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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민대표님의 카톡에서]
♤덕담 해서 남 주나?
어떤 친구가 “우리나라가 건국 70 여 년만에 세계에서
열번째로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이 누구 덕인 줄 아느냐?”는 퀴즈를 냈다.
대뜸, “누군 누구야, 박 대통령 때문이지.”하는 사람.
“뭐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 엄마들 치맛바람 땜에 나라가 이 만큼 잘 살게 된 것 아니겠어?”하는 사람.
“월남 파병과 중동 근로자들 피와 땀의 공로다.”하는 사람. 별의 별 답이 다 나왔다.
그러나 퀴즈를 낸 분의 의도는 처음부터 그런 답을 원했던 것이 아닌 모양이다. 넌센스 퀴즈였던 것이다.
정답은 “옛날에 자식들에게 덕담을 많이 해준 우리네 어머니 덕인기라. 엄마들이 코흘리개 자식들 코를 잡고 “흥 해라. 흥 해”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덕담을 한 덕에 이렇게 금시발복 하여 나라가 흥하게 된 거란 말이다.“
모두들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그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70 대들은 생굴같이 시퍼런 콧물을 코에 매달고 살았던 우리들의 대 여섯 살 때의 자화상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더 많이 웃었다.
콧물이 입에 까지 내려오면 혀로 빨아 먹거나, 아니면 손등으로 문질러 대어 겨울에는 손등이 터서 피가 날 정도였다.
늘 종종 걸음 치던 우리들의 어머니는 그런 자식들과 어쩌다가 마주치면 다가와 치맛자락으로 코를 감싸 쥐시고
“흥 해라, 흥 해.”하시며 코 풀기를 재촉하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머니가 ‘재복을 상징한다는 코’를 잡고 “흥, 해라 흥 해.”하며 축복(?)을 했으니, 그 애들이 자라서 이 나라를 이만큼 빨리 ‘흥’하게 만들었다는 소리다.
우스개 소리지만 그럴듯한 말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같은 말을 계속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생각은 말을 낳고 말이 자라서 행동이 된다.
행동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같은 말을 자주 반복하면, 그것이 내가 남에게 하는 것이든,
남이 나에게 하는 것이든 그것은 예언자의 주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이고, 잘 난 내 새끼... 넌 뭐든 참 잘하는구나.
넌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하며 덕담과 칭찬으로 키운 자식은 나중에 쓸 만 한 인물이 된다.
반대로 “이런 등신 같은 녀석... 넌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 있냐.
빌어먹을 놈아.”하며 쥐어 박히고 욕 들으며 자란 아이는 결국 평생을 변변치 못하게 살아가게 된다.
덕담이 가진 축복의 힘과 악담이 가진 저주의 파괴력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런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똑같은 크기의 양파 두 개를 물 컵에 얹어 창가에 놓아두고
한쪽의 양파에게는 “잘 자라라. 건강하게 자라라. 사랑한다.”하며 축복해주고,
다른 한쪽의 양파에게는 “썩어라. 죽어라. 미워.”하고
저주하였더니, 축복받은 양파의 싹은 잘 자랐지만,
저주받은 양파의 싹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고 한다.
생각 해 보라. 유전자적으로 전혀 다른 동 식물 간에도
이런 교감과 영향력이 작용할 수 있다면, 같은 영혼과 육신을 가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주고받는 축복과 저주의 말이나 텔레파시는 서로에게 얼마나 큰 교감과
영향을 미치겠는가를...
새해에는 좀 더 좋은 말을 많이 하고 살아야겠다.
속된 말로 좋은 말 한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세금을 더 내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아이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덕담을,
아내에게는 감사와 사랑의 말을 더 많이 하자.
마트에서 카트를 밀고 지나다가 마주친 모르는 사람에게도
“좋은 걸 많이 사셨네요.” 하는 기분 좋을 인사말을 건네 보자.
무재칠시(無財七施)라 하지 않던가?
가진 것 없이도 베풀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큰 보시가 남에게 해주는 좋은 말 - 칭찬, 감사, 격려, 위로, 덕담이라 했다.
