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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시(樓亭詩) 기행
34. 거창 관수루
마음을 씻었더니 몸을 잊었네
경남 거창의 명승지 수승대(搜勝臺) 일원은 경관도 빼어나지만 거기 흔적을 남긴 옛사람의 인품이 모두 산고수장(山高水長)의 의미에 부합한다. 절경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관수루(觀水樓)와 요수정(樂水亭)에서는 조선 중기의 선비 신권(愼權)이 벼슬길의 덧없음을 느끼고 낙향하여 자연을 즐기고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선비의 학문은 물의 흐름과 같아야 함을 일깨우는 시구들이 누정에 가득하다.
산 높고 골 깊은 곳
산이 크면 골이 깊고 골이 깊으면 물 또한 깊고 길다. 산이 높아서 큰 산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거느린 품이 커야 큰 산이다. 산이 높고 그 품이 크면 계곡이 깊고 길어 온갖 오묘한 풍치를 자아낸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이런 곳에 깃들어 학문을 연마하고 인륜을 맑게 하는 덕을 길렀다.
산고수장(山高水長).
산은 높고 물은 유유히 흐른다는 뜻이다. 북송 시대의 이름난 정치가이자 문학자, 교육자였던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의 말미에 쓴 구절이다. 엄 선생은 엄광(嚴光)인데, 후한의 광무제 유수(劉秀, BC6~AD57)와 동문수학한 사이였으나 유수가 왕이 되자 낙향했다. 광무제가 엄광을 찾아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그는 다시 깊은 산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범중엄은 절강 엄주 태수로 있을 때 엄광의 사당을 짓고 후손들의 조세를 면해주는 등 상당히 예우했으며, 사당기에서도 그의 고고한 인품과 덕망 높은 학문을 높은 산과 유유히 흐르는 물에 비유했다.
雲山蒼蒼江水泱泱 운산창창강수앙앙 구름 걸린 산 푸르디푸르고 강물은 끝이 없으니
先生之風山高水長 선생지풍산고수장 선생의 덕풍은 높은 산 긴 물과 같네.
— 범중엄 ‘엄선생사당기’ <고문진보> 후기 중에서
이 글 이후로 산고수장이라는 말은 고고한 인품을 상징하기도 하고, 실제 산세가 깊고 골이 그윽하여 둔세의 철학을 실현하기 좋은 곳을 이르는 말로 쓰여 왔다. 그렇다면 산고수장의 인품을 갖춘 사람이 산고수장의 진경 속에 노닐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경남 거창의 대표적인 명승지 수승대(搜勝臺) 일원은 자연경관도 빼어나지만 거기 흔적을 남긴 옛사람의 인품이 모두 산고수장의 의미에 부합하는 곳이다. 덕유산의 높고 깊은 골 가운데 원학동(猿鶴洞) 계곡 위천(渭川)에 자리한 수승대는 산과 물과 바위 그리고 사람이 이룬 절경 중의 절경이다. 그 절경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 관수루(觀水樓, 경남유형문화재 제422호)와 요수정(樂水亭, 경남유형문화재 제423호)이다. 수승대와 관수루 그리고 요수정은 조선 중기의 선비 신권(愼權 1501~1573)이 일찍이 벼슬길의 덧없음을 느끼고 낙향하여 지팡이를 끌며 자연을 즐기고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있음과 없음의 차이를 보다
여름의 끝자락, 수승대는 고요했다. 여름 내내 물놀이 인파에 시달렸을 계곡이지만 관리가 잘되어 모든 풍경이 청징(淸澄)했다. 해마다 한여름 밤에 국제연극제가 열리는 무대를 지나 물소리 가까운 곳에서 타향에서 돌아온 자식을 마중하듯 서 있는 관수루를 만날 수 있다.
이 누각은 구연서원(龜淵書院)으로 들어가는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구연서원은 신권 선생이 1540년 구연재(龜淵齋)라는 이름의 학당을 짓고 후학을 지도한 곳이다. 1573년 선생이 작고하자 지역 사림(士林)이 서원을 세우고 구연서원이라 이름하고 석곡(石谷) 성팽년(成彭年, 1540∼1594)과 함께 배향해 오늘에 이른다.
