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복숭아
이은규
세상에서 가장 예쁜 게 무엇일까
그 대신 납작복숭아 한 알을 샀다
오래된 신화에서 영생을 안겨준다던 열매
비밀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기에
나는 한 사람의 입김에만 꽃 피우는 나무
둥근 복숭아가 거짓말처럼 탐스럽다면
어쩐지 납작복숭아는 숨겨놓은 마음
생각만으로 분홍이 차올랐나 번졌나
얇은 종이봉투에 담긴 복숭아가
도착하는 동안 상하지 않을까 아까워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네게 걸어갔다
기다림을 기다려 주세요, 기다림을
복숭아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참았다
아무래도 손을 타면 안 될 것 같아서
금세라도 분홍이 물러질 것만 같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너무 예뻐서
이름부터 지었다는 한 사람의 마음처럼
노을은 붉고 발등은 부어오르는데
아무리 걸어가도 너는 보이지 않고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의 문장
지나친 후숙은 언제나 옳지 않다
이제 너는 없는 사람
너는 이제 없는 사람
오래된 사실을 무던히도 망각하는구나
납작해진 마음이 뭉클 물러지고
길 위에 주저앉았나, 부끄러움도 없이
세상 가장 예쁜 걸 볼 수 없는 사람
세상 가장 예쁜 걸 줄 수 없는 사람
비밀의 문장에 함부로 밑줄을 그었기에
오래된 신화가 약속한 영생을 믿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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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복숭아 / 이은규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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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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