덕담해서 남 주나? 덕을 베풀면 복이 온다.
오늘 한 나의 좋은 말이 내일은 좋은 일이 되어 되돌아 올 것이다.
좋은 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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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안보연구원. 김명수(육사 31)박사의
국부이승만의 일생과 업적에 대하여 간략하게 요약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올립니다.
널리 퍼 날라 주십시요♧
<건국전쟁>영화를 통한 이승만 재조명
■들어가는 말
이승만 대통령은 당연히 “선구자, 선각자, 예언자, 애국자, 불세출의 영웅, 위인”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까지 이승만은
“독재자, 미국의 앞잡이, 친일파, 양민 학살의 주범, 부정선거 방조자, 하와이망명자, 막대한 비자금 조성자, 플레이 보이” 등 악담들이 따라다녔다
필자는 지난 2월 7일 이승만대통령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건국전쟁> 영화 감상 후
필자 소감을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하였다.
<건국전쟁> 영화는 사실(FACT)에 기반한 충격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필자는 독자제위께서 본 요약물을 정독한 후 건국전쟁영화를 관람 할 것을 강추드린다.
■ 주요 내용
다음은 전기와 영화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승만대통령의 주요 행적이다.
● 성장과정
1)1875년 3월 26일 전주이씨 후손으로 황해도 평산군에서 출생하셨다.
2)1895년 구한 말에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수학하던 중 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
1897년 만민공동회에서 조선이 군주국에서
공화정으로의 체제변화를 주장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집요한 구명운동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 1904년 6년 만에 석방되었다.
20대 청년 이승만은 옥중에서 ‘독립정신’이라
라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여기에서 5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우리나라 왕정(王政)을 민주공화정(共和政)으로 탈바꿈시키고 세계화와 선진화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제시하였다.
3)1904년 미국으로 유학 길을 떠나 6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을 이수하였고
이때 맥아더장군과 민족자결주의 선언으로 식민지국가의 큰 희망이 되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4)1910년 일시 귀국하여 YMCA 간사를 하다가 다시 도미.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폭력적 항거보다 외교를 통한 방법을 지속적으로 모색함과 동시에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이주민이 가장 많았던 하와이에 정착하여 육영사업에 매진하였다.
* 이승만이 폭력대신 외교적방법을 택한 것은
당시 700여만 일본군대에 비해 우리 독립군은 단지 2000여명 내외로 인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5)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초대대통령으로 옹립되었다.
1922년 도미.
1930년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적극적 외교활동을 하였고
1942년 얄타회담에서 미ㆍ소의 한반도 통치
방안을 비판하였다.
1945년 해방 후 40년 간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다.
● 주요 업적
이승만은 1948년 초대 대통령 당선되어 3대 대통령인 1960년 까지 12년 간 재임하셨다.
1)건국(자유민주,시장경제)
북한은 1946년 1월 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하였기에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수립발언은 소련주도의 한반도 공산화를 막았으며 뒤이어 1948년 건국에 기여하였다.
당시 한국민의 70% 이상은 사회주의를 선호하였으며 극한적 이념갈등으로 인한 내전상황이었으나 이승만은 이런 내전을 극복한 후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당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만이 살길이며
공산주의는 절대 불가함은 40년간 미국생활을 하고 미국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대통령만이 체득하였다.
이승만의 건국은 518년 조선왕조를 민주공화정으로 바꾼 대혁명이었다.
* 참고
대한민국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활란(金活蘭)여사는 “이승만은 미국의 조지 워싱턴, 토머
스 제퍼슨,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을 모두합친 만큼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
2)국가보안법을 제정 (구국을 위한 신의한수)
1948년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제헌국회에서 반국가 활동을 규제 할 목적으로 제정하였다.
국보법은 5천여 명의 간첩 색출, 33만 명의 남로당원 숙청을 하여 대한민국 공산화를 저지하였다.
당시 남로당 숙청이 없이 1950년 6·25가 발발하였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만해도 오금이 저린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는 등 철저
한 반공주의자였다.
주월 미대사인 테일러(한국전쟁 시 미 8군사령관)는 월남에 이승만같은 분이 계셨더라면
월남은 공산화가 안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을 표했다.
