 패색이 짙어졌을때는 신립과 함께 죽음을 두려워하지않고 웃으며 말을달려 적진에 뛰어들어 수십명을 쳐 죽이고는 강에 뛰어들어 순국하였죠.
마지막에 함께 자결하는 신립과 김여물
오늘 가짜뉴스의 주인공은 바로 이 김여물의 아들 김류(金瑬)입니다.
칼부림에서 묘사되는 김류. 정치적 감각은 있는 인물로 그려졌죠.
요즘에는 고일권 작가님(여기 까페의 퍼머넌트님)의 웹툰 칼부림을 통해서 더 유명해진 인물이기도 한데, 김여물 사후 김류에게는 김여물의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있었습니다. 신립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것이 당시에도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그에 반대하는 계책을 내었다가 거절당하고도(즉 김여물의 계책을 썼다면 이길 수 있었다는 인식도 팽배하였다는 증거) 신립과 함께 순국하였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사람들에 각인이 되었기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였죠. 인조대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김여물의 비명을 써준 사람이 무려 그 유명한 영화남한산성의 김윤석 아니 김상헌이었죠.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
그래서 그런지 죽은 아버지와 관련된 스캔들이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
헌부가 아뢰기를,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김유(金瑬)가 복수 초모사(復讐招募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충주(忠州)에 왕래할 적에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면서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곳은 바로 그의 아비 김여물(金汝岉)이 전사한 곳입니다. 자식이 된 자로서 자기 아비가 전사한 곳에 이르면 울부짖으면서 통곡하여 차마 그곳을 지나갈 수 없는 일인데, 그의 소행이 감히 이와 같았으니 보고 듣는 모든 사람들이 통탄하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 인륜의 기강을 바루소서.....
선조실록 97권, 선조 31년 2월 18일 계유 2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김류가 탄금대에서 여자끼고 술을 마셨다는 건데 이게 사실이면 현대에도 언론에 언급될 만한 일이죠(아버지가 전사한 곳에서 여자끼고 술을마셨다니....).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그것도 '임진왜란이 아직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 저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헌부의 건의대로 사판에서 삭제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근데 중요한건 이게 가짜뉴스였다는 겁니다.
괴산(槐山)에 사는 진사 이정원(李挺元) 등이 상소하기를,
.......
신이 삼가 보건대, 전 권지정자(權知正字) 김유(金瑬)는 정유년 여름에 복수군 소모관(復讐軍召募官)에 차정되어 본도에 와서 충주(忠州)에 있는 순찰사 김시헌(金時獻)을 찾아가 보고 복수할 일을 의논하고자 하였습니다. 진천(鎭川)에서 충주로 갈 적에 김유가 본 고을에서 충주까지의 거리가 몇 리인가를 묻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충주는 우리 아버지가 전몰한 곳이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자식은 살아서 오늘까지 그대로 있으니 이는 큰 죄악이다. 어찌 차마 그 땅을 밟을 수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이도록 울부짖으면서 머뭇거리며 가지 못하니, 그때에 이를 보고 들은 이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충주에 이르니 문위사(問慰使) 송순(宋諄)도 그곳에 왔는데, 하루는 송순이 탄금대(彈琴臺)에 올라 시를 지어 읊고서 김유의 관사에 돌아와 차운(次韻)을 청하니, 김유는 더욱 더 슬퍼하면서 차마 붓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탄금대 위에서 오락을 하였겠습니까. 김유가 탄금대에서 놀지 않았다는 것은 본 고을의 목백(牧伯)과 통판(通判)만 알 뿐이 아니고 당시의 사민(士民)들도 사실상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평 이필형(李必亨)이 감히 근거없이 떠도는 말을 하면서 심지어 탄금대에서 술을 먹고 놀았다고 허위 사실로 성상을 속여 중죄를 덮어씌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그 무고함을 살피셔서 사론(士論)을 들어주시면 이는 김유 한 사람만의 다행일 뿐아니라, 인정(仁政)을 베푸시는 일에도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이조에 계하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김유의 일은 온 도의 사람들이 모두들 억울하다고 할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순찰사 김시헌도 그 억울함을 말하였습니다. 