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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의사 [李在明 義士] - 매국노 이완용 암살미수사건
(1890(고종 27) ~1910(융희 4))
이재명의사 (하와이 체류중 찍은 사진)
일명 수길(秀吉). 평안북도 선천 출생으로 8세 때 평양으로 이사하여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했다.
1903년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04년 대한노동이민회(大韓勞動移民會)의 하와이 이민모집에 응모하여 미국에서 수년간 노동에 종사했다.
1905년 미국으로 이민, 하와이를 거쳐 1906년 3월 1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한인공립협회(회장 안창호)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안창호의 사상적 지도를 받으면서 민족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07년 정미7조약의 강제체결과 1907년 7월 헤이그에서 이준열사의 순국 소식을 듣고 재미 동포들이 모여 공동회를 개최했을 때, 이 재명은 위국헌신을 공개 약속하고, 10월에 그는 항일 운동에 몸을 던지기 위해 나가사키를 거쳐 조국으로 돌아 왔다.
1909년 1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순종의 평양 순행 소식을 듣고 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평양역에 대기하다가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단념 했다. 이토는 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사살 되었다.
그는 항일운동을 위해 원산을 거쳐 만주,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했다.
그해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암살소식에 고무되어 곧 다시 귀국한 그는 동지 이동수(李東秀)·김정익(金貞益) 등과 함께 친일매국노 이완용·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 등의 암살을 계획하고 기회를 기다렸다.
이재명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09년 경의 종현성당(명동성당).
이재명의사는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성당(현 명동)에서 벨기에 황제 리오올드 2세 추도식이 있으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거사 전날 그는 당시 영심여학교 학생이던 아내 오인성을 숙소로 불러 마지막 작별의 밤을 보냈다. 그녀는 울지 않았고 거사를 말리지도 않았다. 날이 새자 이재명은 이동수, 김병록과 같이 성당으로 향했다. 군밤장수를 가장했다는 자료도 있고 학생복을 입었다는 자료도 있다. 전신주 뒤에 몸을 감추고 기다리니 오전 11시 30분에 이완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재빨리 인력거에 올라타자 이재명이 달려가 인력거 뒤로 올라타면서 칼로 왼쪽 어깨를 힘차게 찔렀다.
이완용은 실신하면서 인력거 밑으로 나둥그러졌다. 인력거 차부인 박원문이 덤벼들다가 칼에 맞고 주인 옆에 쓰러지면서 그는 숨을 거두었다. 이완용을 올라타고 여러 번 찔렀다. 자신의 두루마기에 가려져 이완용을 거꾸로 올라탄 사실을 모르고 가슴인줄 알고 엉덩이를 계속 찌른 것이었다. 달려온 경관들에 의해 체포되면서도 자신의 거사가 성공한 줄 알고 ‘대한 만세’를 연창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동수와 김병록도 이완용이 죽은 것으로 속단하고 현장에서 떠났다. 안중근 의사에 비해 나이가 어린 이재명은 중요한 순간 침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완용은 어깨, 허리, 복부 등 세 곳을 찔렸으나 약 2개월 동안 치료받고 회복되었다.
*[1909년 12월 23일, 대한매일신보 기사] : 총리대신 이완용씨는 어제(작일) 오전 11시, 종현 천주교당에서 설행한 비국 황태자 폐하 추도식에 참례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후좌우로 엄밀히 보호하고 교당 문 밖에서 일곱 여덟 시간 동안 되는 데 이르러서는 단발한 사람 한 명이 돌출하여 여덟 치 남짓한 한국 칼로 인력거 끄는 차부부터 질러 꺼꾸러뜨리고 몸을 소스쳐 차위에 앉은 이완용씨의 허리를 찌르매 이씨가 달아나려 하거늘 이씨의 등을 찔러서 세 군데가 중상하였는데 그 자객은 평양 사람 이재명이라 즉시 포박되었다더라. |
이완용 암살 사건의 첫 공판은 1910년 5월 13일 열렸다. 재판과정 전체가 대한매일신보에 소개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는데 전체 4면 중 2면이 공판 기록일 정도였다.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배후를 묻자 이재명은 '이완용을 살해한다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치 않을 자 없을 것이오. 이천만 동포 모두가 배후요.'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또한 증거물로 제시된 칼이 '행흉할 때 사용된 것이냐'는 질문에는 '행흉하는 데 쓰던 것이 아니라 매국노 이완용을 죽이는 정의를 위해 사용된 것'라 답변해 방청석을 가득 매운 방청객들의 갈채를 받기도 하였고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고 외치는 등 선생의 민족적 기개는 법정투쟁에서도 유감없이 표출되어 민족대중을 각성시켰다.