3)토지개혁으로 공산화 방지, 경제발전 도모
6.25전쟁 발발 직전에 토지개혁을 완료하여
북한군이 남침 이후 남한인들에게 토지재분배
회유를 해도 북한군 기만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승만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지주에게는 삶을 보장하고, 농민에게는 토지를 분배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사업가에게는 사업을 통한 자본의 축적을 가능케하여 경제
발전계기를 마련하는 등 일거삼득을 이루었다.
* 참고
서남아시아, 필리핀 및 중남미 국가들은 토지
개혁을 못해 지주층이 그대로 상류층에 남아
있어 가난하게되었고, 파키스탄은 봉건적 잔재가 남아 아직도 가난하다.
4) 국군통수권자로서 탁월한 리더십 발휘
첫째. 미국내 인맥을 활용 한국전에 미군의 조기참전을 유도했다.
이승만은 오랜 미국 생활을 통해 쌓은 미국내 인맥을 동원하여 미국 등 UN참전을 이끌었다.
※ 이승만은 1942년 발족한 미국 내 한미우호협회 구성원인데 당시 해리슨목사도 한미우호협회 구성원으로서 미상원 원목이고 투르만대통령은 부통령 시절 상원의장으로서 상원
원목인 해리슨목사와 밀접한 관계였다.
※이승만은 미국 내 미군의 한국전 참전을 적극 지지한 빌리그레함목사와도 인연이 깊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무부 고문인 달라스를 설득시켜 미군을 한국전에 참전토록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장군(UN군사령관) 소령 때 인연을 맺었다.
예컨데 이승만의 이런 인맥들이 작용하여 미국은 6월 25일 북한 남침 후 5일 만에 미지상군파병을 신속 결정하고 뒤이어 7월 초 UN군을 구성하였다.
둘째, 맥아더사령관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이양하여 전쟁의 효율성을 높였다.
셋째, 전선지역에 UN군과 국군 격려 방문
80을 바라보는 노구에도 매주 1회 이상 총 279회, 부산에서 포탄이 빗발치는 전방 격전지 (백마고지, 단장능선 및 펀치볼 지역 등)까지 쌍발기와 연락기를 번갈아 타고 순시하였다.
이승만은 이런 열정으로 국군과 미군장성들의
충성과 존경을 받았다.
넷째, 전쟁 중에도 전후복구 대비 인재를 양성하였다
한국전쟁 중 부산에 연합대학을 설립하여 전쟁 후 전후복구 할 인재(군복무 면제)를 양성
했다.
※ 당시 이승만은 하와이 회관을 팔아 인천에
인하대학을 설립했는데 여기서 인은 인천, 하는 하와이 앞 글자를 딴 것이다.
그런데 오래 전 인하대 내 이승만대통령 동상이 제거되 창고에 처박혀 있다고 한다.
* 참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주한미대사인 무초는 이승만대통령에게 망명정부를 요청하자
이승만은 무초대사에게 권총으로 위협을 가했으며
이승만은 최악의 경우 총으로 북괴군을 죽인
다음 나의 가족을 죽이고 맨 마지막에는 자신을 죽이겠다는 등 대한민국수호에 결연함을
보였다.
5) 평화선
이승만은 6.25 전쟁 중인 1952년 1월 18일
해안으로부터 60마일 이내는 우리 영토임을
선언하여 미국 등 연합군의 승인을 받았다.
평화선 선언으로 오늘날 독도는 한국땅이며
독도수역의 광물과 수산자원을 확보하였다.
* 참고
혹자는 이승만을 친일파로 매도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친일파라도 김일성에 충성하면 각료로 기용했지만 이승만내각에는 친일파가 없었다.
이승만이 전쟁 중에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한국영토로 하였고, 한국전쟁에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겨냥하겠다는 단호함을 보였다.
6) 6.25전쟁 중 일본군과 대만군 주둔과 지원을 거부
이승만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청군을 끌어들인 것이 결국 1885년 텐진조약에 의거 일본군도 개입하여 청일전쟁이 발생한 것을 교훈삼아 6.25 전쟁기간 일본군과 대만군의 한국내 주둔 및 지원을 강력거부하였다.
