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비의 생애(5)
유비의 생애 말기
관우와 장비 사망
하지만 219년 관우가 형주 공방전에서 북진하던 중 서황에게 패배하고, 이후 위와 밀약을 맺고 형주의 남군을 기습 침공한 손권의 오군에게 형주를 잃고 참수당하는 일이 생긴다.
그로부터 2년 후 221년 6월, 복수를 준비하던 장비 역시 부하인 장달과 범강에게 살해당한다. 유비는 관우의 일에는 크게 놀라 격분하며 대노하였으며 장비의 일에는 '아! 장비가 죽었구나' 라고 한탄했다.(도원종언)
연의에서는 이를 극적으로 표현해 관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사흘이 지나 깨어나 손권을 잡아 죽이고 동오를 멸할 때까지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뜻을 제갈량에게 내비쳤고 이후 장비마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또다시 사흘 밤낮을 펑펑 울며 두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조 사망
220년 정월에 복잡다난한 관계였던 조조가 죽는다. 아마도 형주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유비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고 천하통일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을 것이나 관우가 죽고 형주를 상실한 유비는 곧바로 그런 대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조비는 너무나도 손쉽게 왕위를 계승했다. 유비는 조조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한염을 보내 글을 받들고 가서 조문하게 하고 조문품으로 비단 등의 예물을 보냈다.
여기서 위서와 전략의 기록이 갈리는데 위서에선 조비는 초상을 빌미로 유비가 화친을 구한다고 생각해 짜증을 냈고 형주 자사에 명해 한염을 죽이고 사명을 끊도록 했다.
반면 전략에선 한염이 병을 핑계로 상용에 머물면서 글과 조문품을 보냈는데 마침 조비가 칭제하고 나서는 그더러 여기 오라고 하는 답서를 보냈고 유비가 그 답서 꼬라지를 보고 마침내 칭제했다고 한다.
학경의 경우 '유비가 조조, 조비와 원수인데 친선용으로 조문을 할 리가 있겠는가? 위나라인들이 과장한 것이다'라고 위서의 기록을 깠고, 반미의 경우 위서랑 전략의 기록이 틀린데 전략의 경우엔 확실하지 않나 싶다고 의견을 달았다.
왕랑이 허정에게 서신을 보내며 이르길 "의심하며 꺼림이 없을 수 있어, 길이 처음으로 개통돼, 옛정을 마음껏 얘기하며, 소식을 전하오", 또한 "마침 천명이 성주(聖主)에게 수여하는 시기를 맞이해"라 이름을 생각하니, 바로 이때라고 했다.
다만 자치통감에 따르면 7월에 맹달이 항복하고 산기상시에 봉하고 서성 세 군을 합쳐 신성군이라 하고, 맹달에게 신성태수를 맡겼다. 조비는 정남장군 하후상, 우장군 서황을 보내 맹달과 함께 유봉을 습격해 상용을 탈취했는데 조비가 제위에 오른 건 10월이므로 조비가 제위에 올랐을 때 상용은 위나라 땅이었다.
이렇게 되면 한염이 병들었다 칭하며 (더 나아가지 않고 촉나라 땅인) 상용에 머물며 글을 위나라로 보냈는데 때마침 조비가 제위에 올라 한염이 올린 글을 받아 답서를 보낼 수는 없다.
황제가 되다
건안 25년(220년) 정월 조조가 죽자 조비가 뒤를 이어 위왕에 즉위하고 연호를 연강(延康)으로 바꿨으며 10월에 마침내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스스로 위나라의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황초(黃初)로 개원했다.
이로서 한나라는 마침내 멸망했다. 촉서 선주전과 화양국지에 따르면 촉에 헌제가 해를 입었다는 소문이 전해졌고[81] 이 사태에 대해 유비의 대응은 빨랐다. 유비는 상복을 입고 발상하며 헌제가 시해당했다고 선포하였으며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물론 헌제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물론 유비와 그의 수하들이 헌제가 정말 살해됐다고 오해했을 수 있다. 당장 위나라 현지에 있던 소칙만 봐도 헌제가 선양하고 나서 해를 입었다고 여기고 곡을 했으며 헌제 스스로도 효헌황후 복씨가 조조에게 죽을 때 스스로의 신변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고 믿을 정도였다.
이릉대전 당시 유비에게 보내는 제갈근의 편지에는 '폐하께서는 관우와의 친분과 돌아가신 황제(先帝)[82]와의 관계를 비교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헌제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었으므로 당시에 헌제가 선양을 하면 무사하지 못할거라는 소문은 분명 퍼져 있었던 듯하다.
그렇지만 시간이 한참이 지난 나중에도 계속 착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헌제가 선양 후 산양공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여생을 보냈다는 사실은 위나라의 국가 기밀도 아니었다. 따라서 촉나라 수뇌부가 그 사실을 영원히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어쨌든 헌제가 해를 입었다는 소문이 퍼진 후 유비의 주위에 있던 무리들은 상서로운 징조를 말하기 시작한다. 모두 많은 길조를 말하며, 해와 달이 서로 이어지는 듯했다는데, 삼국지집해의 저자 노필은 이는 모두 광무제가 도참(圖谶)을 숭상한 풍습을 따른 것이라고 했다.[83]
의랑 양천후 유표, 청의후 상거, 편장군 장예, 황권, 대사마의 속관 은순[84], 익주별가종사 조작, 치중종사 양홍, 종사좨주 하종, 의조종사 두경, 권학종사 장상, 윤묵, 주군[85]등 주로 익주출신 인사들이 상언하길 여러 도참을 말했다.
촉서 선주전과 화양국지 유후주지를 종합하면 여러 도참이 나오는데 예컨데 낙서견요도(洛書甄曜度) 에서 이르길 "적가(赤家)의 세 태양은[86]덕이 창성해, 9세(世)에 비[87]를 만나니, 황제가 되는 때로 삼기에 적합하다."고 했고[88]
주군의 부친(주서)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 주군의 아버지가 아직 죽지 않았을 때 수차례 말하길 남서쪽에 여러 차례 누런 기운이 있어 선 것을 헤아리니 몇 장(丈)이나 되었고 때때로 상서로운 구름과 바람이 선기(璇璣-선성과 기성. 북두칠성의 두 번째, 세 번째 별)에서 아래로 내려와 이에 호응했고 도서와 같으니 이는 필시 천자가 나올 징조다. 응당 익주에서 성스러운 군주가 흥기하여 중흥할 것이나,
이때에는 허도에 황제가 살아 계시므로 신하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이에 유비가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응해, 속히 홍업(洪業)에 임하시며, 해내(海內)를 편안하게 하길 바란다고 했다.
익주 출신 인사들이 이렇게 익주에서 한실을 중흥할 것을 말하며 민심에 순응해 유비에게 칭제를 권하는 것은 그만큼 유비가 생전에 유비정권의 흥망 = 익주호족의 흥망으로 등치시켜 익주호족과 후일 황제국으로 등장할 촉한을 묶어버리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화양국지에 따르면 유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다음해(221년) 봄, 태부 허정, 안한장군 미축, 군사장군 제갈량, 태상 뇌공, 광록훈 황주, 소부[89] 왕모 등이 유비가 즉위하도록 간청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이들은 조비가 찬탈하고 시해하며, 한실을 없애고, 잔혹하고 무도하며 사람과 귀신이 매우 분해하며, 유씨를 모두 그리워하고 있으며 지금 위로는 천자가 없어, 천하가 놀라 두려워하나, 우러러볼 곳이 없다했다.
