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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마을의 전형적인 입지조건을 갖춘 마을
한개마을은 풍수에서 마을이나 건축 조영물이 들어설 이상적인 터를 의미하는 배산임수 지형에 입지한 전형적인 전통마을이다. 마을 뒤편으로는 영취산이 자리 잡았고, 좌우로 백호등, 청룡등이라 불리는 영취산 자락이 마을을 감싸듯이 내려온다.
마을 건너편으로는 이천과 합수되는 백천이 흐른다. 그래서 백천 제방에서 바라보면 영취산 자락에 폭 안긴 한개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마을의 이름도 이러한 입지조건에서 유래했다. 한개마을의 ‘한개’는 큰 개울을 뜻하는 우리말로서 마을 앞쪽의 ‘임수(臨水)’인 백천에 과거 제방을 쌓기 전, 큰물이 지면 물이 밀려 들어왔다가 밀려 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큰 개울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데서 유래하였다.
한개마을을 영남의 제1 길지라 하는데, 이는 입향조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데서 비롯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즉 한개마을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된 것이 바로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위치에 마을이 입지한 것에 힘입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 이후 한개마을 현장의 숨결에서는 9명의 문과급제자와 24명의 생원·진사급제자가 배출되었고, 임오화변(壬午禍變)에 연루되었던 선전관 이석문(李碩文)을 위시하여 공조판서를 역임한 이원조(李源祚),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진상(李震相),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썼던 이승희(李承熙) 등 충절과 지조, 높은 학문, 독립운동 등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기와집과 초가집의 어울림이 있는 마을
한개마을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2007년 12월 31일로 비교적 늦은 시기에 지정되었는데 가옥의 틀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원형을 갖춘 초가집이 3동 뿐이었다. 게다가 초가집으로 건립된 가옥들도 지정당시에는 대부분 지붕이 변형되어 있었다. 이후 전통마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정비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부딪힌 문제가 지붕이 변형된 가옥의 초가집 환원에 대한 반감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변형, 퇴락된 가옥의 보수에는 찬성하지만 초가집으로의 환원에는 대부분 반대하였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양반의 집인 기와집과 머슴, 노비가 사는 초가집이라는 과거로부터 내려온 신분제의 잔상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울러 짚이라는 재료의 특성에 따라 매년 이루어질 초가이엉잇기에 대한 부담, 거주하기에 불편한 낮고 좁은 작은 집의 규모 등에 대한 염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전통마을로 가꾸기 위한 정비를 시작한 지 10여 년이 되어 가는 지금의 한개마을은 이제 35동의 초가가 말끔하게 정비되어 기존의 기와집과 어우러지는 마을 경관이 자연스럽게 연출되고 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처음에는 반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가집으로의 환원에 응해준 가옥 소유자들의 결심과 마을 복원을 바라는 이들의 지속적인 설득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환원해야 할 초가가 마을 내에 다수 분포해 있어 좀 더 오랜 시간의 인내와 설득, 가옥 소유자의 결심이 필요한 상황이다.
문화콘텐츠를 발굴하고 재현하여 채워나가야 할 때
마을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시기가 늦었기에 한개마을의 가치 있는 유·무형의 문화자산들은 전승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마을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한개마을은 토석담이 만들어 놓은 옛 골목길과 고택이 있는 옛 마을이라는 인식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 마을 주민들의 묵시적인 동의 아래 탐방객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상업행위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 할 것이다.
한개마을은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마을의 가옥들이 옛 원형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는 상태에 있기에 이제는 잃어버린 유·무형의 문화자산들을 발굴하고 재현한 문화콘텐츠를 채워나가야 할 시기를 맞고 있다. 근래 한개마을만이 가지는 특화된 유·무형의 자산을 활용하여 다양한 볼거리 및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개최한 ‘한개마을 삼일유가축제’는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글. 사진. 박재관(성주군청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