일제는 이완용 암살미수사건으로 사형을 받을수 없었던 그에게 인력거꾼 박원문의 죽음을 이용해 '박원문 살인죄'를 적용해
1910년 5월 18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1심에서 사형을, 7월 20일 열린 2심에서도 역시 사형이 선고되자,
이재명의사는 최후진술로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빼앗지 못할 것이니 한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허거니와 생전에 이루지 못한 한(恨)을 기어이 설욕(雪辱) 신장(伸張) 하리라"
(무리하고 불공평한 형벌로 나의 생명을 빼앗기기는 하나, 내 속의 충의혼담만은 빼앗지 못하리라. 내 영혼은 영원히 살아 생전에 이루지 못한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리라)고 하였다.
방청석에 있던 그의 부인(오인성, 당시 21세, 양심여학교 학생)도 큰 소리로 “이완용의 생명이 보존하여 살아있는데 사형이 웬말이냐?”고 외쳤다.
이재명의사는 1910년 9월 13일 서대문 형무소의 전신인 경성감옥에서 23세의 나이로 순국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동수, 조창호,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고, 2001년 12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되었다
한편 운좋게 살아남은 이완용은 그 이듬해 8월 총리 대신으로서 정부의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돼 일본과 한일 병합조약을 체결했고,
그 공으로 일본의 백작이 되었다.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조선귀족원 회원이 되었고, 20년 후작에 올라 26년에 69세로 죽을 때까지 일제에 충성하며 호의호식했다.
두 이씨의 운명이 이렇게 달랐다
"한성 2월 7일발 이재명 연루자 28명중 18명은 지방재판소로 넘기는데 그중에 두사람은 대한매일신보 사원(임치정, 이교담을 지목 하는듯)으로 이완용을 암살하라고 교주하엿다 하였으며 그중 3명은 천도교사무원으로 이용구를 암살하려고 ?하였다고 이재명의 자복이 있다 하였더라."
* 오른쪽 기사를 보면 안중근의사 변호사비로 기부금이 7만원에 달하였다는 기사 내용이 있다.
* 바로 밑 기사를보면 국민동지찬성회 라는 매국노 역적 조직이 한일합방을 찬성한다는 청원서를 내었다는 기사 내용이 있다
매국노 이완용 서울대병원 전신 대한의원 흉부외과 수술 법정제출 감정서 기록 : 당시 외과의사 일본인 스즈키 고노스케의 감정서에 따르면 이 의사는 인력거에 타고 있던 당시 53세의 이완용을 향해 칼을 날렸지만 인력거꾼이 먼저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이완용은 칼을 피하기 위해 몸을 숙이는 과정에서 왼쪽 어깨와 오른쪽 등 아래 두 곳을 찔렸다.
지금까지 상당수 역사서는 이완용이 세 군데 이상 칼에 찔렸다고 저술해 왔으며 복부에도 찔렸다고 기록한 백과사전도 있다.
이완용의 상처는 경성지방재판소 검사 이토 도쿠준의 지시에 따라 대한의원 외과 의사였던 스즈키 고노스케가 창상의 위치와 깊이, 흉기의 종류, 창상의 경과, 예후 등을 기록했다.
이완용은 좌측 두 번째 갈비뼈 아래 부위 자상으로 갈비뼈 사이 동맥에 심한 출혈이 있었고 이로 인한 폐 손상 등으로 좌측 흉부타박상, 외상성 늑막염 등이 생겼다.