촉서 선주전에 따르면 이 당시 상서한 신하들만 8백여 명인데 이 정도 숫자라면 다 외부 출신이나 형주 인사들 뿐일리가 없고 익주 출신들까지 합쳐서 출신을 가리지 않고 촉한의 신하 대다수가 상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상언에 따르면 이들 모두 상서로운 조짐을 자세히 진술해, 도참의 뚜렷한 증거라고 했다고 한다. 이들은 유비가 이미 거절했던 한의 혈통을 이어 제위를 잇도록 하는 일을 권했으나, 유비는 이를 또 다시 허락하지 않았다.
유비가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최측근 제갈량이 진언하는데 '경순이 광무제에게 천하 영웅들이 따르는데 제위에 오르지 않으면 그를 따를 자가 없게 된다고 하여 황위에 올랐다,
지금 조씨가 한(漢)을 찬탈하여 천하에 주인이 없는데 대왕께서는 유씨의 일가로 세계(世係)를 계승해 몸을 일으켰으니 지금 제위에 오름이 마땅하며, 대왕을 따라 부지런히 힘쓴 자들이 작고 사소한 공을 바라고 있다'라고 하여 유비를 광무제에 비견해 설득하였다. 결국 유비는 이 말에 따랐다.
이는 즉, 여러 신하들이 유비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요청하게 한 것으로 처음엔 익주인사 출신 실무 관료들의 지지를 얻고, 그 다음엔 주요 측근들과 외부 인사, 형주, 익주 출신의 삼사(三師), 구경(九卿)[90]들의 주도하에 자신을 따르는 형, 익주 관료 상당수들이 지지를 표명하게 한 다음, 촉의 많은이들이 촉한 정권이 세워지는데 도참을 이용하도록 참여하게 하고, 마침내는 최측근 제갈량의 간언으로 어쩔수 없이 황제 위에 오른다는 구색을 갖춘것이다.
이에 유비는 유파를 책임자로 삼아 제위 등극에 대한 모든 문서를 작성할 것을 지시하고 칭제를 준비했다. 제갈량과 박사 허자, 의랑 맹광이 즉위를 위한 의례 작법을 정하고, 길일을 택했다.
그리고 서기 221년 4월 6일, 유비는 마침내 성도 무담(武擔)의 남쪽에서 한의 황제로서 즉위하고 연호를 장무(章武)라고 하였으며[91] 대사면을 행했다. 백관을 두며, 종묘를 세우고, 한고제 이하에게 제사를 지냈다.[92]
제갈량을 승상(丞相)으로 삼고 허정을 사도(司徒)로 올리며 장비와 마초를 각가 거기장군(車騎將軍),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아 군사를 지휘하게 했다. 후일 전한, 후한과 구분하기 위해 촉한이라고 불리게 될 나라의 공식적인 등장이었다. 유비는 한의 계승을 천명했던 만큼 한나라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했는데,
그 제도에 따르면 군부의 서열은 가장 위에 대장군이 있고 그 다음에 표기장군-거기장군 순서인데, 유비는 대장군(大將軍)을 임명하지 않았다. 유비의 측근 중 장비, 마초를 능가할 서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직 죽은 한 사람 때문이기에 일지도 모른다.[93] 유비는 유파가 쓴 다음과 같은 글을 하늘에 올렸다.
건안 26년(221년)[94] 4월 병오일, 황제 유비는 감히 현모(玄牡, 희생용 검은 소)를 써서 황천상제(皇天上帝)와 땅의 천신과 지신에 밝게 고합니다. 한나라가 천하를 차지해 역수(歷數)가 무궁했으나, 일찍이 왕망이 찬역하자 광무황제가 진노하여 이를 주살하고 사직을 다시 보존했습니다.
지금 조조가 무력에 의거하여 잔인한 짓을 예사로 저지르니, 주후(主后)를 살륙하고 하늘에 차고 넘칠 정도로 죄악이 커 중국을 망치며 하늘의 뜻을 되돌아보지 않았고, 조조의 아들 조비는 흉역한 마음을 품고는 신기(神器)를 훔쳐 차지했습니다. 뭇 신하, 장사(將士)들이 이르길, 사직이 무너지려 하니 저 유비가 응당 이를 닦아 2조(한고제, 광무제)의 대업을 잇고 천벌을 봉행해야 한다 했습니다.
저 유비는 덕이 없어 제위(帝位)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 백성들과 바깥의 만이(蠻夷) 군장(君長)들에게 물으니 그들이 모두 말하길, '천명에는 응답하지 않을 수 없고, 선조의 유업은 오래도록 폐할 수 없으며, 사해(四海)에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된다'하며, 온 나라 땅이 저 유비 한 사람을 의지하며 바라봅니다.
천명을 두려워하고 또한 한나라의 제위가 장차 땅에 떨어질 것을 근심하여, 삼가 길일을 택해 백관들과 함께 단(壇)에 올라 황제의 옥새와 인끈을 받듭니다. 제사물품을 마련해 천신(天神)께 고류(告類, 황제나 황태자 즉위식 등 때에 행하는 제사의식)하니, 신들께서는 흠향하시고 한가(漢家)에 복을 주어 사해를 영원히 평안케 하소서!
평생 황실을 좌지우지하며 무시했던 조조는 죽을 때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왕의 직위였고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지만 찬탈을 하지 않고 한의 신하로 죽었다. 반대로 한나라 황실의 존속과 부활을 위해 노력했던 유비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촉한의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둘의 삶을 생각해볼때 묘한 결과가 나왔다고 할 수있다.
물론 조비가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어 조조를 무제로 추존하긴 했지만 조조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이는 그만큼 유비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얼마나 기민하게 여겨보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상황이기도 하다.
사실상 당시 천하에서 오로지 세력있는 한실 종친은 유비 뿐이었으나 헌제는 어쨌거나 한나라의 황제였고 헌제가 있는 한 유비는 한중왕으로서 한실 부흥을 외치며 왕호의 칭호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선양으로 황제위를 찬탈하자 유비가 황제위에 오를 명분이 생긴것이다.
같은 해 5월, 유비는 황후 오씨를 세우고, 유선을 황태자로 삼았다. 6월, 유영을 노왕으로, 유리를 양왕으로 삼았다.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장무 원년에 촉한의 호(戶)는 20만, 남녀 구(口)는 90만이었다.