커다란 바위를 양쪽에 두고 2층으로 지어진 관수루는 1740년에 사림이 세우고 현감 조영석(趙榮䄷, 1686~1761)이 누각의 이름을 짓고 기문을 남겼다. 누각은 구불구불한 나무기둥을 그대로 사용하고 네 기둥을 받치는 활주도 바위와 땅의 형태를 따라 자연스럽게 세워 돋보인다. 누마루 아래로 난 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널찍한 마당에 파란 잔디가 눈을 시원하게 했다.
관수루의 ‘관수(觀水)’는 “물을 보는 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觀水有術 必觀其瀾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는 <孟子>의 ‘盡心章句’ 上편에 나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선비의 학문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 물의 흐름과 같아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관수루에 오르면 판상시(板上詩)들을 해석한 안내판이 누마루 구석에 서 있다. 누각에 올라 이 시들을 읽으면 옛사람들의 풍류와 정신의 일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絃誦儒宮杜若汀 현송유궁두약정 거문고와 시 읊는 서운 물가엔 두약 있고
長川如帶繞堦庭 장천여대요계정 긴 냇물 띠처럼 섬돌과 마당을 둘렀네.
眞源浩浩知多積 진원호호지다적 참된 근원 넓디넓어 많이 쌓인 걸 알겠고
淸派悠悠不暫停 청파유유불잠정 맑은 물결 유유히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肯逐雨晴似溝澮 긍축우청사구회 비 개어 기꺼이 좇아가면 도랑과 같고
終兼晝夜到滄溟 종겸주야도창명 밤낮으로 흘러서 마침내 푸른 바다에 이른다.
請君學道須淵博 청군학도수연박 그대는 도를 배워 반드시 못처럼 넓어져
欲識無形見有形 욕식무형견유형 형체 없는 걸 알려면 형체 있는 걸 보게나.
— 조영석 ‘觀水樓’ 판상시
지역 사림이 관수루를 지었을 때 현감을 지낸 조영석(趙榮祏)이 기문과 함께 1743년에 지은 시다. 첫 행의 두약은 생강과의 다년생 풀 이름인데 은은한 향기가 나기에 선비들의 그윽한 풍류를 상징하는 시어로 쓰였다. 누각이 지어지고 처음으로 창작된 시이기에 이 시의 운자가 ‘관수루운’이 된 것은 당연하다.
조영석은 이 한 수의 시로 누각 앞을 흐르는 위천과 구연서원의 풍경은 물론 곧은 선비 정신 그리고 인륜의 지향점까지를 촘촘하게 풀어 놓았다. 무엇보다 미련의 결구인 “형체 없는 걸 알려면 형체 있는 걸 보게나”라는 대목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초월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오묘한 경지가 아닐 수 없다. 마치 선불교의 선사들이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허물고 초아적인 본질을 꿰뚫어 보라고 획책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그렇게 ‘형체 있는 것’의 본질을 추구하여 ‘형체 없는 것’의 묘한 이치를 갈파하는 면학과 수행의 과정이 바로 앞에 언급된 “밤낮으로 흘러서 마침내 푸른 바다에 이른다”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명(溟)’은 어둡다는 뜻이 아니라 큰 바다를 뜻한다.
觀水樓連樂水亭 관수루련요수정 관수루가 요수정과 잇닿아 있어
泗洙源是繞前庭 사수원시요전정 사수의 근원이 뜰 앞에 둘러 있네.
泉流混混來相繼 천류혼혼래상계 샘물줄기 모여서 서로 이어져 오고
波勢沄沄去不停 파세운운거불정 물결 기세 요동치며 멈추지 않고 간다.
