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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아직 완성된 글이 아니기에 펴가신분은 글이 완성된후에 다시 수정 부탁드립니다. 이글은 저의 개인 문집용이기에 저의 가정사 부분 이야기가 삽입된 점과 선조 휘에 존칭 생략한 점 양해바랍니다.
저는 문화류씨 자료를 널리 알리는 것이 목적이지만 저의 글을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자기 글처럼 소개한 분이 있고 또 자기글이라고 다른분에게 보낸 분이 있으나 자기 자랑하려는 노인특성으로 이해하지만 이글은 제가 고생하여 수집한 자료이기에 스크랩 금지를 설정하여 다른 방법으로 글을 옮겨 쓰다보면 이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여 자기 것이 될 것이고 완전히 이해 한 후에는 자기 글처럼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완성된 연말쯤 대승공과 관련이 적은 부분을 삭제하고 댓글 조언을 받아 수정한 후에 스크랩을 허용할 것입니다.
♧ 지금도 다른 성씨와 관계를 분열로 보고 함께 가공인물 제사를 지내면서 삼국사기 기록에 없는 인물을 거론하는 분이 이글을 보고 한뿌리라는 말릏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류차달의 왕건 지원 자료
하정공파광주종친회장
夏谷 류재균
1. 서론
영암군 신북면 모산 12동네 중 통산(이목동 윗마을)에서 태어난 저는 1956년 文化柳氏 모강공파보(병신보) 수보 당시 교정하신 할아버지와 대승공19세 남재공부터 31세 완석공 할아버지까지 직계 선조 묘비를 소문중에서 주도적으로 설립하신 아버지에게 구전으로 들어온 선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문헌근거로 확인하기 위해 왕조실록을 확인하고 자료 수집과 정리과정에서 습득한 사료로 류차달과 왕건 부분을 소개합니다.
문중계책에 의하면 아버지가 소문중 이름으로 직계선조 묘비를 설립하면서 종중경비 절감을 위해 종중운영비등을 매년 또는 수시로 부담하셨고 寅亨(아버지 제당숙)할아버지가 종중사무와 금전출납을 하면서 당신이름과 寅亨할아버지 이름은 묘비에 한 글자도 기록하지 않고 모두 종손이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撰者 書者가 아버지 지인이거나 절친으로 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습니다.
1946년 남재공과 아들 손자 증손들의 각각 문계를 창계할 때 해방후 의식주 해결이 어려운 시기에 영암 신북 종원들이 벼(나락)를 1~5근(1근=600g) 몇분은 10~20근을 기금으로 10여회 거출하여 소문중재산을 만들고 60년대 보리 고개 시절 남재공 위토답 마련하려 돈을 보자기에 쌓아 허리춤에 전대를 묶고 서울 나들이하시던 모습과 그때 매입한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사리현동 1,000평 논이 수백억대 재산으로 된 것을 보면서 종사를 바로 아는 것이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발전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대승공 구전 자료를 문헌상에서 확인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 대승공 탐구를 위해 수년 동안 고서와 신간 판매 서점과 도서관, 해당종중 족보 확인차 관련종중을 방문하고 비문을 확인하고 남도지방 역사학회지를 구하여 정리한 자료입니다.
대승공이 왕건에게 수레와 군량미를 제공해서 고려 개국2등공신이 되셨는데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군웅활거 시대 많은 재물을 조건 없이 제공 했는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2. 대승공 아버지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박은봉저, 책과함께출판사, 2007)에 의하면 왕건은 원래부터 성씨가 없었던 집안으로 할아버지는 작제건 아버지는 용건(왕륭)인데 도선국사가 용건에게 천지 대운수를 얻으려면 아들 이름을 왕건으로 하라는 말을 듣고 성씨를 왕씨로 바꾸었으니 왕건家 성씨가 작씨→용씨→왕씨(王家 : 개성왕씨)로 바꾸어집니다.
아자개 아들이 견훤으로 성씨가 아씨→견씨로 바꾸어지고 백옥삼→배현경(경주배씨시조) 김행→권행(안동권씨시조) 삼능산→신숭겸(평산신씨시조) 지중익→어중익(충주어씨시조) 등 왕족이나 호족들의 성씨가 당대에 바꾸어지는 경우가 후삼국시대 사회상입니다.
특별하게 토반 전주류씨 류방헌 묘지명에 의하면 류기후(신라각간, 증조)→류법반(후백제 우장군, 조부)→류윤겸(대감, 부)으로 이어지는 성씨도 있으나 선조 이름이 4대를 넘지 못하던 시대에 대승공 아버지는 류씨인지 다른 성씨인지 알 수 없으나 유주 호족으로 해상무역상입니다.
신라말 정치적 혼란기에 지방 세력가들이 성장합니다. 그 중에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해상 세력가들이 조선술의 발달로 대외 무역이 번성하고 국가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민간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정주 류천궁은 왕건이 나주로 출전할 때 군함을 수리하고 군량을 마련하는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주포구를 중심으로 서해안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입니다(정청주, 신라말 고려초 호족연구, 알조각, 1996년)
世宗實錄地理志 文化縣 편에 柳씨는 來姓(이주한 성씨)이라고 되어 있어 문화 류씨가 문화현 토성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이주하여 왔기에 류차달선조(父, 祖父)가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儒州로 왔고 유주가 류차달 8대손이며 고려 고종 최씨무인정권기 때 류경 위사공신의 공으로 문화현으로 승격되였고 고려 초부터 문화 지역의 토착 세력인데 대승공 선조는 황해도 정주 신천 해주 평산등 어디에서 무역을 하여 부를 축적했는지 유주로 오기전 부를 축적한 지역의 기록이 없습니다.