비시전에 따르면 신하들이 한중왕을 추천하여 제(帝)로 칭할 것을 논의했을 때, 비시가 유비의 황제 즉위를 반대했고 때문에 이로 인하여 거역하는 뜻아 되었으며, 영창종사(永昌從事)로 좌천되었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당시 비시를 좌천시킨 것은 촉한 조정으로 조정의 뜻이 황제 추대로 모여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비시의 논조는 당장 황제에 오르기보다는 위나라를 토벌하고 적절한 때에 황제에 오르자고 한 것이니 궁극적으로는 유비의 황제 즉위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비시의 이런 태도를 후일 있을 이릉대전을 막기 위한 시도로 보기도 한다. 유비는 황제에 오른 후 형주의 수복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동진을 했는데 일각에서는 진정한 목표는 찬탈자인 위나라라는 논지를 내세웠고 비시 역시 사실은 그런 의미로 말했다는 것.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했다.
이릉대전
유비 생애 최악의 대패.
221년 7월, 유비는 관우를 잃은 분노를 마침내 폭발시켜 군사를 이끌고 형주를 공격한다. 조운, 진밀 등의 중신들을 비롯해 최고 참모 제갈량도 암묵적으로 반대했을 정도로 (출신을 가리지 않고) 촉한 조정의 신하들 대다수가 반대했으나 유비는 이 의견을 듣지 않았다.(화양국지 유선주지)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유비는 몹시 성내며 허락지 않았다. 결국 유비는 이 전쟁에서 대패했고 그것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는다. 당대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공격할 이유가 있었다는 해석1,2,3,4,5 의견도 있다.
신선전에 따르면 이의기는 촉군 사람으로 도술을 알았다. 소열 황제(유비)가 오를 정벌하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 맞이해 그가 도착하자 길흉을 물었다. 의기는 답변을 하지 않고 종이와 붓을 찾았는데, 병마·(병)기를 수십 장 그리더니 문득 그를 한 장씩 찢어버렸다. 또 큰 사람을 하나 그렸는데, 그를 땅에 묻어버리고는 떠나버렸다.[95]
유비의 공격
촉군은 최초 국경지대인 무현과 자귀까지 큰 무리 없이 진군한다. 육손, 이이, 유아는 의도군 서쪽인 무현과 자귀현에 주둔해 있었는데, 촉군의 선봉인 오반과 풍습은 무현에서 이이 등을 격파했고, 육손은 후퇴한다.
유비는 병력을 자귀로 진격시켜 그곳까지 점령했는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그 병력이 4만 명이었다. 유비는 이로서 동쪽으로 향하는 통로를 온전히 확보했고 무릉의 오계만이(五谿蠻夷)들은 모두 사신을 보내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자귀가 함락된 시점에서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해 대항하게 한다. 그는 5만의 병력을 육손에게 배당했고 주연, 반장, 한당, 서성, 손환, 송겸 등을 휘하에 배속시켰다.
후일 서진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수군을 통해 이 지역을 밀어버렸지만, 유비 같은 경우 확실히 동오를 제압할 전력이 아니기 때문에 수로와 육로 둘 다 썼다. 전선이 밀리거나 후퇴해야 하는 경우를 대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 수군이 육군의 속도에 맞춰줘야 하니까 속도의 이점은 없다.
대신에 병력충원이랑 보급이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는데 유비는 이것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밑에서 설명하겠지만 이릉을 넘어서선 유비가 효정에 주둔하고 오반과 진식이 이릉에 주둔함에 따라 육군과 수군이 나뉘게 되어 효정의 촉군을 상대하는 육손 입장에선 촉군이 배를 버리고 도보로 진영을 만든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한편, 유비가 동쪽으로 오고 무릉만이가 준동하니 손권은 이릉대전과 별개로 보즐이 이끌고 북상하던 교주의 1만 군사로 익양에서 적을 대비하게 했으며, 무릉만은 합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군대가 일어나 소란했던 영릉과 계양, 무릉만 군은 대전이 끝난 이후 보즐의 1만 군에 토벌된다.
무릉만을 유도하려던 번주와 연계해 반기를 들었다가 손권에게 먼저 격파되었었지만 이후 영릉의 7개 현을 지키면서 소릉태수로 자칭하며 촉을 섬기고 이(夷)의 경계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이 지역 반란의 필두격 인물인 습진도 반준에게 격파당한 후 수개월을 버티다 자결한다.
222년 봄 정월, 유비가 자귀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고, 오주전에서는 송겸이 촉한의 주둔지 다섯 곳을 모두 격파, 함락시키고 그 장수들을 참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최초 촉의 육로를 통한 형주 진출은 촉군이 진지까지 세워 주둔하기까지 했는데도 그 기간 동안 오군과 대치를 하다가 돌아올 정도로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시기 정월, 장군 오반, 진식이 이끄는 수군이 의도 이릉현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함으로써, 촉군은 원정 시작 약 반년 만에 비로소 오나라의 최전선이자 강릉으로 갈 수 있는 관문인 요충지 이릉을 점거했다. 이후 장군 풍습을 대도독으로 임명했으며, 장남을 선봉으로 삼고 보광, 조융, 요순, 부융 등은 각각 별독(別督)으로 임명하였다.
자치통감에는 이미 유비가 자귀에서 효정으로 출발하기 전에 수십개 둔영이 무현부터 이릉경계까지 지어져 있었고 이 상태에서 정월부터 6월까지 오나라와 대치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 1월 진식과 오반의 수군이 이릉까지 진출하며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2월, 황권전에 따르면 자귀에서 유비가 남하하여 형주 전선에 직접 참전하려고 하자, 유비군의 참모 황권은 손권군의 전투력이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며, 장강의 수로를 타고 내려가는 진로는 비록 물살을 타고 나아가기가 쉽지만 전세가 불리하여 퇴각해야 할 때에는 되려 물살을 거슬러야 하는 탓에 진퇴의 차이가 크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그는 이러한 형세에 유비가 지속적으로 최전선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으니, 자신이 직접 선봉이 되어 싸우겠다는 간언을 내놓았다. 황권의 발언은 본대가 적의 공격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상황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릉을 넘어선 지역에서의 원정 실패 가능성을 상당히 깊게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유비는 이 발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남하한다.
실제로 황권은 단순히 전략가로서의 기량 뿐 아니라 두호와 박호를 격파하는 등 나름대로 지휘 실력 또한 갖췄음을 실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그 상대가 파촉의 일개 호족과 이족에 불과했으니, 황권 본인의 말대로 손권군의 전투력을 우려한다면 차라리 군사지휘관으로서는 훨씬 뛰어난 자신이 계속 일선 지휘를 맡는 게 맞겠다고 유비는 판단한 모양이다.
무엇보다 오나라와 손을 잡은 위나라의 배후침공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고 그 곳을 방어할 믿을 만한 카드는 황권 정도밖에 없었다.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선봉을 청한 황권을 진북장군으로 삼아서 장강 북쪽에 있는 여러 군사를 감독하게 했다.(권중달 자치통감 번역) 북쪽에 있었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한 이유에 대해 선주전에선 '이릉도(夷陵道)에서 오군과 서로 맞서게 했다.'로 기술하고 있지만
황권전에서는 '강북의 군대를 통솔하여 위나라 군대를 막도록 했다'로 기술하고 있다. 두 서술이 충돌하는데, 이릉도에서 오군이 배후를 끊는 것을 막는 것과 동시에 북쪽의 위군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 둘 다였을 것이다.