勇益日新經萬壑 용익일신경만학 날로 더욱 용맹스레 일만 골짜기 지나서
進無間斷注東溟 진무간단주동명 중단 없이 나아가 동쪽 바다로 흘러드는데
顧名思義憑欄坐 고명사의빙란좌 명분 의리 생각하며 난간에 기대앉아
一氣淸寒覺本形 일기청한각본형 한 기운 맑고 찬 절개에 본래 모습 깨닫는다.
— 신홍성(愼鴻晟) ‘경차관수루운(敬次觀水樓韻)’ 판상시
신권 선생의 12세손 신홍성의 시다. 이 시 역시 조영석의 시가 천착한 올곧은 선비의 학문과 정신에 대한 담론을 펼치고 있다. 작가는 높은 산을 배경으로 길게 흐르는 위천의 당당한 흐름에서 사수(泗洙)의 근원을 생각했다. 사수는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의 사수(泗水)와 수수(洙水)를 말하므로 유학의 근원과 자신의 선조 신권 선생이 구연재에서 펼친 학덕을 추모하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함련과 경련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동쪽 바다 즉, 도의 완성에 닿아 감을 힘차게 노래하고 있다. 그런 정신을 흠모하며 명분과 의리의 도를 생각하는 동안 “한 기운 맑고 찬 절개에 본래 모습 깨닫는다”고 했으니, 관수루는 그 존재 자체가 근원을 깨우치는 명당인 셈이다. 이러한 기개는 후세로 가면서 더욱 창대한 필치로 확장된다.
龜淵源接泗洙汀 구연원접사수정 구연의 근원은 사수 물가에 닿았고
活發淸流繞廟庭 활발청류요묘정 출렁이는 맑은 물결 묘정을 둘렀네.
混混續來知有本 혼혼속래지유본 뒤섞여 이어와도 근본 있는 줄 알겠고
悠悠過去自無停 유유과거자무정 유유히 지나가니 스스로 멈추지 않네.
盈科豈憚經千曲 영과기탄경천곡 구덩이를 채웠다고 어찌 천 구비 지나기를 꺼릴까?
勇進終能達四溟 용진종능달사명 용감히 나아가면 마침내 사해에 닿으리니
觀水名樓誠有意 관수명루성유의 관수루라 이름한 것 참으로 의미 있어
有形觀處覺無形 有形觀處覺無形 유형을 보는 곳에서 무형을 깨닫노라.
— 신수이 ‘관수루’ 판상시
朱樓屹立碧江汀 주루흘립벽강정 붉은 누각 푸른 강가에 우둑 솟았고
浙瀝波聲入院庭 절력파성입원정 잇따라 흐르는 물소리 서원 뜰에 들린다.
千尺澄深那有損 천척징심나유손 천척의 맑고 깊은 물 어찌 줄일 수 있을까?
四時逝續暫無停 사시서속잠무정 사철 이어 가며 잠시도 멈추지 않는구나.
溯回石壁因成瀑 소회석벽인성폭 석벽을 돌아 거슬러 오르면 폭포를 이루고
沿合源泉竟注溟 연합원천경주명 원천 따라 합쳐진 물이 마침내 바다로 흘러
廳佐軒頭奚取術 청좌헌두해취술 마루 끝에 앉아 들으면서 어찌 술수를 부릴까?
洗心觀處却忘形 세심관처각망형 마음을 씻고 보는 곳에서 문득 몸을 잊었노라.
— 신종립 ‘근차황고선생운’ 판상시
앞의 시는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의 1808년 작품이고, 뒤의 시는 그 후손이 운자를 빌려 지은 것이다. 물론 관수루의 원운은 조영석의 시로부터 비롯되었다. 시의 전개는 다른 작품들과 비슷하지만 결구에서 한결같이 조영석의 화두를 나름대로 풀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신수이의 경우 관수루의 이름에 담긴 ‘관수’의 철학에 깊이 몰입하여 시를 지었다. 그래서 유형의 흐름을 보고 무형의 초월적 진리를 깨닫는다고 했다. 신종립의 경우는 물소리를 듣는 것과 물의 흐름을 보는 것에서 장구한 진리의 상전(相傳)을 체득하여 “마음을 씻고 보는 곳에서 문득 몸을 잊었노라”며 현상계에 대한 초월적 경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들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관수루의 위치와 그 이름의 뜻이 이미 무한한 도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이는 것을 버리면 보이지 않는 것을 찾을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버리면 보이는 것을 해득할 수 없음은 현대의 철학자들도 깊이 천착하는 명제가 아니던가?