또 감정서에는 ‘폐를 손상해 창공으로부터 출혈 및 호흡에 수반된 공기 출입이 있었다’며 기흉(폐 주위로 공기가 들어온 것)과 혈흉(폐 주위로 피가 고인 것)을 의미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흉부 속에 고여 있는 혈액 등을 뽑아내는 ‘흉부천자술’에 의한 혈성 삼출액 배출이라는 외과적 시술에 관한 기록도 있다.
감정서 끝에는 ‘외상성 늑막염의 치료 여부가 완전 회복의 관건’으로 기술돼 있다. 당시 VIP 환자였던 이완용은 병원에서 최상급 치료를 받은 후 입원 53일 만인 1910년 2월 14일 완전히 회복해 퇴원했다.
"당시 의료기술 수준으로 봤을 때 이완용이 기흉과 같은 폐 손상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기흉은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응급질환으로 당시 의료술로는 회생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감정서는 5페이지 분량이며 한문과 일본어로 상세히 기록돼 있다.
오적 암살 애국선열명단
이름 | 공적 | 훈격 |
김병수(金炳洙) | 27결사대 | 애족장(90) |
김영채(金永采) | 권중현 습격 | 애족장(2005) |
김용우(金容友) | 27결사대 | 애족장(90) |
김정익(金貞益)· | 이완용 습격 | 국민장(62) |
나경호(羅景鎬) | 27결사대 | 애족장(90) |
나철(羅喆) | 오적암살단 | 국민장(62) |
노윤선(盧胤善) | 27결사대 | 애족장(90) |
박기한(朴基寒) | 27결사대 | 독립장(63) |
박응칠(朴應七) | 권중현 습격 | 애국장(95) |
기산도(奇山度) | 이근택 습격 | 국민장(63) |
김동필(金東弼) | 권중현 습격 | 애국장(90) |
박진태(朴鎭台) | 27결사대 | 애국장(91) |
손창준(孫昌俊) | 27결사대 | 독립장(63) |
송동호(宋東浩) | 27결사대 | 애족장(90) |
안경식(安景植) | 27결사대 | 애족장(90) |
양종환(梁鍾煥) | 27결사대 | 애족장(90) |
오기호(吳基鎬) | 오적암살단 | 국민장(62) |
오덕연(吳德衍) | 27결사대 | 애족장(90) |
오복원(吳復元) | 이완용 습격 | 국민장(63) |
윤충하(尹忠夏) | 권중현 습격 | 애국장(95) |
이광수(李光秀) | 권중현 습격 | 애족장(90) |
이기(李沂) | 권중현 습격 | 독립장(68) |
이덕삼(李德三) | 27결사대 | 애족장(90) |
이기원(李基源) | 27결사대 | 애국장(91) |
이동우(李東宇) | 27결사대 | 애족장(90) |
이범석(李範錫) | 이근택 습격 | 애족장(90) |
이연작(李演雀) | 27결사대 | 애족장(90) |
이재명(李在明) | 이완용 습격 | 대통령장(62) |
이종원(李鍾元) | 27결사대 | 애족장(90) |
이종학(李鍾學) | 권중현 습격 | 애국장(95) |
임석도(林析道) | 27결사대 | 애족장(90) |
전태선(全泰善)· | 이완용 습격 | 국민장(63) |
조창호(趙昌鎬) | 이완용 습격 | 국민장(63) |
차병제(車秉濟) | 27결사대 | 애족장(90) |
최동식(崔東植) | 권중현 습격 | 애국장(95) |
최상오(崔相五) | 권중현 습격 | 애국장(95) |
한국보(韓國輔) | 27결사대 | 애족장(90) |
한선옥(韓善玉) | 27결사대 | 애족장(90) |
홍순범(洪淳範) | 27결사대 | 애족장(90) |
황경오(黃景五) | 권중현 습격 | 애국장(95) |
황집(黃集) | 27결사대 | 애족장(90) |
이홍래(李鴻來) | 권중현 습격 | 국민장(63) |
김인식(金寅植) | 권중현 습격 | 애국장(90) |
홍필주(洪弼周) | 권중현 습격 | 애국장(90) |
최익진(崔翼軫) | 나철에게 자금제공 | 애족장(90) |
김병록(金丙錄) | 이완용 습격 | 독립장(63) |
김병현(金秉鉉) | 이완용 습격 | 애국장(91) |
김이걸(金履杰) | 이완용 습격 | 애국장(90) |
김중화(金中和) | 이완용 습격 | 애족장(90) |
박태은(朴泰殷) | 이완용 습격 | 애국장(91) |
이동수(李東秀) | 이완용 습격 | 독립장(63) |
이우영(李宇榮) | 27결사대 | 독립장(63) |
이학필(李學泌) | 이완용 습격 | 애국장(91) |
최병인(崔秉寅) | 27결사대 | 애족장(90) |
조규수(趙奎洙) | 27결사대 | 애족장(90) |
이탁(李鐸) | 27결사대 | 국민장(63) |
주병웅(朱秉雄) | 27결사대 | 독립장(63) |
박기제(朴基濟) | 27결사대 | 독립장(63) |