3. 以車爲達의 허구
견훤과 신라와 여러 번 교전한 왕건이 出車給餉 以車爲達이라하여 수레에 군량을 싣고와 군사를 먹이고 전쟁을 승리하게 해준 대승공에게“以車爲達”에서 車達 이름을 하사했다는 허구(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처럼 꾸며서 만듦)와 대승공 아버지는 누구인지를 탐구해 보았습니다.
이차위달은 2012년 류주환교수 건의를 받아들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삭제된“차원부설원기”에 차천로가 창작한 내용입니다.(※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 “차원부”는 검색되지만 “차원부설원기”는 삭제되어 검색되지 않습니다)
왕건이 궁예의 장수로 903년 금성(나주)에 침투하여 후백제와 큰 전투를 하게 되고 왕건이 918년 고려를 개국하여 태조왕이 됩니다.
왕건이 왕이 되기 15년전부터 왕건을 지원한 이름이 류차달인데 以車爲達로 차달이란 이름을 왕건이 하사했다면 대승공은 이름 없는 상태로 왕건을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되기에 류차달 이름을 왕건이 하사(賜名)한 것이 아니며 유주지역 대승공家 柳씨는 황해도 어느 포구에서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고 유주지역으로 이주해 온 성씨입니다.
호족들이 전국에서 판을 치고 있던 후삼국시대 태봉과 후백제 신라에 독립적인 호족 세력이 널려 있었고 결국 수도 인근에서 비교적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정도였고 수도(철원 전주 경주)를 벋어난 지역은 신흥 호족들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궁예는 초기에 충청도 경북 지역 대동강 유역 평양을 수복하였고 왕건을 시켜 나주를 탈취하고 견훤을 수전에서 박살내 후백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궁예는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바꾸고 자신을 미륵이라고 자칭하고 중앙집권화를 진행하면서 패서(황해도) 호족들의 인심을 잃게 됩니다.
무역중심지 황해도 호족으로 염주 유긍순, 신천 강씨, 정주 류천궁, 황주 황보씨(황주군)신정황후, 작제건을 위해 예성강 하구지역에 영안성과 궁실을 지을 정도로 세력가인 백주(황해도 연안)의 유상희등이 있는데 904년에 궁예에게 항복한 연백지역 유긍순을 제외하고 신천군 왕건 외고조인 강씨(강효경, 신천강씨의 시조, 손자 강보육은 국조원덕대왕으로 추존됨), 개풍군 신혜황후 아버지 류천궁, 황주군 신정황후아버지 황보제공, 해상세력으로 부와 무력을 축적하여 유주로 온 류차달 아버지 등이 해상세력을 만들어서 부와 무력을 축적하여 송악으로 온 작제건과 용건을 도와주게 됩니다.
승훈이아빠역사이야기(이영민, 신라 말의 호족세력에 대한 고찰, 다움블로그)에 의하면 나주 오씨 다련군 조상은 당의 상인으로 흥해 해외무역을 위해 신라로 건너와 정착합니다. 풍수지리설을 발전시킨 도선과 그의 제자 경보가 영암 출신이고 영암 최씨가 이 지역에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 호족으로 용건에 협력하고 혜성(槥城)은 아산만의 남쪽 연안지역으로 호족 복지겸 선조는 당에서 와서 혜성에 거주했는데, 해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모아 보호했고 강주(진주)에서도 해상세력 왕봉규가 있었고 울산은 당 일본과 통하는 국제항으로 박윤웅 호족이 해상세력 출신 호족으로 용건을 지원하지만 압해(현 신안군)에 능창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여러 섬 군소 해상세력과 결속해 왕건의 수군에 대항합니다(강봉룡, 서남해지역에서 벌인 왕건과 견훤의 쟁패, 목포대 역사문학부 교수)
황해남도 삼천군은 대승공께서 살았던 신천군 일부 지역이였으나 1952년 문화면 5개 리를 통합하여 황해도 삼천군을 신설되었고 면을 없애고 문무면 월남리 초리면 흥학리 달천리를 병합하여 달천리로 개편하였습니다.
신천군은 단군이 도읍을 평양에서 아사달산(구월산) 장당경(藏唐京)으로 천도하여 나라를 다스린 단군문화 발상지로써 고구려시대에는 승산 고려조에는 신주, 근세조선조 (태종13년 1413)대에 신천으로 지명이 변경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문화현은 구월산이 뻗어 내려와 달천온천 삼천온천 신천온천 등 질좋은 유황온천이 있으며 산좋고 물좋고 농산물이 풍부해서 정말 살기 좋은 고장입니다. (이북5도민회 중앙연합회, 서울 종로구 비봉길)
1428년(세종10) 하정공 류관은 상소를 올려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 단군 때 아사달산이라 하였고 고려는 유주로 승격시켰으며 안악군 신당에 단웅천왕 단인천왕 단군천왕이 모셔진 삼성당이 있는데 유사(관청)에 명하여 국가관 확립과 국민이 긍지를 가지도록하였습니다.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처럼 꾸며서 만든 내용중 또 하나는 류차달의 선조입니다.