이번 이정원의 상소 내용으로 보면 반드시 차마 탄금대에 올라가 놀지 못하였을 것인데, 기생을 데리고 가서 즐겼다는 것은 인정이나 천리로 미루어 보더라도 반드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선비가 상소한 것은 사실상 공론에서 나온 것이므로 아마도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일이 중대한 것이니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영상 이항복과 우상 김명원이 의계하기를,
"김유의 일은 사람들이 본디 억울하다고 하였으며 신들도 일찍이 무고(誣告)라고 들었습니다. 이정원 등이 상소한 것은 사실 온 도의 공론에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그 깊은 원한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좌상 이헌국은 의계하기를,
"김유가 앞서 중죄를 받았을 적에 많은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으며, 신도 듣고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이 그때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동료들의 발언을 감히 강력하게 저지시키지 못하였으니, 이번의 이 수의(收議)에 동참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이른바 김유라는 사람은 어떠한 인물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논죄를 당하게 된 것도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다만 그러한 일은 조정의 공론에서 나와야지 유생의 상소로 인하여 좌우될 수는 없으니, 이는 사체가 합당하지 않고 조정의 상벌이 그로 인해 조종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사대부들이 그렇게 모두 억울하다고 말한다면 전일 사판(仕版)을 삭제시킨 사람들에 대해 하문하였을 때 유사가 한마디 말도 없이 방계(防啓)한 것은 무슨 뜻이었는가? 우선 그대로 두고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선조실록 128권, 선조 33년 8월 14일 갑신 1번째기사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저 일이 벌이진지 2년뒤 충주의 지방선비 이정원의 상소를 시작으로 김류의 억울함이 드러나 조정에서 공론이 이루어졌는데, 물론 선조로서는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제대로 판별해야한다고(처음에 좀 그러지) 우선 선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이번에는 관직에 있는 사람이 그것도 위 상소에 언급되었던 김시헌이 직접 김류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우승지 김시헌(金時獻)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지난 정유년에 명을 받고 호서(湖西)에 가 있을 때 김유(金瑬)가 복수군 소모관(復讎軍召募官)으로 도내에 내려와서 신을 찾아 충주(忠州)에 왔었는데 복수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는 모양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때 부호군 송순(宋諄)이 문안사(問安使)로 충주에 와서 이마를 찌푸리며 신에게 말하기를 ‘탄금대(彈琴臺) 말만 하면 김 정자(金正字)는 금방 목이 메어 흐느끼며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습니다. 김유가 충주에 온 것은 원래 신을 만나 일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의 마음은 차마 자기 발로 그 아비의 죽은 땅을 밟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기생을 끼고 풍류를 벌이면서 자기 아버지가 전사한 곳에 갔을 리가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김유가 이미 벼슬아치가 되었으면 그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본관(本官)이 자연 다 알게 됩니다. 