관수루를 내려와 푸른 잔디를 밟으며 구연서원 본체를 향하다 보면 발걸음은 자연스레 왼쪽에 높이 서 있는 비석들로 쏠린다. 그 중 가장 안쪽의 비석이 가장 크다. 빗돌에 새겨진 글자도 가장 큰데, 거기에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고 상단에는 ‘요수선생 수승대’라고 전액 되어 있다.
신권 선생의 후예인 거창 신씨들이 이 비를 새긴 이유는 명백하다. 자신의 선조들이 올곧게 지켜 온 ‘산고수장’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기 위함이다. 관수루에 걸린 시판 가운데 이 비석을 세운 뜻을 알리는 시가 한 편 있다.
絶世貞珉不日成 절세정민불일성 비길 데 없는 비석을 짧은 기간에 이루니
先生遺蹟倍前明 선생유적배전명 선생의 유적이 전보다 훨씬 밝아졌네.
記銘豈比金銀寶 기명기비금은보 명문 쓴 것을 어찌 금은 보배에 견줄까?
表績猶優竹帛名 표적유우죽백명 비석 세우는 게 오히려 역사책 이름보다 낫지.
高巀裕山瞻蓄德 고찰유산첨축덕 높고 가파른 덕유산은 덕을 쌓은 듯 보이고
長淸渭水想交情 장청위수상교정 길이 맑은 위수는 서로 뜻을 알겠도다.
餘徽又有樓坮勝 여휘우유루대승 또 남은 아름다움이 관수루와 수승대에 있어
能詔千秋永振聲 능조천추영진성 영원토록 명성을 떨쳐 알 수 있겠네.
— 문재근 ‘근차산고수장비운’ 판상시
퇴계선생이 고쳐 준 이름
서원을 나와 자연석이 담처럼 길게 놓인 길을 따라 50m쯤 올라가면 왼쪽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들린다. 위천의 하이라이트 거북바위가 있으니 그 바위를 수승대(搜勝臺)라 부른다. 돌계단을 내려서면 곧바로 커다란 바위인데 물이 흐르는 곳은 움푹 파여 있어 물살이 빠르다. 얼마나 오랜 시간 물이 흘러 바위에 깊은 물길이 났을까?
수승대 거북바위에 시와 사람의 이름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수승대의 원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다고 한다. 그 이름의 연원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국력이 팽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사신을 보내는 일이 빈번했는데, 이곳에서 배웅했으므로 ‘근심으로 보내는 곳’이란 의미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또 신권 선생이 이곳에 둔세의 터전을 닦으면서 이 우뚝한 바위가 거북처럼 생긴 것에 착안하여 바위 위에 ‘암구대(岩龜臺)’라는 이름을 붙이고 물을 막아 ‘구연(龜淵)’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후학들을 지도하던 집을 ‘구연재(龜淵齋)’라 했는데 오늘날 구연서원의 원형이다. 오늘날 동네 이름도 구연동이 된 것도 신권 선생의 행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수송대를 수승대로 이름을 바꾼 사람이 퇴계 이황(李滉) 선생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신권 선생이 칩거하는 원학동과 멀지 않는 곳에 퇴계 선생의 처가가 있는 영송 마을이 있다.