고려사에서 이제현이 "강보육은 태조의 외증조부가 되는데 추존하는것은 잘못된 것이며 의조 세조 태조 모두 끝자가 건자로 끝나니 예가 아닌데 당시 삼대가 같은 이름을 가지면 삼한의 왕이 된다는 말이 있었다는 것은 후대에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라 비판합니다.
왕건 가문은 강호경→강충→강보육→강보육 딸 진의(증조모)+당 선종→작제건→용건→왕건으로 이어졌고(고려사 세계, 정인지편찬) 궁예의 강씨황후 가문은 강호경→강충→강보전→강순산→강만루→강연창→강씨황후로 이어집니다(신천강씨대종회).
송악 왕씨와 신천강씨는 피를 나눈 사이고 패서지역 호족으로 강력한 유대관계에 있었습니다.
궁예 부인 강씨황후는 청광 신광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청광의 아들 김총은 순천김씨 시조가 되었으며 신광의 아들 김경의 증손이 광산이씨 시조 이종금입니다.
이렇게 성씨가 자주 바꾸어진 시대 류차달선조가 약4800년전 중국 황제로 시작하여 하후우→사씨→단군조선 왕조명→기자조선 왕수긍→신라 차무일로 박혁거세가 차씨성을 하사했다는 것은 허구입니다.
신라시조왕 박혁거세 자신도 성이 없었고 박처럼 생긴 큰 알에서 나왔다고 해서 후손들이 성을‘박’으로 붙여 주었습니다(과목별 학습백과 한국사 초등, 천재교육 편집부, 2001년)
수많은 학자들이 동원된 고려사에서 왕건 선조도 4대 이상은 알 수 없는데 유주에 호족인 류씨 선조가 황제부터 차무일 류차달까지 희씨성으로 9세, 사씨성으로 11세, 왕씨성으로 58세, 차씨성으로 32세, 류씨성으로 5세 합계 115세까지 기록이 있다는 소설은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처럼 꾸며서 만든 허구입니다.
조선 태조가 1392년 정도전 등에게 명하여 1395년(태조 4)에 고려 태조부터 마지막 공양왕까지 37권의 고려사를 편찬한후 1414년(태종14)에 하륜 등이 개수하도록 하였으나 하륜이 1416년(태종16)에 죽어 개수작업이 중단되었고 1419년(세종1)에 류관 변계량에게 다시 개수 작업을 계속하도록 하였고 1423년(세종 5년)에 류관 윤회에게 다시 개수하게 하였는데 주로 호칭과 정도전이 지닌 편향된 시각의 왜곡을 수정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정몽주를 깎아내린 것을 다시 충신으로 평하여 기록합니다.(모 성씨에서는 류관이 고려사를 개수하면서 “차씨 이름 달”이던 차달에게 성씨 柳를 붙여 柳車達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고려 개국공신 명단에 류차달은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1424년(세종6)에 윤회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 이후에도 신개 권제 등이 찬술하였고 이계전 어효첨에게 교정하도록 하였으며 1449년(세종31)에는 춘추관에 전지하여 다시 편찬하도록 합니다.
이 때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등에게 이 일에 대한 감독을 맡겼으나 실제 작업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석형 김예몽 하위지 양성 류성원 이효장 이문형 등 당대의 최고 문관들이 참여하여 1451년(문종1)에 새로 고려사를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年表)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 2권으로 만들어 냅니다.
이후 김종서가 1452년(문종2)에 고려사를 요약하여 고려사절요 35권을 만들었고 1454년(단종 2년)에 고려사 간행에 착수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학자들이 동원되어 왕건 선조를 기록하였는데 강보육 국조원덕대왕 추존이 잘 못이다 작제건 용건 왕건 3대가 이름에 건자가 들어간 것이 잘 못이다 등등 그리고 4대 이상 선조를 알 수 없는데 일게 호족을 누가 연구해주어서 황제부터 류차달까지 115세 까지 세계를 안다는 것인지 허구입니다. 모두 차원부설원기에 써진 차천로 작품입니다. 이 허구 원파록을 지금도 믿는 류씨가 있어 슬픈 현실입니다.
고려사에 의한 왕건의 4대는 왕건이 왕이 된 후 추존한 국조원덕대왕 의조경강대왕 세조위무대왕 태조입니다.
4. 문화류씨 본관(관향 문화현)
세종실록지리지 문화현 항목에 "토성이 吳 康이요 망성이 盧 仇 羅 表 任 영호(令狐)요 래성은 柳 金이요 續姓은 李 崔이다. 인물은 첨의 중찬 문정공 류경이다. 원종 때 사람이다." 라는 기록(채하 류주환, 2008.9.20.)에 의하면 류차달家는 문화현의 래성이며 다른 곳에서 온 성씨라는 것으로 대승공 아버지가 다른 곳에 살다가 문화현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신라 때부터 지배권력층이었던 金씨 朴씨 토전주류씨 등 다수 있었고 지방호족들에게 왕이 성씨를 나누어준다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또 특별히 일정한 개인들에게 성씨를 내려주었다는 사성(賜姓) 기록들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반면 전국을 대상으로 성을 내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대승공께서 황해도지역에 살면서 부를 축적한 인물로 부를 축적하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는 걸릴 것인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래성'이라는 것은 문화에서 부를 축적하고 그것으로 왕건의 삼한통합을 도울 수 있는 기간은 최소한 짧거나 최대한 넓게 생각하면 대승공은 다른 지역에서 부를 축적했고 그 부로 후삼국통일에 기여하고 언제쯤인가 문화현으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래성 기록을 보면 문화로 옮기기 전에 이미 '류'라는 성을 쓰고 있었고 고려 개국 전부터 문화(유주)에 살던 것은 아니었고 다른 지역의 호족이었다가 옮겨갔고 그 자손들은 문화 지역에서 향리(鄕吏)로 지내다가 대승공7세 류공권 때에 이르러 현달하여 중앙무대로 옮기게 됩니다.