7) 성공적인 휴전협정
이승만은 성공적인 휴전협정으로 3가지를 이
루었다.
첫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다.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는 강수로 미국에 압력을 가하여 기적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1953년 휴전 이후 대북 전쟁억제와 안정적인 안보환경을 보장하였다.
* 참고
당시 한미상호조약체결이 없었다면 남한보다 40배 국력을 갖춘 북한, 압록강 북쪽에는 한반도 100배인 중국 그리고 두만강 넘어 한반도 영토 200배인 소련이 대한민국을 삼켰을 것 이다.
둘째,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8억달러 경제 원조를 받아냈다.
셋째,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켰다.
8) 교육정책
이승만은 오랜 미국생활과 미국에서 석ㆍ박사학위까지 받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유독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이승만정부가 재임 12년간 지출한 정부예산 집행내역을 보면 국방비로 51%, 교육비로 17%를 지출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입국론은 80% 문맹률을 20%로 감소시킴이 만 30여년 만에 조국 산업화 달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은 해방 당시 대학과 전문학교를 합쳐 19개교, 학생 8,000여 명에 불과했으나
1960년에는 총 68개교, 학생 수 약 10만명으
로 늘었다.
국가 예산이 모자라 고등교육기관을 지을 형
편이 못되자 이 대통령은 사회 지도층인사들
에게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학교를 세워달
라”고 호소했다.
9) 기타
*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민중을 계몽시켰다.
* 미국 화와이에 최초 남녀공학학교인 [한인기
독학원]을 설립하였다.
* 이승만은 40년간 미국생활 중 미국 국적 취득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 한국의 최초 독립을 위한 1943년 카이로 선
언에 이어 1945년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에
서도 한국독립이 거론되도록 하였다.
* 1948년 스위스와 프랑스보다 앞서 여성에
게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 이승만은 당시 정치적으로나 자본면에서 열악함과 특히 전쟁상황임을 고려하여 내각제 보다 대통령 중심제에 의원내각제를 가미하여 강력한 정책을 추진토록하였다.
● 대통령 하야
이승만은 4·19 의거 발생시
“불의를 보고 침 묵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으니 나는 성공한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1주일 뒤 자진 하야하는 선진정치문화를 남기었다.
* 이승만대통령은 젊은 학생들이 경찰이 쏜
총알로 피살되자 내가 총알을 맞아야 할텐데
하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이승만은 1960년 4·19 의거 후 하야 후 1주일 뒤 하와이로 출국, 5년 뒤인 1965년 (90세)
해외에서 영면한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 맺음말
1. 미국 초대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향한 미국인의 사랑과 관심은 시대를 초월해 뜨겁다.
기념관은 물론 미국전역에 수많은 기념비와 동상은 물론 그에 대한 전기, 영화, TV드라마가 넘친다.
* 워싱턴대통령은 여자관계가 복잡한 것도 있었지만 미국인들은 옥에 티를 침소봉대하여 워싱턴 업적을 결코 훼손하지 않았다.
일본에선 봉건제를 허물고 근대국가를 세운 메이지 일왕과 중국에선 모택동의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 모택동도 대약진운동 실패와 처참한 문화혁명을 초래했지만 등소평은 모택동에 대해 공7, 과3으로 모택동의 업적을 부각시켰다.
2. 우리 초대대통령 이승만에 대하여 그동안 정치역학의 희생물로 제대로 된 평가와 미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만시지탄의 감이 있다.
다행히 2023년 6월 28일전직 대통령 5명의 아들들이 한 자리에 모여 초대 대통령
'이승만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에 동감하였고 뒤이어 전직 운동권과 진보정치인등 각계각층이 범국민적으로 동참하고있다.
3.진정한 보수는 먼저 산 사람들의 수고를 잊지 않는다. -소설가 이문열
* 우리 국민들도 미국민이나 등소평같이 건국지도자에 대해서는 과보다는 공(업적)을 중
시하는 균형된 역사인식을 갖길 바란다.
한국문화안보연구원. 김명수(육사 31)박사
2024년 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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