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12.19.) 말씀/ 누가복음 6:6-10
신앙의 본질을 잡으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2024 신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연말 마지막 주일이 돌아왔습니다. 이 주가 지나면 이제 2025년 새해가 다시 시작됩니다. 한 해를 보낼 때 대개는 ‘너무 세월이 살같다.벌써 한 해가 지나면 또 한 살을 더 먹겠구나’ 아쉬운 마음이나 허무주의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쉽지가 않습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지난 주 성탄 예배를 드리면서 재중 집사님도 행복하다는 소감을 이야기하고, 지홍집사님도 우유배달하며 매주 섬에 들락날락하지만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권사님도 행복하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한 해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행복한 마음이 더운 드는 이유는 단지 나만의 행복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지체들과 함께 행복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라면 반쪽 행복입니다. 내 주변의 지체들에도 행복으 바이러스가 퍼져가야 나의 행복도 완성성된다고 믿습니다.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에서 오늘의 삶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렇게 오늘의 삶이 영원하기를 바라는가? 그렇게 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게 사는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순간을 영원처럼 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내일도 행복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 하루 카르페디엠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년초가 년말이나 똑같습니다. 새 해에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다만 행복이란 생각대로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오늘만 아니라 내일도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어떻게 살다왔느냐 물으실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미래가 아닌 오늘 당당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간단히 그 비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냥 열심히만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 ‘비본질’을 잘 구분하여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알맹이와 껍데기, 중심과 변두리, 내용과 형식 이런 것을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책을 보면 데이비드 소로의 시를 인용한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숲으로 갔다. 인생을 자유롭게 살고싶어서였다.나는 인새의 참 맛을 마음속 깊이, 그리고 끝까지 맛보며 살고싶다. 삶이 아닌 모든 것을을 털어버리기 위해.. 삶의 참 맛을 보기 위해서 삶이 아닌 것들을 털어버리기 숲으로 갔다고 합니다. 비본질적인 것들을 털어내고 본질을 붙잡고 살겠다는 이런 삶의 태도는 세상살이이든 믿음의 삶이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런데 말로는 그렇다고 해도 실제 삶을 보며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중요한 본질 보다 보이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따르기 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무엇이 삶의 본질입니까? 무엇이 비본질입니까?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웰톤 웰튼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전통 명예, 규율, 최고라는 학교 교훈을 외치며 오직 아이비릭, 진학 미래의 성공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기숙사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키팅이라는 새로운 영어선생이 부임하면서 피격적인 교육을 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훈련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에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인류야말로 열정의 집합체라는 것을 잊지 말라, 의학 법률, 금융, 이런 것들은 모두 삶을 유지하기 우해 필요한 것들이다. 그렇자면 시 낭만, 사랑, 아름다움이 세상에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키팅 선생도 삶의 수단이 아닌 삶을 삶답게 하는 본질적 요소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필요한 수단들이 아닌 낭만 사랑 아름다움 이런 것이 삶의 참 맛을 맛보게 하는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삶도 불교도 기독교도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는 중요한 이슈입니다. 이것이 구분이 안 되면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불교에 ‘단하소불’이라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단하 선사가 우연히 혜림사를 참배하게 되었습니다. 밤은 으슥하고 객실은 썰렁하였습니다. 때가 한 겨울이라 밖에는 모진 삭풍이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절을 혼자 관리하던 혜림사 스님은 동료승려를 재워주는 것이 사찰의 불문율이었지만 단하스님을 재워주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혜림사 스님은 단하스님을 푸대접했습니다. 추위를 몰아내려고 군불을 지핀 자기 방이 불을 때지 않아 추운 대웅전에 단하스님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단하 스님이 너무 추워서 땔감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자 법당에 들어가 목불 불상을 안고 나와 도끼로 잘게 패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습니다. 얼마 후 대웅전에서 불빛이 흘러나오는 낌새에 놀라 뛰어나와 보니, 불상이 산산조각이 나서 불에 타고, 단하스님은 불을 쬐고 있었습ㄴ지다. 혜림스님은 화가나서 당하스님을 꾸짖었습니다. “중이 어떻게 부처를 태울 수 있는가? 당신 미친게 아닌가?” 단하 스님이 대답하였습니다. “사리가 나오는지 시험해 보는 중이오.” 