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밀(到彼岸)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길, 피안의 길, 수행의 완성'등으로 의역
육바라밀은
깨달음의 원리인 삼학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론으로서 곧 수학(수행)의 길이요, 배움의 길이다.
(1)보시바라밀
[화엄경]에 의하면 보시(布施)는 곧 수행이다.
여기서 수행은 학문을 닦음이 아니라 '닦아 배움'을 이른다.
본디 보시란 '물질을 주는 것, 희사함'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주는 행위 자체까지도 포함해서 이해해야 한다.
보시는 상은 물론 온갖 것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가짐이요, 온전하게 드러난 몸의 태도다.
여시서'상'이란 자취를 남기려는 생각, 즉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행하였는가'에 대하여 생각함을 이른다.
보시는 모든 고(苦)의 원인인 우리 몸에 얽메이지 않음이요, 이는 곧 헌신이다.
(2)인욕바라밀
불교 학론에서는 인욕(忍辱)을 인내와 구분없이 사용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인행(忍行)이라 하고 수행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현자(賢者)는 반드시 인욕으로 사념(邪念)을 없애며, 진(瞋, 노여움)을 제어해야 한다고 했다.
타인과 관계에서 인행에 실패하면 번뇌의 원인이 된다.
그리하여 "노여움이 일면 남을 태우기 전에 먼저 제 몸을 태우라."고 하였다.
이같이 인욕은 타자론적 관계의 철학으로서 불교 학론의 중요한 내용이다.
(3)지계바라밀
계는
몸으로 행하는 행위가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음이요,
말이 청정하여 언사에 거침이 없음이요,
마음이 청정하여 어지러운 일이 없음이다.
계는 구체적으로 '절욕, 조행, 계언, 계주'등의 수행을 이른다
첫째, 절욕은 근본적으로 과용, 탐욕, 탐심의 제압이다.
둘째, 조행필신은 애욕에 이끌려 사음하는 행위를 금함이다.
셋째, 계언은 거친 말을 멀리하고 참된 말을 가까이 함이다.
넷째, 음주의 폐해는 실로 막대하므로 반드시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
(4)정진바라밀
정진은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용감한 마음이다.
정진은 소위 근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몸은 물론 마음의 노력까지 망라하는 개념이다.
불교 학론에서 정진은
수행의 대상이라기 보다 수행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있다.
(5)선정바라밀
선정은 정신을 통일하여 안정시키는 것을 이른다.
즉, 정은 관찰된 경 위에 마음을 기울여 흐트러지지 않게 함으로써 성을 이루고,
지에 의지함으로써 업을 이룬다.
여기서 '업을 이룬다' 함은 혜를 형성하는 원인이 됨을 말한다.
한마디로 선정은 조용해진 마음이다.
선정의 목적은 사제에 대한 집요한 수확이다.
사제
첫째, 고제로서 인생은 본시 괴로움이라는 진실이다.
둘째, 집제로서 연기의 도리를 잘 몰라서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고
무상한 것을 영구한 것인 양 집착하는 것이다.
셋째, 멸제로서 이 같은 괴로움과 미혹, 집착을 없애야 한다는 진리다
넷째, 도제로서 멸제의 구체적인 방법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선정의 구체적인 방법은 견도와 수도로 구분되는 팔정도다.
팔정도
첫째, 정견으로 올바로 사제의 도리를 보는 일
둘째, 정사유로 바르게 사제의 도리를 사유하는 일
셋째, 정어로 바르게 말을 하는 일
넷째, 정업으로 바르게 행동하는 일
다섯째, 정명으로 바른 생활을 하는 일
여섯째, 정정진으로 수행에 힘쓰는 일
일곱째, 정념으로 정도를 마음에 두어 사념이 없게 하는 일
여덟째, 정정으로 바른 선정에 들어가는 길
(6)반야바라밀
반야는 깨달음을 얻는 진실한 지혜, 깨달음의 지혜로 의역된다.
여기서 혜란 근본적으로 사물이 올바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마음이다.
방법론적으로 혜는 대개
올바로 듣는 문혜, 올바로 생각하는 사혜, 올바로 선정을 수행하는 수혜등을 통하여 획득된다.
깨달음을 위한 수학의 방법 중에는 이 반야바라밀이 으뜸이다.
아무리 청정한 믿음이 있어도 만일 지혜가 결여되면 결국 어리석음에 머물게 할 따름이다.
결국 지혜는 모든 것 중의 최고다.