목적이야 어쨌든 황권을 강북에 있는 군대를 '감독'하게 한 것은 동일하므로, 자치통감에서는 '황권에게 장강 북쪽에 있는 여러 군을 감독하게 했다'고만 썼다. 다만 후일 강남의 유비가 퇴각해 길이 끊겼을 때 황권은 위나라에 항복하니 위나라에 더욱 가까운 위치였다고 추측할 수는 있겠다. 한꺼번에 둘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라고 시킨 것이니만큼 황권이 얼마나 유비에게 신뢰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동시에, 유비는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산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의도 이도현 효정(猇亭)에 이동하여 주둔했다. 이는 대치가 길어지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도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손에 넣으려는 기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이후 한산에서 무릉으로 통하여 시중 마량을 보내 금, 비단, 작위 등을 주면서 오계만이를 회유했다. 이들이 촉군에 호응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병력을 보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오서 보즐전에 따르면 무릉만이 움직이려 할 때 익양에선 보즐이 교주의 1만 군사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는데 촉군 진영에 있던 호(胡)왕 사마가가 무릉만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므로 무릉만은 보즐에 막혀 이릉 전선에 합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에서 손권이 2월에 조비에게 직접 보낸 상소에서는 유비가 갈라진 무리 4만 명과 2,3천 필의 말을 이끌고 자귀를 출발했다고 썼다. 이렇게 보면 유비의 군은 먼저 출발하여 이릉에 이르는 진영을 구축한 수군, 효정까지 진출한 본대 4만여 군과 다시 이릉에서부터 효정에 이르는 추가로 진영, 진지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이는 후방군대 크게 둘로 나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유비는 육손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유비의 선봉대를 공격한 손환을 이도성에서 포위하였고, 이것이 사서상 확인되는 유비군의 최대 진군경로에 해당하며 육손전에 따르면 이 포위망은 육손에 의한 대패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이 시점에서 유비군은 약 50개 이상의 진영을 구축했으며, 이 중 무협과 건평에서 이릉 경계까지 설치된 둔이 수십 개에 해당한다.
오주전에 의하면 3월 시점에서 이 진영의 총계는 50여 개이다. 3월로 적힌 기록이고, 대전 전체의 경과를 아우르는 묘사 상 전체 진영의 숫자로 의심되므로 확정짓기는 애매하지만 3월 시점에서 50여 개라는 단정은 가능할 것이다.
다만 손환의 포위가 3월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알 필요는 있다. 어쨌거나 이렇게 지속적으로 사건을 관망한 육손의 평가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촉군은 배를 버리고 도보로 진지를 만든 상황이었고 '어떠한 변화도 불가능해질' 정도로 그저 대치하면서 둔중해졌다.
마지막으로 육손의 명을 어기고 이도에서 촉군을 공격한 손환의 군대를 역으로 포위한 선봉군이 설치했을 진영이 있다. 유비군의 정확한 이도 진격 시점이 파악되지 않기에 이는 오주전에 집계된 3월의 진영에 포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대도독 풍습과 선봉을 맡은 장남이 효정 일제 공격 당시 사망하였으나 이도 포위망 자체는 육손의 공격대상이 아니었으므로[96] 6월 시점에서는 효정부터 다시 이도까지 진영이 이어진 것으로 보이고, 장남은 효정의 권역으로 간주될 수 있으면서 이도 포위망을 관리할 수 있는 위치에서 죽어야 한다.
총합하여 문제기, 육손전, 오주전의 험지 주둔 묘사에 따르자면, 촉군의 진영 배치는 다음과 같이 비정이 가능하다.
line
촉군 각 기지의 험지 주둔 묘사를 볼 때 형문산 주둔은 거의 확실하다. 이릉을 끼고 동/서안에 모두 주둔했음이 확인되므로 형문산 주둔은 이릉 서안과 이어진다. 효정을 둘러싼 진지 비정은 효정 방어를 위해 험지 주둔을 가정한 것으로서 효정과 한 덩어리로 파악할 수 있고, 깔끔한 지도를 원한다면 지워질 수 있다.
효정과 이도 사이의 주둔은 이도 공격을 담당했을 선봉대인 장남이 전몰하면서도 효정 주둔으로 적힌 계한보신찬의 서술에 근거한다. 점이 아니라 선으로 표시된 것은 사서상 진영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묘사와 실제 육손의 공격 당시 개별 진영이 각각 공격당해 개별적으로 저항/항복한 묘사에 의거한다.
유비는 강가에 병력을 배치하여 육군과 수군이 서로 최대한 지원할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릉을 넘어오면서 부터는 수군은 작전을 포기하고 진식의 지휘 아래 진격을 하지 않고 일부는 해체되어 오반의 지휘와 함께 유비를 따라 전방으로 이동한 듯이 보인다.
이는 수군이 독자적인 단위로 활동을 포기하고 이도 등을 함락시키기 위해 선봉의 육군전력을 강화하려고 전환되고 나머지는 이릉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거나 이후 기록에서 수군의 기록은 마안산의 수군격파 기사와 자귀의 배를 버렸다는 기사가 나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이후 사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선주전에선 이릉 양안에 수군이 주둔한다는 기록 이후 패퇴할 때까지 수군의 기록이 끊긴다. 육손전에는 유비가 이릉을 넘어온 시점부터 수륙병진을 포기하고 배를 거의 버리다시피 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육손은 이러한 정황이 달라질 수 없다고 평가했다.
군사적 단위로서의 수군이 완전히 해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 이릉 점령 이후로 활동 기록은 육손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마안산 전투에서 촉군의 병사들과 수군이 일거에 손실되었다는 기록과 자귀에 도달한 이후 배를 포기한 기록이 존재해서 이릉 인근에서 수군이 격파되었다는 기록은 있기 때문이다.
별개의 퇴각 기록, 선주전에서 자귀에서 버려진 배의 존재가 확인되므로 모든 선박이 문자 그대로 버려지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각 진지에 분산배속되어 연락/보급 등의 역할을 맡아 통합된 '수군'으로서 활동할 여력을 잃었거나, 혹은 이릉에서 후방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박들이 주둔한 상태였을 것이다. 적어도 효정에서는 육손의 수군을 막을만한 전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장비가 살아 있었거나, 위군과 맞설 지역에 다른 믿을 만한 장수가 있어 황권을 효정의 선봉으로 보낼 수 있었다면 후방인 이릉에는 유비 자신이 주둔하고 이릉의 수군을 따로 분산하지 않고 장비나 황권과 함께 효정에 보내 그곳에서 피해를 입더라도 지휘부는 무사할 수도 있었겠지만
숙련된 야전 지휘관이 부족했던 당시의 촉군은 총사령관인 유비가 전방에서 공격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효정에 주둔하여 적어도 몇달은 버티고 있었을 이도성을 공략하고 있었으며 수군은 일부는 전방을 지원하기 위해 육군으로 전환되고 나머진 효정에서 육군과 함께 공격하며
수로를 지키기보단 후방을 지키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장비를 대신해 효정에 있는 대독인 풍습부터가 상대편 지휘관인 육손을 경시하고 방심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후 약 1년여가 지난 장무 2년(222년) 6월경, 효정에서 2월부터 오군과 대치하고 있던 유비는 오반에게 수천 명의 군사만을 주어 평지에 진영을 새로이 세우게 하고 육손을 유인하니 다른 오나라 장수들은 모두 공격을 주장했는데,
육손만은 유비가 산골짜기에 복병을 둔 것을 간파하여 공격하지 않고 버텼다. 결국 유비는 8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산골짜기에서 나온다.