대승공께서 고구려 사람이었는지 신라 사람이었는지 백제 사람이었는지 하다못해 중국 사람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구월산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던 분이라면 고구려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故 이수건 교수 입장입니다.
5. 왕건을 지원하게 된 배경
장보고를 신라조정에서 제거한 이후 당과 무역하던 해상 호족들은 해적으로부터 보호해줄 세력의 필요성을 실감합니다.
君子는 血肉의 親형제만을 兄弟라 하지 않고 敬과 禮로 맺어진 四海同胞를 모두 형제로 생각하라는 논어 구절에 나오는 형제동맹(司馬牛 四海兄弟)을 맺어 스스로 해상호족끼리 뭉치고 함께 해적소탕 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대승공 시대 해상호족으로 왕건을 도와준 호족중에 류천궁은 선박수리소에서 군함을 수리하도록 하고 군사를 먹이는 경제적지원을 하였고 오다련은 적군에게 군사 침투로 안내할 인적자원을 제공하였고 견훤장수 능창의 근거지를 왕건에게 알려 준 해상 호족들은 작제건 오다련아버지 류차달아버지의 형제동맹으로 맺어진 혈맹호족들입니다. 궁예장수인 왕건을 목숨걸고 도와준 호족에 류차달 가문이 존재합니다. 남쪽호족들에게 왕건을 도와주도록 설득한 광양 옥룡사 도선국사와 제자들입니다.
대승공이 당대에 본인이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기 보다는 대승공아버지 때 축적한 부가 대승공에 이어지고 대승공아버지의 조언과 작제건家와 교류가 있었기에 류차달이 왕건을 군량미로 지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승공 아버지 이름을 알 수 없어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일부 말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대승공 출생년도를 880년으로 추정하는데 대승공을 비롯하여 류천궁이 왕건을 처음 지원한 시기가 금성전투가 있던 903년입니다. 880년으로 보면 대승공 나이가 23살입니다. 고려건국 918년은 38살입니다. 그래서 대승공 아버지 조언이 있었기에 용건의 아들 왕건을 지원하는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이홍직(국사대사전, 백만사, 1975)에 의하면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청년시절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장사를 하여 많은 재산을 모으고 송악에 돌아온 작제건은 많은 땅을 사들이고 평주 지방의 세력가인 각간 두은점의 딸과 결혼했고 용건은 그의 맏아들이었는데 용건은 대궐 같은 집을 지은 그 이듬해 정월 왕건을 얻습니다. 용건 부인은 한씨이고 용건은 송악군 사찬(沙粲)으로 송악군을 궁예 휘하에 들어갔고 천하를 얻을 성인이 나온다는 도선의 말을 믿고 왕건 만들기에 실행으로 궁예를 찾아가게 됩니다.
용건이 궁예에게 가서 금성태수가 되고 발어참성 성주로 왕건(877~943)을 요청하였고 903년 궁예장수로 나주출전할 때 왕건은 26살입니다. 대승공은 23살 왕건은 26살이라면 왕건 아버지 용건과 대승공 아버지 관련이 나타납니다. 왕건의 29명 처갓집과 궁예 견원 신라관리들 정선호족(전이갑) 기주호족(강훤) 송악호족(왕평달) 강주호족(윤웅 왕봉규 정예) 홍주호족(홍규) 골화현호족(황보능장) 수원호족(백탁) 청주호족(현율 경종 진선) 능성호족(구족달) 압해호족(능창) 등 수 많은 호족 군웅 활거시대 누가 최종승자가 되어 천하를 지배하고 통일할지 모르는 시국에 수 많은 호족과 그들중 한 호족의 장수인 왕건에게 해양세력들이 지원해준 것은 아버지들의 형제동맹 때문입니다.
