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지 ]문혜란

[초록장미]

편지 / 문혜란 문예지에 글이 실린 후 익명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안부를 묻는다던가 하는 일반적인 절차가 생략되어있다. 내 근황을 알고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발신인을 숨길만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약간의 칭찬을 덧붙여 책을 늘 가까이 두겠다는 말로 궁금증을 숨겨 놓았다. 책을 읽다보면 나도 편지를 보내고 싶을 때가 있기는 하다. 공감이 일 때도 그렇고, 무언가 잘못 알고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그렇고, 힘내라는 말을 해주고 싶을 때가 그렇다. 그러나 읽을 때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 되곤 해서 좀처럼 써지지 않는다. 펜을 들어 종이에 써야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난(蘭)잎이 옅게 그려진 하얀 종이에 약간 흘림체의 글씨가 단정하다. 사나흘 걸어오며 발효된 편지에는 잉크 내음과 손끝 온기가 따스하게 남아있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도 된다. 여백에 담긴 마음의 결까지 읽으려 애써보아도, 젊은 날에 편지의 인연이 닿았던 사람일까 싶어 기억을 헤집어 보아도,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익명이라도 알아차릴 것이란 짐작으로 가까운 이가 장난 삼아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그가 누구인들 어떠한가. 오랜만에 받은 편지한통이 굳어진 내 감성을 말랑하게 어루만지며 기억의 수레바퀴를 되돌린다. 문자가 향기롭던 시절, 편지지 밑장까지 깊이 새겨 넣으며 쓰고 또 써도 넘쳐나던 때가 있었다. 가슴 안쪽에서 뽀글대는 무수한 말들을 백지 위에 옮기는 것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멀리 돌아도 눈길 멈추게 하던 길모퉁이 빨간 우체통, 서성대던 그 길가에 소인처럼 찍힌 내 영혼의 발자국, 밤새도록 지우고 또 쓰며 꼬깃꼬깃 봉한 편지를 끝내 부치지 못한 젊은 날이었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게 오는 모든 인연을 귀하게 여기던 시절이다. 꽤나 심각했을 그 까칠한 지문들이 지금은 사기 대접에 떠놓은 샘물 같은 추억으로 남았다. 편지 쓰기는 늘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친구들과도 나누었지만 두 오빠가 월남에 파병되었을 때는 꼬박 2년을 일과처럼 썼다. 친척 오빠한테 보내는 편지의 대필까지 맡았던 때문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터에서 유일한 기쁨은 편지를 받을 때라는 오빠들을 위해 나는 호롱불 앞에 바투 앉아 포르르 포르르 앞머리를 살라가며 편지를 썼다. '오늘 강 일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암호 같은 오빠의 글 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린 내가 오빠들을 감동시킬만한 필력이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저 고국에서 부쳐온 소식이라는 이유로, 또 자신을 염려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던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는 이웃동네의 친구와 우표도 없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 쪽에서 더 자주 내 우편함에 넣어두곤 하였다. 사흘이 멀다고 만나는 사이였고 늦은 밤이면 전화해서 반보기로도 만났다. 잠시 뒤에 만날 것이면서 편지를 가져왔고 돌려읽는 책 속에도 편지는 있었다. 아이들의 도시락이나 남편의 여행가방 속옷사이에 끼워 넣는 조금은 계산된 편지와는 다르게 재미가 있었다. 중년의 아낙들이 무슨 할말이 그리도 많았을까 싶다. 좋은 문구를 만났다며 쭉 찢은 노트에 아무렇게나 적어 봉투도 없이 갖다 두기도 하고, 어느 날은 오다가 비를 맞았는지 쭈글쭈글한 재생종이에 잉크가 번져있다. 문장 몇 개를 들고 뛰어온 듯 하다. 와인 한잔을 마셨다는 날, 빨간 볼펜으로 휘갈긴 지독한 악필의 긴 편지는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 해독하지 못했다. '요즘 무슨 책 읽고있어?' 이렇게 첫 문장이 시작되는 그녀의 편지는 느슨하게 살고 싶은 나를 수시로 자극하며 바지랑대처럼 떠받쳤다. 사실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는 수신인이 딱히 그녀이거나 내가 아니어도 무방한 내용이다. 내면을 잣아 올린 독백이었다. 생의 이룸에 대하여, 박제된 감성과 시시한 보통의 삶에 대하여, 꾸어볼 꿈조차 없다는 속내를 그런 식으로 토해내었다. 가슴속 허무를 메우는 작업이었으며 자기 연민에 함몰하지 않으려는 방편이기도 했을 게다. 내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우리는 나이를 먹지 말고 포도주처럼 익자'던 그녀의 도전적 삶이나 세상을 겨누는 번뜩이는 시선에 편승하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 그녀도 내가 있어 고맙다고 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에게 사고의 반려가 아니었나 싶다. 젊은 날의 편지가 누군가를 향해 화살표를 띄운 그리움이었다면, 중년의 편지는 의식의 자폐에 감금되지 않으려고 자기 안으로 내린 두레박인 셈이다. 속엣 것들을 방목함으로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겪는 갱년기의 고비도 수월하게 넘어오지 않았나 싶다. 뜻밖의 편지 한 통으로 나는 다시 편지가 쓰고 싶다. 누렇게 빛 바랜 편지묶음을 풀어 몇 개의 주소를 골랐다. 편지란 자신의 마음을 봉송(封送]하는 일이며 정(情) 나눔이다. 받는 이에게도 쓰는 이에게도 위안이 된다.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는 이가 있거나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고 있다면 용기 내어 몇 줄의 글이라도 보내 보면 어떨까. 자신을 기억하며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지지 않을까 싶다. .

[꽃 비]

그 시절이 아름다웠지요........지금은 참 메마른 가슴을 가지고 산다고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