오군의 분위기는 지휘관인 육손과 휘하가 양분되어 있었다. 당시 육손의 부장으로 종군한 주연, 반장, 한당, 서성 등은 모두 유비를 빠르게 격파하길 바랐으며, 이에 응하지 않은 육손이 유비를 두려워한다고 여겨 원망했다.
이러한 태도는 이도에서 육손의 명을 무시한 손환이 유비의 선봉대를 공격하려다가 역으로 유비에게 포위되어 방어전을 시작한 이후로 재차 관측된다. 장수들은 육손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기에 육손이 칼을 잡고 강경하게 나와야 할 정도였다.
이렇게 육손은 장수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강력히 고수했다. 육손전에 따르자면, 육손은 (유비군이 다다른) 이릉은 나라의 최전선에 있는 관문일 뿐이며, 분명히 요충지지만 그 자체로서는 언제건 함락될 수도, 함락 당할 수도 있는 입구일 뿐이라는 자세를 견지했다.
따라서 아직 오나라의 초입에 도달했을 뿐인, 더군다나 험지에 주둔한 촉군에게 오군이 먼저 공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후일 육손의 아들 육항은 보천이 서릉(이릉)에서 반역하자 '서릉은 빼앗기면 이남의 이민족들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지니 강릉을 버려서라도 서릉을 차지해야 한다.'라고 하긴 했지만 이때는 촉한이 멸망해 북쪽의 형주뿐만 아니라
서릉 서쪽의 익주까지 진나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서릉이 전략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위치가 되어 오나라가 여길 빼앗기면 진나라는 익주에서 삼협을 거쳐 서릉을 통해 다시 북형주의
양번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오나라의 형주를 유리한 상황에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에 서릉을 지원하기 위해 출격한 양호 등의 서진 구원병력은 익주가 아니라 북형주에서 오기도 했고, 이는 익주에서만 이릉으로 진격할 수 있었던 유비와는 차이가 있다.
한편 유비에 대항할 때, 장군들 가운데 어떤 이는 손책 시대의 노장이고,어떤 이는 황실의 친척이었으므로 각각 긍지를 갖고 서로 듣고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육손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비는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조조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오늘 그가 우리의 경내에 있는데, 이것은 강대한 적수인 것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국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서로 화목해야 하며 함께 이 적을 무찔러서 위에서 받은 은혜를 보답해야만 하는데, 서로 순종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해야만 되는 일이 아니다.나는 비록 서생이지만, 주상의 명령을 받았다.
국가에서 여러분들을 굽혀 나의 명령을 받도록 한 까닭은 나에게 칭찬할 만한 약간의 장점이 있어 치욕을 참아내고 중임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 맡은 일을 해야지, 또 어찌 말을 하겠는가! 군령(軍令)은 영원한 것이니, 범할 수 없다.
보기에 유비의 '굳히기'는 나쁘진 않은 전략으로 보인다. 촉군이 한중 점령 이후 조조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던 까닭에서는 역시 지형의 유리를 빼놓을 수 없다. 위험한 지역을 공격해 들어오면서 수세에 몰렸을때를 대비해 각 진영을 험지에 둠으로써 점거하고 굳힌다는 발상은 나쁘지 않다.
실제 유비가 세운 전략을 두고 오나라 장수 전원이 빠른 개전을 원했고 개전을 막고 있던 육손을 원망했다는 점에서 지형을 위시하고 적군을 유인한다는 유비의 발상은 통용되지 못할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유비는 효정에서도 대대적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유도하는 유인책을 쓰기도 했고 이때 오군의 다른 장수들은 다 넘어갔으나 육손만은 넘어가지 않아 무산된 전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육손이 마침내 수세를 풀고 비로소 교전에 나설 때가 됐음을 천명했을 때, 앞서 출진을 주장했던 장수들은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며 되려 사령관의 지시에 반대를 표했다.
육손을 제외한 제장들의 여론은 이미 많은 요충지는 모두 유비가 선점해 굳게 지키고 있으니 적군의 주둔지를 치기 어렵고 공격하면 반드시 불리하는 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상태였으며, 이는 유비가 선택한 전략이 일견 효과적이었을 여지가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으로 유비는 손권의 애간장을 태우게 해서 돌발적인 선공을 취하게 만들고 이를 이를 역격하면서 형남의 이민족들과 호응하여 남군을 싸먹으려 했다는 전략을 입안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전적으로 상대방의 '섣부름'에 의존하여 전술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시도였으며 상대가 육손이 아니라 빠른 개전을 원하던 다른 장수였다면 몰랐겠지만 실제 역사상에서 육손은 오나라 장수 전부의 이러한 섣부름을 효과적으로 관리했다.
결국 이릉대전에서 촉군은 지형의 유리는 있을지언정, 한중공방전에서 촉군의 승리를 성립시킨 나머지 요소가 없었다. 육손이 증명했듯이 이미 촉군이 수백킬로 미터의 보급로를 유지시키고 있는다는 점, 지형에 의존하는 이상 진군 속도가 늦어지며 이것이 전체 군의 부담을 다시금 가중시킨다는 점,
당시 촉군이 진공한 이릉이 아직 최전선에 불과하여 설령 빼앗아도 빼앗기기 쉽기 때문에 적에게 반드시 먼저 와야만 할 전술적 이유를 제공할 수 없었고, 따라서 상대가 일단 육손처럼 관망에 나서면 조금씩 지형에 의존해 진영을 늘려 나가며 진영이 얇아지는 것 외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더불어 이민족의 호응 역시 보즐에 의해 막히고 있었을 공산이 컸다.