어느 날 퇴계 선생이 인근 명승지를 유람하고 처가에도 들릴 겸 영송 마을에 와서 신권 선생을 방문하겠다는 기별이 왔다. 신권 선생은 당대의 거유(巨儒)를 맞이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퇴계 선생은 임금이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상경해야 했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수송대의 이름을 수승대로 바꿀 것을 제안하는 시 한 수를 보냈다.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승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본래 그 풍치가 빼어난데다가 조선의 하늘 아래 가장 빛나는 학자가 이름을 지었으니 수승대는 거창의 자랑이 되기도 한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거북바위 한중간에 퇴계의 시가 새겨져 있는 것도 당연한지 모르겠다.
搜勝名新換 수승명신환 수승(搜勝)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逢春景益佳 봉춘경익가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다.
遠林花欲動 원림화욕동 먼 숲 꽃망울은 터져 오르는데
陰壑雪猶埋 음학설유매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희끗.
未寓搜尋眼 미우수심안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惟增想像懷 유증상상회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他年一樽酒 타년일준주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巨筆寫雲崖 거필사운애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 이황 ‘기제수승대’ 암각시
좋은 풍광을 찾아가지 못하고 상경하는 아쉬움과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한 마음 그리고 다음날을 기약하는 애절한 마음이 잘 스미어 있는 이 시는 수승대를 대표하는 시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시에 신권 선생도 화답시를 지었다.
林壑皆增采 림학개증채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 가는데
臺名肇錫佳 대명조석가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勝日樽前値 승일준전치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愁雲筆底埋 수운필저매 구름 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읍시다.
深荷珍重敎 심하진중교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殊絶恨望懷 수절한망회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 스러우니
行塵遙莫追 행진요막추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獨倚老松崖 독의노송애 홀로 벼랑 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 신권 ‘수승대봉화퇴계운’ <안의읍지> 제영편
바삐 떠나는 퇴계 선생보다는 그를 맞이할 준비에 여념이 없던 동갑내기 신권 선생의 아쉬움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꽃향기와 술 향기가 풍기는 한 수의 시로 대신한 퇴계 선생의 방문을 한 수의 시로 영접하는 신권 선생의 마음에도 봄꽃의 빛이 감돌고 있다. 신권 선생이 화답시를 지은 뒤 같은 마을에 살던 갈천(葛川) 임훈(林薰, 1500~1584)도 시 한 수로 수승대 개명의 의미를 찬미했다.
花滿江皐酒滿樽 화만강고주만준 강 언덕에 가득한 꽃 술동이에 가득한 술
遊人連袂謾紛紛 유인연몌만분분 소맷자락 이어질 듯 흥에 취한 사람들
春將暮處君將去 춘장모처군장거 저무는 봄빛 밟고 자네 떠난다니
不獨愁春愁送君 불독수춘수송군 가는 봄의 아쉬움, 그대 보내는 시름에 비길까.
— 임훈 ‘해수송시’ <안의읍지> 제영편
이렇게 당대의 지성들이 수송대에 붙인 시편들은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 깊은 사유와 시대정신을 나누는 그윽한 교분이었다. 이 교분을 사숙하고자 하는 후세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커다란 거북바위에 이름을 새기고 시 구절을 새겼다. 그래서 아마 거북바위는 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렇게 목을 길게 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헛된 이름을 좇지 않으리
너럭바위를 건너 노송이 하늘을 찌르는 비탈에 요수정이 서 있다. 신권 선생이 이 정자를 처음 지은 것은 1542년이다. 자신의 휴식과 강학을 위해 지은 정자인데 그 이름은 자신의 호인 요수(樂水)를 딴 것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논어> ‘옹야(雍也)’ 편의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는 구절에서 비롯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현재의 정자는 180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듯 가파른 암벽 위에 지어진 요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 어간(御間)의 배면에 1칸의 방을 들여 배면을 제외한 3면에 문을 냈다. 누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뒤쪽 왼쪽의 출입구 일부를 제외한 4면 모두 계자난간을 둘렀다. 출입구 쪽에 판상시들을 해석한 안내판이 서 있다. 기둥에는 신권 선생의 시를 새긴 주련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에서 자연에 묻혀 살며 스스로 행복을 길어 올리려는 선비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林泉甘老地 임천감노지 숲과 물이 함께라면 늙기도 수월할 터
小檻卜淸幽 소함복청유 작은 정자 그런대로 맑고 그윽해
洞鶴留仙跡 동학유선적 골짜기에 내리는 학 신선의 자취
巖龜送客愁 암구송객수 시름 달래기엔 거북바위가 안성맞춤
登臨惟自適 등림유자적 이곳에 노닐며 자신에 만족할 뿐
聞達不須求 문달부수구 헛된 이름을 좇지 않으리.