6. 왕건의 후백제와 신라 전쟁 연표
(PP자료용임, PP자료는 로고 사진 등이 포함됨)
가. 846년 : 장보고 피살
① 신라 조정은 염장을 보내 장보고 제거함
나. 王建家 柳車達家 柳天弓家 吳多憐家등 형제동맹 : (司馬牛) 四海兄弟
① 장보고이후 해적을 보호해줄 곳이 없어 해상무역호족끼리 형제동맹을 맺음
② 공자 제자 사마우(司馬牛)가 모두 형제가 있지만 나는 형제를 잃고 외톨이다. 라고 탄식하자 자하(子夏)가 그를 위로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어 모든 사람이 다 형제다. 그러므로 군자는 형제가 없다고 해서 걱정하지는 않는다.'하였다(※참고문헌 : 論語 顔淵篇)
③ 이들중 왕건조부 작제건, 류차달부, 오다련부 등이 동맹을 맺은 결과 왕건을 지원함
다. 900년대 : 후삼국 해상호족
① 유주(신천)지역 : 류차달(문화류씨 시조)
② 송악(개성)지역 : 작제건(왕건 할아버지)
③ 정주(풍덕)지역 : 류천궁(신혜황후 아버지)
④ 금성(나주)지역 : 오다련(장화황후 아버지)
⑤ 백주(연안)지역 : 유상희(작제건에 충성)
⑥ 압해(목포)지역 : 능창(왕건에 대항)
⑦ 혜성(아산)지역 : 박술희 복지겸
⑧ 영암지역 : 최지몽(崔相昕 아들)
⑨ 영광지역 : 전종회(영광전씨시조)
⑩ 강주(진주)지역 : 왕봉규(당과 외교활동)
⑪ 울산 지역 : 박윤웅 등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인물전)
라. 후백제 건국
① 900년 : 전주에서 견훤이 후백제 건국
② 901년 : 권훤이 신라 대야성(합천) 공격후 돌아오는 길에 나주로 가서 약탈합니 다(서남해 호족들 저항으로 9년간 백제건국을 방해한 분풀이)
③ 장보고를 죽인 신라의 장수 출신인 견훤 보다는 서남해안 호족들 형제동맹으로 견훤에게 비협조적인 상태입니다.
마. 903년(1차) 910년(2차) 914년(3차) : 태봉 장수 왕건 금성(나주) 전투
① 왕건이 서남해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해상 호족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② 대표적인 호족은 나주오씨 영암최씨 영광전씨 등입니다.
③ 오씨가문은 대대로 나주의 목포(영산포)에 살면서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합니다. 나주 오씨는 그 세력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해상동맹 출신입니다.
④ 영암 최씨 역시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후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한 가문이었습니다. 영암은 덕진포라는 항구를 가지고 있어 해상교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⑤ 田宗會는 왕건이 서남해지역을 공략할 때 큰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습니다
⑥ 맹자 민본사상 전파한 백계산 옥룡사 도선국사와 제자들입니다.
(※참고문헌 :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바. 903년부터 柳씨들 왕건지원
① 류천궁 : 정주가 왕건의 수군기지인데 류천궁이 전함을 수리하고 군사를 먹이는 등의 준비 지원합니다.
② 류차달 : 태봉국 왕건 수군 군량미와 고려개국후 견훤과 전투에 군량미와 군량미 수송 수단 수레 제공하여 수천명 군사를 먹일 식량을 류천궁보다 더 지원합니다
③ 류차달은 2등개국공신, 류천궁은 그냥 개국공신이며 오다련은 공신이 아닌 것으로 보아 王建家와 柳車達家의 선조때부터 해상호족으로 교류했고 이들보다 더 지원한 증거입니다.(PP자료용끝)
사. 918년 : 왕건등극(고려 개국)
아. 919년 : 고려 수도 개경으로 이전(이후 18년간 전쟁)
자. 920년~930년 : 고창(안동)전투
① 920년 신라의 구원요청에 고려가 응함으로서 고려 건국후 후백제와의 첫 군사적 대립으로 보마군(步馬軍) 1만으로 대야성(陜川)과 구사군(창원지역)을 함락시킨 견훤은 군사를 진례성(茂朱)으로 옮깁니다.
② 924년 : 견훤 曹物郡(안동 구미 김천 의성 지역)공격
견훤이 아들 수미강에게 대야 문소 2성의 군사를 내어서 조물성을 공격 하였습니다.(제1차 조물성전투)
③ 925년 : 연산진 전투
고려가 후백제 연산진 임존군을 공격하고 태조가 견훤의 군대와 조물군(제2차 조물성전투) 전투
④ 927년 견훤은 근품성(尙州), 고울부(永川)를 습격하고 경주로 진격해 신라경애왕을 죽이고 왕의 족제 김부를 세워 왕(敬順王)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은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공산에서 견훤과 결전했으나 크게 패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은 왕건은 겨우 달아나 위기를 모면합니다.
⑤ 928년 청주로 쳐들어온 후백제군 3,000여 명을 격파하고 포로 300여 명을 잡았습니다. 제3차 조물성전투가 벌어집니다.
⑥ 929년 태조는 영창에게 백제 대야성을 함락하라 명합니다. 고려수군 영창은 참모 최지몽과 장군 등과 함께 배를 타고 나주로 가서 남쪽에서 공격하고 홍유는 다른 장수들과 대야성으로 진격하여 추허조를 붙잡고 대야성을 함략합니다.
신라말 합천 해인사 화엄司宗 두분 중에 관헤는 견훤의 福田(스승)이고 희랑은 태조(왕건)의 복전인데 해인사가 있는 대야성(합천)은 전략적 요충지로 합천 가야산과 지리산 일대가 후백제파와 고려파로 나누어져 대립할 때 희랑이 용적대군(승군)을 보내 후백제 왕자 월광을 물리칩니다(문명대, 해인사목조희랑조사진영상의 고찰, 미술사학연구회, 1978)(※대가야 월광태자 설 있으나 태조26년 943년에 해인사에 전답 500결을 시납한 내용을 판에 세겨 남기고 4대왕 광종이 949년 희랑에게 시호를 내립니다)
⑦ 929년 7월 견훤은 고창 전투에서 견훤은 승산이 없어 보였던 왕건에게 크게 패해 8천여 인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합니다. 왕건이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고창 지방 호족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한반도 재통일의 최종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투입니다
⑧ 929년 12월 고창에서 태조 유금필등이 후백제군을 격파합니다.