그가 설령 참으로 기생을 끼고 풍류를 즐긴 일이 있었다면 그가 끼고 놀았던 기생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고 또 풍악을 울렸던 악공도 있을 것이며, 그 밖의 술을 따르고 음식을 나른 자와 마졸(馬卒)들까지 적어도 10여 명은 있었을 것인데, 여러 사람이 보았을 것이니 어찌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이 실지 없었기 때문에 김유가 죄를 입은 것에 대하여 당시 수령들은 모두 지극히 원통하다고 말하였고, 온 도내의 사람들도 그 억울함을 말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 김유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공정하여 속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김유가 한 일이 옛사람이 취했던 복수(復讎)·토적(討賊)의 의리와 맞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래도 타당하지만 흔적도 없고 인정에도 가깝지 않은 말로 그를 불측(不測)한 죄에 빠뜨리려고 한다면 어찌 천하에 지극히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몇 해를 두고 김유를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의 봉장(封章)이 끊이질 않고 있으나 그 실상을 아는 것은 신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오래 전부터 그 사실을 구중(九重)에 진달하려 하였으나 대례(大禮)가 끝나지 않아 조야(朝野) 모두가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문 채 오늘까지 지체하여 왔던 것입니다. 삼가 연중(筵中)의 대신들이 그 사건에 대하여 말한 사실을 듣고 천일(天日)이 내리 비치어 그 사정을 통촉하시면 그 동안 억울했던 일이 행여 신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감히 처음부터 끝까지의 곡절을 대강 아뢰는 바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상소문을 보았다. 김유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모르고, 다만 김여물(金汝岉)의 자식이라는 말만 들었다. 여물이 나랏일로 죽은 데 대하여는 항상 민측(愍惻)함을 느껴왔다. 김유의 일은 대간(臺諫)의 논박에서 나왔는데, 한두 마디 말로 개석(開釋)하기는 어렵다. 이미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이라면 일찍 아뢰지 아니한 것이 애석한 일이다.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133권, 선조 34년 1월 22일 신유 2번째기사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우승지 김시헌의 상소는 현직에 있는 사람의 상소이기도 하고, 당시의 정황을 증명해줄 구체적인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오니 이에 대해서 선조는 대신들에게 직접의논하도록 명을 내렸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모함을 벗을 수 있었는데, 또다시 사헌부에서는 김류를 모함하는데 이번에는 탄금대에서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복수군에서 주색을 일삼았다는 어정쩡한 이야기로 모함을 하였고, 선조는 또다시 김류를 파직합니다만, 5개월뒤 다시 기용하고 이후 조정에서 김류가 탄금대에서 술판벌였다는 이야기는 다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까지 김류를 공격했을까요?
헌부가, 이조 좌랑 홍서봉(洪瑞鳳), 예문관 검열 김유(金瑬)를 논박하여 파직시켰다.....이 두 사람은 모두 나이 젊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또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무리들이 제일 꺼렸는데, 이제 또 그 의논을 주워 모아 탄핵, 파직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 김유가 사관(史官)이 되어 새로 천거될 사람에 대해 의논하는데 동료와 뜻이 맞지 않아 4일이나 서로 버티면서 끝내 그들에게 정도를 굽혀 따르지 않았다. 동료는 바로 시배(時輩)인데, 즉시 대관을 사주하여 김유가 궐문(闕門)을 나서기도 전에 탄핵하는 글이 이미 이르렀다. 단지 김유만을 논박하면 지시하고 사주한 자취가 드러날까 걱정하여 홍서봉도 함께 탄핵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36권, 선조 35년 2월 1일 갑자 3번째기사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선조후반기에 정권을 잡고 있던 측이 북인계열이었고, 김류가 서인이었던 걸 감안한다면, 아마도 북인측에서 서인인 김류를 공격하기 위해 거짓으로 카더라 뉴스를 만들어서 공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아무리 그래도 아버지 죽은 걸로-_-). 이는 김육도 지적하는 바였죠.