時看漁樵伴 시간어초반 풀 베는 아이, 고기 잡는 늙은이 벗 삼아
相尋碧澗頭 상심벽간두 이따금 푸른 물에 발을 담그네.
— 신권 ‘요수정’ 주련시
요수정에 올라서면 아래로 푸른 물이 발을 적시는 듯하고, 거북바위 위의 수승대 푸른 소나무는 천 년을 변함없을 것만 같다. 건너편 구연서원과 관수루도 옛 선비의 높은 지조를 품은 채 시간에 초연한 듯 다가온다.
시간은 멈춤이 없어도 사람의 흔적은 바위에 새겨지기도 하고 책에 적히기도 하여 그 시간을 따라간다. 그래서 옛일을 달빛에 씻기도 하고 햇빛에 말리기도 하며 한 시대의 정신을 전하고 또 전하여 문명의 기틀이 되는 것이다. 신권 선생의 후손들 역시 요수정에 뿌리내린 선조의 뜻을 면면히 이어가는 데 게으르지 않아, 오늘날 정자에는 아름다운 시구들이 즐비한 것이다.
先祖藏修地 先祖藏修地 선조께서 수양하던 곳에
水亭屹且幽 水亭屹且幽 물과 정자가 아득하고 우뚝하다.
石老鷓鴣跡 石老鷓鴣跡 돌이 오래되니 자고새 흔적 있고
山空猿鶴愁 山空猿鶴愁 산이 비니 원숭이와 학이 근심한다.
千年攸好德 千年攸好德 천년에 좋은 덕을 닦으며
人爵不須求 人爵不須求 사람이 주는 벼슬 구하지 않네.
難忘追遠感 難忘追遠感 선조를 추모하는 느낌 잊기 어려워
佇立搜勝頭 佇立搜勝頭 수승대 끝자락에 멈춰 서 있다.
— 신종온 ‘경차요수선생운’ 판상시
작자는 신권 선생의 11대 후손이다. 선조의 학덕을 흠모하는 지극한 마음이 잘 드러난 시라 하겠다. 요수정에서 판상시들을 훑어보면, 자연 속에 사람이 있고 사람 속에 정이 있어 자연과 정이 계합하면 그것이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이 크고 골이 깊어 위천은 마를 날이 없고, 뜻 높은 선조들의 청명한 가르침이 있어 요수정과 수승대 그리고 구연서원도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오늘에 살아 있는 배움의 터전이 될 수 있다. 여름이 끝나 인적이 뜸해지더라도 다시 여름은 오고 물놀이 인파도 북적일 것이니, 그게 사람의 일이고 자연의 일이다.
<唯心> 90호, 2015년 10월 01일 (목) 임연태 시인
[부록]
관수루기
구연서원이 수승대 옆에 있으니 큰 시냇물이 띠같이 휘돌아 한 고을의 아름다운 곳이 되니 곧 요수 신권(愼權) 선생과 석곡 성팽년(成彭年)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 있다. 경신년에 제생들이 서원 남방에 루를 지어 봄․가을 강습의 도장으로 하면서 이름을 나에게 묻고 또 글쓰기를 청하니 내가 루에 관수라 썼더니 지금 서원의 선비들이 또 와서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썼으니 원컨대 또한 기문을 지어 후세에 참고토록 하라 하니 내가 사양할 수 없어 이에 말하기를 맹자께서 말한 관수(觀水)의 뜻을 제군들이 이미 알고 있으니 나 또한 무슨 말을 하리요만은 제군들이 이 고을에 있으면서 마땅히 양 선생으로 법을 삼아야 한다.