자. 934년 : 운주(홍성)전투
운주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후백제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내분이 일어나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 계열과 넷째 아들 금강 계열의 갈등 대립이 극심하게 되었습니다.
타. 935년 : 신라멸망(경순왕 고려에 항복)
파. 936년 : 태조 19년에 지금의 경북 구미 지방에서 고려와 후백제 일리천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백제 멸망 :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하여 935년 견훤이 왕건에 투항
7. 결론
“한국의 역사 한국사(조선사연구회엮, 한울, 1988)에 의하면 후삼국시대 초기 상황은 수십만 단위의 병력이 움직이는 전쟁을 보다가 이 시대의 전쟁을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고려와 후백제의 전면전도 동원된 양 측의 병력이 고작 수천인 경우가 다반사이며 일리천 전투에서 처음으로 만명 단위로 병력이 동원됩니다.
이 시대 호족들이 난립하여 국가 지방통제력이 극도로 떨어졌고 고려 통일 직전까지는 정상적인 병력 동원체제를 구축할 수 없을 정도로 정부조직도 허술했고 전투라야 호족 가병정도 전투에서 왕건을 도왔다는 원인이 있습니다.
柳門家는 고구려 사람으로 대승공 아버지(대승공할아버지)는 당나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부를 대승공에게 유산으로 전달(富 대물림)되었으며 대승공家 왕건家 류천궁家 오다련家 류덕영家(장덕황후) 등 선조들 형제동맹 영향으로 궁예 장수이며 한나라에 왕이 된다는 것이 불확실한 형제의 손자이며 아들인 왕건을 도와주게 됩니다.
대승공 아버지는 문헌상으로 알 수 없으나 현지에서 군량미를 확보하던 당시 전투상항은 민심을 얻지 못하니 천하를 얻으려면 점령지에서 군량미를 확보하지 말라면서 군량미를 운반할 수레 천대와 수많은 전투에서 군량미를 지원해 주었는데 대승공 당대 축적한 부(財力)라기 보다는 대승공 아버지가 무역으로 축적한 재력입니다.
왕건할아버지 부를 바탕으로 왕건아버지가 왕건의 발판을 마련해 준 것처럼 대승공아버지나 할아버지때부터 무역으로 富를 축적한 결과 형제동맹인 왕건에게 대승공이 군량미를 지원하게 됩니다.
대승공家 류차달은 황해도 래성(토성)으로 왕건으로부터 성씨를 하사 받지 않았으며 류천궁 오다련보다 높은 개국2등공신이기에 이들보다 왕건의 더 도움을 주었다고 봅니다.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고려태조통합삼한익찬벽상공신명록에 의하면 왕건은 918년 고려 개국하고 개국공신 29명을 선정하면서 혼인정책에 의한 29명의 호족은 공신에 명단이 없고 궁예를 몰아낸 5명은 1등공신으로 하고 호족과 장수를 2등공신으로 했는데 경제적 지원을 해준 호족은 대승공(군량과 수레)과 이도(군량과 배) 2명이며 3등 4등공신에도 경제적지원 호족은 없으며 왕건처족으로 경제적지원한 류천궁 등이 있습니다.
“전라문화논총”(박천석,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1988) 논문중 삼한공신일람표 발뤠한 명단에 의하면 류차달은 고려삼한공신명단에 잇고 류천궁은 아래명단에 있으며 오다련은 명단에 없습니다.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高麗太祖統合三韓翊贊壁上功臣名錄이나 문화류씨 파평윤씨 족보에 의하면 1등공신은 왕건책사와 왕건을 추대한 4명이 1등공신(계5명)이고 2등공신 12명은 호족 장수들인데 왕건에게 경제적 지원을 한 공신은 류차달(군량미와 수레)과 이도(군량미와 배)이며 3등 10명 4등2명은 호족과 장수들입니다.
나주 동호동에 대승공 사우가 건립되어야 하는 근거로
① 왕건이 대규모 전투를 한 나주에서 군사적으로 도움을 준 오다련 김길이 나주출신이고
② 대규모전투에 재정적 지원을 해준 대승공 후손들이 나주에 거주 했기 때문입니다.
왕건이 903년부터 나주 전투를 참가할 당시 대동사가 있는 동호동은 나주였고 조선조에 문화류씨 후손들이 자리 잡고 이웃에 나주오씨등이 토반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본량면으로 재편됩니다. 나주군 본량면 동호리가 도로명 주소로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587(광산구 동호동 본량신촌동길 47-8)입니다.
하정공후 대승공 18세 류용공(증대사헌) 용강(참봉)이 국반세력으로 이주한 곳이 나주 비읍(현 영암군 신북면)이며 대승공22세로 숙종8년에 대승공 묘비를 개수한 류상운이 나주(비읍 모산)출신이며 좌상공후 대승공 20세 류순장(사헌부감찰)의 배위는 부친 방귀온의 피화로 아들을 데리고 나주로 이거하였고 자손중 21세 절(공조참의)후손들이 광산군 본량면으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룹니다.