혜림스님은 황당해 하며 말했습니다. “아니. 나무로 된 목불(木佛)에서 어떻게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 그러면서 혜림스님은 동시에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은 목불을 부처라고 생각하면서 매일 먼지를 털어내며 소중히 모셨는데 방금 그 목불은 부처가 아니라 나무에 불과하다고 실토하였던 것입니다. 혜림스님은 그동안 본질을 두고 비본질 껍데기를 붙들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불교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런데 혜림 스님은 나무로 불상을 만들어 열심히 참배하면서도 먼 곳에 온 손님 즉 살아있는 생불인 단하스님은 차가운 본당에 모시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형식과 제도 껍데기를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비본질적인 것을 마치 본질인 것처럼 붙들고 살면서 본질을 놓쳐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형식과 겁데기에는 생명도 없고 기쁨 행복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냉혹해지고 피폐해지게 됩니다. 인문학적 사유도 막연한 생각의 확장이 아닙니다. 유영만씨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문학적 사고는 상대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본질적인 사고에서 출발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며 내가 만약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반추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사고다. 그런 본질이 없으면 단지 지식의확장 교만할 뿐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하고 자유하고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본질을 붙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국에 세계 최고 큰 교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마다 야심차게 건축 역사를 이루고 경쟁이라도 하듯이 건축 붐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전입니까? 아닙니다.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처소입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산이나 들이 아닙니다. 성전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여러분들 자신입니다. 건물이 없다면 어디서든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베를 드릴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예배의 중요한 본질적 요소는 장소가 아니라 영이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장소를 파기하는 이런 말씀도 성전 예배를 중시하는 과거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성전건축에 목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고 그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선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삼일만이 일으키리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 성전인 자신의 몸을 비유하신 것인데 그 말씀대로 40년이 넘게 지은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졌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홀하심으로 참 성전 새 성전이 되셨습니다. 성전의 본질은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모시고 사는 여러분이 진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욕을 먹는지 아십니까? 본질을 놓치고 껍데기 형식을 붙잡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교회 열심히 나가고,, 에배드리고 헌금하고, 봉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가? 왜? 또 어떻게 믿는가?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일하시는가 엿보다가 고소를 하였고, 손 씻지 않고 먹은 제자들을 관찰하고 지적하였고, 세리 레위인과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거리 시장 모통에 서서 기도하였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참 회개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였지 사랑과 긍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습니다.(마12:7) 예수님은 이들에게 율법의 더 중한바 본질인 의와 인과 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한 손마른 자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엿보고 있다 병을 고치면 안식 법에 적용하여 고소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 한 손 마른 자들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안식일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구약의 십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하였습니다. 6일동안 열심히 일하고 7일은 거룩히 지켜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계명의 본질이 아닙니다. 십계명의 본질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의 형식을 붙잡고 오직 틈을 엿보아 예수님을 잡아 죽일 꼬트리를 찾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안식일의 본질은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불쌍한 한 손 마른 자를 사랑으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주 안에서 거룩하고 복된 날을 맞아 생명을 살리고 선한 일을 하는데 참여하는 날입니다. 의무로 지키는 안식 일이 아니라 일주 내내 기다려지는 복된 날 아니겠습니까? 당연 행복한 예배, 행복한 주일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는 예배가 되지 않고 주를 모시고 생명의 말씀을 듣고 기도와 찬송, 사랑의 떡을 나누며 은혜의 교제하는 행복한 예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새벽 큐티 여호수아 말씀에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명기 10“12-13)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경외. 