내가 살피건대 요수 선생은 덕기(德器)가 천성(天成)이여서 아주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어버이 명을 따라 과거에 응시했다가 불리하여 지난 뒤에 탄식하기를 “인작(人爵)은 사람에 있고 천작(天爵)은 내게 있으니 어찌 내 것을 바라고 다른 사람에게 구하리오.” 하고 이에 문을 닫고 글을 읽어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여 남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사친봉제를 극진히 하되 옛 현인에게 부끄럼 없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살피면서 항상 부족감을 느꼈다. 학문에 있어서는 체(體)를 밝히고 씀씀이를 알맞게 하여 자신의 기만이 없고 혼자일제 삼가 함으로 중요함을 삼고 나이 칠십이 넘어도 엄경(嚴敬)으로 몸을 단속하여 일찍부터 해이함이 없었다. 선생이 계시는 곳에 수석의 승이 있어 요수로 재를 이름하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었다.
석곡 선생은 정 동계(鄭桐溪)가 그 전함에 이르기를 공은 총명하고 강기하여 많은 책을 다 읽었고 모병(母病)에 기도문을 지어 대신하기를 원하고 남매간에 우애하여 사람들의 이간이 없었다. 용모가 해맑아서 맑은 물이 부용 같고 타고난 성질이 엄격하여 행의가 준결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공은 가끔 나는 사람이라 그 재주는 큰 벼슬로 도를 세울 것이요 그 뜻은 구집을 물리치고 맑음을 들춤이라 하였으니 요수․석곡 양 선생 학문의 돈독함과 행의의 높음은 어찌 원천의 근원이 있다고 말 못할 손가.
이제 이물 실로 그 당일에 표주박으로 마시고 갓끈을 씻든 물인즉 군자가 일찍 그 형상을 봄으로서 항상 그 득을 사모함이 이로서 가히 증험함이라 그 막힘없이 통하고 두루 퍼져서 이치의 인연으로 행함은 곧 신 선생의 인작을 버리고 천작을 치함을 알게 될 바요 이물로 즐거움이로다. 저 깊음을 도도하게 의심 없이 천리를 감은 또한 선생이 구도에 용맹하여 늙도록 쉬지 아니함이라 대개 가을 물결이 맑고 맑아 잔재 없이 더러움 제함 같음은 성선생의 맑은 자품과 준결한 행동으로 탁함을 멀리하고 맑음을 취하는 그의 뜻을 또한 가히 표현함이다.
이 물은 산골로부터 발원하여 암석을 흘러 한․수해를 당하여도 덧없이 흐르는 물로서 그 천리(天理)로 따를 뿐 모두 안류로 받아들이고 그 법도를 잃지 아니함은 양 선생이 함께 산림 속에 살면서 불만 없이 편안히 도덕을 숭상하였으니 이 누에 올라 물을 보는 자는 그 착한 바를 본받아 양 선생의 높은 교훈의 구함을 얻은 것으로서 빈유의 뜻을 버린 후에 정하게 생각하고 익히 글 읽어 모름지기 역을 물리치고 매사에 과격하지 말라. 그 이치를 얻으면 학문에 밝고 행실이 높아지며 덕이 길고 업이 커서 마침내 원천서 흘러 사해에 도달함과 같은 것이니 가히 관수에 얻음이 많으리라.
혹 말하기를 그대의 말씀이 맹자와 같지 아니하니 어찌 주자의 옥산강의에 치우친 것이 아닌지요. 내가 말하기를 그 고을의 선달과 학자들이 힘쓰는 것은 대개 그 풍성과 풍속으로 인도하고자 함이라 실지를 숭상하고 순서 따라 점진한 뜻이 거기에 있음이라 하노라.
숭정기원 160년 계해 단양 후학 함안 조영석 근기
첫댓글 15,6년 전쯤에 금원산휴양림에서 1박하면서 수승대 주변 유적지를 가족들과 함께 둘러 본 적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