나주에 왕건이 궁예장수로 왔고 대승공 도와 주었고 대승공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곳입니다. 대승공 묘비를 개수한 충경공후 관, 외손 홍춘경, 검한성공후 희림, 하정공후 상운, 정숙공후 기영 등 내외손 다섯분인데 나주에 집성촌을 이룬 후손들이 나주에 대승공 사우 건립하게 됩니다. 충경공후는 곡성에 검한성공후는 화순에 집성촌을 이루지만 문화류씨 전종원과 유림이 협의하여 나주에 대승공 사우건립을 결의합니다.
나주오씨 정묘보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이 궁예조정에 처음 벼슬하여 수군장군이 되어 서해(나주)에 유진하고 목포에 이르러 오색구름을 보고 배로 금강진 흥룡동(나주 중흥리)에 이르렀는데 빨래하는 나주오씨(장화황후)를 만납니다.
김길(광산김씨 시조 김흥광 손자)이 신라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금산군(錦山郡,나주)으로 피신했는데 왕건의 나주 공략시 금산(나주)의 왕자대(王子臺)에서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는 공을 세운 곳이 나주입니다.
왕건을 지원해준 대승공 업적을 보존하기 위해 나주 동호리에 대승공 사후를 1946년 건립하게 된 근거가 왕건이 전투를 시작한 나주이며 왕건을 지원해준 대승공 후손과 오다련후손들이 집성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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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해지역에서 벌인 왕건과 견훤의 쟁패
강봉룡(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1. 견훤과 서남해지역의 관계
견훤과 서남해지역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견훤이 889년에 ‘서남해 방수군(防戍軍)’으로 파견되었다는 기사를 근거로 하여, 서남해지역이 9세기 말부터 견훤의 지배 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다를 거라 생각된다.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해 보자.
첫째, 견훤의 주요 진군로는 ‘진주→순천→광주’로 이어졌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서남해지역은 그의 진군로에서 비켜나 있다는 점이다.
둘째, 견훤이 892년에 광주에 입성한 이후 곧바로 전주로 중심지를 옮겨가 백제의 건국을 선언하려 했던 애초의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이 무려 9년 간이나 지체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서남해지역에 대한 공략이 예상과는 달리 지지부진했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셋째, 견훤은 뒤늦게 900년에 이르러서야 전주로 옮겨가 백제의 건국을 선언한 그 이듬해에 대야성(합천)을 공격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주 인근의 부락을 약탈하였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끝까지 저항한 서남해지역에 대한 일종의 화풀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일련의 맥락에서 볼 때, 견훤의 서남해지역에 대한 공략 의지는 매우 집요했었고, 이에 대한 서남해지역 사람들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장기간에 걸친 쌍방 간의 공방은 더욱 처절한 국면으로 치달았을 것이며, 그만큼 서남해지역 사람들의 위기감은 더욱 증폭되어 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 틈새를 당시 궁예의 장수로 복무하고 있던 왕건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2. 서남해지역 해양세력과 왕건과의 관계
서남해지역은 9세기에 장보고가 국제 해양무역을 주도하던 청해진체제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고대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일찍부터 해양세력이 크게 성장했던 곳이다. 장보고가 암살당하고 청해진체제가 해체된 이후에도 서남해지역 일대에는 해양을 무대로 활동하는 해양세력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서남해지역의 해양세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섬 지역을 무대로 한 ‘도서 해양세력’과 해안 육지부를 무대로 한 ‘연안 해양세력’이 그것이다. 이들은 견훤의 침략 위협에 처하자 혼연일체가 되어 이에 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견훤의 침략이 장기화하고 그 강도도 거세어지자,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서 해양세력’은 끝까지 비타협적 저항의 노선을 견지해 가려 했던데 반해, ‘연안 해양세력’은 점차 실리적 타협의 대상을 모색해 갔던 것이다. 전자의 중심에 압해도의 능창(能昌)이 있었다고 한다면, 후자의 중심에는 나주의 호족 오다련(吳多憐)이 있었다.
오다련은 오랫동안 처절한 전투를 벌여왔던 견훤과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었던지, 새로운 타협의 파트너로서 왕건을 선택했다. 왕건 역시 오다련세력을 서남해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한 유용한 발판으로 생각하였으며, 쌍방은 왕건 자신과 오씨의 딸과의 혼인을 결행함으로써 타협의 증표로 삼았다. 반면 ‘도서 해양세력’의 우두머리격인 능창은 견훤에게 그랬듯이 왕건에게도 마지막까지 적대적 무력 대결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왕건의 서남해지역으로의 침투는 ‘연안 해양세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견훤과 ‘도서 해양세력’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방향에서 추진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왕건의 첫 침투 시도는 903년에 이루어졌으니, 이해 3월 그는 주사(舟師=해군)를 이끌고 광주 경계의 해안으로 상륙하여 금성군(나주)을 접수하고 10여 개의 군현을 점령하고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돌아갔다. 견훤의 집요한 공략에도 요지부동이던 나주의 세력이 멀리서 서해 연안을 따라 내려온 왕건의 단 1회의 공격에 무력하게 무너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고, 앞에서 살폈듯이 ‘연안 해양세력’과의 우호적 교감 속에서 이루어진 ‘평화적 점령’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한다.