육손은 이릉은 이도까지 얻어야 의미가 있는 점령지라고 파악하고 손환이 수개월 포위되어 있는 이도가 버틸 것을 자신했으며, 성이 견고하고 식량도 충분하며 손환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다 했으므로 이러한 자신감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지원이 가능한 안정된 배후지가 있는 상황에서 형주의 거점들이 육로로 함락된 사례는 이 시기 전체를 들어서 관측하기 어렵다. 육손은 지형에 기댄 촉군에 말려드는 일이 불필요하며, 공격하면 산지의 지형상 움직이기 어려우므로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수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평야에서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할 일을 경계했는데,
이 중 후자는 특히 이도를 포위한 촉군에 직접적으로 말려드는 일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평야에서 벌어지는 회전은 근본적으로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운 데다가 촉군에는 적어도 2~3천 필의 말이 있었고 이는 기병전력이 몇천 단위로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릉대전 관련 기록에선 오나라의 기병전력이 나오지 않는데 만약 오군의 기병전력이 부족했다면 개활지에서 상대편에 기병이 몇천 정도 있다는 점 역시 껄끄러운 요소였을 것이다. 거기다 육손 스스로 말했듯 유비는 보통 적이 아니기에 신중한 태도를 고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손의 반격
육손의 전략은 맞아 떨어져, 그의 전략에 의하여 오의 영토 내로 5, 6백 리를 들어온 촉군은 장강을 따라서 전군과 후군이 7백 리나 되는 긴 전선을 형성했다. 이 사실을 들은 조비는 유비가 병법을 모르며, 7백리 군영으로 적을 막을수 없고 고원, 습지, 험한 곳 등 장애가 있는 곳에 군영을 설치하는 일은 쉽게 포위당하기에 병법에서 금하는 바라며 유비를 비판했다
윤 6월, 유비를 관망하던 육손은 공격을 시작한다. 다른 장수들은 유비를 이기려면 처음부터 싸웠어야 하지 어째서 본토에 5, 6 백리나 들어와 요충지들을 차지한 지금에서야 들어오냐고 묻자 육손은 원정이 길어져(이 시점에서 원정은 약 1년에 해당한다.) 유비군의 기세가 흐트러졌고, 달리 선택할 계책도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육손전에 따르자면 그가 손권에게 보낸 장계에서 말하길 촉군은 육군과 수군이 함께 진군하지 않았으며, 변화가 불가능한(둔중한) 상황이었고, 배를 포기했다고 언급한다. 실제 당시 촉의 수군 기록은 이릉 점령 기록과 마안산 전투때 격파당했다가 자귀에서 배를 버렸다는 기록뿐이다.
수군을 감독했던 오반은 육로 진군으로 추정되는 매복계의 일원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별개 선박들의 퇴각 기록, 육손전에서의 마안산 수군 대파, 선주전에서 자귀에서 버려진 배의 존재가 확인되므로 모든 선박이 문자 그대로 버려지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따라서 각 진지에 분산 배속되어 연락/보급 등의 역할을 맡아 통합된 '수군'으로서 활동할 여력을 잃었거나, 혹은 이릉에서 후방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박들이 주둔한 상태였을 것이다. 두 가능성은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둘 사이 어딘가가 실제일 가능성이 있다.
선주전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수군은 이릉 양안에 주둔한 이후 더 이상의 활동 기록이 없는 상태였다. 육손전에 묘사된 육손의 지속적인 관측에 따르면 적어도 전방에 위치한 효정과 이도의 사이에서는 오의 수군을 막을 만한 촉의 수군 전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였고 육손은 이를 확신한 시점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최초 유비군의 진지를 공격한 육손군은 패퇴한다. 비로소 유비군을 공격할 시기가 이르렀다는 판단하에 치러진 육손의 첫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지켜보던 부장들은 마치 그것 보라는 듯한 태도로 병사들을 소모시킬 뿐이라고 그를 비판했다.
그러나 육손은 오히려 자신만만하게 유비를 격파할 방법을 알고 있다며 제장들을 다독이며 화공을 시작했다. 육손은 병사들에게 각기 띠풀을 한 묶음씩 준비케 하여 다수의 요새들을 공격했다. 오서 육손전에는 여러 부대를 통솔하여 동시에 공격했다(通率諸軍同時俱攻)고 묘사되어 있는데, 여러 요충지에 있던 유비의 군사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촉군을 격파했다는 뜻이리라.
때는 마침 무더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고[97] 유비군의 진영은 나무 울타리, 목책으로 만들어진 터라 여기에 완전 상극이었다. 덕분에 화공이 크게 성공하였다.
사실 고대에 화공으로 대승리를 거뒀다는 건 전략도 전략이지만 사실 그 군대를 훈련시키고 통솔한 능력을 아주 높이 쳐야 한다. 왜냐면 네이팜탄 같은 걸 터뜨리는 게 아니고 기껏해야 기름이나 땔감 먼저 준비해두고 횃불에 불화살인데 이런 조건하에서 화공은 동시다발적으로 불을 붙여서 한번에 화르륵 해버리는게 중요하기 때문에 무전 이딴것도 없는 그 시대에 화공이 성공했으면 그건 엄청나게 잘 훈련된 군대이며, 그 통솔자가 매우 뛰어나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육손과 육손이 이끄는 오나라 병사들은 그에 적합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황권전에 따르면 유비가 직접 강남으로 갔는데(효정) 육손이 물의 흐름을 타고, 갑자기 포위하자 강남에 주둔한 촉군이 패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육손전과 자치통감에서 화공의 주체가 육손이 인솔한 '각 부대'(육손전), '여러 부대'(자치통감)로 명시되는 점과 이 '여러 군대'가 동시에 함께 공격했다는 점을 보면,
육손의 수군은 강을 타고 이동하며 강에 인접한 진지들에 공격을 펼친 것으로 보이고, 이에 육지의 여러 곳에 주둔한 군대가 호응하여 각자 띠풀과 짚단을 들고 양측에서 육손의 지휘하에 동시에 수륙으로 포위 공격한 형태로 보인다.
배를 타고선 마른 짚단이나 띠풀로 불을 놓아 화공을 할 수는 없을 테고 수군만으로 효정을 포위할순 없었을 테니까. 어쨌거나 이 모든 부대를 인솔하는 총사령관은 육손이었으므로 이때 동원된 모든 오나라 군대는 육손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상에서는 육손이 물을 따라 강가를 향해 공격해오고 육상에서는 화공으로 진지를 혼란시켜 공격해 효정에서부터 이도 사이의 촉군 진지는 양방에서 공격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촉군 지휘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98] 이때 최전선 효정에서 지휘를 맡고 있던 대독이자 당장 계한보신찬에서 적을 가벼이 여겨 (대처할, 수습) 시기를 잃고 위험을 불러일으켜 재난이 이 한사람으로부터 생겨 커졌기에 (이 화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풍습은 반장의 부하에게 베여서 죽임(斬)을 당했다. 이로 보아 반장은 당시 육상으로 효정을 공격했을 것이다.
오군이 패스하고 지나간 이도 포위군의 장남도 주연에게 죽었다. 육손전에 따르자면 이들은 직접적으로 붕괴하지 않은 상태에서 후방의 지휘부가 패주하자 별도로 퇴각을 시작했다.
이도에서 촉군이 포위하였던 바로 그 손환군은 이후에 '매우 강성하여 산골짜기에 가득한' 유비군을 육손과 함께 격파(이 서술은 1차 붕괴가 있던 효정-형문산에 대한 서술이거나, 2차 붕괴가 있던 마안산에 대한 서술이다.)하고 패주하는 유비를 추격해 탈출로 요소요소를 끊어 놓으므로, 일단 촉의 이도 포위군이 퇴각을 시작한 이후 손환군이 빠르게 북상한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도 포위망을 유지하던 선봉 촉군은 공격당하자 자신들이 역으로 포위하던 손환군과 이릉 서편에서 공격중인 한당군, 마지막으로 육손 본대를 거쳐야 유비가 이끄는 촉군 본대에 도달할 수 있는 상황에서 기록이 사라진 상태이고, 이상의 정황을 볼 때 이 선봉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하다가 바로 격파당했다고 간주하는 편이 합당하다.