1905년 11월 17일,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었다. 흔히 을사조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버려 사실상의 망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를 들은 백성들은 분노하였고 폭발하였다. 민영환 선생이나 조병세 선생 같은 분은 자결로서 더러움을 씻었고 최익현 선생이나 류인석 선생등은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직접적으로 대결하려 하셨다. 을사조약에 항거하는 움직임은 하나 더 있었는데 조약에 서명한 오적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을사오적은 누구인가. 친일의 대명사인 이완용을 필두로 하여 당시 외부대신을 맡았던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부대신 권중현을 일컫는다. 이들은 권력의 핵심에 있으면서 국가를 수호해야 할 의무를 져버리고 일제의 주구가 되어 외교권을 넘긴 것이니 당연히 그 죄를 물어야 했다. 그러나, 공권력은 모두 일제가 잡고 있으니 어떻게 그들을 처단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민중이 나서 이를 해결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조약이 체결된 이튿날, 기산도 등은 결사대를 조직하고 오적을 처단하고자 적신배의 동정을 염탐케 하였다. 그러나 경무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의 부하에게 발각되어 주도자 전원이 체포되고 말았다. 비록,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오적을 척살하려한 최초의 시도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하겠다.
두번째 처단 시도 역시 기산도에 의해 주도된다. 1906년 2월 16일, 그와 동지들은 이근택의 집을 급습한다. 잠자리에 들려한 이근택의 방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칼로 내리쳤고 이근택은 10여군데 중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이근택은 위기를 모면하고자 촛불을 꺼 주변을 암흑으로 만들었고 안타깝게도 의거는 실패하고 만다.
조약이 체결된지 2년이 되는 1907년, 2월에는 이지용과 박제순에게 선물을 가장한 폭탄을 보냈으며 3월 25일에는 나인영과 그 일파가 일제히 거사하여 오적을 처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폭탄은 제대로 터지지 않았으며 3월의 계획 역시 이홍래 등이 권중현을 습격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1909년, 이재명 의사의 나이는 겨우 20살이었다. 겨우 약관에 불과한 그는 친일의 거두인 이완용을 습격한 것이다. 그해 1월, 순종황제의 평안도 순시 때,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코자 했던 그는 1909년 11월, 동지를 규합한 뒤 이완용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12월에 상경하여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여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척살할 것을 맹세한다. 마침내 12월 23일, 그는 인력거 차부를 칼로 거꾸러뜨리고 이완용의 허리를 찌렀다. 인력거 아래로 떨어지자 사정없이 난자하였다. 이완용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체포되었고 불행히도 이완용은 살아남았다.
오적을 제거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국권이 피탈되고 나서 일어난다. 1919년 고종 황제의 서거 이후 오적과 정미7적을 암살하려는 27결사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만주에서 결성되어 국내로 잠입한 뒤 군중을 선동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불행히도 5월 5일 단원의 일부가 체포되어 조직이 와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