3. 왕건과 견훤의 쟁패전
왕건의 전격적인 나주 점령은 견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큰 타격을 받은 세력은 능창을 중심으로 한 ‘도서 해양세력’이었다. 왕건에게는 이들의 도전을 꺾는 일이야말로 피해갈 수 없는 어려운 과업으로 다가왔다.
왕건과 견훤의 첫 격돌은 909년에 이루어졌다. 왕건이 해군을 이끌고 남하하던 중 염해현(무안 해제면)에 상륙하여 견훤이 중국 오월(吳越)에 파견한 후백제의 사신선을 나포한 것이 그것이다. 불의의 일격을 가함으로써 후백제의 기선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던 것이다. 왕건이 다음 공략의 타켓으로 삼은 것은 ‘도서 해양세력’이었다. 먼저 서남해지역의 중심 도서 중의 하나인 진도군을 함락시키고, 영산강하구의 압해도 인근에 있는 작은 섬인 고이도를 위복시켰다. 이로써 왕건의 서남해지역에 대한 장악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럴수록 견훤과 능창의 저항은 더욱 거세어 갔다.
912년경에 왕건이 다시 서남해 공략에 나섰을 때, 견훤은 후백제의 해군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견훤은 직접 진두지휘하여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에 배치함으로써 견훤이 나주세력과 연결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난관에 봉착한 왕건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책을 써서 견훤의 전함을 거의 전소시키고 후백제군 500여급을 목베는 완승을 거두었다. 견훤은 작은 배에 갈아타고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고 하니, 제갈공명의 저 유명한 적벽대전을 연상케 하는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 전투야말로 ‘덕진포(전남 영암군 덕진면)대전’이라 불려 마땅할 듯하다.
【견훤은 덕진포에 주둔하였고 왕건은 영산포에 주둔하였고 칼을 간 숫돌을 채굴한 礪石山天池(영암군 신북면 월평리)는 명주실 세 꾸리가 들어갈 만큼 깊고 가뭄이 들면 관개용수로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수량이 풍부한 사방 30m 정도의 지소(池沼)가 있다. 이 연못은 고려 태조 왕건과도 관계가 있다.
왕건이 후백제를 토벌할 때의 일이다. 후백제를 향해 진격한 왕건은 나주는 쉽게 토벌했으나 영암을 토벌하는 데는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왕건은 후고구려의 왕이 하사한 용천검을 지니고 있었는데, 오랜 전투 탓에 칼이 몹시 무디었다. 영암 지역을 토벌하는 데 고전하자 왕건은 용천검을 탓하며 화를 냈다. 이를 염려한 왕건의 부인(오다련 딸)이 매일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고 어느 날 기도를 하다 보니 발밑에 숫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부인은 그 숫돌에 용천검을 갈아서 왕건에게 건네주었다. 다음 날 왕건은 전투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이 지역의 숫돌이 좋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수년을 두고 숫돌을 무한량 파내니 그곳에 못이 생겼고 그 깊이가 무한정 깊어져 중국까지 통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삼경에 닭이 울면 그 소리가 여석산 천지까지 들렸고, 비가 오니 항아리 덮으라는 말소리까지 들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석산에서 숫돌 캐는 것을 그만 두었다.※이 부분은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자료 추가함 】
고려사에서는 이 해전의 의의에 대하여 “이로써 삼한 땅의 태반을 궁예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덕진포대전의 대승으로 나주세력과 합류한 왕건의 해군은 다시 돌아가는 도중에 능창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능창을 생포함으로써 예상과는 달리 싱겁게 마무리되고 만다.
4. 파군천(破軍川)의 전설
고려사의 기사에 의거하여 기술한 왕건과 견훤의 쟁패전 이야기는 왕건의 일방적이고도 싱거운 승리로 일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영산강 하구의 무안군 몽탄면에 전해오는 파군교의 전설은 이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포함한다. 그 전설의 내용은 대개 이러하다.
왕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산강변에 진을 쳤는데, 견훤군이 사방을 에워싸고 공격을 가해왔다. 왕건은 포위망을 뚫으려 했지만 마침 바다의 밀물이 밀려들어 강물이 범람하는지라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마침 밤이 되어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왕건이 잠시 조는 사이에 백발노인이 꿈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몽탄의 청룡리에 진을 치고 매복해 있으라. 그러면 견훤군이 뒤쫓아 올 것이니 그를 치면 장군이 크게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잠에서 깬 왕건은 그 노인의 말대로 하여 과연 대승리를 거두었다. ‘꿈의 여울’이란 의미의 몽탄(夢灘)이란 지명과 ‘군대를 격파한 천’이라는 의미의 파군천(破軍川)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연원한다.
이 전설은 아마도 ‘덕진포대전’의 사실(史實)에 부회되어 지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때 왕건이 견훤군에 포위되어 몰살의 위기에 쳐하기도 했다는 숨은 이야기와 함께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이 전설을 지은이는 아마도 서남해지역의 민중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전에 자신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왕건의 통일 대업도 불가능하였으리라는 점을 자부하는 한편, 왕건을 향해 그것을 잊지 말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이 전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꿈속의 백발노인이란 그들의 염원을 담보하는 ‘서남해 그리고 영산강의 신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한국역사연구회
첫댓글 수고가 너무 많으십니다.꾸벅
문중을 위해서 많이 애써주시는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하정공후손입니다 대승공36대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