병신년(1596)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패금(貝錦)을 만났다(탄핵되었다는 뜻). 옥당(玉堂)과 한원(翰苑)에 있으면서 잇달아 낭패를 당하고는 낭료(郞僚)로 침체되어 있거나 주군(州郡)으로 내쳐졌다. 그러나 공적이 더욱더 드러나 명성이 더욱 커졌는데, 대개 공을 아낀 사람들은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경림(慶林) 김명원(金命元),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등 여러 명상들이었으며, 공을 해친 자는 이필형(李必亨),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의 무리였다. 이 어찌 하늘이 장차 공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고 하여 공의 심지(心志)를 거슬러서 능하지 못한 바를 더욱더 닦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잠곡유고 묘지명
다만 이걸 통해서 또 알 수 있는건 탄금대에서 김여물이 전사한 것, 즉 탄금대 전투는 두고두고 일반인은 물론이고 조정에서도 매우 안타까운 큰 일로 여겨졌다는 거겠죠. 그렇지 않으면 이런 공격거리로 삼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당대는 물론이고 조선후기 사람들은 탄금대를 지나며 매우 안타까워 하는 시들도 남겼습니다,
사공이 탄금대를 바라보고는 / 舟子望琴臺
고기 노는 강 속에 밥을 던지어 / 投飯贈江魚
뉘에게 주는 건가 물어봤더니 / 問此誰與食
애달파라 순국한 병사라 하네 / 哀哉國殤徒
당시 참사 자세히 알 수 없으나 / 喪亂安可詳
백 년이 지나도록 원기 서렸네 / 氣結百載餘
귀천을 막론하고 함께 죽을 때 / 貴賤死同日
슬기 용맹 지닌 이도 예외 없었지 / 智勇淪一塗
자취는 물새 함께 사라졌지만 / 跡掃鵝鸛陳
넋만은 강물 속에 모여 있어서 / 魂聚蛟龍墟
봄 구름에 모래톱 어두워지자 / 春雲晦洲島
원기가 그곳에 서려 있는 듯 / 冤氛疑有無
도도히 서쪽으로 흐르는 강물 / 滔滔西逝水
사무치는 울분을 막을 수 없네 / 遺憤不可除
구슬픈 뱃노래는 목이 메인데 / 榜歌咽浦思
해묵은 탄금대에 우짖는 새들 / 古臺鳥悲呼
잔 들어 슬픈 심정 애써 달래고 / 持觴寄一哀
노를 저어 묵묵히 나아간다오 / 擊汰且前徂
-농암집 탄금대-
험준한 재 다 지나고 대지가 확 트이더니 / 嶺隘度盡地坼開
강 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나왔네 / 江心湧出彈琴臺
신립을 일으키어 얘기나 좀 해봤으면 / 欲起申砬與論事
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을까 / 啓門納寇奚爲哉
회음이 만약 성안 위치에 있었던들 / 淮陰若在成安處적치가 무슨 수로 정형을 통과했으리 / 赤幟豈過井陘來
그때 우리는 조였으면서 한이 쓰던 꾀를 썼으니 / 我方爲趙計用漢
뱃전에 표했다가 칼 찾으러 나선 멍청이로세 / 鍥舟索劍眞不才
기 휘둘러 물 가리키며 물로 뛰어들었으니 / 麾旗指水入水去
목숨 바쳐 싸운 군대들 그 얼마나 가련한가 / 萬夫用命良可哀
지금도 밤이면 도깨비불이 출몰하여 / 至今燐火夜深碧
길손들 간담을 섬뜩하게 만든다네 / 空使行人肝膽摧
-다산시문집 탄금대를 지나며-
충주라 삼협의 안에 있어서 용흥사(龍興寺) / 忠州三峽內
큰 강물 내닫는 걸 굽어보누나 이유소부(貽柳少府) / 俛視大江奔
싸움터서 죽은 귀신 통곡하는데 대설(對雪) / 戰哭多新鬼
탄금대에 해 저물어 구름 떠 있네 탄대(彈臺) / 琴臺日暮雲
-잠곡유고 충주 탄금대 -
그리고 1763년(영조39년)에는 일본에 통신사를 가는 사람들이 아예 집단으로 탄금대를 지나며 탄금대를 기억하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차마 통신의 사신이 되어 / 忍爲通信使
저물녘에 탄금대를 지나단 말가 / 暮過彈琴臺