이 시점에서 촉군에 선봉이라고 명시되는 장수는 장남뿐이고, 그 역시 풍습과 똑같이 이 패배로 목숨을 잃었다는 계한보신찬, 육손전의 기록이 있다. 위에서도 얘기되었지만 장남은 효정의 권역으로 간주될 수 있으면서 이도 포위망을 관리할 수 있는 위치에서 죽었을 것이다.
주연전에는 주연이 5천의 병사를 감독하여 유비와 싸우면서 육손과 협력하다가 '별도로 촉군의 선봉대를 공격해 격파하고 그들의 퇴각로를 막은' 사건이 유비군의 패주와 연관되어 서술되는 기록이 있는데 장남의 죽음은 이 시점으로 비정이 가능할 것이다.
촉군을 지원하던 호왕(胡王) 사마가[99] 또한 목숨을 잃었다. 총사령관 유비는 효정의 공격을 더 이상 막지 못하고 도주했고 촉군의 지휘체계는 총지휘부인 효정이 붕괴된 이 시점에서 개별 진지들에 거의 영향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40여 곳의 진영이 격파되었고 개별 진지들은 경우에 따라 포위당하여 항복을 시도하거나 배를 이용해 무질서한 퇴각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도성을 포위하고 있던 유비군의 선봉이 물러나니 성에 갇혀있던 손환의 애움도 알아서 풀려 손환 또한 참전해 유비를 추격했고 형세가 급격하게 기울어지자 도망칠 곳이 없는 두로와 유녕은 항복해버린다.
효정에 있던 유비는 후퇴하여 자귀와 이릉의 중간 지점인 마안산에 올라 주위에 군대를 다시 포진시켰으나 오군은 이를 추격해 포위했다. 한 차례의 거센 전투를 끝마치는 것과 동시에 장수들을 다시 한 곳에 불러모은 육손은 다시 한 번 군대를 격려하고 지휘하여 사방에서 육박해가며 유비를 포위해 공격했다.
이때 마안산에서 급히 수습해서 집결한 유비 본대는 효정에 이어 2차 격파되었다. 유비의 진영은 붕괴되고 와해되어 오군에 대패하고 수만명이 전사했다.(자치통감) 이 패배로 인해 원정의 피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결국 유비군의 진지는 모두 격파되었고, 자귀에까지 패배가 이어졌다. 유비는 밤을 틈타 간신히 도망친 다음 자귀에 이르러 군사를 재수습했으며 이 시점에서 자귀에서 형주로 나간 유비군은 조직으로서는 궤멸되었다.
결국 유비는 효정에서 자귀로 돌아와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합하여 배를 버리고 육로로 파군 어복현으로 향했다. 손환전에서는 유비가 배를 버린 까닭을 손환이 앞서 영안으로 돌아가는 길을 끊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시점에서 오의 수군은 이미 자귀를 스쳐지나가 강 상류의 촉 진지들을 공격하는 상태로 보인다. 촉서에 따르자면, 유비가 숨을 고른 자귀 그 자체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상총전, 조운전의 주석으로 달린 조운별전, 계한보신찬에 진수가 단 주석은 효정 패배와 별도의 자귀 패배를 서술하고 있으며 상총전에서는 자귀 패배 당시 상총의 진영만이 무사했다고 말할 정도로 큰 패배를 서술하고 있다. 왕보는 자귀에서의 패배로 사망했다.
결국 유비는 자귀에서 패배할 때 그나마 피해 없이 온전한 상태를 유지한 상총의 부대와 오반, 진식이 이끌고 있던 수군 등 남아 있는 부대들을 규합해 마침내 배를 버리고 육로로 파군 어복현으로 도주를 시도했다.
오군의 손환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유비의 도주로를 차단했고, 육손군은 육로로 유비를 추격했다. 유비는 약 이백여 킬로미터를 산행으로 도주하였다. 후전[100]을 맡은 부융의 군대는 오군의 항복 권유를 거절하며 최후까지 항전하다 전멸한다.
계속해서 육손군의 추격을 받던 유비와 패잔병들은 역참에 있던 한 무명 관리의 기지로 인해 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유비가 백제성으로 들어서려 할 때 그런 유비의 뒤를 막기 위해 역을 관리하는 자가 스스로 꽹과리와 투구를 져다가 태워서 후방의 추격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후에야 유비는 겨우 백제성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101]
하지만 육손군은 속도가 늦어졌을 뿐 추격을 계속했고, 백제성의 지척인 남산에 도달해 이대로 유비를 칠지 어떨지를 상의했다. 오의 제장들은 강력히 유비를 잡을 것을 건의했으나 육손은 위군을 우려해 이를 거부하고 돌아왔다.
자귀에서 유비가 패했을때 조운은 진군해 백제성에 도착했는데 오군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유비는 어복현으로 돌아왔고, 어복현을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이렇듯 부융과 정기 등 충신들의 희생을 대가로 하여 유비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한편 유비가 격파됨에 따라 북쪽의 황권은 222년 8월 길이 끊겨 어쩔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했고 황권 및 영(領) 남군태수 사합 등 318명이 형주자사에게로 와서 가(假)인수, 계극, 당휘, 아문, 고거 등을 바쳤다.
황권 등이 행재소에 이르자 조비는 주연을 준비하고 승광전(承光殿)에서 이들을 보았다. 황권, 사합 등은 각각 앞으로 나와 항복한 사정을 진술했으며, 조비는 군대의 승패와 진퇴에 대해 논설하니 위의 장수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황권에게 금과 비단, 수레와 말, 옷과 갖옷, 휘장과 처첩을 하사하고, 편장, 비장에 이르기까지 하사하는 것에 차등을 두었다. 황권을 시중 진남장군에 배수하고, 열후에 봉했으며, 그날로 불러 수레에 배승하도록 하였다. 사합 등 42인은 모두 열후에 봉해졌으며, 장군, 낭장이 된 것이 100여인이었다.
연의에서는 판본에 따라 제갈량이 유비가 짠 진을 보고 분노해 '이딴 식으로 진을 치라고 한 사람을 처형해라' 라는 말을 하지만 곧 진을 짠 사람이 유비라는 것을 안 뒤 이제 촉한도 끝이라고 탄식하는 장면도 나온다.
결국 진을 잘못 짠 탓에 유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두 차례에 걸쳐 군사를 수습했다고 한다. 물론 정사에서 제갈량이 이런말을 한 적은 없다. 그저 유비를 도울 훌륭한 군사였던 법정의 부재를 한탄했을 뿐.
[80] 같은 제후왕이라도 봉지명이 한 글자인 1자왕(국왕 또는 친왕이라고도 함)이 2자왕(군왕(郡王)이라고도 함)보다 높은 지위다. 다만 고려와 조선이 친왕 격이었던 건 봉왕이나 번왕이 아닌 외번국의 국왕으로 인정하여 그러한 것이다. 봉왕이나 번왕들은 식읍만을 가지고 행정을 못하지만 국왕은 6조 일체를 열 수 있다.