사랑, 섬김. 순종이 본질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명하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행복의 비결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올해도, 내년도! 우리가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또 장차 주님 앞에 나가서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본질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40년 목회를 하지만 전에는 해마다 후회스런 삶을 많이 살았습니다. 믿음을 가졌어도 내가 바라는 요구들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외치지만 막상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작고 부흥되지 않지 않고, 자녀들도 내 자신의 여러 조건들을 보더라도 바라는 수준에 못미치기 못했습니다. 본질, 비본질 똥 오줌을 가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수적 부흥, 큰 교회 건물에 대한 욕심, 큰 업적을 남겨서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나 자신의 능력도 그렇고 시골 목회가 다른 교회와 다른 동기 목사님들과 비교가 안되었습니다. 초라한 마음, 밝고 행복한 날보다는 우울하고 어두운 날이 많았습니다. 저뿐만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비 본질적인 것을 붙들면 그렇게 될 수 박에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말씀에 빗나가 타락하게 되고, 목회자는 수적 놀음에 웃고 울 수밖에 없습니다. 치유 집회에 가보면 자립이 안되는 수많은 목회자들, 사모들이 상처와 아픔에 속앓이를 하며 치유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대형 교회는 대형교회 나름대로 분파 싸움, 세습문제, 재정문제 등 세상 구설수에 오르 내립니다. 이런 것이 다 본질에서 빗나간 문제들입니다. 요한 계시록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보면 두 교회를 빼고 나머지 교회들은 다 책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본질을 놓치고 육체가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진리 되신 예수님 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사랑과 생명입니다. 이는 영원한 본질의 속성입니다. 어떤 모양이든 사랑과 생명을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키우시며 ‘내가 누구인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면서 끊임없이 신앙의 본질을 세우는 일을 하셨습니다. 성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마지막 장 21장에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한가지 심고자 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것과 내 양을 먹이라는 것, 사랑과 생명 두가지 본질입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를 보십시오. 능력이 많고 이단도 구분해 내고, 큰 일을 많이 하였지만 사랑의 본질에서 빗나갔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찾아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라오디아교회는 스스로 자부할 정도로 아주 큰 부자였지만 영적으로 가난하고 눈 멀고 곤고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이 문밖에 박대받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사람들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겉으로 부요하였지만 생명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배반치 않았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은 그 교히에 열린 문을 두시고 아무도 닫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계 3:14-15). 영적으로 열렸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환란을 당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저버리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네가 실상은 부자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죽도록 중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도 받았습니다(계2:9=10). 본질을 놓치며 어떤 큰 교회도 타락하고 본질을 잡으면 작고 약하고 가난해도 칭찬과 인정을 받습니다. 당연히 작지만 주님이 인정하시는 크고 부요한 교회 행복한 교회가 됩니다. 저는 다윗의 열쇠 책을 쓰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개혁이 무엇인가 나아가 우리 교회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우리 교회의 모델로 삼고자 기도했습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 적은 능력이지만 말씀을 충성되이 지키는 교회. 시골 변방에 있지만 우주적으로 베풀고 나누는 교회가 되리라. 그리고 정말 행복한 목회자가 되어 올 한 해도 행복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행복하다는 고백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론은 그래도 실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뻐 춤을 추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규율, 논리, 계명이란 껍데기를 지키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질인 사랑을 붙들고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잡아서 남는 것이 있는 풍요로운 인생이 되기기를 기도합니다. 확신컨대 누구나 행복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인생은 짧습니다. 알맹이 없는 형식적인 것 비본질적인 것들을 삶에서 떨어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잡고 있으면 시간 낭비입니다. 먹던지 마시던지 사랑으로 하고, 일하던지 공부하던지 책을 읽던지 생명의 말씀에 기본을 두고, 일을 하든지 여행을 하던지 우리의 관심은 영혼 사랑과 구원에 초점을 두고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세상 종말이 오고 주님 앞에 벌거벗은 채 설 때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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