장군의 한이 더할 줄은 너무도 잘 알지만 / 知益將軍恨
열사의 슬픔을 어찌 견딘단 말고 / 那堪烈士哀
전루(戰壘)에 구름 엉겨 흩어질 날이 없고 / 壘雲凝不散
진 뒤에 물은 맺혀 돌고 돌아 부딪치누나 / 陣水結如洄
근방에 임공의 옛 집이 있다 하니 / 傍有林公宅
영특한 인재는 모두 초야(草野)에서 나네 그래 / 英才起草萊
전쟁한 땅이어서 가을 풀이 쓸쓸하고 / 戰地多秋草
수심 서린 구름은 옛 대에 가득하여라 / 愁雲滿古臺
패전하던 그날에는 비난도 무척 많았지만 / 成虧當日議
영풍(英風) 기절(氣節) 기리면서 뒷사람들 슬퍼하네 / 風節後人哀
칼 기대어 노래하다 도로 눈물지으며 / 倚劍歌還涕
배 멈췄다 물 거슬러 다시금 올라가네 / 停舟溯更洄
서생이란 언제고 담력이 없는지라 / 書生無膽力
관복 갖추고서 동래로 나가노라 / 冠服出東萊
남옥
백년 고목 엉겨엉겨 묵은 사당 희미한데 / 老木迷荒廟
차거운 가을 물은 옛 대를 감고 도누나 / 寒江繞古臺
용사의 난리에는 좋은 꾀가 없었던가 / 龍蛇無上策
원학들은 아직도 슬픔 남아 있다오 / 猿鶴有餘哀
구름과 물은 저렇다 깜깜하고 아득한데 / 雲水空溟漠
성사는 또 소회를 한다 말가 / 星槎且泝洄
굳센 넋 기리며 남문을 벗어나서 / 南門懷毅魄
동래를 향하여 앞길을 떠나노라 / 前路指東萊
성대중
장군의 묵은 전루(戰壘) 아직도 남았는데 / 將軍餘故壘
가을 물은 스스로 빈 대를 감았구나 / 秋水自空臺
폐백(幣帛)을 들고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 皮幣今何往
산하는 아직도 슬픔이 남았는데 / 山河不盡哀
구름을 뚫어 해는 쓸쓸히 사라지고 / 穿雲寒日落
돌 모서리에 부딪쳐 성낸 물결 구비치네 / 觸石怒濤洄
어찌하면 손ㆍ오의 병술(兵術)을 다 배워서 / 安得孫吳術
창칼로 한 번 싸워 오랑캐를 물리칠꼬 / 干戈闢草萊
원중거
탄금대라 흐르는 물 한을 남기고 / 遺恨彈琴水
야마대라 깊은 원수 어찌 잊으랴 / 深讐野馬臺
산하는 오히려 기세가 웅장하건만 / 山河猶壯氣
원학은 상기도 슬픔이 남았다오 / 猿鶴尙餘哀
지나가는 나그네는 슬픔을 더하는데 / 過客增悲慨
외로운 배는 홀로 물결을 거슬리누나 / 孤舟獨泝洄
섶에 눕고 쓸개 씹은 백년의 쓰라림 / 百年薪膽痛
눈물을 가리우며 동래로 내려가네 / 掩淚下東萊
김인겸
창해의 나그네 가을바람 거슬리며 / 秋風滄海客
해질 무렵에 탄금대를 지나노라 / 落日彈琴臺
임진ㆍ정유년 난리의 부끄러움 더 말할 수 있겠는가 / 尙說龍蛇恥
원학의 슬픔을 어떻게 견디랴 / 那堪猿鶴哀
진 머리엔 구름이 언제나 맺혀 있고 / 陣雲長菀結
등 뒤의 맑은 물은 얽혀 스스로 구비치네 / 背水自縈洄
말 먹이고 서성대며 서 있노라니 / 秣馬夷猶立
쓸쓸한 연기만이 마른풀에 감겼노라 / 寒煙鎖草萊
홍선보
동사수창록 탄금대를 지나면서
더 훗날 순조대에는 '임진년'이 돌아오자 그를 잊지 않기 위해서 조정에서 그를 기려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명년 봄을 기다려 고(故) 순변사(巡邊使) 신입(申砬)과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岉) 및 여러 장사(將士)들을 충주 달천(撻川)의 순의(殉義)한 옛터에 사제(賜祭)하라고 명하였는데, 예조 참판 조인영(趙寅永)이 태실(胎室)을 봉심하기 위하여 충주에 갔다가 돌아와서 ‘명년이 임진년의 옛 갑년(甲年)이 되니 옛일을 추억(追憶)하는 감회를 나타내어 보임이 합당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인영이 또 충주에서 삼영(三營) 에 바치는 보미(保米) 7백 19석(石)의 폐단을 말하면서 대전(代錢)으로 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순조실록 32권, 순조 31년 11월 22일 경오 1번째기사
여담이지만 김류는 일본과의 화의에 있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치적입장이던 어쨌든 자신의 아버지가 탄금대에서 전사를 하였으니 원한이 더 깊었겠죠.