[81] 다만 촉서 선주전은 조비가 황제위에 오른 후, 화양국지는 연호를 연강으로 바뀐 후 이 기사가 나온다.
[82] 한 헌제 유협. 강남에서도 조비가 유협을 살해했으리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자치통감 호삼성 주석에서는 '당시 촉인들이 전하길 한제가 이미 살해당했다고 하니 이로 인해 칭하길 선제라 하였다.'(時蜀人傳漢帝已遇害,因稱之爲先帝)라고 적었다.
[83] 촉서 선주전: 건안 25년(220년), 위문제(魏文帝, 조비)가 존호(尊號)를 칭하고 연호를 고쳐 황초(黃初)라고 했다. 혹 전해 듣기로 한나라 황제가 해를 입었다 하니, 이에 선주는 발상(發喪)하여 상복을 입고, 시호를 추존해 효민황제(孝愍皇帝)라 했다. 이 이후로 여러 곳에서 뭇 길조들이 있다고 말하여 해와 달처럼 서로 잇대었다.(日月相屬).
[84] 殷純, 화양국지에 따르면 음순(陰純).
[85] 선주전 원문에는 초주가 참가했다고 되어 있으나 초주전에서는 초주가 권학종사가 된 것은 유비가 죽은 건흥 연간에 제갈량이 명한 것이며 초주의 나이를 상고하면 당시에는 겨우 20대 초반이라 이런 중대사항에 참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삼국지집해에 학자들이 고증이 적혀있다. 화양국지에는 상서로운 도참을 말할때 "주군(周群)의 부친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라고 적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심가본은 "부친 군" 두 자가 베끼다 잘못돼 거꾸로 된 것으로, 응당 "신 군의 부친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라고 하는 것이 화양국지의 말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여기서 나오는 초주의 이름은 주군이 와전된 것으로, 글을 베끼다 군(群) 자를 놓치고, 다시 초(谯) 자를 잘못 더한것이라고 했다. 중국어 위키문헌에 제공하는 화양국지교보도주(華陽國志校補圖注)본 에서도 같은 이유로 '주군'으로 적고 각주로 '(화양국지의) 각 구본(舊本)과 삼국지에는 동일하게 '초주'라고 적혀있다. 고찰하건데 당시 초주는 아직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다(尚未入仕), 이 표 안에는 주군(周群)이 밝혀져 있다. 당시 전사(傳鈔)하면서 잘못 쓰여 주군이 초주가 되었다. 이곳을 개정하니 상세한 주를 그대로 따른다'라고 교정했다.
[86] 반미(潘眉)가 말하길 '적가에서 세 태양이란, 고조, 광무제, 선주(유비)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세 태양의 예언에 부합한 것이다'라고 했다.
[87] 備, 준비하다는 뜻도 있지만 유비의 휘인 '비'를 뜻하기도 한다.
[88] 이 도참은 광무제 유수와 엮이던 도참과도 유사하다, 낙서견요도(洛書甄曜度)에 따르면 붉은 세 덕이 구세를 창성하면 수(광무제 유수의 휘)의 증표가 모이고 황제의 때로 합쳐져 편안히 새겨 봉해진다.(洛書甄曜度: 赤三德 昌九世 會修符 合帝際 逸刻封.)고 한다. 이는 후한서 97권 지(志) 제7 제사상(祭祀上)에 나오는데 이외에도 유사한 도참이 여기에 꽤 실려 있다. 촉한은 광무제처럼 한실을 부흥한다는 명분이 있었으므로 이런 광무제와의 공통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필의 의견처럼 그 당시의 풍습을 따른 것일 가능성이 있다.
[89] 少傅, 구경(九卿)의 하나로 천자의 어의, 어물, 경비, 식사 따위를 맡아보는 관직.
[90] 이때 구경의 출신을 보면 남양 출신의 뇌공, 영릉 출신의 황주, 익주 한가군 출신 왕모로 왕모는 후에 뇌공의 후임 태상이 된다. 형주에서 온 남양-남군 출신말고도 촉한에선 이와는 관계없는 형남 영릉 출신인 유파, 장완, 황주 등이 기용되기도 했고 왕모는 이후 뇌공 후임으로 태상도 지내면서 주 안에서도 이을자가 없다고 평가받는 등 고평가를 받는다.
[91] 송서 역지(曆志)에 따르면, 유씨가 촉에 있으며, 역법을 고치지 않았으니 한의 사분법(四分法)을 그대로 썼다.
[92] 배송지는 유비가 비록 한경제로부터 나왔다 하나 세대 수가 아득히 멀어, 종족 계보를 밝히기 어렵고, 한을 계승해 어떤 황제를 원조(元祖)로 삼아 친묘(親廟)를 세웠는지도 알 수 없다. 이때 빼어나게 슬기로운 이들이 보좌하고 유생들이 궁에 있었으므로 종묘에는 필시 헌장(憲章)이 있었을 것인데, 실어놓은 기사에서 누락되었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라고 했다.
[93] 그래서인지 유비의 심중을 이해할만한 측근이었던 제갈량은 대장군을 부활시키지 않았다. 촉한에서 대장군이 임명되기 시작한 때는 제갈량이 죽고 승상이 영구결번이 되면서 승상을 대신할 직위가 필요해졌을 때였다.
[94] 유비는 조비가 바꾼 연강, 황초 연호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건안 연호를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95] 유비가 죽은 후에 사람들은 대인을 그려서 묻은 것을 황제가 붕어하는 형상임을 알았다.
[96] 이하는 모두 '육손전'이 출처다.
[97] 연의에서는 무더운 날씨 때문에 촉한의 군세가 지쳤다고는 하는데 일리가 없는 얘긴 아니지만 당시 중국의 기후는 대체적으로 한랭건조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육손은 기후를 살펴보아 마침 건조한 날씨를 기다려 화공을 했을 공산이 있다.
[98] 강한 바람을 탄 산불의 전파 속도는 초속 30-40m 정도나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 상대편의 계략이 화공인 것과 그 공격이 시작되는 시기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면 불길을 잡기도 전에 불이 순식간에 번졌을 수 있다. 만약 효정에 수군이 있었다면 임기응변으로 병력을 수군에 태워 육상의 화공을 피하고 강에선 육손의 수군과 대치하며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상황은 그리 흘러가지 않았다.
[99] 이 호왕이라는 칭호 때문에 사마가는 북방 이민족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자세한 얘기는 사마가 문서 참고.
[100] 후퇴할 때 추격하는 군사를 막아 전 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후방에 있는 부대를 말한다.
[101] 유비는 이릉에 도착한 후 사천성 봉절현에서 동쪽으로 7km 지점에 있는 백제성까지 직통으로 연결하였는데 연도에 역마점을 두어 잘 연결되도록 하였다. 유비가 도망할 때 오의 군사가 뒤를 쫓아왔는데, 이때 다행히 이 많은 역점에서 일을 맡았던 관리인이 유비군이 버리고 간 갑옷 등을 모아서 좁은 길에 모아두고 불을 질러서 추격군의 추격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상 국역 자치통감에 달려 있는 주석.
[출처] 유비의 생애(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