칼부림에서 항왜장 김충선의 김류에 대한 평가. 김류가 일본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묘사되었죠.
그래서 훗날 일본과 조선의 화의가 이루어진 뒤에 일본에서 일광산에 사당을 짓고 시문을 요청하였는 일이있었는데 김류는 이를 사양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국의 일광산(日光山) 사당(社堂)이 준공되자, 왜차(倭差)가 와서 편액(扁額)과 시문(詩文)을 청하므로 조정이 허락하였다. 전에 도주(島主) 평의성(平義成)이 평행성(平幸成) 을 보내 말하기를,
"일광산에 가강(家康)의 묘당(廟堂)이 있으므로 그 묘당 뒤쪽에다 사당(社堂)을 건립하였는데, 기둥과 들보와 사방의 벽을 모두 대리석으로 꾸며 호화롭기가 그지없습니다. 국왕의 어필(御筆)과 시문을 얻어 천추만대에 전해줄 보물로 삼고자 합니다."
하고, 또 종(鍾)과 서명(序銘)을 구하였는데, 접위관(接慰官) 이태운(李泰運)이 이 사실을 계문하였다. 상이 묘당에 의논하여 선조(先朝)의 왕자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 에게 일광정계(日光淨界)라는 큰 네 글자의 편액을 쓰게 하고 또 종을 주조하여 보내게 하였는데, 이명한(李明漢)이 서(序)를 짓고 이식(李植)이 명(銘)을 짓고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다. 또 시문을 제술할 사람을 뽑았는데, 김류(金瑬)·최명길(崔鳴吉)·이식·홍서봉(洪瑞鳳)·이명한·이성구(李聖求)·이경전(李慶全)·신익성(申翊聖)·심기원(沈器遠)·김시국(金蓍國) 등이 참여하였다. 상이 대제학 이명한으로 하여금 먼저 칠언율(七言律) 한 수를 짓고 뽑힌 신하들에게 그에 화답하게 하였으며, 또 명한에게 오언 배율(五言排律)을 더 지어 이웃 나라로서 영광으로 생각하는 소지로 삼게 하였다. 김류는 그의 아버지 김여물(金汝岉)이 임진 왜란에 죽었기 때문에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인조실록 43권, 인조 20년 2월 18일 무오 3번째기사 1642년 명 숭정(崇禎) 15년
현 栃木県日光市 소재의 輪王寺
원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해를 久能山에 묻었지만, 훗날 日光山으로 이장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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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정치적 공격이라 해도 저건 좀 너무했다 싶었습니다 ㅎㅎ
@배달민족 ㅇㅇ
자식이 특AAA폐급인거 빼고는 두루두루 무난한 양반으로 기억하는데요
잘 읽었습니다. 김류가 김여물의 아들인거는 미처 몰랐네요.
아들인 김류는 그렇다치고 손자인 김경징은 진짜....^^;;
재미있는게 신경진은 신립의 아들입니다.
나름 부부ㅡ자자가 생사를 같이했지요
흥미롭게 보고 가요
네 ㅎㅎ
김류:난 억울하다고!인간적으로 내가 아버지가 죽은 장소에서 술을 먹을리가 없잖아!
???: 그것이 정치적 경륜이야 ~~~
정치란 게 다 그렇겠습니다만, 너무 했네요. 패륜공격이라니 ㄷㄷㄷ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유학의 나라다 보니 되려 공격들어가는게 불효관련 가족사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